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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르 소설 창작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 무협, 판타지, 로맨스 소설은 이미 해외 장르 소설 못지않은 물량공세가 이어진 지 오래고 스타 작가들도 생겼다. 공포, SF는 창작집단을 중심으로 신인작가를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추리, 스릴러 소설의 경우 해외 작품들에 비해 한국 창작소설의 인지도가 약했던 게 사실인데, 황금가지의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은 다양한 시도를 통해 한국 추리, 스릴러의 존재감을 알리는 책이다. 류삼의 <싱크홀>은 안정적인 필력과 긴박한 구성이 돋보이는 스릴러다. 청각장애를 겪는 아들을 혼자 키우는 혜원은 폭우 속에서 자동차 사고를 겪는다. 모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성욱이 살인자의 얼굴을 드러내면서 펼쳐지는 서스펜스가 군더더기 없이 펼쳐진다. 정명섭의 <불의 살인>은 고구려를 무대로 한 역사추리물. 선의와 악의가 우연으로 얽혀 벌어지는 참극을 안정적으로 풀어냈다. 김유철의 <암살>은 제주 4·3사태를
한국산 스릴러의 매력을 만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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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입으로 무엇에 미쳤다고 말하는 이들은 별로 신뢰가 안 간다. 당신네들이 나만큼 열정이 있느냐는 오만하고 요란한 뻐김이 그냥 밉살스럽다. 심성이 삐뚤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사진으로 생활하기>의 도입부도 좀 그랬다. 살아 있어서, 섹스할 수 있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기쁘다”는 과한 도취가 부담스러웠다. “30년 넘게 한눈팔지 않고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사진 때문이라는 구애도 작가들의 지극히 닳고 닳은 헌사 아니던가. 청년 시절 알몸으로 공동묘지에서 찍은 묘한 느낌의 자화상만 하더라도 객기의 흔적이라 넘겨짚었다. 하지만 게으른 독자의 예상은 침을 묻히고 책장을 넘기면서 점점 틀어졌다. <사진으로 생활하기>는 ‘나’와 대면하고픈 사진쟁이 최광호의 기괴한 변론집이다. 사진에 눈먼 그의 반복적인 구애는 후반부로 갈수록 굉장한 중독성을 내뿜는다. 특히 가족사진을 주로 찍는 그가 왜 ‘누드사진’ 아니 ‘벗음사진’에 집착하는지를 설명하고 직접
이 사진작가, 정말 제대로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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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적으로 민주사회에서 언론이 담당하는 역할은 간단하다. 사회의 규모가 개인이 지각 가능한 범위를 넘어설 때 시민으로서 권리와 책임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그의 눈과 귀를 대신하는 기구가 언론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작동하려면 헌법에 명시된 언론 자유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안정적 노동조건과 튼튼한 중산층, 합리적인 시스템이 받쳐줘야 한다. 경제적 좌절은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져 불평등을 악순환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 허버트 갠즈는 쓴다. 저널리스트가 뉴스를 전하는 일만으로 민주주의 수호자를 자임하는 건 기만이라고. <저널리즘, 민주주의에 약인가 독인가>라는 번역 제목의 질문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요컨대 “약이 되려면 노력 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종 절충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이 책에서 가장 영양가 높은 대목은 오늘날 미국 언론이 매일 데드라인 앞에서 부딪히는 일상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서술한 3장 ‘저널리즘의 관행과 문제점’이다. 복합기업의 자회사가 된 현대 미
언론사 사장에게 밑줄 그어 권하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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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만화의 마니아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이토 준지의 신간이 2권이나 나왔다. 권당 12편씩 총 24편의 단편이 담겨 있으니 이토 준지에 대한 허기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미공개된 초기작들을 비롯해 불쾌함과 유쾌함을 동시에 선사하는 기상천외한 단편들이 가득하다. 이토 준지 작품의 전반에 깔려 있는 미에 대한 과도한 열망, 인체변형과 사지절단, 집착에 가까운 가족주의는 이번 신간들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중 2001년 일본에서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한 <허수아비>는 가족에 대한 집착과 애증,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파국을 ‘허수아비’라는 어쩌면 생뚱맞은 소재로 절묘하게 버무려낸 걸작이다. 애지중지하던 딸이 죽자 무덤 앞에 허수아비를 세우는 한 아버지. 시간이 지나자 허수아비의 얼굴에는 머리카락이 자라고 딸의 이목구비가 새겨진다. 이 사실을 안 동네주민들은 자신의 가족을 묻은 무덤에 허수아비를 세우고 공동묘지는 생전의 모습을 닮은 망자들의 허수아비들이 빼곡히 채
공포 마니아를 위한 최고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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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경찰이 저희 집에 와서 남편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살로 결론내렸죠. 한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제가 남편을 12층에서 밀었으니까요.” 한 여자가 죄의식이라는 중력에 끌려 살인을 저지른 지 10년 만에 경찰서를 찾아가 자백한다. 다음날이면 공소시효 만료, 주말이 기다리는 퇴근 세 시간을 앞두고 난데없는 살인 자백을 듣게 된 경찰은 자칭 살인자와 이야기를 시작한다. 살인자는 체포되어 죄의식을 벗고자 하고, 경찰은 자정을 넘겨 공소시효 만료를 유도하고자 한다. 경찰이 공소시효 만료를 유도하는 까닭은 단순히 그 자신이 퇴근하고 주말을 즐기려는 욕망 때문만은 아니다.
<중력의 법칙>은 자백하는 범인과 만류하는 경찰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대화 속에서 과거의 범죄를 둘러싼 이야기가 점점 구체화된다. 과거와 현재가 대화로 중첩되는 이 책에서, 범인의 선량함과 경찰의 불량함이 대조를 이루는 것 역시 흥미롭다. 이미 14년 전에 끝난 사건을 흥미
범인의 자수를 만류하는 경찰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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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배수아가 번역한 독일 작가 마르틴 발저의 2006년작. 이 책의 원제 ‘앙스트블뤼테’는 전나무가 이듬해 자신이 죽게 될 것을 감지하면 그해 유난히 화려하고 풍성하게 꽃을 피워 올리는 현상을 가리킨다. 두려움으로 인한 만개. 노년에 찾아온, 존재를 뒤흔드는 사랑에 모든 것을 내준 한 남자의 이야기에 그보다 적합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성공한 투자상담가인 71살인 카를은 아내 헬렌과 만족스럽게 살고 있다. 그는 투자를 원하는 영화감독과 여배우 요니를 만나게 되는데, 서른살의 요니와 사랑에 빠진다. 카를은 요니에게 극도의 집착을 보이지만 투자가 마무리되면서 그녀는 그에게서 멀어진다. 그의 아내 역시 그의 곁을 떠난다. 이 책이 보여주는 카를의 사랑은 비단 젊은 여자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투자상담가인 그는 투자의 효율을 극대화해 최고의 수익을 낳는 일에서도 만족을 느낀다. 아내 헬렌에게 쓴 카를의 편지는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인데, 이 나이 든 남자가 자신의 욕망을
생의 최후에 가장 아름다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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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에게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안겨준 <색, 계>는 50쪽이 겨우 넘는 단편소설이 원작이다. 영화가 왕치아즈와 리의 과거와 현재를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을 통해 탄탄하게 쌓아가는 반면, 장아이링의 원작은 상하이에서 재회한 둘의 관계에 주목한다. 짧은 분량임에도 줄거리는 물론 인물들의 심리까지 녹여, “영화적 감각이 살아 있는 소설”이라는 평과 문단에 발표한 뒤에도 30년에 걸쳐 고치고 다듬었다는 뒷이야기가 실감난다. 이 책에는 표제작 외에도 <망연기> <머나먼 여정> <해후의 기쁨> <못잊어> <재회> 등 단편 6편과 희곡 <연애는 전쟁처럼>이 실렸다. 장아이링의 작품은 대부분 여성이 주인공이다. 24살에 초혼에 실패하고 루머와 가십의 주인공이 되어 여자로서 또 작가로서 은둔하다 끝내 미국으로 떠났던 격정적인 개인사가 투영된 듯, 작중 캐릭터의 심리에 대한 통찰이 뛰어나다. 전쟁을 겪은 대륙과 홍콩의 공간적
리안의 능력을 재확인하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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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90년대 고우영, 이두호, 윤승운, 오세영 등이 그려낸 한국 전통물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으며 한국 만화를 대표하는 한 장르로서 자리잡았었다. 그러나 일본 만화의 직수입이 시작된 1990년대 중반부터 전통물이 설 자리는 줄어들었고 2000년대 들어서는 그 명맥조차 끊길 위기에 처했다. 그런 상황에서 <춘앵전>과 같은 만화의 등장은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천일야화>로 ‘2006년 하반기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한 한승희, 전진석 콤비가 철저한 자료조사와 함께 탄생시킨 <춘앵전>은 여성 국극의 창시자 임춘앵을 모델로 한 독특한 퓨전순정만화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사주팔자가 모두 ‘양’(陽)인 양팔통의 사주를 갖고 태어난 여장부 임춘앵. 그녀가 초창기 연예기획사라 할 수 있는 ‘권번’에 들어가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춤과 소리에 능한 명기로, 그리고 전통을 재창조해 진정한 예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순정만화의 외피 속에 절묘하게
순정물로 만나는 여성 국극의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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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식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세컨드라이프의 창립자 필립 로즈데일이 인터넷 가상경제사회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한 SF소설에서였다. “<스노 크래시>를 읽고 내가 꿈꾸는 것을 실제로 만들 수 있다는 영감을 키웠다”는 것. 2005년 <타임> 선정 ‘현대 영미소설 베스트 100선’에 꼽히기도 했던 <스노 크래시>의 의미는 저자 닐 스티븐슨이 세컨드라이프와 같은 새로운 세계관과 ‘아바타’ 같은 단어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크립토노미콘>과 <다이아몬드 제국>을 읽은 사람이라면 닐 스티븐슨이라는 이름만으로 이미 지름신의 강림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근미래의 LA. 주인공 히로 프로타고니스트는 최후의 프리랜서 해커를 자청한다. 히로는 가상세계인 메타버스와 현실세계 양쪽에서 활동하는 가장 뛰어난 검객이기도 하지만 현실세계에서는 피자 배달부로 일한다. 히로는 ‘스노 크래시’라는 신종 마약에 관련된 음모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1992년
1992년에 예측한 사이버펑크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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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 하얀 피부와 매끈한 얼굴, 날씬한 몸매와 가는 허리, 탱탱하게 솟은 가슴과 하얀 치아, 큰 눈, 가는 허벅지와 걸을 때마다 씰룩거리는 엉덩이로 이 혁명 전사를 낚을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사단장도 마찬가지야. 백전노장의 혁명가이자 영웅이며 고급 간부인 그가 어떻게 이런 여자를 얻을 수 있었단 말인가?” 중국 문화대혁명 즈음, 인민해방군의 모범병사이자 규율의 화신인 우다왕은 분노를 금치 못한다. 사단장의 전속요리사가 된 그의 눈앞에 등장한 사단장의 젊은 아내 류롄 때문. 사단장이 집을 비운 뒤 류롄의 유혹은 강도를 더해가자 우다왕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사단장과 사단장의 가정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일진대, 그러기 위해서는 스물여덟살 원칙주의자 우다왕이 서른두살 사단장 아내의 애정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2005년 봄 중국 광둥성 격월간 문예지 <화청> 3월호에 삭제본으로 발표되었음에도 중
‘5금(禁) 조치’에 빛나는 전설의 문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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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포르주 피아노: 공구, 부품’은 파리 센강의 왼쪽 언덕에 자리잡은 피아노 공방이다. 이야기는 파리가 더 익숙한 미국인 사드 카하트가 공방의 간판에 호기심을 가지면서 시작한다. 중고 피아노 한대 들여놓을까, 대수롭지 않던 생각은 “소개받은 손님만 맞는다”는 주인의 텃세에 기가 꺾인다. 하지만 어렵게 소개받고 피아노와 만나는 과정에서 저자가 경험하는 황홀경은 글만 읽어도 부러워 죽겠다. 공방의 뒷방 작업장은 보물창고다. 예술가의 아틀리에처럼 햇볕이 쏟아지는 작업장에는 가느다란 다리 3개로 거대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그랜드 피아노부터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상감된 날씬한 업라이트까지 즐비하다. 에라르, 플레옐, 뵈젠도르퍼 등 이름만 들어도 사연을 간직했을 법한 유럽의 피아노 브랜드 흥망사도 무궁무진한 소재의 화수분이었다. 음악의 우아함으로 빚어지는 이야기들도 아름답지만, 이 책의 매력은 믿음직하면서도 참신한 묘사에 있다. 피아노의 물리적인 아름다움은 물론, 건반에서 현으로 이어지는 소리에
연인보다 더 사랑스런 피아노 찬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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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만화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가운데 순정만화만이 고유의 정체성을 고수하고 있는 유일한 장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장르 속에서는 끊임없는 세포분열이 진행되고 있어 마치 3세계 영화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주는 순정만화가 등장하곤 한다. 일본 순정만화계의 신성, 오노 나쓰메의 <리스토란테 파라디조>가 바로 그런 작품. 오노 나쓰메는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한 만화계에선 독특한 이력의 작가로 주로 유럽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그리고 있다. <리스토란테 파라디조> 역시 이탈리아의 한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50줄에 접어든 중년 남성과 그들을 사랑하는 중년 여성들과 한 풋내기 아가씨의 로맨스를 담고 있는 만화다. 중년들이지만 레스토랑 ‘카제타 델로루소’에서 일하는 이들은 사장부터 종업원까지 하나같이 늘씬하고 탄탄하다. 게다가 어찌나 사려깊은지 막 사랑을 시작한 여주인공 니콜레타의 연모의 대상이요, 성장통을 풀어주는 훌륭한 상담사 역할까지 한다. 여느 순정만화에서라면
순정만화에 담아낸 중년 로맨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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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숏을 단어에, 편집을 통사론에 비유하는 시도는 다분히 과장의 위험을 내포한다. 그러나 몽타주를 통해 영화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원하는 문체로 비로소 전달한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몽타주의 개념과 역사를 논한 이 책의 1부에서 몽타주는 세 가지 개념의 종합이다. 자르고 붙이는 물리적 행위인 커팅, 시청각 요소를 배치해 영화의 꼴을 완성하는 에디팅, 그리고 숏 사이 관계를 결정하는 좁은 개념의 몽타주가 그것이다. 편집기사 출신 영화학자인 저자 뱅상 피넬은 몽타주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줄 세우는 글을 최소화하고 몽타주 개념의 진화를 실제 영화의 예를 통해 살핀다. 고전기까지 모든 영화감독들은 발명가이며 이론가이기도 했기에 이는 무리한 방식이 아니다. 몽타주의 실제를 다룬 2부는 180도 가상선과 장비의 진화를 소개하는 한편 히치콕의 시퀀스를 분석하고, 앙드레 바쟁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쓴 글에서 몽타주의 핵심을 지적한 한 대목을 발췌했다. “몽타주는 촬영이 감추었던 불
실용적이며 핵심적인 몽타주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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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김중혁은 수집가다. <펭귄뉴스>를 통해 라디오, 타자기, 자전거 등 시대의 조류에 반걸음 뒤처진 사물들을 불러모았던 그가 이번에는 다양한 소리들을 채집했다. “음악을 몸으로 소멸시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는 영화음악가,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열정으로 수백 가지의 악기 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하는 남자, 엇박자를 성대에 새기고 태어난 듯 늘 합창을 망가뜨리고 마는 소년 등 <악기들의 도서관>은 피아노와 오르골, 턴테이블과 전자기타, 인간의 음성이 맞물리며 유려하게 이야기를 연주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금세라도 음악이 들려올 것처럼. 이른바 “0.5cm SF”인 김중혁 특유의 화법은 여전하면서도 좀더 풍성해졌다. 나이와 국적이 다른 두 피아니스트는 수화기를 통해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며 묘한 우정을 쌓고, 지하철에서 엉킨 실을 풀던 백수 청년들은 대중의 호기심을 얻고 졸지에 예술가의 자리에 등극한다. 경쾌하면서도 알싸한, 가벼우면서도 뻐근한 8편의 이
0.5cm SF식 화법이 들려주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