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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이기도 한 이상용은 가장 성실한 영화평론가 가운데 하나다. 2회 <씨네21> 영화평론상을 통해 영화와 연을 맺은 이상용 평론가는 오래도록 직업적 영화 글쓰기를 해오며 인문학적 바탕 위에서 텍스트를 꼼꼼히 두번 세번 읽고, 진득한 자기만의 문체로 영화의 안과 밖을 살펴왔다.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은 스스로 ‘묵은지’라 말하는 글들을 거짓말, 웃음, 환상, 시간, 앨프리드 히치콕 등 12개의 키워드로 나눠 헤쳐 모은 첫 번째 개인 영화평론집이다. ‘웃음’에서 우디 앨런의 심오한 위트와 최근의 변화에 대해 말하고, <이터널 선샤인>과 <러브레터>와 <중경삼림>을 이어 ‘시간’과 ‘사랑’의 의미를 되짚으며,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라 말하는 히치콕의 현재적 의미와 영향력을 분석하며 꽤 너른 장르와 세대를 오가며 영화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정연한 질서가 있는 듯 없는 듯 꽤 정교한 배치라고나 할까. 다르
12가지 키워드의 ‘묵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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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나가 후미의 감각은 항상 예민했다. “휘핑크림이 듬뿍 스며들어 촉촉하기 그지없는 쇼콜라 클래식” 따위의 케이크를 군침나게 대접한 만화 <서양골동양과자점>이 너무나 극명한 예일 뿐. <오오쿠>에서 미즈노는 은빛 문양만을 새긴 검은 예복으로 “휘황찬란한 무리 가운데 고고히 시선을 잡아끌”었고, <달과 샌들>에서 고바야시는 애인 토요를 위해 햄 파니니와 니스풍 샐러드를 함께 넣은 듬직한 “러브 도시락”을 챙기지 않았던가. 요시나가의 남자들은 미소를 띠는 일이 드물어도 때론 굳게 다문 입술만으로 우리 마음을 서늘하게 베어내곤 했다.
<어제 뭐 먹었어?>는 이른바 요리만화다. 생활비 몇푼에 파트너를 달달 볶는 자린고비지만 실은 음식 해먹이는 걸 즐기는 40대 게이 카케이가 주인공이다. 그의 나직한 손길과 목소리를 좇아 “자반연어를 꺼내 잘게 찢고 다시마도 채썰어서 다시 밥솥에 넣고 통깨를 듬뿍 넣은 연어우엉밥”같이 정성어린 가정식들이 소개된다
그 가정식, 요리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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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신경숙의 여덟 번째 장편은 칠순 맞은 노모를 잃은 한 가족의 이야기다. 1장은 작가인 큰딸 이야기, 2장은 큰아들 이야기, 아내의 손을 놓고 지하철에 오르고 한 정거장을 지나도록 알아차리지 못했던 남편의 회한은 3장으로 이어진다. 가족은 전단지를 들고 거리로 나선다. 종종 엄마를 목격했다는 증언들이 들려오지만, 실종 당시의 엄마 모습이 아닌 기억 속의 엄마의 환영인 양 진술되어 죽음을 암시한다. 시간이 흐르고 실종이 상실로 받아들여질 즈음 감정은 증폭한다. 어떤 고통은 충격이 지나가고 한발 늦게 찾아오는 것처럼 가족은 잘못한 일만 떠올리며 뒤늦게 가슴을 친다. 그리고 신파로 흐를 법한 이야기는 애끓는 절절함으로 독자의 손을 재촉한다.
4장은 엄마에게도 사랑과 꿈이 있었다고 말한다. 겉도는 남편 대신 마음 붙일 곳을 찾았던 엄마의 비밀은 세상사를 초월한 듯한 독백을 따라 흘러나온다. 무엇보다 엄마도 엄마가 필요했다는 구절은 탄식을 자아낸다. 작가
엄마도 엄마가 필요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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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봉준호,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 임상수, 김지운. 동시대 한국영화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일곱명의 감독이 비평가들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들이 읽히고 분석된 적이 어디 한두번이겠느냐마는 그 주체가 외국 비평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의 영화감독 7인을 말하다>는 한국과 이탈리아의 비평가 8명이 합심하여 분석한 한국영화의 일곱 초상이다.
한국영화의 현재에 대한 안팎의 시선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만든 이 책은 감독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보다 평론가 개개인이 제시하는 다양한 분석론에 무게를 둔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기에 달리 보이는 지점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박찬욱 감독을 예로 들면, 그의 성장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한국 평론가(김영진)는 “거대 서사나 이념에 대한 짙은 부정”을 그의 특징으로 꼽으며 한국영화사 안에서 그가 점유하는 위치를 말하는 반면, 이탈리아 평론가(마르코 그로솔리)는 “심오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너무 엄격하지 않
한국영화의 일곱가지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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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계의 전설적인 대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생전에 미친 듯이 책을 썼고 한국에서도 꽤나 많은 편수가 출간됐다. <아시모프의 과학소설 창작백과>는 작고한 대가의 모든 것을 되돌아볼 수 있는 게 방점으로, 부제를 붙인다면 ‘아시모프의 세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의 가이드’가 좋겠다. 책은 3부로 나눠져 있다. 1부는 ‘과학소설론’, 2부는 ‘과학소설 창작론’, 3부는 아시모프의 후기 단편들이다. 원래 이 책은 지난 90년대 두권의 책으로 나눠서 출간된 바 있다. 1부와 2부는 <아이작 아시모프 SF특강>으로 묶인 하드커버 양장본으로 나왔고, 3부는 <골드>라는 제목의 단편집으로 나왔다. <아시모프의 과학소설 창작백과>의 공로는 분리 출간된 두 책을 오리지널의 정신 그대로 하나로 합쳐서 출간했다는 거다.
게다가 <골드>에는 누락됐던 8개의 단편도 모조리 되살아났다. 대한민국 과학소설계 인사 23명이 아시모프에게 보내는 헌사와 김선욱
SF 소설 대가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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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치하 이탈리아. 매춘부 누나에게 찾아오는 독일군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며 어른인 척 살아가는 빈민가 소년 핀에게는 또래 친구가 없다. 어른의 세계에도 섞일 수 없다. 핀은 독일군의 권총을 훔쳐 비밀장소인 거미들이 집을 짓는 곳에 감추고, 결국 정치범으로 몰려 투옥된다. 감옥에서 탈출한 뒤 아지트로 향한 핀은 유격대에 합류하고, 친구를 얻는 듯하지만 그마저도 순탄치는 않고 숨겨둔 권총이 없어지는 사건마저 벌어진다. 이탈로 칼비노는 레지스탕스를 평가절하하는 사람들, 그와 동시에 그 주인공을 영웅시하고 아첨하는 레지스탕스 신봉자들에게 도전하고 싶어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은 독일 점령하 이탈리아에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이탈로 칼비노가 1947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이다. <자전거 도둑>의 네오리얼리즘과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의 판타지가 뒤섞인 듯한 사실적이고도 환상적인 한 소년의 성장담인 동시에 칼비노
소년, 독일군 권총을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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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고민도 관계없다. 남이 보기에 하찮을지라도 김어준은 먹고살기 위해 진지하게 응대해준다. 인터넷 매체 <딴지일보>의 총수 김어준이 <한겨레 ESC>의 ‘그까이꺼 아나토미’를 비롯해 여러 매체에 연재한 상담 기록을 묶었다. 본인 말대로 남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게 머쓱함에도 뭐 어쨌건 모았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 내가 하찮은 사람 같아요’, ‘<조선일보> 때문에 남편과 싸웠어요’, ‘된장녀 같은 여친, 고칠 수 있을까요?’, ‘친구가 있는 집 자식인 게 부럽습니다’ 등 상담 분야는 제한이 없다. 자잘한 가족과 연애문제부터, 88만원 세대를 향한 충고까지 김어준 특유의 독설과 능청스런 유머로 가득 채웠다. 구체적인 자료로 친절하게 상담할 때도 있고 ‘그까이꺼 대충’ 얼버무릴 때도 있다. 이런 상담 나도 하겠다, 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거 참 재밌네, 라며 무릎을 칠 때도 있다. 서문에서 밝히는 것처럼 김어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민 상담 그까이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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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의 글을 마주하는 첫 느낌은 막연함이다. 그의 글은 손쉽게 잡히지 않는다. 주변 환경과 인간의 내면이 섬세하고 구체적인 단어로 설명되어 있음에도 그게 그려내는 풍경이 어떤 모습인지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클레지오의 소설은 오감을 무력하게 할 정도의 세세한 관찰로 시작하며 그렇게 표현된 단어들은 현실의 영역을 훌쩍 넘어버린다. 그래서 그의 글들은 항상 처음이 힘들다. 무뎌진 감각을 깨우고 무시하고 지나쳤던 세계에 눈을 뜨기까지 10여 페이지는 소요된다.
<사막>은 클레지오가 1980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원시사회, 자연과 근원으로의 회귀 본능이 강하게 드러난 후기 작품 중 한편이다. 소설은 사하라 사막에서 살아가는 1910년의 사람들과 사막 변두리 빈민촌에 사는 소녀 랄라의 이야기를 교차로 보여준다. 소녀 랄라는 ‘청색인간’이라 불리는 사막 투사의 후예이기도 한데 그녀는 결혼을 피해 어쩔 수 없이 프랑스 도시로 나간다. 문명이 몰아낸 사막과 그렇게 없어지는
사막과 소녀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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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 주인공 중 한명이지만 그 누구보다 평범한 소녀다. 특별히 예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귀여움이 묻힐 정도로 못생긴 건 아니다. 영민하고 재치있지만 독자를 놀라게 할 정도로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는 아니다. 좌절된 어린 시절의 소망과 소소한 행복감을 고루 버무리면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가 된다. 책을 읽는 소녀들의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아로 자라나 소년을 원했던 집에 보내져 새로운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성장하는 소녀의 이야기는 국경과 시간의 벽을 넘나드는 사랑을 받았다.
<빨강머리 앤> 100주년 기념판은 앤을 추억하는 세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루시 M.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은 캐나다의 ‘빨강머리 앤 협회’ 100주년 공식 기념판.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는 ‘빨강머리 앤 협회’가 인정한 캐나다 작가 버지 윌슨이 원작 연구를 통해 완성한 앤의 탄생 배경부터 입양 전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여
앤을 추억하는 세 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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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 롱스타킹’ 시리즈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쓴 또 하나의 시리즈. 갓 스물을 넘긴 여자 카티가 다른 나라를 여행하고, 우정을 쌓고,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비슷한 내용인 E. M.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보다 더 소박하고 낭만적이다. <바다 건너 히치하이크>에서 미국 여행을 떠난 카티. 카티가 미국에서 방종하게 지낼세라 동행한 이모는 사랑에 빠지고, 결국 결혼하게 된다. <베네치아의 연인>에 이르면 이모와 함께 살던 카티는 남자친구 얀의 청혼을 받는데, 청혼의 이유가 사랑인지 집인지 의문을 갖는다. 카티는 청혼을 거절하고 친구와 베니스로 떠난다. 결국 <아름다운 나의 사람들>에서 카티는 사랑을 이루고 프랑스로 떠난다.
삐삐 롱스타킹의 추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카티가 너무 순하고 착하다는 데 약간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읽을수록 카티의 평범함이 마음에 와닿는다. 소녀 시절 꿈꿨던 대로 삶이 풀려가지 않는다는 씁쓸함을 상
‘그때 그 꿈’을 돌려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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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미술사학도인 한 영국 청년이 지도교수의 부탁으로 이탈리아 귀족가문의 대저택을 연구하러 떠난다. 교수는 청년에게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와 <달력>을 쥐어주며 저택의 소유자인 도치 여사를 주의하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저택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예의바르지만 뭔가를 감추고 있다. 요절한 아내를 위해 도치 가문의 조상이 지었다던 추모정원은 아름답지만 위험해 보인다. 청년은 오비디우스의 책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추모정원의 조각상들이 어떤 사실을 은유적으로 암시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새비지 가든>은 호사스런 추리물이다. 이 소설은 단테의 <신곡>과 그리스 신화의 대표적인 아이콘(플로라와 아폴론, 아도니스와 나르키소스)으로부터 실마리를 유도하며, 한 가문의 비극을 말하기 위해 이탈리아 우파와 좌파의 역사적 충돌을 끌어온다. 누릴 호사가 많아서일까. 소설의 마지막에 ‘준비된’ 진실보다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더 매력적으로
추모정원 조각상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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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기엔 경성의 풍경사진들을 모아놓은 책 같다. 하지만 <경성, 사진에 박히다>는 역으로 경성시대의 사진문화를 들춰보는 책이다. 물론 사진으로 경성을 보든 그 시대의 사진문화를 엿보든 독자의 감상은 별다를 게 없을지 모른다. 어쨌든 사진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 시대의 모습들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경성, 사진에 박히다> 또한 당시의 경성이 사진에 어떻게 활용됐는가를 설명하면서, 시대의 면면들을 소개한다. 당시 사진관들에 엄청난 수익을 안겨준 신분증명사진 붐은 일제가 조선인들을 관리·감독하기 위해 사용한 술책이었다. 조선인 비행사로서는 처음으로 안창남이 경성을 비행하며 찍은 사진들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독립의 꿈을 심어주었다.
책은 또한 경성의 사진문화를 통해 이미지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유구한 것인지를 드러낸다. 자신의 사진을 신문사에 보내고 자살을 택한 한 남자의 사연은 버지니아공대 총기 사건을 일으킨 한인 학생을 떠올리게 한다. 안중근의 사
사진문화, 경성에 박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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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영웅에게서 결함투성이 이웃의 얼굴을 보았고, 열차 칸처럼 늘어선 신문 일일 연재만화의 비좁은 네모 칸에 중원을 담았다. “싸운 적은 없고 버티기만 했다”는 본인의 회고대로 그는 치사찬란한 검열의 시대를 몸을 낮추어 통과한 작가였지만 풍자와 반항을 김장독처럼 깊숙이 묻어놓아 후대에 새록새록 발굴의 즐거움을 안겼다. <고우영 이야기>는 한국 대중문화가 배출한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의 한 사람인 고우영 화백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정리한 책이다.
책을 여는 전 <한겨레> 기자 임범의 글은 1994년 진행한 인터뷰를 토대로 화백의 생애를 요약했다. 고우영 만화를 이유불문 필독서로 꼽는 만화연구가 김낙호는 텍스트를 분석했는데 방대한 인물에도 불구하고 개성을 보존한 캐릭터의 외적 형상화를 지적한 대목과 디지털 시대에 고우영 만화가 발휘하는 저력을 평가한 부분이 솔깃하다. 중국 철학을 연구한 이상수는 고우영 만화의 고전 해석을 검토했고 비평가 이명석은 헤밍웨이처럼 자연을
‘풍자의 거장’ 고우영의 체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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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식당은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연다. 특별한 메뉴는 없다. 손님이 원하는 음식이라면 뭐든지 만든다는 것이 주인장의 소신이다. 물론 아닌 밤중에 캐비어를 곁들인 연어 스테이크를 주문하는 손님이 신주쿠 유흥가에 있을 리는 만무하다. 심야식당을 찾는 손님은 대개 동네 불량배, 나이든 게이, 잘 안 팔리는 엔카 가수, 사랑에 빠진 스트리퍼다. 그들이 원하는 음식도 달콤한 달걀말이, 문어모양의 비엔나 소시지 볶음, 하룻밤 냉장고에서 묵혀둔 카레라이스, 낫토 정식 정도에 불과하다.
<심야식당>은 밑바닥 인생들의 담담한 이야기다. 마흔한살에 만화가로 데뷔한 아베 야로는 서민적인 일본 음식들을 통해 심야식당을 찾은 서민들의 인생을 조근조근 단편으로 풀어낸다. 그림체는 화려하지 않다. 아니, 종종 아마추어적이다. 그러나 작가의 담백한 손맛이 심금을 울리는 순간이 꽤 있다. 이를테면 고양이 맘마(갓 지은 밥 위에 잘게 썬 가다랑어포와 간장을 얹어서 먹는 것) 에피소드의 마지막
뜯어내 벽에 붙여두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