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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혼자 저녁을 먹으러 어딜 가기 애매해서(응?) 펍에 들어가 기네스를 파인트로 한잔 시켜 마셔 버릇했다. 파인트면 568ml인데, 기네스 맥주 자체가 워낙 묵직해서 그런가, 시장이 반찬이라 그런가, 그 한잔이면 숙변처럼 들러붙은 비관과 쑤시는 팔다리의 고통은 자취를 감추게 마련이었다. <유럽 맥주 견문록>을 보다가 안개처럼 서늘하고 솜처럼 푹신한 기네스 맥주의 거품과 포만감 느껴지는 묵직한 맛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책의 사진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러니 유럽에서 마셨던 각종 생맥주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천국이자 지옥이다. 이 책은 영국, 아일랜드, 체코,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맥주로 유명한 유럽의 나라와 도시를 직접 방문해 쓴 맥주탐사록이기 때문이다.
맥주라고는 해도 미묘하게 부르는 이름이 제각각이고 맛도 천지 차이라(수준 차가 아닌 개성 차) 혼란스러웠던 부분을 시원하게 정리할 만한 책이다. 이를테
[도서] 여기 맥주 두병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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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가장 영향력없는 인간이 되기 위한 에코 라이프’라는 부제가 딱이다. <지구형 인간>은 신선하고 유쾌한 환경운동을 표방한 비영리 환경단체 그리스트의 녹색 생활 제안이랄까. 실천이 쉬운 친환경 일상을 요점만 간단히 정리한 작은 책이라, 화장실에 놓고 식구들이 수시로 들춰보게 하면 좋겠다. 깜짝 놀랄 새로운 정보가 있어서 좋다기보다는 보기 쉽고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워서 좋은 책이다. 무엇보다도, 때로 지나쳐서 되레 친환경은 몽땅 포기하게 만드는 엄숙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게 장점이다.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건 ‘지역’인데, 환경을 생각하는 채식주의도 좋지만 멀리서 온 채소를 먹는 것보다 인근 지역에서 생산된 돼지고기를 먹는 게 지구에 도움이 된다는 식이다. 게다가 친환경 책에서 보기 드문 섹스 토이 이야기도 나오는데, “많은 인기 성인용품이 PVC가 주원료이며 프탈레이트를 써서 부드럽게 만든 것들”인데도 규제나 시험을 받는 일이 별로 없다며, 프탈레이트는 생식
[도서] 지구에 영향력 발휘하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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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16호에서 소개한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와 비교하면서 읽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는 <문은…>으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2위에 오른 이시모치 아사미의 또 다른 작품이다. “연쇄살인을 계획하고 있다”는 범인의 살의로 시작되는 이 책은 제한된 시간 속에 범인을 몰아넣으며 숨돌릴 틈 없이 ‘살육의 밤’을 향해 돌진한다. 용의주도하게 세 사람의 살인을 준비해오던 나미키는 뜻하지 않은 사고를 겪으며 하룻밤 안에 세 사람을 모두 죽여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당황하면서도 그는 ‘완벽 살인’을 완수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철저하게 범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 작품은 마치 작가가 범인의 머릿속에 들어앉아 중계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좋은 점은 첫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의 어설픈 행동과 예측 불가능한 사건 전개가 리얼하게 묘사됐다는 것이다. 반면 나쁜 점은 작가가 범인의 심리에
[도서] 범인의 마음으로 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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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리만치 한국에선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황금기의 명탐정 또 한명을 당신의 목록에 올려둘 차례다. 탐정소설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작가 S. S. 밴 다인이 창조한 탐정 파일로 밴스는 사적인 예술애호 취미로나 공적인 추리 임무에서나 완벽함의 균형을 추구하는 고전주의자다. 당신이 필립 말로처럼 우수를 겸비한 하드보일드 탐정에 열광하는 독자라면 파일로 밴스가 짜증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에르큘 포와로의 느긋한 자랑질이 귀엽다고 느꼈다면 파일로 밴스는 더한층 마음에 들 것이다. 하버드대학 출신에 미술과 문예, 음악 비평가와 편집자 등으로 맹활약하던 밴 다인이 야심차게 빚어낸, 기형적이리만치 귀족적이고 지적이며 배배 꼬인 유머를 구사하는 캐릭터니까.
<스카라베 살인 사건>은 이집트의 고대 왕조사와 신화, 고고학적 지식이 난무하는 현학 취미가 살인 사건 해결과 별도로 독자의 주의를 마구 흐트러트린다. 중편 <겨울 살인 사건>은 은반 위의 피겨 스케이팅과 미국의 반항적이고
[도서] 얄미운 명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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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자전거를 한대 사기로 마음먹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명인 대중음악평론가 차우진의 권유였다. 게다가 몇년 전 사석에서 만난 (역시 이 책의 저자 중 한명인) 미술평론가 반이정의 자전거 예찬도 여전히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삼각형으로 생긴 미니벨로 스트라이다를 사려고 벼르다가 관뒀다. 추운 겨울이라 자전거 따위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봄이 되니 중고 자전거는 드물어졌다. 환율이 오르는 바람에 수입 자전거 가격은 뛰어올랐다. 자전거를 타고 홍대 앞을 질주하는 청춘들을 보며 쓰라려 하던 참에 <자전거,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아홉 가지 매력>을 받았다.
이 책에는 자전거를 오랫동안 사랑해온 아홉명의 저자들이 쓴 아홉편의 글이 들어 있다. 각각의 글이 모두 다르다. 델리스파이스 윤준호가 자전거 콘서트 개최 과정을 투박하게 기술하는 한편에 자전거 메신저 지음은 한국에서 자전거 메신저라는 직업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차우진이 슴슴한 글로 자전거와 인생의
[도서] 자전거 지름신 오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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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악몽을 꾼 일이 있다. 땀과 구토물과 눈물 범벅이 되어 도망치는데, 어디에서부터 어디로(혹은 무엇으로부터 무엇으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끝나지 않는 꿈. 현실 속 나쁜 경험도 그런 악몽과 다르지 않다. 꿈에서는 깨면 되지만 현실에는 이계로 뚫린 출구가 없다.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도 그렇다. 소설은 끝나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는 인상이다. 주인공의 삶이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삶과 겹쳐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지만.
남자주인공 버드는 아내가 아이를 낳는 동안 아프리카 지도를 하나 구입한다. 학원 강사인 그는 아프리카로 떠나고 싶어 한다. 아이가 생기면 영원히 떠나지 못하겠다고 탄식하기도 잠시, 병원에 돌아간 그는 아들이 두개골 결손으로 뇌의 내용물이 빠진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내에게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큰 병원으로 아이를 옮긴 그는 아이의 죽음을 기다린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여자친구와 섹스를 하면서.
[도서] 고유한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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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아직 닫혀있는데> 같은 도서미스터리를 읽을 때의 즐거움은 복합적이다. 도서미스터리라는 말을 먼저 소개하면, 범인의 범행 과정을 먼저 보여주고 이후 탐정역의 추리 과정을 보여주는 미스터리물을 말한다. 일반 미스터리물은 이미 벌어진 사건을 두고 범인을 추적하는 두뇌게임 과정을 거치지만 도서미스터리는 범인이 이미 알려져 있기 때문에 범행동기나 수법, 혹은 범인의 시점에서 범죄를 은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탐정과 맞서면서 재미를 낳는다. 도서미스터리의 효시인 <노래하는 백골>을 쓴 오스틴 프리먼은 “총명한 독자는 마지막 결과보다 책 속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동료의 행동에 특히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며 새로운 기법을 시도한 이유를 밝혔다. 프리먼의 말은 이렇게도 들린다. 총명한 독자는 책 속 동료(탐정역 혹은 경찰)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밝히는 데 관심을 갖고, 또 어떤 독자들은 범인의 입장에서 들키지 않기 위해 조마조마하는 쾌락을 누린다. 탐정에게는 알릴
[여름에 읽는 장르문학] 범인을 까고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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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두살 터울인 언니가 있었어요. 인물이 고운 언니는 이웃 고을의 큰 부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지요. 언니가 시집을 가 더이상 아가씨가 아니게 될 일을 서운해하던 혼례 전날, 저는 언니에게 찰싹 달라붙어 산으로 꽃구경을 갔답니다. 그런데 언니가 그만, 호랑이처럼 커다란 괭이, 그러니까 산묘와 마주친 거예요. 놀란 언니는 실신했는데 정신이 들고도 어쩐지 멍해보였죠. 그런데 혼례날, 식 중에 언니가 없어진 거예요. 언니는 내게만 말해주었어요.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다고. 결국 혼담은 깨졌는데, 언니의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어요. 언니는 산묘와 눈싸움을 했던 그 장소에서 남자 음색과 여자 음색을 나누어 쓰며 노래를 부르고… 그래요, 실성한 거지요. 결국 언니는 굶어죽었고, 시신 주위에는 산묘의 털이 많이도 떨어져 있었답니다.
<전설의 고향>의 한 장면을 떠올릴 만한 이 이야기는 에도시대 괴담을 모티브로 한 괴담집 <항설백물어>의 첫 번째 이야기다. 제목이
[여름에 읽는 장르소설] 귀신보다 무서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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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냐 우연이냐의 문제는 재능이냐 노력이냐의 문제만큼이나 자주 질문되지만 성공적으로 그 답이 제시된 적은 없다. 모두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는 게 유일하게 가능한 해결책으로 보이는데, <뉴욕타임스>의 수석 미술 비평가로 일하는 마이클 키엘만은 그 절충점인 ‘우연이 운명으로 이어지는’ 경우들을 미술사 속에서 탐색한다. 미술은 미술이되 미술인지 헷갈리는 미술인 “참 쉽죠잉”의 밥 로스 이야기부터 발품을 팔아야만 감상할 수 있는 대지미술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예술가와 그들의 뒷이야기가 재미있게 실렸다.
특히나 현대미술에 관심을 집중한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다른 읽을거리가 되어준다. 독특한 걸작들, 그러니까 ‘닥치는 대로 수집하다가 나온 걸작’은 신상 구두로 성이라도 쌓을 것 같아 보이는 서인영과 예술품 수집가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게 해준다. 모나리자 앞에서만큼이나 이삿짐을 싸다가 발견한 다 해진 옛 사진(구도가 엉망이고 초점은 맞지도 않는)에
[도서] 어쩌다 보니 걸작이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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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논문의 주제가 되는 일은 많지만 논문이 소설로 인정받는 일은 흔치 않다. 드물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이렇게 기적 같은 성공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작가 커리드웬 도비의 <함정>은 원래 문예창작 석사 논문용으로 쓰였고, 2007년 출간되어 영미권 국가들에서 주목을 받았다. 독재정권이 쿠데타로 전복된다. 대통령과 그의 전속 화가, 이발사, 요리사가 포로로 억류된다. 그들과 관련된 여자들 역시 난폭한 정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각기 안간힘을 쓴다. 가까스로 정권이 자리를 잡아가던 때,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난다.
도비와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존 쿳시는 “오만한 권력, 그 황홀한 얼굴 뒤에 숨겨진 욕망의 실타래를 파헤치는 한편의 우화”라고 <함정>을 추어올렸다. 도비는 권력이건 욕망이건, 순수해 보이던 희망이건, 성취한 순간부터 부패해가는 모습을 그렸다. 인류학을 공부하고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저자의 뛰어난
[도서] 쿠데타,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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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으로라도 책장이 술술 읽힌다고는 못하겠다. 존 드릴로의 <리브라> 이야기다.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이야기와 의미를 파악해보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혼란은 멈추지 않는다. 의기소침한 독자를 다독이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이야기에 대해 이미 꽤 잘 알고 있다는 사실. <리브라>는 JFK 암살사건을 둘러싼 세상을 그린다. 미국 안팎 정보기관의 음모, 리 하비 오스왈드의 어려서부터의 삶을. 이 이야기가 어떤 결말을 맺을지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미국 대통령 암살), 어떻게 그런 결과로까지 이어졌는지 그 이유와 과정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있기는 할까?).
소설가 존 드릴로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암살사건(범인이 잡혔지만 그가 진범이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을 소설로 재구성했다. 방대한 자료가 밑바탕이 되었지만, 그래서 몇몇 장면에서는 마치 기억 속 장면을 낡은 사진으로 재확인하는 기분마저 들지만, 이
[도서] 암살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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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실리는 <씨네21> 714호에는 별책부록 <이 책에 마음을 놓다>가 따라붙는다. 간단히 설명하면 출판사 편집자들이 추천하는 신간 모듬인 셈인데, 별책을 만드는 동안 편집기자들이 먼저 낚여서 주말 동안 광화문에 나가 책을 샀다. 그중 특히 인기있었던 책이 바로 이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였다. 사진 촬영을 위해 책을 받았는데, 사진팀에서 사진을 찍고 디자인팀에서 책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책을 내가 가져다본 뒤 디자인팀에 반납, 그 책을 이번엔 주말에 출근했던 교열팀 K선배가 보려고 책상에 가져다뒀는데 월요일에 나와보니 책이 사라졌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회사에서 자주 생기는 일인데, 책 행방을 수소문하다 보니 이거야 원. 다들 “나도 보려고 했는데…”라며 아쉬워하는 것 아닌가.
잡담이 길었는데, 이렇게 뜨거운 관심을 받은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는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고스케
[여름에 읽는 장르소설] 음산하고 괴이쩍은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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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대한늬우스>를 보고 분노했던 이유는 그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황당해서기도 하지만 너무 재미없어서기도 했다. 웃기는 사람들을 썰렁하게 만드는 기똥찬 발상! 그들과 정반대 지점에서 경제 공부를 유행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KBS 인터넷에서 경제 상식을 알리는 <최진기의 생존경제>의 강사 최진기, <십자군 이야기>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등으로 (주로 중세) 유럽 역사를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꾸어놓은 김태권이 바로 그들이다.
김태권의 <어린왕자의 귀환>은 부제 ‘신 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이 알려주듯 현대 경제학의 논쟁적인 이슈를 한자리에 불러모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시장원리나 경제논리는 오늘날 반대자의 입을 틀어막고 진지한 문제제기를 금한다”는 작가의 문제의식은, 비정규직 문제, 건강보험을 비롯한 공공부문 민영화 문제, 환경과 주거 문제 등 최근 일년 새 먼 정치판의 구호가 아니라 생활과 밀접한 문제가
[도서] 경제 상식 갖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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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이라는 사자성어가 말하듯, 같은 걸 본다고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이마 이치코의 <뷰티풀 월드>는 <찬란한 유산>을 보며 이승기와 배수빈이 주먹질할 때 그 둘 사이에서 뭔가를 느끼며 혼자 얼굴을 붉히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만화다. ‘썩은 여자’(BL에 열광하는 동인녀를 가리키는 신조어)로 살면서 만화를 그리는 이야기가 코믹하게 펼쳐진다. BL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각종 전문용어(?) 안내도 자세한 편이라 ‘그쪽’을 잘 몰라도 읽기 편하다. (그림체로는) 초등학교 3학년 같은 얼굴이지만 사실 중년 여자인 작가 자신이 계속 뭔가에 흥분하는 이야기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리는 걸 보고 있으면 너무 웃겨서 정신이 이상해질 듯. 미국, 일본의 영화·드라마를 많이 보는 사람이라면 특히 즐길 만한 대목이 많다. <올드보이>에 대해 “유감스럽게 20년 이상 가둬두면서도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듯…”이라고 천연덕스럽
[도서] 작가님, 얼굴 그만 붉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