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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도 경사로 지어져 “기울어진 저택”이라 불리는 유빙관에서 살인이 일어난다. 대부호 하마모토 고자부로가 소유한 이 별장에는 그가 초대한 손님들과 고용인들, 딸 에이코와 친구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묵던 중이었다. 모두 모인 첫날 밤 손님 중 하나가 “흉터가 있는 얼굴”을 3층 창문 밖에서 봤다며 소리를 지르는데, 다음날 아침 운전사가 부자연스러운 모습의 시체로 발견된다. 흔적없는 처녀설 위에 뉘여진, 사람 크기의 목없는 인형이 기이함을 더한다. 그리고 사건을 수사하러 형사 세명이 출동한 날, 또 한번의 밀실 살인이 일어난다.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는 1982년 일본에서 출간된 본격 미스터리 소설이다. 제목의 “기울어진 저택”은 살인의 배경이자 미스터리를 푸는 거대한 열쇠. 지하와 2층은 이어졌지만 1층에서 2층으로 바로 갈 수 없고, 어떤 방은 건물 밖에서만 출입이 가능한 수수께끼 같은 건물이다. 소설은 건물의 투시도, 시체가 발견된 방의 평면도 등을 제시하는데, 형사
[도서] 이상한 저택의 살인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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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는데 한 학생이 휴대폰으로 전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몰라, 이력서 100개는 쓴 것 같아….” 한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을 다니는 친척 동생들은 이대로는 힘들다며 유학 준비와 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 스물여섯살인 옆자리 후배는 대학 동기들이 취업이 안되는 통에 채플 과목만 수강하는 식으로 가능한 한 졸업 시기를 늦추고 있다고 한다. 호객꾼들이 모두 일본말로 소리치는 명동의 한 커피숍에서는, 일본 남자의 가이드부터 밤일까지 패키지로 하는 여자들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경기 불황과 88만원 세대라는 표현이 일반명사화되어가는 이런 시점에 읽는 <퍼킹 베를린>은 국경을 넘어 오싹함을 안긴다.
<퍼킹 베를린>은 저자 소니아 로시의 자전적 이야기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베를린대학으로 진학한 뒤 가난한 고학생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인터넷 채팅, 안마시술소를 비롯한 성매매업소에서 일하게 된 이야기를 쓴 책이다. 베를
[도서] 1천유로 세대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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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조승희 프로파일’이다.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과 그 사건의 범인인 조승희의 심리를 파악하고자 노력한 논픽션이다. 후안 고메스 후라도는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로, 사건 직후부터 현장취재를 통해 이 책을 완성했다.
2007년 4월16일 새벽 4시59분부터 오전 9시51분까지 조승희의 행적에 대한 꼼꼼한 기록이 가장 눈에 띈다. 조승희의 첫 번째 살인을 일별한 뒤, 총기난사사건을 막을 수 있는 지점은 없었는지를 차근차근 짚어간다. 시종일관 강조되는 것은 조승희가 대화 상대가 없는 외톨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승희가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버지니아공대 노리스홀에서 한 말은 단지 “안녕, 잘지내?”(Hi, how are you?)가 전부였다. 이 책의 말미에서는 그 한마디가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오싹하게 깨닫게 되는 순간을 맞는다. 설명도 변명도 아닌, 일정한 거리를 지키는 르포타주 특유의 서술 방식은 이 책의 가장 돋보이는 매력 중 하나. 또한 이 책은 미국에서 사는
[도서] 조승희 사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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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연상시키는 <마담 보베리>는, 영국 작가 포지 시먼스가 그리고 쓴 ‘그래픽 노블’이다. 좀더 정확하게는 ‘그래픽+노블’이 맞겠다. 말풍선이 등장하는 만화와 줄글이 한 페이지 안에 뒤섞여 전개되기 때문이다. 제목이 말하듯 <마담 보베리>는 <보바리 부인>의 줄거리에 상당 부분 기대어 간다. 하지만 그 자체로도 독립적인 이야기라서 패러디나 각색, 그 어떤 말로도 완전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패러디+각색+오리지널’이라고 하면 또 모를까.
이야기는 젬마 보베리의 죽음에서 출발한다. 화자는 주베르라는 이웃 남자다. 평소 젬마를 흠모했던 주베르는 유품에서 일기장을 훔쳐 그녀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일기문, 주베르의 독백, 몹쓸 상상이 자유롭게 펼쳐진다. 얼핏 젬마의 삶은 <보바리 부인>의 주인공 엠마의 삶과 복사판이다. 영국인 젬마는 찰스 보베리라는 이혼남과 결혼해 프랑스 노르망디로 건너왔다. 노르망디에서 젬마는
[도서] 보바리 부인 아니죠, 보베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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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를 알면 더 재밌다 지수 ★★★★
하드보일드가 좋다 지수 ★★★★
요 몇년 새 재밌는 소설을 쓰는 미국 소설가들을 새로 꽤 발견했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조너선 사프란 포어,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의 주노 디아즈, <사랑의 역사>의 니콜 크라우스… <유대인 경찰연합>의 마이클 셰이본도 그중 하나다.
대체역사소설인 <유대인 경찰연합>은 SF와 판타지 소설에 수상하는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알래스카에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되었다는 가정 아래 이야기가 진행된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위해 알래스카에 유대인 정착촌을 세운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런 계획에 따라 알래스카 싯카 특별구에 유대인들이 자리를 잡는데, 60년 뒤에 미국 본토에 땅을 반환해야 한다는 조건 아래서다.
주인공인 형사 랜즈먼은 싯카 특별구에
[도서] 코언 형제의 차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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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공룡을 다시 지구 위로 불러내기 위해 공룡의 DNA를 복구했다. 누군가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떠났다. 전자 <쥬라기 공원>은 서스펜스와 액션, 스릴러였고, 후자 로버트 J. 소여의 <멸종>은 SF와 액션, 멜로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어느 쪽이 더 재미있느냐고 묻는다면… 판단 불가. 둘 다 꼭 읽으라고 할 수밖에. 로버트 J. 소여는 마이클 크라이튼의 발상, 속도감, 구성력을 온전히 SF적으로 풀어낸 엔터테인먼트 소설을 쓰기 때문이다. 특히 공룡의 스펙터클을 시각적으로 느낄 만한 묘사가 뛰어나다.
타임머신이 개발된 2013년, 캐나다의 고생물학자 브랜디와 지질학자 클릭스가 공룡 멸종의 이유를 밝히려고 백악기로 향한다. 도착하자마자 곧 티라노사우루스가 모습을 나타낸다. 그런데 두 사람은 공룡의 멸종에 관련된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다. 브랜디의 전처 테스를 가운데 둔 브랜디와 클릭스의 신경전, 백악기, 미래, 근과거의 이야기가 숨가쁘게 뒤섞인다
[도서] 공룡 멸종의 진짜 비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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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마이클 케인의 이론에 따른다면, 요즘 배우들이 취미랍시고 사진책과 요리책을 내는 건 말도 안되는 외도다. 명배우가 되기 위한 케인의 요점은 딴 거 없다. 한눈팔지 말고 연기에만 매진할 것. 관객이 그의 연기에 압도될 수 있었던 건 그가 무슨 대단한 기술을 타고나서가 아니다. 바로 그가 온전히 연기만을 생각하고, 연기만을 위해 노력하는 순결한 영혼의 배우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파트타임으로 할 수 없다. 24시간 강박증에 사로잡혀 몰입해야 하는 직업이다.” 이 무시무시한 말을 그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며 유랑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한 이십대 이후, 무시무시하게도 평생 실천해왔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연극판에서 연기를 영화 촬영장에 묻혀와 촬영장 물 흐리는 배우, 연기 말고 다른 일까지 겸업하는 배우 모두 영 꽝이다. 오랜 경험 끝에 카메라와의 소통의 중요성을 터득한 그는 카메라 앞에 한점 거짓없는 연기로 그 자신, 명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이 노인, 실천하기에는 결코 쉽지
[도서] 배우는 24시간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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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권하고 싶다 지수 ★★★★
다른 시집도 읽고 싶다 지수 ★★★★
“인류는 작은 공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일하며/ 때로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화성인은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는지)/ 그러나 때때로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만유인력이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 우주는 점점 팽창해간다/ 따라서 모두는 불안하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이십억 광년의 고독>
일본에서도 시만 써서 먹고살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그 일본에서 직업적으로 시 써서 먹고사는 시인이 딱 한명 있는데, 그 인물이 바로 다니카와 슌타로라고 한다. 스물한살에 낸 첫 시집 <이십억 광년의 고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래 거
[도서] 시에 숨겨진 상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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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신인. 단편집인 <군청학사>는 이야기마다 다른 인물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보이는 반응을 재치있게 담아내고 있다. 이를테면 ‘선생님, 저는’은 장난기 다분한 4등신 남자 초등학생들이 어느 날 묘한 메일을 받게 되면서부터 시작한다. 내용은 간단하다. ‘코다치 아카네(29) 노브라 의혹.’ 이후 학생들의 관심은 컴퓨터 선생님의 특정 신체부위에 집중된다. 좀더 확실한 증거 수집을 위해 선생님이 카디건을 벗도록 하고 선생님에게 물을 끼얹으려는 시도도 발생하는데, 주인공 격인 소년은 아주 엉뚱하게 진실을 확인하게 된다. ‘숲으로’는 숲이라는 자연의 경이를 관통하는 한 할머니를 뒤쫓는다. 불상을 닮은 할머니의 인자한 미소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하얀 불꽃’은 연작 단편. 연인 사이면서도 침대 밖의 일에 대해서는 소통하지 못하는 두 청춘남녀의 이야기를 그린다.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기묘하게 어긋난 남녀의 이야기는 ‘포로 공주’에서도 기발하게 그려진다. 관심과 무관심 사이
애정과 호기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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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Y읍, 아동생매장사건이 발생했다. 사이비교 ‘백백교’의 세 번째 학살사건으로 유일한 생존자는 순덕이란 아이다. 1976년 서울, 남매가 있던 집에 불이 나 동생은 죽고 누나만 살았다. 그리고 2008년, Y읍이 승격한 Y시의 타운하우스 단지에서 일가족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옆집의 임신부도 칼에 찔려 의식을 잃었는데, 범인은 배를 가르고 7개월 된 태아를 꺼내갔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이상한 단서들이 계속 튀어나온다. 알고보니 단지는 백백교가 생매장한 터에 지어졌고, 타운하우스의 회장은 순덕, 회장을 보좌하는 비서는 76년 화재에서 살아남은 동주다.
‘아이무덤’이라는 의미의 <애총>(兒塚)은 이렇듯 질긴 목숨으로 살아남은 이들을 중심에 놓은 미스터리스릴러다. <금지된 사랑> <M·노엘> 등을 그린 한혜연이 8년 만에 선보인 연재물로, 소설형식으로 먼저 완성해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해외출판지원작에 선정, 영화화 판권도 판매됐다. 영화화를 염두
나중에 영화로도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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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꽝스러운 코스튬 등장 빈도 지수 ★
여성 독자의 만족도 UP 기대 지수 ★★★★★
“기억나요, 내 코스튬? 그 바보 같은 짧은 치마에 배꼽까지 늘어진 목걸이라니… 우리가 대체 왜 그랬던 걸까요?” 그래픽 노블 <왓치맨>의 한 장면, 2대 실크 스펙터인 로리 저스페직은 지나간 옛 시절을 이렇게 추억한다. 그건 어쩌면 DC코믹스의 한계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대사일지도 모른다. 우스꽝스러운 코스튬을 입고 고뇌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영웅들이라니. 그 세계의 서사는 이미 충분히 원대하고 성숙했으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좀더 참신하고 격조 높은 새 시대의 콘텐츠가 필요했다.
스토리작가 닐 게이먼(<스타더스트> <신들의 전쟁>의 저자)의 <샌드맨>은 DC코믹스 제2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DC의 성인용 레이블인 버티고의 대표적인 타이틀 롤이 된 이 작품은 코스튬 히어로 대신 고대 그리스의
그리스 여신들의 그래픽 노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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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경영하는 히야마 다카시에게 경찰이 찾아온다. 아내를 죽인 3인조 강도들이 차례로 변을 당한다는 소식이다. 4년 전, 13살 소년 3명이 히야마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 4개월된 딸이 보는 가운데 아내를 살해했다. 그들은 “14살 이하의 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소년법에 의해 보호기관으로 보내졌고, 곧 사회로 돌아왔다. 당시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던 히야마는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매스컴에서 말한 적이 있고, 그 때문에 경찰은 가장 먼저 그를 의심하게 된 것이다. 묻어두었던 고통이 되살아나 괴로워하던 히야마는, 과거의 사건과 새 사건 사이의 석연치 않은 구석을 감지하고 관련자들의 과거를 찾아 나선다.
현재는 개정된 소년법의 모순을 다루는 <천사의 나이프>는, 사회파 미스터리와 추리소설의 균형을 잘 맞춘 소설이다. 묵직한 주제와 다르게 부담없는 문장들이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재촉한다. 소설은 독자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새로운 단서들이 툭툭
[도서] 인간은 용서한다, 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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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책을 쓴 사람이 그 책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동안 너무 게으른 독서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 책이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쓰였고, 그 작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 하지 않고 그냥 책을 읽기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준엄한 뉘우침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앓느니 죽지. 나는 역시 게을러터진 인간이로군.
책에 대한 책인 <성석제가 찾은 맛있는 문장들>은 게으른 독자에게도 부지런한 독자에게도 알맞은 독서 체험을 제공하는 책이다. ‘문학집배원 성석제 엮음’이라고 되어 있는 이 책은, 정말 성석제가 문장을 엮어 펴낸 책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단을, 책 속 한 장면을 소개하는 책이다. 2∼3페이지 정도 분량의 장면을 발췌한 뒤 성석제는 아주 짧게 첨언한다. 고등학생 때 밑줄 그어가며 배운 김유정의 <봄봄>부터 불안함까지 동경하게 만들었던 전혜린의 <마지막 편지>, 젊은 독자가 사랑하는 김애란의 <
[도서] 당신을 유혹하는 책 속 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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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마셜의 고귀한 호러영화 <디센트>의 소설판, 혹은 소설로 만들어진 <디센트>의 속편인 줄 알았다. 읽다보니 전혀 다른 이야기다.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둘 다 지하의 지옥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히말라야 산맥을 트래킹하던 여행자들이 폭풍우를 피해 동굴에 몸을 피신한다. 거기서 온몸에 기괴한 기호가 새겨진 시체를 발견한 여행자들은 점점 동굴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이야기는 영화 <디센트>와는 다른 방향으로 확장된다.
칼리하리 사막에서는 태평양 밑바닥까지 이어지는 동굴이 발견되고, 보스니아의 유엔부대는 지하에서 등장한 생명체의 공격을 받고, 결국 지구의 지하에는 인류와 다른 진화를 거듭해온 백색 피부의 변종들이 살고 있음이 밝혀진다. 게다가 제프 롱은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바티칸이 등장하는 <다빈치 코드>식 종교-팩션물로까지 확장한다. 출판사의 설명에 쓰여 있는 ‘움베르토 에코의 철학적 성찰’은 반농담이다. 그래도 마이클
[도서] 지하 지옥으로 빠져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