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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3부작’(<모두 다 예쁜 말들> <국경을 넘어> <평원의 도시들>)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로드>로 유명한 매카시의 대표작이다. 사막을 무대로 한 묵시록적 서부 소설 연작이다. 서부물이라고 해서 악과 싸워 이기는 선이 존재한다거나, 스릴 넘치는 총격전이 주를 이룬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코맥 매카시의 ‘국경 3부작’을 처음 읽었던 때, 일주일가량 앓은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막과 소년들과 언제나 ‘저편’만이 존재하는 국경이 등장하는 악몽에 가까운 꿈이 밤마다 찾아왔다.
‘국경 3부작’은 앞 두권의 이야기가 마지막 <평원의 도시들>에서 대단원을 맞는 구성이다. 그러니 세권을 차례로 읽는 게 가장 좋겠지만 세권을 벼르다 한권도 읽지 않을 가능성을 대비해 한권을 추천한다면 두 번째 책인 <국경을 넘어>가 좋을 것 같다. 소년은 부모와 살던 농장에 출몰하던 늑대에 매혹된다. 소년은 어
[도서] 서부에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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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2년 4월5일 토요일 밤 9시가 조금 지나서 OOOOO를 죽였다. 그날은 햇살이 화사하고 상쾌한 봄날로, 이제 여름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만큼 따뜻했고, 밤에도 적당히 쌀쌀했다.” 짐 톰슨이 1952년에 발표한 하드보일드 범죄소설 <내 안의 살인마>를 보면 이런 아이로니컬한 문장 배치가 종종 나온다. 살인을 고백한 뒤, 바로 날씨에 대한 서정적인 설명이 따라붙을 수 있다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본래 인간의 마음이 가장 무섭고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살인에의 충동을 ‘병’이라 지칭하는 주인공 ‘루 포드’는, 차근차근 자신의 살인 과정을 1인칭 시점으로 들려준다. 때론 가전제품 매뉴얼을 읽어주듯 담백하게, 때론 결말을 채근하는 독자들을 다독이면서.
이 소설은 알게 모르게 TV시리즈 <덱스터>나 영화 <아메리칸 싸이코>에 영향을 줬을 거라 생각될 정도로, 1인칭 범죄소설의 매력을 십분 발휘한다. 루 포
[여름에 읽는 장르소설] 나의 살인 과정을 한번 들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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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순간은 완전히 상실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사람들은 그 점을 알면서도 잃어버린 삶의 지점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추억한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관통하는 주제다. 이 책은 국적과 시공간이 제각각인 아홉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지만, 상황과 인물을 거대한 상실감이 압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의 외국 여성은 세상을 떠난 연인의 나라 한국에서 상실감을 극복하려 하고, 물고문을 하다가 한 대학생을 죽게 만든 <내겐 휴가가 필요해>의 전직 대공과 형사는 그 학생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날것의 고통을 갈망했던 <기억할 만한 지나침>의 고3 여학생은 자신이 안락함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지금 막 무엇을 잃어버리려는 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상실보다 중요한 건 상실 그 이후의 삶이다. ‘지금, 여기’에 남은 사람들은 가슴에 묻거나 책임을 지거나, 혹
[도서]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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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건축물을 돌아볼 때면 가장 인상적인 공간 중 하나가 계단이다. 계단을 통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뒤로 공간이 펼쳐지는데, 가파른 계단을 헐떡이며 오르며 새로운 공간과 만날 때는 건물의 육체성을 몸으로 실감하게 되곤 한다. 종교적인 건축물의 경우 높지 않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계단에 집중해 발을 옮기다 보면 계단이 사색과 깨달음의 도구구나 싶어진다.
<계단, 문명을 오르다>는 생활에 밀접하지만 막연하게만 인지되었던, 혹은 불편함으로만 존재를 인정받았던 계단의 인문사회학적 의미를 캔다. 의도와 관계없이 생겨난 ‘변형된 대지 계단’(등산로를 생각하면 된다)이 가장 기초적인 형태였고, 고대 종교에서 계단은 하늘로 오르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쭉 뻗은 곧은 계단이 하늘을 향해 긴 거리를 수직으로 거침없이 뻗어 올라가는 장면은 그 자체가 종교적 아이콘이었다. 이런 장면은 곧 정치적 권위와도 직결되어서, 고대 문명에서 정치 지도자에게 곧은 계단을 갖는 수직 구조물은 필수 조
[도서] 계단에 무슨 비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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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에 관한 책은 많다. 해외에서 발간된 책은 셀 수 없을 정도이고 국내 번역본만 해도 10종이 넘는다. <The Complete Beatles Chronicle>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이 책이 포괄하는 방대한 자료 때문이다. ‘완전한 비틀스 연대기’라는 제목이 어울리게 이 책은 1957년 비틀스의 전신(前身)인 쿼리 멘 결성부터 공식적으로 해체한 1970년까지의 일을 시기별로 상세하게 정리한다. 그 상세함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비틀스의 스튜디오 녹음 일정과 내용뿐 아니라 작은 클럽부터 대형 경기장에서 열린 모든 공연까지 꼼꼼하게 담고 있다는 말이다. 이 모든 기록이 날짜별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저자가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커다란 판형과 전면에 사용된 컬러용지는 그 노고를 담아낼 유일한 형식이었으리라.
사실, 이 책은 비틀스의 초심자용이 아니다. <The Complete Beatles Chronicle>은 비틀스의 결성에서부터
[도서] 비틀마니아의 필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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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고지의 공포소설 <링>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10년 전, 책대여점집 딸인 친구가 하루는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링> 책이 반납이 안되어 전화를 걸었다. 빌려간 사람은 초등학생이었는데, “책에서 귀신이 나올 것 같아서 깊숙한 곳에 숨겨놨다”고 한다. 책을 다시 만지기 싫대서 결국 그 어머니가 반납했다던가.
윌리엄 요르츠버그의 <폴링 엔젤>을 보며 그 얘기가 생각났다. 정신이 나갔다고밖에 할 수 없는 최후의 반전은 그렇다치고 책을 지배하는, 나쁜 기운이 들러붙는 듯한 찐득한 기운은 아무리 이성적인 독자라 해도 쉽게 떨쳐내기가 힘들다. 한마디로, 쉽게 만나기 힘든 걸작 오컬트 소설이라는 말. 이 책의 영화판인 미키 루크 주연의 <엔젤 하트>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특유의 소름끼치는 느낌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1959년 3월, 13일의 금요일. 사립탐정 해리 엔젤은 뉴욕 5번가 666번지의 한 사무실에서 이상한 의뢰를 받는다.
[여름에 읽는 장르소설] 오컬트 하드보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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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는 갓을 벗고 서양에서 들어온 문제의 천조각을 머리에 동여맸다. 써보니 관모보다 더 위엄이 느껴졌다. 발견을 스스로 기특해하며 관리는 천조각에 이름을 하사하였다. 아니 불. 높을 아. 놈 자. 이름하여 ‘불아자’.
사실 그건 브래지어였다. 2세기 전만 해도 서양인을 도깨비 취급하던 조선이었으니, 브래지어를 서양식 갓으로 착각하고 ‘뽕’의 개수를 지위의 높낮이로 해석한다 한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신문물검역소>는 이처럼 서역만리 신문물을 처음 접하는 조선 관리의 좌충우돌 검역기를 다룬 소설이다. 과거시험을 망쳐 제주로 발령난 선비 함복배는 ‘신문물검역소’에서 신(新)문물의 쓰임새를 밝히는 임무를 맡는다. 여기에 난파한 배에서 살아남은 네덜란드인 벨테부레(조선 이름 박연)가 합류해 큰 도움을 준다. 치설(칫솔)을 치질 치료제로, 곤도미(콘돔)를 골무로 착각하는 민망하고도 우스운 나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결혼을 앞둔 제주 처녀들이 처참하게 살해되는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
[도서] 나는 불아자를, 너는 곤도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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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이민자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으로 삶의 뿌리를 옮기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해도 그렇다. 옮겨심기 좋게 뿌리를 내리지 않고 살아남는 데 익숙하다. 부모님 세대와 비교하면 사랑, 일, 주거, 가족의 문제에서 우리는 어찌나 ‘기꺼이’ 부유하는지. 줌파 라히리의 소설이 마음을 움직이는 대상이 단순히 인도계 미국인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다. 미국 이민 2세대의 이야기를 주로 쓰는 줌파 라히리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야만 굴러가는 가족의 비밀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다. 본국의 가치를 버리지 못한 부모 세대와의 갈등으로 비치는 많은 것들은 사실 이민의 문제와 관계없이 어느 집에서나 맞딱뜨리는 문제들. <그저 좋은 사람>에 실린 한 단편 제목처럼 ‘지옥-천국’인 한 처마 밑에서 너무 오래 서로를 알아왔던 인간들의 이야기.
이 책에 실린 몇몇 단편을 처음 읽었던 몇년 전을 돌이켜보면, 그때보다 지금의 감흥이 더 깊은 건 내가 그만큼의 시간을 더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도서] 젖은 눈빛으로 돌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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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SF 장르에 처음으로 입문하게 만든 작품이 뭐였습니까? 한국 SF소설 팬들의 대답은 비슷비슷할 거다. 대부분의 SF팬들이 90년대 초반 처음으로 출간되기 시작한 장르의 고전들로 SF에 입문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서 C.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와 함께 SF계의 ‘빅스리’(Big3)로 불리는 로버트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은 국내에 정식으로 계약되지 않은 채 세번이나 불법 출간된, 이 장르의 클래식이다. 개인적으로는 고려원에서 90년대 초 출간된 판본으로 이 책을 접했다. 알고보니 이번에 출간된 <여름으로 가는 문>이 국내에서 처음 발간되는 정식 한국어판 완역본이란다. 일본어 중역본의 압축본을 오리지널이라고 여기며 살아온 장르팬이라면 다시 구입하는 게 거장에 대한 도리다.
SF장르의 팬이 아니라도 <여름으로 가는 문>은 아무런 부담이 없는 책이다. 궤변과 하드SF적 설정이 많아진 후기 하인라인의 작품과 달리 <여름으로 가는 문&g
[여름에 읽는 장르문학] 여름으로 가는 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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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삶도 그렇지만 이 이야기도, 행복한 결말을 맺으려면 말이다, 아가, 희생이 필요해. 즉 누군가의 불행 말이다. 절대 잊지 마라. 한 가지 행복마다 두 가지 불행이 생겨난단다.” 상상 속 이야기에서조차 비극만이 가능한 이곳은 ‘아프가니스탄 어느 곳, 아니면 다른 곳’이다. 마치 적막한 무대 위에 조명이 켜지듯 작은 방이 먼저 보여진다. 한 남자가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고, 아름다운 여자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녀는 그의 아내이고, 그들에게는 두딸이 있다. 그녀는 연주를 굴리며 신의 이름을 암송하며 남편이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돌덩이처럼 꼼짝 않는 남편, 집 밖에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폭격 소리. 여자는 신의 이름 대신 다른 말을 주워섬기기 시작한다. 시아버지가 말했던 ‘인내의 돌’ 이야기가 생각나서다. ‘인내의 돌’, 그 돌을 앞에 놓고 그 앞에서 모든 불행, 모든 괴로움, 모든 고통, 모든 비참한 이야기 이런 걸 다 탄식하며 털어놓으면 된다. 어느 날 그 돌은 비밀을
[도서] 버릴 수 없는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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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무라카미 하루키 관련 동호회에서 활동하며 신기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맥주, 스파게티, 야구, 재즈를 좋아한다는 것. 한 작가를 좋아하기 이전에 비슷한 취향으로 묶여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경험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루키의 장점이다. 그는 취향을 매력적으로 전시하는 방법을 알고, 그로부터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반면 ‘과잉된 스타일로 옅은 깊이를 감추려 한다’는 비판도 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루키 문학을 얘기할 때 이와 같은 ‘깊이 논란’은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5년 만에 출간된 하루키의 <1Q84>는 이러한 논란을 어느 정도 잠식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1984년의 평행 세계인 ‘1Q84’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제목만 봐서는 <해변의 카프카>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환상성을 기대하기 쉽지만, 면면을 살펴보면 그 어느 때보다 리얼리티가 풍부하고 문학적 깊이가 느껴진다. 여자
[도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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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원작 소설. 안으로는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견제와 밖으로는 열강의 침략에 맞서 치열한 삶을 삶았던 명성황후. 긴박한 정치상황 속에서 결국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된 불우한 조선의 마지막 황후.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여기까지다. 여기에 작가는 명성황후의 호위무사, 이무명을 새롭게 등장시킨다. 작가의 말에 설명되어 있듯이 “황후의 삶은 고단하고 치열했다. 그녀의 옆에 조그만 위로라도 될 만한 무엇을 배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바로 평생을 바쳐 그녀를 사랑한 한 남자다”.
이야기는 흑귀로 불리는 무명이란 사내가 중전 간택을 40여일 앞둔 최종후보에 선발된 소녀 민자영을 감고당에서 우연히 마주치면서 시작한다. 첫눈에 둘은 서로를 마음속에 품는다. 민자영이 왕비가 되어 궁으로 들어간 지 만 2년 뒤, 무명은 오늘날의 청와대 경호실 같은 곳인 용호영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둘의 사랑은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그날까지 아무도 모르게
[도서] 조선의 마지막 황후와 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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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평평한 땅만이 펼쳐져 있다. (중략) 이 평원 위에 목욕탕 굴뚝이나 튼실한 창고 몇 개, 그리고 두꺼운 철제 문으로 보호된 단단한 건물 몇 개가 엄지손가락처럼 솟아나 있다.” 종전 직후 도쿄의 주재기자였던 러셀 브라인스의 글은 당시 일본의 겉모습만 묘사한 것은 아니었다. ‘교다쓰’(허탈)라는 단어가 <전후 신조어 해설>이라는 소사전에 특별히 등재될 정도로 일본인의 내면 역시 극도로 황폐해졌다. 전후 일본사 전문가인 존 다우어가 쓴 <패배를 껴안고>는 패전 직후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통해 일본이 어떻게 패전 직후를 헤쳐왔는지 보여준다. 이 논픽션으로 다우어는 1999년에 전미도서상을, 2000년에 퓰리처상을 받았다.
책을 펴들기만 해도 손목이 시큰할 정도의 판형과 두께(주석 포함 860여쪽)가 위압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긴 하지만 다우어는 압도적인 자료를 동원해 유려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구체적이다. “견디기
[도서] 일본식으로 패전 극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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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이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이하 <그리고 좀비>)의 첫 문장은 어떤지 한번 보자. “한번 뇌를 먹어본 좀비가 더 많은 뇌를 원하게 된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책 제목과 도발적인 첫 문장에서 알 수 있듯, <그리고 좀비>는 오스틴 특유의 클래식한 연애소설에 좀비와 닌자 등의 하위문화를 토핑한 코믹소설이다. 역병이 창궐해 좀비들이 들끓는 19세기 영국, 홍차와 수다를 즐기고 사랑의 완성을 꿈꾸던 베넷가의 숙녀들은 어깨엔 머스킷총을, 가슴엔 좀비를 위한 단도를 품은 여전사로 다시 태어난다. 전세계 여성들의 영원한 우상 미스터 다아시는 위대한 좀비 헌터로 등장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건 그저 제인 오스틴과 등장인물의 이름을 빌린 완전히 다른 종류의 좀비 소설일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여름에 읽는 장르문학] 다아시가 좀비 헌터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