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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말해서는 안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쓴 조정래의 <황홀한 글감옥>은 그의 문학론, 작품론, 인생론 그 자체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에게 받은 500여 질문 중 간추린 84개의 질문에 대한 작가 자신의 성실한 답변을 담은 이 책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작가로 살아온 그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그의 모든 것이 궁금하다면 당장 그의 소설을 읽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쓸 수 있습니까. 예술을 하는 데 재능과 노력은 어느 정도 비율이어야 합니까. 대하소설 3부작을 통해 공통적으로 전달하고픈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황홀한 글감옥>은 그에게 묻고 싶은 거의 모든 질문이 총망라된 책이다.
[도서] 조정래에게 묻고 싶은 84가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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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발매된 도나웨일의 1집은 꽤 깔끔한 사운드와 정서로 주목받은 앨범이다. 그리고 두 번째 앨범이다. 1집에서 로하게 들렸던 감성이 세련되게 다듬어진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밴드와 팬들 모두 납득할 만한 수준의 변화일 것이다. 특히 마시멜로처럼 말랑하면서도 탄력있는 멜로디의 <도레미>와 스산한 가을바람에 떨리는 가슴을 대변하는 것 같은 <스노우 드립>의 아득함, <Bye Bye Waltz>의 아기자기함과 불현듯 삽입된 파도소리가 인상 깊을 것이다. 물론 도나웨일이 한국 인디의 바로미터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들로부터 한국 인디, 혹은 한국 록의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렇지만 이 앨범은 듣기 좋다. 믹싱이 어떻네, 사운드가 어떻네, 음질이 어떻네 같은 딴생각을 안 하게 된다. 멜로디에 집중하게 되고 노랫말을 살피게 된다. 감상적인 밴드 음악으로서 이보다 더 좋은 성취는 드물 것이다. 곧 겨울이
[음반] 위로가 되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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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18곡의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총 79주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한 기록만으로도 머라이어 캐리의 ‘포스’는 압도적이다. 이번에는 6년 만에 한국에도 온다. 앨범 프로모션을 위해 제일 먼저 선택한 곳이 한국이라는 건 그만큼 한국에서 머라이어 캐리의 인기가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Memoirs Of An Imperfect Angel≫이란 제목대로, 새 앨범은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완벽하지 않은 천사’란 수식이 허세처럼 보일 수도 있겠고, 나이와 무관하게 줄기차게 헐벗고 있는 커버가 불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머라이어 캐리다. <Hero>의 그녀란 말이다. 빌보드 차트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판매한 솔로이자, 빌보드 50년의 역사에서 두 번째로 많은 앨범이 팔린(1등은 물론 비틀스다) 가수다. 첫 싱글 <Obsessed>와 두 번째로 싱글 커트된 그룹 포리너의 1985년 빌보드 팝 싱글 차트
[음반] 빌보드 여왕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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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은 은밀하고, 아주 거의 외설적이다.” ‘쉬었다’ 가는 커플에게 그 은밀하고 외설적인 모텔의 특성은 당연하고도 반가운 것이겠지만 맨송맨송하게 ‘자고’ 가야 하는 일행 없는 여행자나 출장을 간 사람이라면 모텔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 은밀함과 외설에 다소간 치이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물며, 눈먼 개와 함께 여행하는 남자는 어떻겠는가.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의 주인공 지훈은 그런 생활을 3년이나 해왔다. ‘아라비안’, ‘달과 6펜스’, ‘바나나’처럼 제멋대로의 이름을 가졌지만 그 속살은 대동소이한 고만고만한 모텔을, 늙고 눈먼 개와 함께 전전해왔다. 세면대 아래,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2009년 8월3일, 나와 와조가 다녀감”이라고 네임펜으로 적어놓는 작은 비밀을 만들면서.
아, 소개가 늦었다. 와조는 지훈이 데리고 다니는 늙고 눈먼 개의 이름이다. 와조는 그의 할아버지가 데리고 다니던 맹인안내견이었다. “녀석에게 이리 와조, 도와조란 말을 주로 하다보니”
[한국 소설 품는 밤] 눈먼 개와 나의 모텔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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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에는 모두가 그림을 그리고 부르고 무언가를 만든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였고 배우였고 도예가였고 무용수였다.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로부터 20년 후, 나는 넥타이를 맸다. 이제 전화 통화할 때나 그림을 끼적대는 사람이 되었고 미술관이나 박물관, 놀이터엔 더 이상 갈 일이 없어졌다. 대신 TV로 골프중계를 봤다. 나는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었다.” <창작 면허 프로젝트>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어른이 되고 밥벌이를 하느라 “잊고 있던(혹은 잃어버렸던)” 창작열에 불을 지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드로잉 기법을 이야기하는 책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장르를 가리지 않은 다양한 창작활동에 도움이 되는 말로 가득하다. 머리로 아는 것을 버리고 다시 보는 법을 익히라는 말은 삶의 태도에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잠언이다.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펜과 종이만으로 드로잉을 하고 싶을 때, 어떤 펜과 어떤 종이면 되는지, 왜 내가 그리는 그림은 발전이 없
[도서] 어른들이여, 예술가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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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란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직업이 있다면, 그건 바로 기자다. 늘 새로운 흐름을 좇는 기자와 많은 새로움의 원형이 되는 고전물은 정확히 대척점에 서 있다. <클래식 중독>의 저자 조선희는 <씨네21>과 한국영상자료원이라는 깊고 깊은 루비콘강을 건넜다. 영화 주간지의 업보인 새 영화 중독에서 벗어나 한국 클래식영화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료원 생활을 시작하니, 옛 영화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 책은 옛것이 새것보다 짜릿하게 다가오는 순간을 경험한 전직 기자의 새 업보 이야기다.
이장호, 김기영, 유현목, 이만희, 신상옥….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의 ‘짜릿한 고전 리스트’에는 내로라하는 한국의 거장 감독들이 이름을 올렸다. 그들의 대표작에 치중하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며, 감독들의 인간적인 면까지 조명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가장 많은 페이지(38p)를 할애하며 애정을 표현한 장선우 감독을 예로 들어보면, 저자는 <경마장 가는 길>이
[도서] 장선우의 <꽃잎>이 걸작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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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들어본 제목이라고? 맞다. 이 책은 히치콕이 연출한 1935년작 동명 영화의 원작 소설이다. 1915년에 쓰여진 첩보물의 고전인 <39계단>은 히치콕의 작품 말고도 두번 더 영화화되었고, <BBC>에서 TV드라마로도 만들어졌으며, 연극으로 각색되어 한국에서도 무대에 올려졌고, 2011년 개봉예정으로 네 번째 영화화가 진행 중이다.
아프리카 생활을 마치고 영국에 돌아온 리처드 해니는 3개월 만에 고국 생활에 질려버린다. 어느 날 아파트로 돌아오던 길에, 그는 낯선 남자와 마주친다.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라고 입을 뗀 남자는, 자신은 국제적 음모를 막아야 하며, 추격자가 있어 몸을 피할 곳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한다. 남자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믿은 해니는 그를 집에 들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해니의 집에서 몸에 칼을 맞고 숨진 채 발견된다. 해니는 죽은 남자가 나라를 위해 하고자 했던 일을 대신 하고자 마음먹고, 죽은 이의 비밀 수첩을 가
[도서] 쫓기는 자의 심장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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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3부작’(<모두 다 예쁜 말들> <국경을 넘어> <평원의 도시들>)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로드>로 유명한 매카시의 대표작이다. 사막을 무대로 한 묵시록적 서부 소설 연작이다. 서부물이라고 해서 악과 싸워 이기는 선이 존재한다거나, 스릴 넘치는 총격전이 주를 이룬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코맥 매카시의 ‘국경 3부작’을 처음 읽었던 때, 일주일가량 앓은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막과 소년들과 언제나 ‘저편’만이 존재하는 국경이 등장하는 악몽에 가까운 꿈이 밤마다 찾아왔다.
‘국경 3부작’은 앞 두권의 이야기가 마지막 <평원의 도시들>에서 대단원을 맞는 구성이다. 그러니 세권을 차례로 읽는 게 가장 좋겠지만 세권을 벼르다 한권도 읽지 않을 가능성을 대비해 한권을 추천한다면 두 번째 책인 <국경을 넘어>가 좋을 것 같다. 소년은 부모와 살던 농장에 출몰하던 늑대에 매혹된다. 소년은 어
[도서] 서부에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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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2년 4월5일 토요일 밤 9시가 조금 지나서 OOOOO를 죽였다. 그날은 햇살이 화사하고 상쾌한 봄날로, 이제 여름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만큼 따뜻했고, 밤에도 적당히 쌀쌀했다.” 짐 톰슨이 1952년에 발표한 하드보일드 범죄소설 <내 안의 살인마>를 보면 이런 아이로니컬한 문장 배치가 종종 나온다. 살인을 고백한 뒤, 바로 날씨에 대한 서정적인 설명이 따라붙을 수 있다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본래 인간의 마음이 가장 무섭고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살인에의 충동을 ‘병’이라 지칭하는 주인공 ‘루 포드’는, 차근차근 자신의 살인 과정을 1인칭 시점으로 들려준다. 때론 가전제품 매뉴얼을 읽어주듯 담백하게, 때론 결말을 채근하는 독자들을 다독이면서.
이 소설은 알게 모르게 TV시리즈 <덱스터>나 영화 <아메리칸 싸이코>에 영향을 줬을 거라 생각될 정도로, 1인칭 범죄소설의 매력을 십분 발휘한다. 루 포
[여름에 읽는 장르소설] 나의 살인 과정을 한번 들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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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순간은 완전히 상실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사람들은 그 점을 알면서도 잃어버린 삶의 지점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추억한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관통하는 주제다. 이 책은 국적과 시공간이 제각각인 아홉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지만, 상황과 인물을 거대한 상실감이 압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의 외국 여성은 세상을 떠난 연인의 나라 한국에서 상실감을 극복하려 하고, 물고문을 하다가 한 대학생을 죽게 만든 <내겐 휴가가 필요해>의 전직 대공과 형사는 그 학생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날것의 고통을 갈망했던 <기억할 만한 지나침>의 고3 여학생은 자신이 안락함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지금 막 무엇을 잃어버리려는 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상실보다 중요한 건 상실 그 이후의 삶이다. ‘지금, 여기’에 남은 사람들은 가슴에 묻거나 책임을 지거나, 혹
[도서]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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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건축물을 돌아볼 때면 가장 인상적인 공간 중 하나가 계단이다. 계단을 통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뒤로 공간이 펼쳐지는데, 가파른 계단을 헐떡이며 오르며 새로운 공간과 만날 때는 건물의 육체성을 몸으로 실감하게 되곤 한다. 종교적인 건축물의 경우 높지 않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계단에 집중해 발을 옮기다 보면 계단이 사색과 깨달음의 도구구나 싶어진다.
<계단, 문명을 오르다>는 생활에 밀접하지만 막연하게만 인지되었던, 혹은 불편함으로만 존재를 인정받았던 계단의 인문사회학적 의미를 캔다. 의도와 관계없이 생겨난 ‘변형된 대지 계단’(등산로를 생각하면 된다)이 가장 기초적인 형태였고, 고대 종교에서 계단은 하늘로 오르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쭉 뻗은 곧은 계단이 하늘을 향해 긴 거리를 수직으로 거침없이 뻗어 올라가는 장면은 그 자체가 종교적 아이콘이었다. 이런 장면은 곧 정치적 권위와도 직결되어서, 고대 문명에서 정치 지도자에게 곧은 계단을 갖는 수직 구조물은 필수 조
[도서] 계단에 무슨 비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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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에 관한 책은 많다. 해외에서 발간된 책은 셀 수 없을 정도이고 국내 번역본만 해도 10종이 넘는다. <The Complete Beatles Chronicle>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이 책이 포괄하는 방대한 자료 때문이다. ‘완전한 비틀스 연대기’라는 제목이 어울리게 이 책은 1957년 비틀스의 전신(前身)인 쿼리 멘 결성부터 공식적으로 해체한 1970년까지의 일을 시기별로 상세하게 정리한다. 그 상세함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비틀스의 스튜디오 녹음 일정과 내용뿐 아니라 작은 클럽부터 대형 경기장에서 열린 모든 공연까지 꼼꼼하게 담고 있다는 말이다. 이 모든 기록이 날짜별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저자가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커다란 판형과 전면에 사용된 컬러용지는 그 노고를 담아낼 유일한 형식이었으리라.
사실, 이 책은 비틀스의 초심자용이 아니다. <The Complete Beatles Chronicle>은 비틀스의 결성에서부터
[도서] 비틀마니아의 필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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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고지의 공포소설 <링>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10년 전, 책대여점집 딸인 친구가 하루는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링> 책이 반납이 안되어 전화를 걸었다. 빌려간 사람은 초등학생이었는데, “책에서 귀신이 나올 것 같아서 깊숙한 곳에 숨겨놨다”고 한다. 책을 다시 만지기 싫대서 결국 그 어머니가 반납했다던가.
윌리엄 요르츠버그의 <폴링 엔젤>을 보며 그 얘기가 생각났다. 정신이 나갔다고밖에 할 수 없는 최후의 반전은 그렇다치고 책을 지배하는, 나쁜 기운이 들러붙는 듯한 찐득한 기운은 아무리 이성적인 독자라 해도 쉽게 떨쳐내기가 힘들다. 한마디로, 쉽게 만나기 힘든 걸작 오컬트 소설이라는 말. 이 책의 영화판인 미키 루크 주연의 <엔젤 하트>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특유의 소름끼치는 느낌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1959년 3월, 13일의 금요일. 사립탐정 해리 엔젤은 뉴욕 5번가 666번지의 한 사무실에서 이상한 의뢰를 받는다.
[여름에 읽는 장르소설] 오컬트 하드보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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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는 갓을 벗고 서양에서 들어온 문제의 천조각을 머리에 동여맸다. 써보니 관모보다 더 위엄이 느껴졌다. 발견을 스스로 기특해하며 관리는 천조각에 이름을 하사하였다. 아니 불. 높을 아. 놈 자. 이름하여 ‘불아자’.
사실 그건 브래지어였다. 2세기 전만 해도 서양인을 도깨비 취급하던 조선이었으니, 브래지어를 서양식 갓으로 착각하고 ‘뽕’의 개수를 지위의 높낮이로 해석한다 한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신문물검역소>는 이처럼 서역만리 신문물을 처음 접하는 조선 관리의 좌충우돌 검역기를 다룬 소설이다. 과거시험을 망쳐 제주로 발령난 선비 함복배는 ‘신문물검역소’에서 신(新)문물의 쓰임새를 밝히는 임무를 맡는다. 여기에 난파한 배에서 살아남은 네덜란드인 벨테부레(조선 이름 박연)가 합류해 큰 도움을 준다. 치설(칫솔)을 치질 치료제로, 곤도미(콘돔)를 골무로 착각하는 민망하고도 우스운 나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결혼을 앞둔 제주 처녀들이 처참하게 살해되는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
[도서] 나는 불아자를, 너는 곤도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