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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실리는 <씨네21> 714호에는 별책부록 <이 책에 마음을 놓다>가 따라붙는다. 간단히 설명하면 출판사 편집자들이 추천하는 신간 모듬인 셈인데, 별책을 만드는 동안 편집기자들이 먼저 낚여서 주말 동안 광화문에 나가 책을 샀다. 그중 특히 인기있었던 책이 바로 이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였다. 사진 촬영을 위해 책을 받았는데, 사진팀에서 사진을 찍고 디자인팀에서 책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책을 내가 가져다본 뒤 디자인팀에 반납, 그 책을 이번엔 주말에 출근했던 교열팀 K선배가 보려고 책상에 가져다뒀는데 월요일에 나와보니 책이 사라졌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회사에서 자주 생기는 일인데, 책 행방을 수소문하다 보니 이거야 원. 다들 “나도 보려고 했는데…”라며 아쉬워하는 것 아닌가.
잡담이 길었는데, 이렇게 뜨거운 관심을 받은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는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고스케
[여름에 읽는 장르소설] 음산하고 괴이쩍은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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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대한늬우스>를 보고 분노했던 이유는 그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황당해서기도 하지만 너무 재미없어서기도 했다. 웃기는 사람들을 썰렁하게 만드는 기똥찬 발상! 그들과 정반대 지점에서 경제 공부를 유행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KBS 인터넷에서 경제 상식을 알리는 <최진기의 생존경제>의 강사 최진기, <십자군 이야기>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등으로 (주로 중세) 유럽 역사를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꾸어놓은 김태권이 바로 그들이다.
김태권의 <어린왕자의 귀환>은 부제 ‘신 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이 알려주듯 현대 경제학의 논쟁적인 이슈를 한자리에 불러모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시장원리나 경제논리는 오늘날 반대자의 입을 틀어막고 진지한 문제제기를 금한다”는 작가의 문제의식은, 비정규직 문제, 건강보험을 비롯한 공공부문 민영화 문제, 환경과 주거 문제 등 최근 일년 새 먼 정치판의 구호가 아니라 생활과 밀접한 문제가
[도서] 경제 상식 갖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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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이라는 사자성어가 말하듯, 같은 걸 본다고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이마 이치코의 <뷰티풀 월드>는 <찬란한 유산>을 보며 이승기와 배수빈이 주먹질할 때 그 둘 사이에서 뭔가를 느끼며 혼자 얼굴을 붉히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만화다. ‘썩은 여자’(BL에 열광하는 동인녀를 가리키는 신조어)로 살면서 만화를 그리는 이야기가 코믹하게 펼쳐진다. BL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각종 전문용어(?) 안내도 자세한 편이라 ‘그쪽’을 잘 몰라도 읽기 편하다. (그림체로는) 초등학교 3학년 같은 얼굴이지만 사실 중년 여자인 작가 자신이 계속 뭔가에 흥분하는 이야기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리는 걸 보고 있으면 너무 웃겨서 정신이 이상해질 듯. 미국, 일본의 영화·드라마를 많이 보는 사람이라면 특히 즐길 만한 대목이 많다. <올드보이>에 대해 “유감스럽게 20년 이상 가둬두면서도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듯…”이라고 천연덕스럽
[도서] 작가님, 얼굴 그만 붉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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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왜 나를 버렸을까?” 30년 이상 같은 질문을 해온 남자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펜을 들었다. <지미 코리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이하 <지미 코리건>)은 저자 크리스 웨어의 자전적 경험이 모티브가 된 그래픽 노블이다. 주인공 지미 코리건은 평범하다 못해 볼품없는 30대 남자다. 소심한 그의 어깨는 둥글게 굽었으며 풀 죽은 눈빛은 어떤 시선과도 마주하지 못한다. 인간관계라고는 양로원에서 매일 전화를 거는 어머니가 전부다. 그런 그에게 편지 한장이 도착한다. 추수감사절을 함께 보내자는 아버지의 초대다.
<지미 코리건>은 이미지의 사용과 상징이 풍부한, 참신한 시각언어로 완성된 성인용 성장담이다. 일견 팝아트 그림책이란 착각도 들지만, 페이지 한장 한장에 담긴 의미의 무게는 팝아트의 가벼움에 비할 게 아니다. 어두운 주제와 상상 속에서만 ‘가장 똑똑한 아이’가 되는 주인공의 현실도피적 성향은 서사의 흐름을 분절적으로 만든다. 게다가
[도서] 아버지 왜 떠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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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올 히가시노 게이고 책이 있느냐고, 종종 질문을 받는다. 아무리 읽어도 어느새 인터넷 서점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새 책이 나와 있다. 엄밀히 따지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워낙 한국에서도 인기가 좋아 그의 예전 작품까지 모두 소개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긴 하지만. 여튼, 또 나왔다. 그것도 네권이 한꺼번에. <졸업>으로 시작하는 ‘가가 형사 시리즈’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소설가로 데뷔한 이듬해인 1986년 시작한 것으로, 지금까지 일곱권이 소개되었다. 현대문학에서 이번에 펴낸 것은 <졸업>을 시작으로 <잠자는 숲>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내가 그를 죽였다>. 시리즈 중 <악의>와 <붉은 손가락>은 기출간작.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가가 형사는 20여년 동안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함께 성장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젊었고, 그의 주인공도 젊었다. <졸업>을 보면 딱 그렇다. 가가 형사
[여름에 읽는 장르소설] 작가는 젊었고, 주인공도 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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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들 말씀에 따르면 남자의 99%는 자위를 하고 1%는 거짓말을 한다… 고 한다. 그 자위에 필요한 동력으로 가장 사랑받는 건 실제 경험보다는 각종 영상, 그러니까 AV다. 성과 폭력에 대한 글을 주로 쓰는 프리라이터 이노우에 세쓰코의 <15조원의 육체산업>은 일본 성인비디오를 다각도로 들여다본 르포타주다. 표본이 다소 작은 감은 있지만 남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AV에 관한 인식(본다면 얼마나 보는지, 얼굴 사정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지 등)을 살피고, 여성용 성인비디오 시장의 가능성을 탐색하기도 한다.
아동학대와 매춘 등의 문제에 폭넓은 관심을 가졌던 저자는 도시전설처럼 떠도는 “AV 여배우 중 성폭행을 경험한 여성이 많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아쉽게도 직접 취재를 한 글은 없지만 AV 잡지에 실린 관련 내용의 여배우 인터뷰를 인용해 싣고 있다. 시부야 인근에서 스카우터가 일반 여성을 길거리 캐스팅하는 이야기 역시 흥미롭다. 2002
[도서] 그의 사정, 그녀들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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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인도에 간 겁니까?” 수없이 들었을 이 질문에, 작가 후지와라 신야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모든 것에 엉망진창으로 지기 위해서 갔던 게 아닐까.” 짐작했겠지만, <인도방랑>은 인도에 대한 친절한 가이드북이 아니다. 유려한 언어로 인도의 신비로움을 팔아먹으려는 책도 더더욱 아니다. 후지와라는 25살이 되던 해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인도로 떠났고, 이후 천일 동안 인도를 방랑하면서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존재였고, 삶의 진정성이었다.
삼등열차의 무질서한 풍경과 사막의 모래폭풍, 화장터에 모여든 죽은 자와 산 자, 뜨거운 태양과 비쩍 마른 거리의 개들. 빈곤함과 풍요로움, 비루함과 고귀함의 경계를 넘어, <인도방랑>에는 날것 그대로의 인도로 가득하다. 그가 직접 찍은 사진은 빛보다 어두움에 더 가까우며, 글은 수다스럽기보다 겸허한 침묵에 가깝다. <인도방랑>은 많은 젊은이들을 인도로 떠나게 한
[도서] 패배할 각오로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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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읽던 이국의 모험담은 불길한 징조와 견딜 수 없는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추락하는 코스만으로 이루어진 롤러코스터처럼, 남자가 되려는 소년, 아름다운 여인, 치명적인 오해, 이룰 수 없는 운명, 발작적인 쾌락, 거대한 마침표처럼 뚝 떨어지는 죽음이 쉬지 않고 휘몰아쳤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소설도 그렇다.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동시에 지극히 통속적이다. 청소년을 위한 소설을 쓰던 사폰을 스타로 만든 첫 (성인용) 소설 <바람의 그림자>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바르셀로나 뒷골목 냄새가 어디선가 풍기는 기분에 코를 킁킁거리며 책 주문 버튼을 자동적으로 눌렀을지도 모르겠다. 두 책은 ‘잊힌 책들의 묘지’와 바르셀로나, 그리고 그 어떤 TV연속극보다 중독성이 강한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좋아했던 고아 다비드 마르틴은 우연한 기회에 소설을 연재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의 대중소설은 큰 인기를 얻는데, 신문사를
[도서] 우아하고 그로테스크한 꿈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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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역관 김홍륙이 고종이 즐겨 마시던 커피에 독약을 타넣은 독살음모가 있었다. ‘러시아 커피’를 개화기식으로 표기한 <노서아 가비>는 이 일화에서 탄생한 팩션이다. 주인공 ‘따냐’는 역관의 딸로 태어났으나, 조선을 떠나 청나라와 러시아를 떠돌아야 했던 여인이다. 러시아에서 광활한 숲과 바다를 귀족들에게 팔아치우는 대담한 사기극을 벌이던 따냐는, 조선 태생의 또 다른 사기꾼 ‘이반’을 만나 사랑하고, 역관이 된 그와 조선에 돌아오고, 그 뒤 고종의 새벽 커피를 담당하는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가 된다.
<노서아 가비>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건 불필요하다.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변주되었는지보다 따냐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더 크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따냐에게 속아넘어간 사람들이 그랬듯, 독자는 따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 책장을 넘기면 된다. 그만큼 살기 위해 남을 속이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사랑하는 이에게 아흔아홉을 주더라도 마지막 하나는 자
[도서] 고종과 커피와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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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람의 말>은 2009년 6월9일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과 대한문 앞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6·9 작가선언’의 기록이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우리냐 그들이냐를 두고 고민하거나 싸우는 사람들 옆에서 쿨시크를 표방하는 사람들을 보며 느꼈던 갑갑함이 다소나마 해소되는 기분이다. 시국선언에 동참한 작가, 평론가들의 선언문과 참가자 이름만 실린 건 아니다. 각자 자신의 뜻을 문장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참여자들의 이름을 살피고, 좋아하는 작가가 쓴 문장을 읽고, 그냥 처음부터 읽고, 후루룩 넘기다 눈길 가는 문장을 새기며 모르던 작가 이름을 새로 알게 되기도 하고, 마지막부터 거꾸로 읽고…. 마음만 먹으면 10분 만에 다 볼 수도 있지만 생각에 따라서는 일주일도 부족한 책일 수도 있다. 내가 몇번이고 다시 읽었던 문장을 골라 소개한다. 손에 잡히는 종이에 당신의 문장을 끼적여보는 것도 좋겠다.
“촌스러워서 살 수가 없다.”(곽은영)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다
[도서] 침묵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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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할 만하다 지수 ★★★★
시간 없을 때 읽기 시작하면 낭패 지수 ★★★★★
비디오방-만화방-당구장의 트라이앵글 속에서 청춘을 소모하던 10년 전, <바나나 피쉬>라는 게 입소문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추천 이유가 사람마다 조금씩 달랐다. 대작이니까 꼭 보라는 모호한 말부터, 색다른 순정만화라는 친구도 있었고, 야오이물 싫어하는 사람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야오이물이라는 말도 있었고… 한 만화를 두고 하는 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제목에, 줄거리는 복잡하고, 작가는 낯설고, 웬만해서 첫눈에 반하기 쉽지 않은 그림체였는데 입소문은 무섭게 퍼졌다. 읽은 사람 모두가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일단 끝까지 읽은 사람은 <바나나 피쉬>를 숭배했다. 입소문이 났던 즈음엔 이미 만화책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바나나 피쉬>가, 이번에 완전판으로 부활했다. 번외편을 모은 외전집과 공식 가이드북도 함께 출간되었다.
<바나나 피쉬>는
[도서] 전설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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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 앙리 마티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버나드 쇼. 열일곱에 치명적인 미약(媚藥)을 발견한 오스왈드와 그 일행에 사기를 당한 희생자들의 명단 중 일부(!)다. 철저하게 부도덕하고 이윤과 향락만을 추구하는 오스왈드는 이 미약을 이용해 스물이 되기도 전에 백만장자가 되는데, <나의 삼촌 오스왈드>는 오스왈드를 ‘평생 한량’으로 만든, 대담하고 섹시한 사기극의 전모를 폭로한다.
오스왈드가 수단에서 공수한 미약은, 80 먹은 노인도 9분 만에 섹스머신으로 변신시키는 비장의 무기다.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의 야스민이 미약이 들어간 초콜릿을 세기의 천재들에게 먹이면, 그들은 9분 뒤 야스민을 탐하게 된다. 콘돔을 씌워 행위를 마치고 정자를 가져오면 임무는 끝. 천재의 어머니가 되고픈 부유한 여인들은 앞다투어 냉동된 정자를 사간다.
소설은 이 발칙한 활극 중 ‘야스민의 정자 수집과정’을 정성스레 기술한다. 유명인들과 야스민이 벌이는 육탄전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단연
[도서] 웃기고 섹시한 사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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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크가 아니라 지글거리는 소리와 냄새를 팔아라.” 영화마케팅에서 제1의 금언으로 앞의 문장을 내세우며 시작하는 이 책은, 제목처럼 ‘영화마케팅의 A to Z’를 논한다. 저자인 로버트 매리치는 <할리우드 리포터>의 편집장을 역임하고, 영화 및 TV업계의 엔터테인먼트 마케팅과 관련해 20년 이상 글을 써온 저널리스트. 영화와 관객 그 사이에서 마케팅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철저한 취재와 조사를 바탕으로 이 책을 완성했다.
영화마케팅에 대한 모든 것이라니, 조금은 솔깃했을 독자들에게 감히 경고하면 이 책을 심심풀이로 읽어내려가는 교양서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본격적인 영화마케팅 실무를 풀이해준 교본 같은 존재로 봐야 적당하다. 전문용어와 정의, 조사방법론, 용례 순으로 이어지는 구성이 수업시간에 줄그어 읽었던 교과서를 연상시킨다. 할리우드가 기준이 된 까닭에 한국영화 마케팅에까지 100% 적용하기 힘든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 그래
[도서] 영화, 어떻게 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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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맞은 청소년을 위한 선물 지수 ★★★★☆
주변 인물들이 매력적이다 지수 ★★★★☆
닐 게이먼의 이름만 보고 책장을 펴고 읽기 시작하다가, 그림이 많다는 데 당황했고 그리움을 자극하는 착한 말투에 또 한번 당황했다. 표지를 다시 보니 ‘2009 뉴베리상 수상작’. 뉴베리상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잘 알려진 아동문학상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 의해 공동묘지에서 키워진 한 소년의 모험과 성장을 그린 판타지 소설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좋아했던 청소년 독자와 성인 독자의 관심을 끌 법한 책이다.
어느 날 밤, 잭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일가족 살해에 나선다. 두 부부와 여자아이를 해치운 뒤 그는 마지막 남은 사내아기를 찾아 집을 뒤진다. 갓난아이는 젖비린내와 초코 과자, 축축하게 젖은 일회용 기저귀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를 남기고 사라진다. 걸음마를 갓 배운 아기는 공동묘지의 주민들, 그러니까 유령들의 눈에 띄고, 그들은 잭을 따돌리고 긴 토론 끝에 아기를 키우기
[도서] 공동묘지의 노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