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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따라 세월은 다르게 각인된다. ‘어른’들에게 세월은, ‘아이’의 나이 듦으로 인식된다. 2000년 입사 당시 <씨네21> 기자직 신입사원 중 역대 최연소였던 24살 고졸 여사원 이다혜를 처음부터 봐왔던 선배들은 아주 오랫동안 “넌 아직도 서른살이 안됐냐?”며 웃었고 그 뒤로는 “어느새 너도 내일모레 마흔이란 말이냐”라며 한탄한다. 내게 세월은 이렇게 각인된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고 만난 하늘 같은 선배들, 거의 모든 영화를 알았고, 글을 잘 썼고, 모르는 사람이 없던 그 선배들과 내가 처음 만났던 때, 그들은 젊었으며 지금 내 나이 또래에 불과했구나 하고. <한겨레>와 <씨네21> 기자였던 임범의 <내가 만난 술꾼>을 읽으면서 그들과 처음 만났던 때 다들 참 젊었구나 깨달았다. 이 책은 임범 자신에게 무척 개인적인 추억의 모음이고, 서문에 쓴 것처럼 ‘살아 있는 지인들의 조사를 쓰는 일’이겠지만, 그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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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마북스에서 선보였던 엘러리 퀸의 미스터리 시리즈 전권 수집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전권을 갖추려고 보니 어느새 절판되어 전국 헌책방을 뒤져도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Y의 비극>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같은 책은 다른 출판사에서도 나와 있으니 읽을 수나 있다고 치지만, <중간지대> <악의 기원> 같은 책은 중고책에 2만5천원에서 3만원에 달하는 돈을 지불하지 않고는 만져볼 수도 없다(정가는 5500원이다). 하여튼 그 시리즈가 ‘엘러리 퀸 컬렉션’으로 다시 출간된다. <로마 모자 미스터리>와 <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를 필두로 국명 시리즈 9권이 차례로 먼저 선보인다. 엘러리 퀸(사촌 형제 사이인 만프레드 리와 프레더릭 다네이의 필명)은 미스터리의 기본에 충실한 작품들을 썼다. 퀸의 초기작에서는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 이야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사건의 풍경을 미리 그려 보이는 ‘주요 등장인물들’, 필요하다면 언
[도서] 미스터리 팬의 심장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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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야기는 이렇다. 할머니 한분이 계신다. 이 할머니는 이제 100살 생일을 넘기셨다. 평생 편하게 살아본 적 없는, 그저 부지런히 살았던 할머니는 90살이 되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써놓은 시는 백수(白壽) 기념으로, 자비출판했다. 그런데 그 책이 입소문을 타더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시집의 제목은 <약해지지 마>다. <100세-살아가는 힘>은 할머니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일본의 서점에 갈 때마다, 한국 대형 서점의 일서 코너에 갈 때마다, 시바타 도요 할머니의 책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었다. 일본에서 유난할 정도로 시바타 도요의 책이 잘나간다는 건 알았지만, 노인 인구의 급증과 최근 일본사회가 직면한 여러 어려움이 그 원인이 아닐까 생각했을 뿐, 책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이런 시다. 제목은 <당신에게-보이스피싱 사기사건 피해자분에게>. “가족을 위해/ 모아두었던 돈인데/ 못된 꾀에 속아 넘어간/ 그 억울함/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당신, 살아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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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에서 사람들이 고생담을 하나둘 털어놓다 보면 누가누가 가장 큰 상처를 받았나 배틀이 벌어진다는 얘기가 있다. 작가가 8년 동안 틈틈이 썼다는 이 일곱 단편에는, 그런 상처 배틀이 열리면 웬만해선 지지 않을 인물들이 나온다. 빚 갚으려고 택시 운전사로 일하다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친척 언니, 어렵사리 가족들 주려고 적금을 모으다 갑자기 죽어버린 외삼촌. 도대체 왜 이들은 이토록 불운한가. 왜 세상은 이들이 불운하건 말건 잘도 돌아가는가.
애초에 명쾌하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거니와, 이 책은 해답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대신 불운한 사람들을 위로한다. 이들의 사연을 시시콜콜 소개하고 이들이 얼마나 착하고 성실했나 알리는 것이다. 왼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증상 탓에 자꾸 남편을 때리게 되어 결국 소박맞은 여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번도 울지 않는다는 ‘찍새’라는 별명을 지녔다. 또 암 선고를 받고 말없이 사라진 여자는, 그전까지 매일매일 가정부에게 손수 편지
[도서] 복고풍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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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에 대항해 똘똘 뭉쳐 거세게 저항하는 염소 떼가 있었다. 상황을 전해 들은 늙고 경험 많은 잿빛 늑대는 흰 염소와 검은 염소 중 수가 적은 흰 염소만을 쫓으라고 한다. 늑대들은 수가 적은 흰 염소만 잡으려고 평소보다 더 힘을 써야 했다. 하지만 몇번 더 같은 패턴이 반복되자, 검은 염소들이 방어선에서 빠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늑대에 잡아먹히는 흰 염소의 수가 늘었다. 흰 염소들은 검은 염소들에게 따졌다. 왜 같이 싸워주지 않는가. 검은 염소들은 되레, 자신들이 쫓기지 않는데도 싸워준 것에 고마워해야 한다고 맞선다. 흰 염소들이 고마움을 모른다고, 너희들만 공격받으니 스스로 싸워 살아남으라고. 바로 옆에 검은 염소가 있어도 흰 염소만 쫓기는 상황. 결국 흰 염소는 모두 잡아먹혔다. 늑대들은 다시 늙은 잿빛 늑대에게 어찌할까를 물었다. “이제 아무 염소나 내키는 대로 잡아도 된다네. 이제 검은 염소들은 한 마리가 잡아먹히면 그놈이 왜 잡아먹혔는지 알아내느라 대항할 생각을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징한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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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신작도 한강의 문장은 여전하다. 손쉬운 찬사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필사적으로 쓴 문장들. 내용은 단순하다. 양육권을 잃고 실어증에 걸린 여주인공이 말을 다시 하고자 언어의 본질을 건드리는 고어인 희랍어를 배우면서, 시력을 잃어가는 강사와 친해진다. 한강의 소설평에 늘 언급되듯 이야기 자체가 그렇게 중요하진 않다. 그녀의 묘사를 따라, “어둑한 은숫가락” 같은 달, “희끗한 혼령 같은” 민들레 홀씨 등 지나치기 쉬운 자연을 되새기고, 희랍어를 “우렁우렁 따라 읽는” 변두리 교실을 엿보고, “검고 단단한 숲” 같은 밤을 거닐다 “오래되고 희미한 적의 같은” 침묵이 밴 막차를 타자. 읽다보면 어둑어둑한 도시의 거리를, 소리를 제거하고 촬영한 동영상을 감상하는 기분이 든다. 문장의 달인이 도시를 활보하다 이미지를 채집해 매끄럽게 편집한 조각물이라고 할까. 실제로 보면 무감각하겠지만, 문장을 통해 무척 아름다워진 풍경.
캐릭터들도 한강식의 익숙한 모습 그대로다. 마
[도서] 문장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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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보러 가는 길에 하는 준비는 음악 장르마다 다르다. 스탠딩으로 관람하는 록이나 일렉트로니카 계열이라면 쿠션이 좋은 신발과 데킬라를, 가요나 팝, 포크록이라면 그날 부를 가능성이 있는 거의 모든 곡의 가사를 챙긴다. 클래식의 경우, 언젠가부터 나는 그날 들을 곡을 절대 미리 듣지 않아 버릇하는데, 그 곡의 최고로 꼽히는 녹음을 듣고 가면 실황에서 되레 실망하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거니와 듣던 연주의 해석을 상기하느라 실황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경험을 한 뒤로 그런다. 그래서 음악회 가는 길에는 음악을 끊고 음악에 대한 글을 읽는다. 11월15일에 있었던 베를린필하모닉의 말러 <교향곡 9번> 연주를 들으러 가는 길에 읽은 책은 서경식의 <나의 서양음악 순례>다. 말러의 무덤을 찾았던 일과 말러의 교향곡들을 실황으로 들었던 일에 대한 회고는 딱 알맞은 독서였다. 하지만 나를 사로잡은 대목은 한국에서의 관객 목격담이었다. “유감스러웠던 것은 연주가 끝난 순간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침묵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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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사운드>는 ‘사운드’보다 ‘청춘’에 방점을 찍어야 할 책이다. 그 청춘은 저자인 차우진 자신의 청춘이지만 20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사운드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것이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앵콜 요청 금지>에서 시작해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와 미선이의 <Drifting>을 경유해 샤이니의 <JoJo>, 달빛요정만루홈런의 <Infield Fly>를 거쳐 당연하게도 검정치마의 <Don’t You Worry Baby(I’m Only Swimming)>를 이야기한 뒤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Abracadabra>로, 백현진의 <반성의 시간>으로, 10cm의 <오늘밤은 어둠이 무서워요>로, 그리고 흐른의 <흐른>으로 흘러간다. 지금, 여기를 살며 청춘의 마음으로 음악을 듣는 모든 이에게 복된 리스트다. 연애와 죽음이 샴쌍둥이처럼 등을 맞대고 함께 움직였던
[도서] 잘 지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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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기보 읽기를 굳이 배운 적이 있었다. 이창호 9단의 기보에 대한 해석을 읽다가 ‘검고 뭉툭한 선(線)’이라는 표현을 만났는데, 바둑의 기보가 미적으로 읽힐 수 있음에 충격을 받아서였다. 지금은 안다. 뛰어난 선수나 감독의 야구를 보면, 축구를 보면, 장인이 담근 술 한잔을 마시면, 한평생 가족을 먹인 할머니의 밥 한 그릇을 먹어보면… 그 안에 다 우주가 깃들어 있다. 그 안에 시가 있고 음악이 있다.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에서는 체스의 기보 안에 숨은 우주를 발견한 한 소년이 주인공이다.
소년은 태어나면서부터 입술이 붙어 있었다. 탯줄을 자르자마자 수술대 위에 누워야 했던 그는, 절개한 입술 피부에 다리 살을 이식해 붙여야 했는데, 성장하면서 입술의 그 부분에 솜털이 난다. 그는 상상 속의 친구 둘을 사귀는데, 하나는 코끼리 인디라로, 새끼 코끼리던 때 백화점 지붕에서 전시되었으나 몸집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다른 하나는 좁은 틈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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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9일 일본 원전과 관련해 눈에 띄는 뉴스가 2건 있었다. 첫째, TV프로그램에서 후쿠시마산 야채를 시식하던 일본의 한 캐스터가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둘째, 후쿠시마현 후타바군 가와우치의회 니시야마 지카코 의원은 지난 11월6일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글에서 지난 3월 동일본 지진 이후 후쿠시마 원전에서 작업했던 인부 중 4300명 정도가 사망했으며 유족들에게 입막음용으로 각각 3억엔씩이 지급됐다는 주장을 적어 논란이 되었다. 지난 9월19일에는 도쿄 도심에 5만명이 모이는 대규모 원전 반대 시위가 있었다. 문제는 현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일본 정부나 언론의 발표를 무조건 믿기 힘들다는 불신이 퍼져나갔다는 점이다. <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진실>은 원자력 폐지를 주장한다. 저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과학의 탄생> <16세기 문화혁명>으로 잘 알려졌는데, 일본의 최초이자 최후의 학생운동 시
[도서] 나는 왜 핵발전에 반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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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반칙인데.
기리노 나쓰오의 책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난감한 표정을 짓게 된다. 한국에서는 <아웃>으로 유명하고 <아임 소리 마마>로 잘 팔린 작가 기리노 나쓰오의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읽으면 매번 그렇게 되어버린다. 시리즈의 순서와 무관하게 <다크>가 가장 먼저 나왔고 가장 최근에는 프리퀄인 <로즈 가든>이 출간되었는데, 순서를 맞춰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장 마음이 가는 제목의 책을 먼저 읽어보라, 아마 (뻥 좀 보태)약쟁이가 주사기를 찾듯 시리즈의 다른 책으로 손을 뻗게 될 것이다. 나부터가 그랬고.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프리퀄인 <로즈 가든>의 표제작은 미로의 소녀 시절을 그린다. 미로와 후일 자살한 전남편 히로오가 처음 만나 섹스하고 결혼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히로오의 관점에서 회상을 통해 되살아난다. 교복, 약간 지저분한 양말, 유일한 동거인인 의붓아버지를 가진 여고생 미로는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에스. 이. 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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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행복을 느꼈다면, 혹은 언젠가 올레길을 걸어보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할 책이 나왔다. 올레길 중 가장 풍광 좋은 코스로 꼽히는 올레 7코스 한복판에 해군기지가 들어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레길의 안부를 걱정하는 일보다 다급한 것은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내쫓기는 현재의 상황이다.
‘오마이뉴스’의 이주빈 기자가 쓴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는 강정마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15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길 위의 신부’라고 불리는 문정현 신부가 가장 먼저 소개된다. “길이 자꾸만 그를 부르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스스로 길이 되고 있는 것인가.” 공권력에 떠밀려 길로 나앉아 싸워야 하는 사람들 편에, 그는 여전히 서 있다. 문정현 신부는 강정마을에서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는 젊은 감독들에게, 나중에 그럴싸한 작품 만들 궁리를 하지 말고 그때그때 소식을 전해달라고, 그래야 지킬 수 있다고 간곡하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도서] 제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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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나 열흘을 목표로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어쨌든, 잇태리>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이 책과 궁합이 맞는 독자일지 가늠해보고 싶다면, 이 책 291쪽에 실린 ‘진짜 이태리를 만나는 박찬일의 버킷 리스트’를 읽어보면 된다. 난이도가 낮은 것은 ‘로마 스페인 광장에서 젤라토 먹기’와 ‘새벽 7시, 피렌체 중앙시장에서 현지인들 틈에 껴 카푸치노 사먹기’. 난이도가 높은 것은 ‘제노바에서 바질 페스토 스파게티 먹기’, ‘안개 낀 11월에 피에몬테 알바의 구릉 드라이브하기’, ‘A1 고속도로에서 페라리 타고 200km 밟기’. 한편 완전히 틀린 정보도 실려 있다. ‘시스티나 성당에 누워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보기’. <최후의 심판>은 누워서는 볼 수 없다.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을 구분 못하는 이유가 있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면서 로마와 밀라노, 피렌체를 중
[도서] 하드코어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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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년간 이십대의 자기소개서라는 걸 읽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인생 다 살아봤고, 다 경험해서 알겠는데… 라면서 적은 ‘내 인생’은 학교와 부모 돈으로 한 여행과 스펙 쌓기를 위한 인턴십이 전부다. 똑같아서 슬픈 자기소개서들.
제발 더 생각하고 경험하세요. 그외에 뭐가 더 필요한가. 자기소개서에서 중요한 건 매끈한 문장이 아니라 그 안의 ‘나’다.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과 <내가 걸은 만큼만 내 인생이다>가 하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은 그 유명한, 안철수와 박경철의 ‘청춘 콘서트’ 안팎에서 만난 10대, 20대와 그들의 학부모와의 대화를 기반으로 쓰인 책이다. 혁명이라는 단어 그대로의 책이다. 지금처럼 살지 마라. 인생을 바꿔라, 그건 너만이 할 수 있다. 그런 책이다. 박경철의 강연이나 글을 이전에 읽고 감동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행복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이유’에서, 원칙을 세웠다 무너뜨리기를 반복하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읽으니까 청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