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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나일강>에는 작가 플로베르가 엄마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돼 있다. 이 위대한 <보바리 부인>의 작가는 무려 미라의 밀수에 대해서 고민을 털어놓는다. “프랑스로 미라를 가져가는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그게 어려울 것 같아요. 이제 미라를 외국으로 가져가는 것이 금지되었거든요, 카이로까지 밀수품으로 빼내서 알렉산드리아에서 선적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요.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이 드는 일이 될 테니까요.” 플로베르의 제국주의적 마음에 분노하기 전에 이게 1850년에 쓴 편지라는 걸 기억하자. <뒤마의 볼가강> <모파상의 시칠리아> <폴 아당의 리우데자네이로> <라울 파방의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 등으로 구성된 ‘작가가 사랑한 도시’는 지금은 잊혀진 시대에 이국으로의 모험을 감행한 작가들의 여행기를 모아놓은 시리즈다.
가장 재미있는 책을 하나만 고르라면 <라울 파방의 1896년 제1회
[도서] 그 도시를 사랑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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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담컨대 나는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을 두번 이상 읽었다. 내 담당 원고가 아니었음에도. 그래서 <씨네21>에 연재되었던 ‘나의 친구 그의 영화’가 단행본으로 엮여 나왔을 때, 가장 먼저 새로 추가된 글이 있는지를 살펴보았고, 그게 ‘서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새침하게 “흥! 칫! 핏!” 하고는, 몇 꼭지만 산책하듯 천천히 훑어볼 생각이었다. 책을 펴기 전까지는 그랬다.
김연수와 김중혁(참고로 이름은 가나다순이다)은 오래된 친구이자 소설가들이다. 얼굴로나 글발로나 유명세로나 우위를 가를 수 없는 두 사람인데, 서로를 너무 잘 알다보니 이 책에 실린 글의 태반은 상대의 과거를 폭로하거나 자폭하는 식의 유머로 점철되어 있다. 김연수가 <씨네21> 신입사원 공채에 지원했다 떨어진 사연을 말하면 그에 질세라 바로 다음 회에 김중혁이 <키노> 입사시험을 보고 떨어진 이야기(정확히는 아무도 뽑지 않은 이야기)로 응수한다. 원고 매수를 쉽게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말랑말랑 깔깔낄낄 대꾸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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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불행은 혼자 조용히 방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누구는 술을 마시고, 누구는 결혼을 하고, 누구는 인터넷에 악플을 단다. 혼자 있을 때 고독한 건 물론이고, 군중 속에서도 고독하다고들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 제라르 마크롱이 쓴 <고독의 심리학>은 인구는 많아지고, 인터넷만 되면 방 안에서 전세계로 통하는 창을 열 수 있는 세상에 고독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상담서다.
더 완벽하게, 더 빨리 성공할 수 있는 법을 다룬 자기계발서가 한번 쓸고 간 뒤, 요즘은 덜 완벽해도, 더 느려도 자기 스스로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법에 대한 일종의 심리치유서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 책은 가벼운 고독감이 아니라 고독감에 시달려 아무 일도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는데, 고독이 버림받았다는 뜻이라고 생각하고 우울해하는 사람이라면 일독할 만하다(혼자 있기 싫다는 이유로 나쁜 관계에서 더 나쁜 관계로 뛰어들어 버릇하는 사람
[도서] 혼자서도 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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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생활자로 살아가는 이상 키스 해링이라는 이름을 모를 수는 있어도 그의 작품을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팝아트의 슈퍼스타, 미술관 밖에서 숨쉬고 소통할 줄 알았던 수많은 벽화와 프랜차이즈 상품으로 남은 사나이. <키스 해링 저널>은 1990년, 서른한살의 나이에 에이즈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일기를 모은 책이다. 또 다른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일기가 매일 아침 9시 반, 비서(이자 출판편집자)에게 꼼꼼하게 전화로 불러준 전날의 일과(택시비와 식대를 포함)를 바탕으로 한, 반쯤은 공식적인 기록물 성격이라면 이 책은 좀더 내밀한 성장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스무살이 되던 1977년부터 죽기 전 해인 1989년까지의 일기가 실렸다.
“대중에게도 예술을 즐길 권리가 있다. 대중은 대부분의 현대 예술가에게 무시당하고 있다. 최종적인 의미가 결정되는 어떤 작품에 대해 무수히 많은 의견이 있듯이, 나는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경험하고 탐구하는 예술을 만들어가고 싶다”라는
[도서] 한 팝아티스트의 낮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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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부도덕 교육 강좌>의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를 쓴 탐미주의자라기보다 감독 겸 배우 겸 코미디언인 독설가 기타노 다케시 같다. 여성지에 연재한 글을 모은 이 책은 일상적인 문제들을 주로 다루는데, 그 일상에 대해 부도덕한 생각을 전개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얼마나 바보 같을 수 있는지, 그런 고정관념 속 도덕을 배반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논하는 책이랄까. 여자에게 밥을 사게 하라든가, 친구를 배신하라든가, 수프는 소리내서 먹으라든가. 심지어 죄는 남에게 덮어씌우라고도 하고, 선생은 교실에서 협박하라고도 되어 있다.
물론 도발적인 말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나름의 이유가 있다. 때와 장소, 상황을 가려 행한다면 유용한 조언도 분명 있다. 배꼽을 잡게 하는 동시에 그럴듯하다 싶은 조언 중 하나는 ‘마음껏 참견하라’이다. ‘모르는 남자와도 술집에 갈 수 있다’고 쓴 미시마 유키오의 글(이 책 첫글)을 읽은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한 마초남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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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가장 섹시한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20년을 담은 책이 나왔다. < PD수첩 >을 만들었던 PD와 작가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의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어, 그들의 목소리로 직접 여러 사건의 뒷이야기부터 누가 봐도 만들기 힘들 게 분명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과정에 대해 들려준다. < PD수첩 >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성역을 가리지 않는 취재에 있다. 최근 ‘법의 날’ 특집으로 법조인들이 가장 질색할 ‘검사와 스폰서’편을 방영하기도 했지만, 종교문제 역시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1995년 방영되었던 ‘소쩍새 마을의 진실’편을 기억하시는지? 자비로운 스님이라고 알려졌던 일력 스님의 비리를 캔 사건이었다. 물론 종교 관련해서 더 유명했던 사건은 ‘이단 파문 이재록 목사!’편 쪽이었다. 신도들이 MBC 주조정실에 난입해 방송이 중단되는 사건을 낳았다.
과거사로 남은 특이한 사건은 이제 웃어넘길 수 있지만, 광우병 관련 보도 때문에 PD와 작가들이 당한 황당한
[도서] 시대의 증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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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 소설 <쌍두의 악마>에는 ‘독자에 대한 도전장’이 세번에 걸쳐 등장한다. 해당 부분까지 충분히 단서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사건에 대한,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도전장이다. 지금까지의 단서를 토대로 이 미스터리를 풀 수 있겠는가 하는. 퍼즐 미스터리 작가로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정정당당한 게임을 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월광게임>과 <외딴섬 퍼즐>로 이미 친숙해진,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연구회 회원들이 수수께끼 같은 살인사건 해결에 나선다.
세상과의 교류를 거부한 채 창작에만 몰두하는 예술가들이 기사라 마을에 모여 지내고 있다. 그 마을에 들어간 친구 소식을 들은 추리소설연구회 회원들은, 그녀를 데리러 마을까지 가지만, 도무지 마을 입성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추리소설연구회의 에가미 부장 한 사람만 마을에 간신히 잠입하는데 갑작스러운 폭우 때문에 기사라 마을은 고립되고 만다. 기사라 마을 안과 밖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서로 연락이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도전에 응해 보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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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반갑다. 왜 이제야 나왔나 싶다. <한겨레> 논설주간이었던, 한때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에 글을 쓰기도 했던 김선주의 산문집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얘기다. 오랜 시간 써온 글을 모은 책인데도 2010년 대한민국이라는 맥락이 그대로 살아 있으니, 약간은 신기한 마음마저 든다. 남의 눈을 의식하느라 허리 졸라매 없는 돈을 쥐어짜 허세를 부리고 싶어 하거나, 무엇이 바른 일인지 뻔히 알면서도 눈앞의 편안함에 젖어 바르지 못한 삶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심리는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1995년에 쓴 교육문제 관련 글은 이렇다. “고등학교에서 국·영·수 시간은 잠자는 시간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과외를 통해 이를 따로 공부하고 있고, 교사도 그런 전제로 수업을 진행한다. 학생들로선 과외 수업이 입시에 훨씬 효과적이고, 학교 진도가 과외 진도보다 늦기 때문에 부족한 잠을 수업 시간에 보충한다는 것이다.” 15년이
[도서] 왕언니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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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프로그램 녹음을 갔다가 담당 작가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은 일이 있었다. 밥을 먹으며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카모메 식당>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녀는 눈을 빛내면서 카모메 파티를 연 적이 있었다고 했다. <카모메 식당>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영화에 나온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었다면서 당시 사진들까지 보여주었는데, 영화 분위기와 파티 분위기가 묘하게 닮아 부럽게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라이프: 카모메 식당, 그들의 따뜻한 식탁>을 봤을 때 생각난 건 그녀였다. <카모메 식당>의 음식감독 이이지마 나미가 쓴 홈메이드 푸드 레시피를 담은 이 책은 요시모토 바나나와 시게마쓰 기요시, 다니카와 순타로 등이 쓴 관련 음식에 대한 에세이까지, 뭐 하나 빼놓을 게 없는 맛깔난 성찬이다. 일본인 친구의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얻어먹게 되는 소박하고 따뜻한 가정식과 꼭 닮은.
햄버그 스테이크나 (종류별)샌드위치, 카레라이스처럼 낯익은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츄릅츄릅 하악하악 맛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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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월드컵 직전까지, 각국 전력 분석만큼이나 자주 들려오는 소식은 남아공의 극도로 불안정한 치안에 대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아프리카에 대한 뉴스가 폭력과 무관하기란 얼마나 힘들었나. 아프리카 문학이 (인종차별을 비롯한) 정신적 폭력과 (부족간의 대학살과 같은) 물리적 폭력을 주로 다루는 건 당연해 보인다. 우웸 아크판은 나이지리아 출신의 예수회 사제인데,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으면서 <뉴요커>에 단편을 발표해왔다. <한편이라고 말해>는 그렇게 발표했던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다. 그 자신이 직접 돌아본 케냐,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 르완다의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첫 번째 단편 <크리스마스 성찬>의 무대는 케냐. 주인공 소년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집에서 형제자매들과 복닥거리며 크고 있다. 그는 한참을 고대하던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설렘에 들뜨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누나가 몸을 파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누나가 창녀촌에 들어가 돈을
[도서] 꿈꾸기 위해 필요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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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개미 한 마리가 있다. 개미는 풀잎을 타고 열심히 오르고, 떨어지고, 다시 오르고 또 오른다. 이유? 이 개미의 뇌가 창형흡충이라는 작은 기생충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이다. 뇌 기생충은 개미의 목숨이야 어찌되건, 자기 자손에게 이득이 되는 위치로 개미를 조종한다. 이같은 일이 인간에게도 일어날까. 꼭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간은 종교를 위해, 하나의 생각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고통을 용감하게 받아들이고, 목숨을 내던지지 않던가. 인간에게는 번식을 위해 무엇이든 하려는 욕구가 내재해 있지만, 동시에 유전적 명령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지적인 영웅’으로 여기는 생물철학자 대니얼 데닛의 종교비판서 <주문을 깨다>의 부제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종교라는 주문에 사로잡혔는가?’
<주문을 깨다>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다루어지던 종교 비판을 진화생물학적으로 파고든다.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을 두고 미국을 텍스트로 해 풀어가는 이 책
[도서] 왜 믿는지 물어보시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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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단연코, “살 빼면 예뻐질 텐데”다. 사람들은 덕담을 하듯 그렇게 말한다. 새해에는 건강해라. 부디 뜻하는 일 다 이루시길 바랍니다. 아들딸 가리지 말고 쑥쑥 낳아라. 그런 말을 하듯 살빼라고 한다. 어떤 말에도 별 상관않고 살긴 하지만, 해마다 아픈 곳이 하나둘씩 늘어나니 적당히 건강 관리를 할 필요는 느낀다. 감기약에 취해 잠드는 게 벌써 한달째에, 잦은 야근으로 인한 위통도 빨간불 들어온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물론 뼈 앙상한 미인들이 수두룩한 한국에서 연애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살을 빼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생각에 그칠 뿐으로, 정신을 차려보면 프라이드 치킨을 뜯고 있다든가 하는 식이 되어버린다.
이리 나태하게 살면서 다이어트에 대한 책이 나오면 꼭 한번 들춰보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다이어트 책이 나왔을 때 한번 들춰보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를테면 1시간의 조깅 같은 것)을 한 듯한 기분이 든다. 세상에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다이어트를 글로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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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놀라운 수출력은 비단 맥도널드 햄버거와 <아바타>, 아이팟에 그치는 게 아니다. 미국은 ‘톨레랑스 제로’ 정책도 수출했다. 관용과 인내심 전무, 절대 봐주기 없기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톨레랑스 제로’는 사소한 경범죄도 엄벌하는 강경한 형벌 정책을 일컫는다. 1990년대 뉴욕 시장이었던 루돌프 줄리아니의 그 유명한 ‘범죄와의 전쟁’과 일련의 형벌 정책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는 빈민층을 위한 사회복지 예산을 축소하고 대신 교도소를 지었는데, 그 교도소의 입주자들은 공교롭게도 빈민층과 (흑인을 중심으로 한) 이주자들이었다. 이런 뉴욕의 형벌 정책은 전세계로 수출되었고,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타고 남미로 북유럽으로 국경을 넘어 자리잡았다.
“벌금형은 부르주아와 프티부르주아에게! 집행유예는 빈민에게! 징역은 극빈 무산자에게!”
프랑스의 사회학자 로익 바캉이 1999년에 쓴 <가난을 엄벌한다>는 1980년대 이래 20년간 서구에서 감옥이 팽창하고 강경한 형
[도서] 가난이 죄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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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감독님을 뵙고 인사를 드릴 때마다 떠오르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 인상이 어쩜 그렇게 좋으실까. 둘, 이렇게 푸근한 얼굴로 어떻게 <송환>이나 <상계동 올림픽> 같은 묵직한 다큐멘터리를 만드셨을까. 인상과 진지함은 반비례한다는 식의 억지를 부리려는 건 아니다. 다만 현실의 암담한 부분을 꾸준히 비추고 드러낸다는 건 분명 고단한 작업일 텐데. 김동원 감독의 얼굴에서 그 고단함을 읽어낼 수 없었음을 궁금해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홀로 한 건 아니었나보다. <한국 독립다큐의 대부: 김동원전>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거대한 원류가 된 김동원 감독의 영화 세계를 두루 훑는 작품이다. 제1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김동원 감독 특별전’이 열림과 거의 동시에 발간된 이 책은 평소 존경받는 선배 다큐멘터리스트에 대한 후배의 궁금증- 이를테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를 닮은 극영화 연출을 꿈꾸던 감독이 어떻게 30여년 동안 다큐멘터리 외길 인생을 걸
[도서] 미래를 지키는 휴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