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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카페에서, 런던의 전철에서, 뉴욕의 도서관에서, 도쿄의 공원에서,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은 모두 이 작품들을 읽고 있다.” 광고, 홍보 문구에 유난히 냉소적인 나조차도 이 말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민음사에서 새로 펴낸 ‘모던 클래식’ 시리즈에 이보다 잘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지넷 윈터슨의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이른바 기존의 고전 컬렉션에는 포함되지 않을지라도 영상의 지배력이 심해지는 시대에 국경을 넘어 활자의 힘을 발휘한 책들 아닌가. 국내외 잡지나 블로그, 트위터…. 어디가 됐건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읽고 신간이 나오면 이야기하는 작가들. 이미 출간되었던 책을 전집용으로 표지갈이
[도서] 미래의 고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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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년 기자 시절, 감독들에게 ‘왜 시나리오대로 찍지 않았냐’고 물은 적이 꽤 있었다. 이유는 다양하다. 러닝타임 때문에, 찍다보니 마음에 안 들어서, 제작비 때문에 등등. 하지만 이 질문은 의미가 없다. “내 시나리오는 영화를 다 찍고나면 완성된다”는 임권택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시나리오가 아니라 영상의 형태로 살아남기 때문이다. <마더>의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를 함께 묶어놓은 이 책에서 봉준호 감독이 적은 것처럼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는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 소멸”되며 감독 입장에서는 “막상 그것을 들고 촬영현장에 섰을 때, 어떻게 그것에서 벗어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 책을 낸 이유는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 그 자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미세한 차이와 틈새를 기억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어쩌면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꼭 필요했지만 그와 동시에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는 그들에 대한 송가 같은 건지도 모른다. 만약 이
[도서] 영화와 비교하며 보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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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을 기다렸던 이유는 톰 포드가 연출한 영화의 원작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순전히 톰 포드를 향한 팬심으로 이 책을 기다렸다는 거다. 톰 포드는 패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남자 디자이너 중 한명이다. 완벽할 정도로 잘생긴 나머지 벗겨진 머리마저 귀티나는 이 남자는 90년대 구치(Gucci)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했다. 나는 순전히 톰 포드의 이름에 현혹되어 50만원이 넘는 안경테를 구입한 적도 있다. 후회없다. 그가 디자인한 안경을 쓰는 순간 좀더 섹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톰 포드 플라시보 효과라고나 할까.
구치를 뛰쳐나온 톰 포드는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며 예술가연하더니 결국 영화를 감독했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원작을 토대로 한 <싱글맨>이다. 패션 한량의 유아론적인 예술놀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주연을 맡은 콜린 퍼스는 남우주연상을 가져갔다. <싱글맨>의 예고편을 보노라면
[도서] 톰 포드가 반한 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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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사과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깟 자존심 때문에, 용기가 없어서, 혹은 죄책감이 없어서. <사과는 잘해요>의 두 백치 주인공, ‘나’와 시봉은 이에 착안해서 빈틈시장을 개척한다. 차마 얼굴 보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사과하는 것이다. 말로 하는 사과 누가 받나. 그들은 쇠파이프로 손목을 휘갈기거나 열중쉬어 자세로 엎드려뻗쳐를 한다. 사과받을 이가 속시원해지도록 징글징글하게 제 몸뚱이를 괴롭힐 작정인 셈.
‘나’와 시봉이 사과를 빙자한 자해공갈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복지원 출신인데, 복지사들은 “네 죄가 뭔지 아느냐”며 그들이 죄를 고할 때까지 구타하곤 했다. 카프카의 소설마냥 뜬금없이 ‘유죄’를 선고받고, 없는 죄도 지어내야 했던 것. 심지어 복지원에 원생이 늘어나자 ‘나’와 시봉은 원생들을 대신해서 죄를 고하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는다. 인류를 대신해서 피 흘린 예수처럼 대속하는 것이다. 엉겁결에 복지원을 나온
[한국 소설 품는 밤] 빚진 사과 대신 갚아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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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사강, 하면 생각나는 것은? 한국에선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여주인공 조제(사강의 소설 <한달 후, 일년 후>에서 차용한 이름)를 떠올릴지 모르겠으나 사강의 조국 프랑스 사람들은 ‘스캔들’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열아홉살에 집필한 소설 <슬픔이여 안녕>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사강에겐 명성과 함께 스캔들이 따라붙었다. 두번의 이혼과 도벽, 스피드에 대한 집착과 약물 중독의 기록은 평생 그림자처럼 그녀와 함께했다.
하지만 그런 스캔들이 예술에 대한 사강의 재능과 애정을 어느 정도 가렸던 것도 사실이다. 사강의 에세이집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에서는 세간의 이러저러한 평가를 떠나, 예술과 환락에 대한 그녀의 솔직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에세이에 따르면, 사강은 문학과 음악과 영화를 숭배하는 만큼이나 그 창조자들을 사랑했다. 재즈의 여왕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도서] 고통도 환희도 사랑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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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 충동을 느꼈다. 저자는 첫머리에 “이것은 실화다”라고 적시하는데, 이게 실화라면 미국인의 세금은 정부의 순진한 믿음을 위해 쓰이고 있을 것이다.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은 심령적인 능력으로 염소의 심장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미국의 비밀부대에 관한 이야기다. 비살상무기를 강구하던 차에 그들의 상상력이 초능력을 수련하는 부대창설에 이른 것이다. 상대의 숨을 끊는 것 외에도 벽을 통과하거나 구름을 흩어지게 만드는 능력을 배양하는 게 이들의 목적이다. 한 관계자가 말하길, “상대방이 막 말하려던 것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요령도 가르쳤다고 한다. “방법은 쉽소. ‘안돼애애애!!!’라고 소리치면 되오.” 저자인 론 존슨은 당시 군 내부의 관계자와 기자들을 인터뷰했다. 그가 사실을 열거하는 방식은 마이클 무어를 닮았다. 저자의 서술은 미국 정부의 허황된 계획를 씁쓸한 헛소동으로 치부한다. 이라크 전쟁 당시 포로를 심문하기 위해 <바니와 친구들>의 주제가를 계
[도서] 진짜? 진짜 ‘진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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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건축가 안도 다다오 지수 ★★★★★
(무서운) 인간 안도 다다오 지수 ★★★★★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한때 내 꿈은 건축가였다. 더 부끄러운 이야기는, 꿈을 꾸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에 건축가의 꿈을 꿨다는 거다. 행정학과를 졸업해 영화잡지에 들어간 20대 후반의 인생 여정에서 건축가의 꿈은 자기 직전 떠올려보는 로또 당첨의 망상과 다를 바가 없다. 각설하고, 여전히 나는 건축이 영화만큼 중요한 종합예술의 형태라고 믿는다. 프랭크 게리를 보면 루이스 브뉘엘이 떠오르고, 오스카 니마이어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중 누가 더 위대한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안도 다다오와 오즈 야스지로 중 누굴 선택할지도 묻지 마시라. 대답할 수 없다.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오랫동안 사랑해온 건축가 중 한명이다. 그에 관련된 책은 꽤 많이 출간됐다. 도쿄대 대학원에서의 강의를 토대로 쓰여진 <연전연패>와 마쓰바 가즈키요와 함께 쓴 <안도와 함께한 건축여행> 같은
[도서] 건축으로 투쟁하는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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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음악을 알려준다 지수 ★★★★☆
인터뷰 읽는 재미가 있다 ★★★★
2009년도 막바지에 접어든 지금, 최근 몇년간 혹은 지난 10년간 한국 대중음악계의 이슈를 꼽을 때 ‘인디신의 성장과 약진’을 빼놓을 순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따지는 건 좀 무의미한 것 같다. 그러니까 이른바 ‘장기하’ 때문이라든가 혹은 EBS의 <헬로루키> 때문이라고 말하긴 망설여진다는 얘기다. 아니, 망설여지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할 순 없다. 왜냐하면 인디신이든 어디든 일종의 ‘성장’이란 게 순식간에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과정과 맥락을 살피는 게 중요하다.
<한국의 인디레이블>은 한국(혹은 홍대 앞) 인디신의 역사를 레이블의 역사로 살펴보는 책이다. 이게 의미있는 이유는 인디신을 산업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도이기 때문이고, 또한 커뮤니티와 시장이 뒤섞여 있는 ‘로컬신’을 음악가나 팬이 아님에도
[도서] 언니네 이발관 1집, 어떻게 만들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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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터넷 고양이 카페에서 입양 관련 글을 보고 화가 치솟았다.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그 여자는 앞으로 시집도 가야 하니 키우던 고양이를 보내고 싶다 했다. 참을 수가 없어 댓글을 달았다. 대학원도 졸업하고 시집도 잘 가셔서 어디 한번 잘 살아보시라 했다. 괜한 참견을 한 것 같아 잠깐 망설였지만 후회는 없다. 대학을 졸업해서, 남자친구가 싫어해서, 시집을 가야 해서, 이사를 가야 해서, 사람들은 몇년을 키운 동물을 길로 내몰거나 보호소에 위탁한다. 이건 생명경시 풍조를 넘어선 총체적 인간성 말살 현상이다. 이게 아우슈비츠가 아니면 뭐가 아우슈비츠겠는가.
<유기동물에 관한 슬픈 보고서>는 일본 동물보호활동가인 고마다 사에가 전국 유기동물 보호소를 돌며 찍은 사진집이다. 책의 첫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책에 실린 사진 속 동물들은 더이상 이 세상에 없다.’ 일본의 보호소에서 유기동물을 보호하는 시간은 3일이다. 3일이 지나면 동물들은 가스실에서 고통스
[도서] 이 아이들을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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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영상문화연구의 생산적인 담론을 끌어내는 데 탁월한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가 <아시아 영화의 근대성과 지정학적 미학>을 펴냈다. 2006년 출간한 <트랜스: 아시아 영상문화> 이후 두 번째다. 한국·일본·싱가포르·중국·말레이시아·필리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필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책은 크게 두장으로 나뉜다. “1부 트랜스 아시아 영상문화 이론”은 일종의 개괄적 연구서들이다. “민족, 자본, 국제성, 세계화와 연관된 동아시아 스크린 문화의 복잡한 동학의 한축을 보여준다”(김소영).
양식적 계보에 관심이 있다면 스티븐 티오가 밝히는 오즈 야스지로와 왕가위 영화의 공간적 상관성에 관한 글을, 차이밍량 영화의 여성과 도시에 관심이 있다면 펑핀치아의 글을 읽으면 좋겠다. “2부 아시아 웨스턴”은 말 그대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웨스턴을 교차시켜 읽어낸다. 한국에 만주 웨스턴이 있지만, 인도에는 커리 웨스턴, 방글라데시에는 방글라데시 웨스턴,
[도서] 아시아 영화의 오늘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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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파삭 늙었는 줄 알았는데 이제 열여덟밖에 안됐구나.”
‘어른’이 듣기엔 한대 쥐어박았으면 딱 좋겠는 얼토당토않은 신세 한탄이지만, 허언이라고 낙인찍을 수는 없다. 청소년 소설인 <파랑 치타가 달려간다>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강호의 선배가 하는 저 말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 ‘부류’의 삶이라고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걸 은근히 드러낸다. 2009년 제3회 블루픽션상을 받은 <파랑 치타가 달려간다>는 청춘물을 읽는 즐거움을 일깨운다.
주강호는 흔히 말하는 문제아다. 아버지가 처음 보는 아줌마를 세 번째 엄마라고 집에 들이자 집을 나왔다. 여동생이 마음에 걸리지만 어쩔 수 없다. 주유소에서 먹고 자며 학교에 가고 아르바이트를 하면 아버지에게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돈도 벌 수 있다. 현재 그에게 가장 절실한 소원은 오토바이를 사는 것이다. 강호의 반에 이도윤이 전학을 오면서 평온한(?) 그의 일상에 변수가 생긴다. 초
[한국 소설 품는 밤] “이 슬픔을 알랑가 모르것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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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소설을 쓰면서 의식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우익청년 탄생기(성장기)’를 써보겠다는 것이었다. 건전한 상식과 나름의 철학을 토대로 한 우파가 득세한 나라에서는 ‘우익청년 일대기’로 분류될 수 있는 소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정당성도 갖추지 못했을뿐더러 부도덕한 우파가 득세한 나라에서는 ‘우익청년 일대기’가 나올 수 없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학이 줄창 ‘좌익청년 일대기’만 쏟아냈던 까닭이 거기 있다.” 장정일이 말한 대로, <구월의 이틀>은 우익청년 탄생기를 다룬 책이다. 동시에, 이제는 세상을 뜬 두 전직 대통령의 임기, 그중에도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한 뒤 탄핵 소추 문제로 나라가 들끓기까지의 대한민국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이십대의 문턱에 선 두 청년이다. 이름은 금과 은. 금은 전라도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가 참여정부의 일원이 되는 바람에 어렵사리 서울에 자리를 잡고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은은 경상도 출신으로 (심
[한국 소설 품는 밤] 어떤 우익청년 탄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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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 드라마에는 마력이 있다. 화면 속, 움직이는 모든 대상이 내뱉는 무수한 말, 그 말 모두를 끄집어내 하나둘 밑줄 긋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내뿜는 <그들이 사는 세상>의 준영의 공격적인 표현에, 사랑을 말하기보다 감추기 급급한 지오의 방어적인 대사에, 사랑의 실체는 아낌없이 파헤쳐지고 해부된다. 때로 웃음을 자아내기도 또 때로 아리기도 하지만, 이건 기쁨과 슬픔 어느 하나로 규정해선 안될 사랑 그 자체의 감정이다. 노희경의 대사는 드라마 속 인물들을 통해 사랑의 언어로 자리하고, 그 언어는 고이 적어두어야 할 글이 되어 팬들의 기억에 남는다. 민망한 시청률을 버텨내는 노희경의 진득한 비법은 이 마력의 말이 모인 결과다.
노희경이 그 기록을 드라마 팬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작가가 드라마를 위해 제작진에만 내놓는 비밀 레시피, <그들이 사는 세상>의 대본집을 두권의 책으로 엮였다. 16부의 드라마가, 16부의 언어들이 마
[도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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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 <배틀로얄>이다.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하나의 국가가 존재하고, 그 국가의 지배를 받는 12개 구역의 강제로 선발된 대표들이 갇힌 공간에서 서로를 죽인다는 설정, 그리고 최후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인원은 단 한명이라는 점. <헝거게임>의 설정은 어느 모로 보나 <배틀로얄> 시리즈의 그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면면은 오히려 <해리 포터>와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대체 이 세 유형의 영화가 엮일 수는 있는 것이냐고? <헝거게임>을 보니 가능하더라. 먼저 각 구역에서 뽑힌 24명의 전사들이 독재국가 판엠의 수도인 캐피톨에 화려하게 입장하는 장면은 <해리 포터> 속 호그와트의 연회식 행사를 떠올리게 한다. 12구역의 대표로 나선 여주인공 캣니스를 가르치는 헤이미치는 한심하지만 늘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해그리드와 닮은꼴이고 말이다. 한편 캣니스
[도서] 게임에서 이겨야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