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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다 지수 ★★★★★
글과 사진의 조화 지수 ★★★★
이게 다 땅이 좁기 때문이다. <작가의 집>에 나오는 전세계 작가들의 집구경에 넋을 놓고 있다가 내린 뜬금없는 결론이다. 좋다는 서재에 대한 취재를 했던 때, 놀랍게도 큰 아파트인가 작은 아파트인가가 서재의 우아함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임을, 그게 땅 좁고 집값 비싼 나라에서 작가로 먹고사는 일의 고충임을 깨달았다. <작가의 집>은 헤르만 헤세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마크 트웨인,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가 가장 활발히 작품을 써내던 시기에 그들에게 지붕을 준 공간들에 대한 사진과 글을 담고 있다. 집은 대개 지역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집보다 오래 존재해온 자연이 존재한다. 작가의 집필실은 바다나 정원, 하늘, 바람을 온몸으로 마주할 수 있는 특별한 창이나 문이 있는 방에 마련된다. 프랑스 소설가인 장 지오노는 “이 마을에서 집 밖으로 20년 이상 나가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기란 그
[도서] 시와 소설을 낳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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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 동안 우리 모두 너무 많은 죽음을 경험했고, 너무 많이 상심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눈물을 흘린 걸까. 죽음들의 허무함? 함께할 수 없다는 슬픔? 죽음을 부추긴 세상의 부조리? 그 무엇도 가장 큰 답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울었을 것이다. 허무함을 이해하고, 슬픔을 이겨내며, 부조리를 참고 사는 건 온전히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애도는 그래서 (김훈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산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훈의 신작 <공무도하>는 레테의 강을 건너지 않은 ‘이쪽 편’ 사람들에 대한 우회적인 애도다. 굳이 ‘우회’라는 표현을 사용한 건 이 애도가 ‘애도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애도이기 때문이다. 장마전선이 한반도에 찾아와 폭우를 쏟아내는 첫 장면부터, <공무도하>는 김훈 특유의 스트레이트한 문장들을 맹렬히 쏟아낸다. 형용사와 부사, 혹은 그 어
[한국 소설 품는 밤] 이 세상에 사는 우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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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2시에 남자친구와 전화로 싸우고 손톱을 물어뜯다가 트레이닝 차림으로 편의점에 달려가 초콜릿바를 사와서 한입에 해치운 뒤 굳이 이를 닦지 않고 잘 때의 이상한 만족감이라는 걸 아시는지. ‘현 상황에 대한 불만족+욕구 불만+분노+나쁜 짓+더 나쁜 짓’인 일련의 행동을 했을 때 느끼는 딱 그런 것. <워너비 윈투어>를 읽으면서 즐거웠던 기분이 그랬다. 뒤표지 문구는 ‘고졸 학력의 어시스턴트로 시작해 <타임> 선정 세계 파워우먼이 되기까지’로 되어 있지만, 이 책을 보면 (<보그> 편집장이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안나 윈투어는 유명한 언론인 아버지를 두었고, 유명 예술가와 상류층에 닿는 연줄을 어려서부터 잘 활용할 줄 아는 여자였다. 애초에 타고난 계급부터 남달랐는데 야망은 더 남달랐다. 일반화가 불가능한 아주 특별한 성공담인 셈이다. 이 책을 읽고 ‘나도 할 수 있다’고 분발했다가는 회사에서 쫓겨날 듯. 하지만
[도서] 마녀의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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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살림꾼이자 유희형 요리인을 자처하는 <이기적 식탁>의 저자 이주희는 이 책이 감동의 음식 에세이도, 유용한 밑반찬과 찌개 요리책도, 화려한 사진의 쿡북(cook book)도 아니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위한 이타적인 식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식탁을 차리는 사람이라고. 정말이지 딱 그런 책이다. 아들, 딸, 남편이나 아내, 애인에게 차려줄 식탁의 힌트를 얻기에도 유용한 책이긴 하지만 이 책에 환호할 사람은 먹기를 좋아하는 독신자다. 요리를 잘할 필요도 없다. 먹는 걸 좋아해서 먹어본 맛을 직접 만들어보겠다는 시도를 할 정도면 충분하다.
일상 이야기 하나와 그에 맞는 음식의 레시피 하나. 그 둘이 얼마나 개연성있게 붙어 있는지를 따지면 약간 의아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야기는 읽는 맛이 쏠쏠하고 레시피는 매우 실현 가능하다. 토마토소스 만들기부터 똠양꿍에 조개탕까지, 참 중구난방의 메뉴를 잘도 끌어모았다. 먹고 싶은 건 많고 변덕은 죽
[도서] 끝내주는 푸드포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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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모어 레너드는 흑백 카메라처럼 묘사하고 폭죽놀이처럼 대화를 끌어간다. 범죄물, 스릴러, 서스펜스. 뭐라고 부르건, 엘모어 레너드는 언제나 아드레날린이 책장을 타고 흐르는 소설을 쓰면서도 유머와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이 한국에 많이 소개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가 욕을 너무 많이 쓰고 범죄자와 창녀들에 대해 너무 긍정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설정만 읽으면 <블랙 달리아> <LA 컨피덴셜>의 제임스 엘로이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는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엘모어 레너드는 웃길 줄 아는 남자다. 그는 자기 주인공이 시가를 피워 물고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을 연기하길 원치 않는다. 그 대신, 농담하고 섹스하고 총질하고 잘난 척하고 무사히 살아남아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겟 쇼티>와 <재키 브라운>, 그리고 조지 클루니 주연의 <표적>이 영화로 성공을 거
[도서] 매력적인 남자라는 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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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무슨 상 수상작품집이라고 적힌 책을 사서 읽는 이유는? 그 상을 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올해는 누가 받았나’ 혹은 ‘어떻게 쓰면 받나’가 궁금해서 읽는다. 어쩌다 보니 몇년간 그 상 수상잡품집을 쭉 읽어왔으므로 올해도 읽는다(내가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쭈욱 읽어온 이유이기도 하다). 무슨 상이건 상받을 정도면 기본은 하겠지 싶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읽어본다…. 마치 아티스트 이름이 ‘various artists’(여러 가수들)라고 적혀 있는 베스트 어쩌고 하는 편집음반을 듣는 것처럼 다 읽고 책 한권 뗀 느낌은 덜하지만 트렌드를 한큐에 꿴 듯한 기분이기도 하고…. 그 작가를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고…. 그래서 이 글은, 이런 유의 수상작품집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 제안이다. 한해 한 나라에서 발표되었다는 걸 제외하면 아무 공통점도 없는 단편들을 묶은 책을 재밌게 읽으려면?
첫 번째. 상을 받은 작가의 수상 소감을 읽는다. 소설상 이름은 대개 유명한 소설가의 이름을
[한국 소설 품는 밤] 각종 수상작품집 재밌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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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미 지수 ★★★★★
내 멋대로 읽는 재미 지수 ★★★★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국가의 기원에 관하여’라는 딱딱한 에세이로 시작한다. 놀랄 것은 없다. 이건 존 쿳시 소설이니까. 작품마다 늘 식민주의에 대해, 폭력에 대해, 인간에 대해 여느 학자 못지않게 예리한 지성을 보여주는 부커상 수상작가 쿳시 말이다. 놀라움은 형식에서 온다. 책의 첫장, 국가의 기원을 얘기하는 에세이 밑으로 긴 줄이 페이지를 가르고, 그 밑으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 하나가 시작된다. 아파트 세탁실에서 “천사라고 해도 될 만큼 거의 완벽한 엉덩이”를 가진 젊은 여자에게 홀딱 반한 노인의 이야기다. 전업 작가인 노인은 여자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덜컥 그녀에게 자신의 비서가 되어달라고 제안한다.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은 에세이와 노인의 작업담은 첫 페이지 이후로도 긴 줄을 경계삼아 따로 또 같이 전개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야기는 세 갈래로 나뉜다. 세 번째 이야기는 노
[도서] 어쩌면, 쿳시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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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 쳇 레이모는 37년간 같은 길을 걸어 직장인 스톤힐대학으로 출퇴근했다. 그 길엔 100년 묵은 집들이 늘어선 거리가 나오고 숲과 들을 지나고 개울을 가로질러 오래된 과수원과 마을 정원을 통과한다. 레이모는 그 1마일에서 우주를 발견하는 특별한 산책으로 독자를 이끈다. 천문학자로서의 지식, 나이든 학자로서의 지혜, 그리고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 길을 우리가 걸을 수 없으므로 무슨 소용이겠는가 묻는다면, 이 책을 읽는 것으로 그 길 위에 설 수 있다고 말하겠다. 그가 본 것을 글로 쓰면 나는 상상해 풍경을 그려낸다. 숱한 꽃이름과 새이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스팔트킨트로 살아온 게 못내 아쉽다.
<1마일 속의 우주>에는 대단한 유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경천동지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산책자의 발걸음으로, 그 느릿한 속도로 주변을 둘러보고, 본 것에 대해 찾고 공부하고 생각하는 과정 자체를 담았다. 겨울에 스케이트를 타는 연못
[도서] 출근길에 우주가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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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독서라는 핵심 키워드를 공유하는 두권의 책이 나왔다. 도쿄대학 대학원 교수인 강상중의 <청춘을 읽는다>는 “내가 탐욕스레 읽었던 책 몇권을 노트 필기 형식으로 기록한 글”이다. 재일한국인 2세의 청춘의 궤적을 알 수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이 그렇듯, 재일조선인 역사의 단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갖게 해주고, 그들의 눈으로 본 한국의 현대사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는 시간을 뛰어넘어 도쿄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하게 한다. 흥미로운 점은 T.K.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말하는 강상중의 목소리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최인훈의 <광장>을 말하는 유시민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책읽기가 자기 개발의 수단일 수도 있고, 남보다 한발 더 앞서 나가기 위한 주춧돌일 수도 있
[도서] 청춘이 책을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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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은 대개 책 말미에 평론가의 서평을 싣는다. 모든 서평을 다 읽는 건 아니다. 굳이 읽지 않아도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내용도 있는 법이니까. <북쪽 거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서는 달랐다. 재빨리 서평이 있을 다음 페이지를 폈다. 누군가의 설명에 기대서라도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인지를 정의하고 싶었다. 김형중 평론가의 글이 마침 작은 위로가 되어줬다. “사력을 다해 읽거나, 혹은 가급적 이른 시기에 읽기를 포기해야 할 책. 한국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실험정신으로 유명한 문제작이 되거나, 독자라고는 몇몇 평론가들과 운없는 다독 시민 몇과 소수의 문창과 학생들밖에는 갖지 못하게 될 저주받은 책이 되거나 할 수 있도록.”
그러므로 지금부터 쓰게 될 내용은 단단히 각오가 되어 있는, 문학적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북쪽 거실>은 정체불명의 수용소로부터 석방된 여자, 수니로부터 시작한다. 수니는 전직 오디오북 성우로, 수용소에 남겠다
[한국 소설 품는 밤] 읽거나 포기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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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스틴 레비는 프랑스 좌파 지식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딸이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석학인 장 폴 앙토방의 아들 라파엘 앙토방과 사귀고 21살에 첫 소설을 발표해 성공을 거두었고, 그와 결혼을 했다.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시아버지의 연인 카를라 브루니가 남편과 잠자리를 함께하고, 결국 그녀의 곁을 떠나기 전까지는. 사르코지의 아내가 된 카를라 브루니의 전 애인이 바로 <심각하지 않아>를 쓴 주스틴 레비의 남편이었던 라파엘 앙토방이었다는 말이다. <심각하지 않아>가 프랑스에서 <해리 포터> 시리즈와 <다빈치 코드>를 누르고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이 책이 그 소설 같은 실화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 헤어진 아버지와 어머니(공교롭게도 둘 다 부유하고 아름답고 유명했던), 소꿉장난처럼 시작해 들불처럼 타올랐고 마침내 통속극보다 못한 결말을 맺은 결혼, 낙태와 약물중독, 그리고…. 주스틴 레비는 자신이 겪은 일과 느낀 일을 적고 있음을 감추
[도서]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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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너마저의 <앵콜 요청 금지>, 장기하와 얼굴들의 <별일 없이 산다> 같은, 주류 음반사에서 상상도 못할 기획으로 지루함에 시달리던 청각을 한껏 자극한 음반사 붕가붕가레코드 주변인들이 쓴 책. 2000년대 초 ‘붕가붕가 중창단’이 결성되어 처음으로 무대에 오르고 붕가붕가레코드가 창립 작품 <<관악청년포크협의회>> 1집을 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붕가붕가레코드라는 음반 레이블 이름 작명부터가 걸작인데, 거기에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이라니. ‘지속 가능한’이라는 단어의 최초 출몰지가 친환경주의였음을 감안한다면 이 책의 제목은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딴따라질이 꼭 필요하다는 가열찬 주장을 하는 중일 테다. 또한, ‘지속 가능한’은 지금의 성공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마추어라는 소리를 듣기는 죽어도 싫었다. 그렇다고 프로가 될 자신은 없었다. 우리가 지향했던 곳은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의 어딘가였
[도서] 딴따라 없으면 지구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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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지수 ★★★★★
고전 지수 ★★★★★
그러니 안 보면 후회할 지수 ★★★★★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의 최고 걸작이 드디어 정식 발매됐다. 사실 데즈카의 걸작들은 지난 90년대 후반 학산문화사에 의해 하나씩 국내에 소개가 된 바 있다. 데즈카의 최대 대작인 <불새>는 물론이거니와 <키리히토 찬가>처럼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데즈카의 성인용 만화들까지 출간됐다. 사실 <우주소년 아톰>은 데즈카 세계의 아주 지엽적인 대륙을 대표할 따름이다. 일본 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의 진가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작품에서 빛을 발한다. 문제는 그의 최고 걸작인 <아돌프에게 고한다>가 불법 복제본으로만 90년대 만화방을 떠돌아다녔다는 사실이다. 그 시절 만화방에서 <아돌프>라는 제목의 이 걸작을 읽고는 가슴이 너무 뛰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이미 절판된 그 복제본을 몰래 훔쳐가지 않은 걸 얼마나 오랫동안
[도서] 만화의 신, 그의 최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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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2009년 한국 인디신의 승자는 붕가붕가 레코드와 루비살롱 레코드일 것이다. 양쪽 모두 독특한 정서를 일관되게 반영하고 있는데 특히 붕가붕가는 복고와 키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교차시키며 독보적인 감수성을 자산으로 삼고 있다. 그중에서도 ≪생각의 여름≫은 서정성 면에서 돋보이는 앨범이다. 거리의 소음을 배경으로 어쿠스틱 기타가 강물처럼 흐르는 <동병상련>과 인트로를 생략한 채 갑자기 도약하며 시작하는 <서울하늘>, 이장혁의 헛헛한 목소리가 연상되는 <허구>와 꺼끌꺼끌한 질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래서>로 이어지는 앨범 중반부의 정서가 특히 그렇다. 간결한 가사와 그에 맞춘 짧은 길이의 노래가 담백하면서도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긴다. 얼핏 들으면 기존의 이런저런 인디 포크 송과 큰 차별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당부하건대 노랫말에 온 감각을 집중해서 들어보기를. 그제야 이 앨범은 특별한 소리를 만들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만 어
[음반] 그 가사 치명적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