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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다 읽었다. 가볍고 술술 읽히는 소품이다.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있지만 추리소설이라기엔 아쉽고, 으스스한 분위기는 있지만 공포소설이라기엔 부족하다. 그런데도 미간에 주름 잔뜩 잡고 두근거리면서 읽게 만든다. 책읽기가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 있다면 이런 책들 때문이 아닐까.
‘바벨의 모임’이라는 수수께끼의 사교모임을 둘러싼 연작 소설인데, 사실 모임 자체가 사건의 중심에 서는 일은 없다. 상류계급의 영애들만 가입 가능한 문제의 독서모임 ‘바벨의 모임’의 멤버들이 각자 겪은 이상한 일이라는 편이 맞겠다. ‘마지막 한줄의 반전’이라지만 대개 짐작 가능하니 너무 크게 기대하지는 말 것. 책을 좋아하는 몽상가로 십대를 보낸 소녀라면 손톱을 마구 깨물며 부모에 대한 불만과 세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몸부림치던 성장기를 떠올리게 되는 대목들을 만나게 된다. 집사물 덕후라면 이 책에 각별한 애정을 느낄 듯. 소녀를 보필하는 소녀라니, 거참….
요즘 이런 작은 모임을
[도서] 후루룩 연작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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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책에는 두 종류가 있다. 언급되는 책을 읽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경우, 언급되는 책을 읽지 않으면 충분히 즐길 수 없는 경우.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은 후자에 속한다. 제목부터 그렇지 않나. 세계가 ‘두번’ 진행되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는 한번 진행된 적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정혜윤은 이번 책에서 고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이 고전의 제목과 내용은 대강 알지만 읽은 적은 없는 독자에 속한다면,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 이상을 얻기는 힘들다. 이 책들을, 카프카의 <변신>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었다면, 정혜윤은 그 세계가 다시 진행되는 언어의 숲으로 당신의 손을 잡아 안내한다. 맹세컨대 당신이 이 책들을 어제 읽었다 할지라도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을 읽으
[도서] 사랑하는 그 세계에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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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못하는 김 여사가 아니라 칼질 잘하는 심 여사라니 쫄깃하다. 쉰한살, 정육점 심 여사는 자식 먹여살리려고 흥신소 킬러가 되기로 결심한다. 미행하려면 안경 쓰고 무릎에 패치 몇장 붙여야 하는 우리네 엄마 같은 그녀가 냉혹한 킬러의 세계에 뛰어든다니! 놀랍게도 그녀는 흥신소 첫 미션, 전남편 재산 긁어먹는 찜질방 여주인을 야무지게 해치운다. 잠깐만. 정육점 경력이 아무리 길어도 그렇지, 금방 프로 킬러가 될 수 있어?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런 의심은 잠시 접을 만큼 설정이 재미나다는 것이다.
<심여사는 킬러>는 만화잡지 <팝툰>에 실린 작품으로 잡지 연재에 어울리는 구성을 갖추고 있다. 각 장에 심 여사와 주변인의 사연이 하나씩, 미니소설처럼 소개되는데 그들 이름이 제목이다. 심은옥, 박태상, 오신자…. 부모님 계모임에서 들어봄직한 이름들. 강지영 작가는 이들을 재래시장이나 유흥가 골목, 동네 찜질방에서 한번쯤은 마주칠 캐릭터로 감칠맛나게 그려낸다.
[한국 소설 품는 밤] 가장 보통의 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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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영의 비평집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에 실린 두편의 우정어린 발문에서 정성일은 ‘이상하다’라고 말하는 허문영의 질문으로 시작하여 허문영 비평의 욕망을 새롭게 밝히는 정치한 메타비평을 성취했고(발문1), 김혜리는 느리게 ‘말한다’는 허문영의 습관으로 시작하여 그의 몸의 기질과 글의 관계에 관하여 우아하게 중계했다(발문2). 나는 ‘대면한다’고 쓰는 허문영의 비평적 생존의 의지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이 책의 감상평을 짧게나마 대신하려고 한다. 그가 이 말을 얼마나 자주 쓰는지 의식해보지 않았으나 점점 더 허문영의 글쓰기에서 중요해지는 건 그것이며 내게는 들을 때마다 가장 울림이 깊은 그의 표현 중 하나다.
허문영은 꾸준하게 한국영화의 무언가를 만나길 청해왔다(1부, 한국영화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그 때 그는 공고한 용어에 의탁하지 않아도 혜안의 조감도가 가능하다는 걸 매번 입증함으로써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동시에 그가 만나기를 가장 즐겨했던 것은 그가 사랑하
[도서] 그 글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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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북디자인>은 1935년부터 2005년까지 출간된 펭귄 책 표지 디자인의 역사를 담았다. 한권의 책에 도판 500개. 현대 출판물의 역사를 아우르는 의미로도 부족함이 없는 저작이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펭귄 클래식’으로 가장 익숙한 출판사로 현대적이고 대담했던 초기 문고본 디자인부터 두루 눈에 익은 책들이 등장하지만 내용 면에서 낯선 시리즈도 있다. ‘펭귄 스페셜’이라고 불리는 TV 시사프로그램에 어울릴 법한 폭로적 저널리즘 시리즈가 대표적. ‘펭귄 스페셜’은 전운에 휩싸인 유럽의 분위기를 반영한, 신문과 잡지보다 깊은 읽을거리를 보급판으로 선보인 것이었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상식>(1940), <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중국>(1939), <왜 영국은 전쟁에 뛰어들었는가>(1939), <전쟁의 새로운 방법>(1940)과 같은 책들이 공격적인 수평선과 강렬한 타이포그래피의 표지로 선보였다. 이 시리즈는 1960년대 들어 각종
[도서] 책덕후 최후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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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소설 속 젊은이들더러 그렇게 무기력하게 살지 마, 라고 말한다면 꼰대 소리를 들을까? 어쩔 수 없다. 책을 보는 내내 한숨이 나왔단 말이다. 이 반짝이는 청춘들이 왜 그토록 밋밋하게 사는가. 주인공 ‘나’, 성실하게 편의점 알바 뛰는 모습이 예쁘기만 하다. 또 ‘나’의 지인들, 평균 이상으로 멋지다. 동료 J는 마르고 키가 크고 피부가 희어 뮤지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청년으로, 특별히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어 몇년간 알바를 하며 자유로이 살아왔단다. 또 J가 짝사랑하는 카페 알바, 별칭 물고기는 흉터를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길고양이와 낡은 책을 좋아하며 거리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을 줄 아는 아가씨다. 패션잡지 빈티지 의상 모델이 떠오르는 모습이다.
콤플렉스 없이 어여쁜 청춘, 상큼하다. 늘어지지 않는 산뜻한 문장들도 한몫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 단체로 무기력증에 빠진 모양이다. 꿈도 없고 야심도 없다. 사회질서에 편입되기 싫어하건만 바깥으로 탈주하고픈
[한국 소설 품는 밤] 이 상큼한 무기력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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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개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추위가 가시지 않았는데 시범경기가 치러지는 야구경기장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인파가 몰려 야구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딱 알맞은 때 <야구생활> 1호가 발간되었다. 각 팬덤을 대표하는 ‘야구생활자’들이 모여 만든 이 책은 잡지를 지향하는, 일단은 1호가 발간된 책인데, 시시각각 뜨거워지는 야구 팬덤의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2009년을 결산하고 2010년을 내다보는 의미의 팀별 에세이들이 실려 있어, 감격적이었던 추억이나 울컥 속상했던 순간을 정리하게 해준다. <프로야구 카툰>을 연재하는 최훈과의 긴 인터뷰도 실렀다. MBC ESPN 박상언 PD와 <해태타이거즈와 김대중>을 쓴 김은식, <리더 김성근의 9회말 리더십>을 쓴 ‘이데일리’ 정철우 기자 등이 필진으로 힘을 보탰다. 한참 야구열기가 뜨겁던 80~90년대와 참 많이 달라진 팬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망한’
[도서] 야구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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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혹은 나뭇잎 한장. 장편소설(掌篇小說)이나 엽편소설(葉片小說)이라고 불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콩트 모음집이다. 작은 판형에 290여쪽, 그런데 68편이나 실려 있는 건 그래서다. 이야기 하나가 두세 페이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설국>으로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도 유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의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책이다. 그가 젊은 날에 (이십대였던 1921년부터 1935년 사이) 쓴 이야기들이라 <설국>과 <잠자는 미녀> 같은 작품들에 이르는 단초가 되는 ‘발상’을 만날 수 있어 흥미롭다. 여자의 몸, 어린 여자의 몸, 생명, 삶, 죽음, 희생을 비롯한 죽음과 맞닿는 탐미주의적인 아름다움을 탐색하는 이야기도 있고, 예상외로 쿨한 연애담도 있고, 환상담도 꽤 있다.
이야기 내용 자체에 집중해 호불호를 가르는 일도 의미있겠으나, 그보다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 있다. “많은 작가들이 젊은 시절에 시를 쓰지만, 나는 시 대
[도서] 거장의 젊은 손바닥에서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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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다. “막 암전되는 화면처럼 어두운 눈”을 지닌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소년 같은 얼굴과 곧게 뻗은 팔다리, 매혹적인 목소리도 지녔단다. <바람이 분다, 가라>의 서인주 얘기다. 그림은 그리는 순간만이 중요하다며 캔버스 대신 곧 퇴색될 산성지를 택한 화가. 모두가 그녀에게 끌린다. 예술에 매혹되듯. 그리고 모두가 그녀의 내면을 속속들이 파악했다고 믿는다. 예술을 분석하듯. 서인주의 평생지기인 희곡작가 이정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맹렬하게 살던 서인주가 자살했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서인주의 죽음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그러나 본격 추리를 기대하면 곤란하다. 이정희는 서인주를 자살한 천재 화가로 미화하려는 평론가 강석원에 맞서 그녀의 죽음을 조사하기로 결정한다. 탐정이라면 서인주가 죽은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목격자와 증거는 있는지 조사하겠지. 대신 이정희는 서인주의 작업실에 침입해서 유품을 매만지며 기억을 더듬는다.
[한국 소설 품는 밤] 서늘한 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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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당신의 ‘고향 도시’에 생각해보라. 도시는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멜랑콜리와 그리움으로 가득한 영혼의 공간이기에, 그에 얽힌 감정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세계 최대 규모의 열두 도시에 살고 있는, 혹은 살았던 작가들이 ‘고향 도시’에 대한 글을 썼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났거나 오래 살았던 한 도시에 대해 사랑하고 미워하는 도시와 삶의 풍광을 자유롭게 그려냈다. <스테이>는 열두 도시에 대한 열두 작가의 글을 담았는데, 모두 다른 이야기지만 어찌보면 서로 닮아 보이는 감상을 자아낸다. 복합적이고도 복잡한. 냉소적이고 자조적이지만 애정을 부인할 수는 없는. 돌아는 가는데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모두 돌아버리게 만드는 현실에 대한 농담이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아마 당신이 가장 뼈아픈 감정으로 읽게 될 글은 김영하가 쓴 서울에 대한 글 ‘단기기억상실증’일 것이다. “서울은 어쩌면 정신과적 상담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미치지는 않았을지 몰라
[도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서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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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에서 선으로. 요즘 여행의 방식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선을 그려야 하니 걷기 좋은 길, 오랫동안 깊숙이 들어가고 싶은 길이 주목을 받는다. 주말에 서울 성곽을 따라 걸었다거나 휴가를 내 제주 올레길을 일주했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는 그렇게 천천히 선을 긋는 여행을 시작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는 녹색연합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생태환경작가 박경화가 쓴 국립공원 탐방기다. 저자는 2007년에 국립공원 도보순례에 참여해 전국 국립공원을 탐방한 뒤 자료조사를 하고 다시 찾아 돌아보고 썼다. 저자의 이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에는 산성과 사찰, 자연생태계를 비롯한 국립공원의 생태학적 읽을거리가 많다. 2006년 벼락을 맞고 쓰러진 할아버지나무의 위용부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새들 사진까지, 사진자료도 풍부하다. 여행정보는 기본. ‘왜 과일
[도서] 나를 부르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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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아주 나약한 영혼을 가진 미국인에게도 비교적 가벼운 질병인데 반해, 무익함은 강인한 사람과 나약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미국인을 매번 파괴합니다. 우린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 이 세상에 만연한 악덕과 물신 숭배와 생명 경시 풍조를 비난하는 어떤 문장들이 이제 너무 나약하고 진부하게 들린다고 생각한다면, 대신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읽기를 권한다. 이토록 관대하고 지적이고 따뜻하며 동시에 숨넘어가게 웃긴 작가의 뒤를 3박4일 따라다니는 그루피가 되고 싶어질 테니.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는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중 국내 초역작이다. 보네거트가 자신의 작품들을 직접 평가한 리스트에 따르면,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는 당당히 A학점을 받았다. <타이탄의 미녀> <마더 나이트> <제일버드>와 같은 순위다(제일 점수가 안 좋은 작품은 <제일버드>
[도서] 보네거트! 이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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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쓰고 싶다 지수 ★★★★
그들의 다른 책도 읽고 싶다 지수 ★★★★
세상 모든 글은 읽는 자를 염두에 두고 씌어진다. 심지어 일기조차 어느 정도는 그렇다. 하지만 편지만큼 적극적으로 독자를 글 한복판으로 끌고 들어가는 글은 없다. 상대가 글을 쓰게 만드는 건 기본이고 다툼, 사랑, 혹은 영원한 결별을 ‘행동’하게 만드는 글이니까. 그런데 서간체 소설이건 서간집이건 재미있는 점은, 그런 문답의 과정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나 각자가 처한 상황을 이유로 편지들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묻지 않았던 것에 대한 대답, 질문에 대한 회피,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 이번주 신간 지면에 소개할 책들은 세권 다 편지글이다. 편지쓰는 문화가 사라진 시대에 편지만이 할 수 있는 긴장과 자극을 느끼게 해주는 책들이다.
<경계에서 춤추다>는 도쿄게이자이대학 교수 서경식과 일본 소설가 다
[도서] 타지에서,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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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플루가 휩쓸던 시절, 멕시코 등 요주의 국가에서 떠나와 공항에서 바로 격리된 사람들을 보며 비로소 ‘생체 권력’이라는 단어를 실감했다. 이제 전염병은 국제적 문제이며, 개개인을 향한 추적 시스템도 계속 발달할 것이다.
<재와 빨강>은 이 현대적 소재를 카프카적 상상으로 풀어나간다. 아내가 바람나서 이혼한데다 회사에서도 따돌림당하는 주인공은 C국 본사로 파견나가서 인생을 ‘리셋’할 작정이다. 그런데 ‘리셋’은 그가 반기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C국에 가자마자 그는 미열이 있고 기침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공항에 격리되고, 회사에서도 대기 조치를 당한다. 마침 숙소는 전염병이 휩쓸고 있다. 거리에는 쓰레기 더미가 방치되어 있고, 소독약이 뿌려지는 희뿌연 세계를 검역복을 입은 방역원들만이 활보할 뿐. 이 디스토피아적 풍경 속에서 그는 점차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다. 고국에서 아내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신이 용의자로 체포될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숙소에
[한국 소설 품는 밤] 신종 플루 시대의 카프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