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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알트먼의 영화 <고스포드 파크>의 톡 쏘는 고전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놓치지 않으면 좋겠다. 흔히 고전적이라고 할 때의 우아함을 기본으로, 은근한 풍자, 뼈굵은 농담을 곳곳에 숨겨둔 미스터리물이기 때문이다.
<증인이 너무 많다>는 애거서 크리스티와 더불어 영국 미스터리물의 황금기(추리소설이 부르주아의 애호물이었던 시절)를 다진 도로시 세이어스의 ‘귀족 탐정 피터 윔지’ 시리즈다. 이후 무수한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집사 캐릭터의 원형인 번터가 등장하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피터 윔지 경의 형인 제럴드 덴버 공작이 살인혐의로 체포된다. 피해자는 공작의 여동생 메리의 약혼자 캐스카트. 모든 정황과 관계자들의 증언으로는 공작이 범인이지만 피터는 형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나선다. 문제는 지적이고 말주변 뛰어난 이 피터라는 인물이 때와 장소를 못 가리는 쾌활함과 통찰력으로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망치곤 한다는 사실. 여동생은 그를 ‘밉상’이라고 콕 집어
[도서] 귀여운 밉상 귀족 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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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의 김태권이 <초한지>와 <삼국지연의>를 10권의 만화 <김태권의 한나라이야기>로 엮어냈다. 첫 두권이 먼저 선을 보였는데, 1권은 <진시황과 이사>, 2권은 <항우와 유방>이다. 그런데 왜 한나라일까. 작가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서양 문명에서 로마제국에 해당하는 것이 동아시아에서는 한나라다. 로마가 서양 역사에서 하나의 전범이듯, 한나라 역시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그러했다.” 역사의 큰 줄기를 잡아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고정관념처럼 굳어진 몇몇 인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거나 혹은 동양적 성공신화의 모델이 된 사건을 재발견하게 해준다. 예컨대, 폭군으로만 알려진 진시황. 그는 왜 그렇게 욕만 먹었나. 비슷한 업적을 쌓고도 서유럽에서는 영웅이 되고(알렉산드로스 황제), 동아시아에서는 악당이 되는(진시황제) 이유는 무엇일까. 평민 출신도 천자가 될 수 있다는 궁극의 출세
[도서] 유방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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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올 문학상은 없다 싶었는데 하나 더 추가. 문학동네에서 <제1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냈다. “한국 문단의 최전선”에 서 있는 “젊은 감각”을 지닌 작가들의 단편이란다.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김중혁과 배명훈을 찾자. 대상을 받은 김중혁의 <1F/1B>는 상가건물 관리자라는 ‘소외’의 아이콘을 요리조리 굴리는 손맛이 백미다. 건물 관리자들이 비밀 지하벙커로 모여 외부 공격에 맞선다는 장르적 설정도 있고, 지하벙커가 ‘1F’와 ‘1B’ 사이에 존재하는 ‘/’(슬래시) 같은 공간이듯 관리자들 자신도 그런 존재라는 한국문학적 통찰도 있다. 진지한 투로 건네는 썰렁한 농담도. 건물관리자연합 회장이 펴낸 책을 보자. “우리는 손을 뻗어서 형광등의 열기에 맞서 싸운다. 우리는 깜빡이는 형광등보다 외로운 존재들이다.”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는 철학적 아이디어 덕분에 이 작품집과 제법 어울리는 본격SF다. 과학자 신수정이 자살한 뒤 ‘나
[한국 소설 품는 밤] 이야기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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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소년 소녀의 지구는 일기와 편지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어딘가에 일기와 편지에 쓰인 일들이 일어나는 가상우주가 있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매일 소풍을 가거나 가족과 외식을 했다. 요즘처럼 실시간으로 트위트와 리트위트를 반복하는 시대라면 코웃음칠 펜팔이라는 문화는 어땠나. 매일같이 우리는 묻고 또 물었다. 하우 아 유?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자문자답. 아임 파인 땡큐. 우표 수집을 취미로 갖지 않은 아이가 없었고, 정 할 말이 떨어지면 <펜팔 예문집>에 나온 남의 일상을 베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때 그 일이 좋다 아니다를 말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가끔은 몹시 그리워진다. 글이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나만의 가상현실.
<연애편지의 기술>을 보면 소싯적 편지 한통으로 지구를 정복할 기세였던 지난 세기의 몇몇 순간이 떠오른다. 편지는 소통이라고 배웠는데 사실 대부분은 혼잣말이고 넋두리였다. <연애편지의 기술>에서 편지를 쓰고
[도서] 이 미친 유머감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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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다 읽었다. 가볍고 술술 읽히는 소품이다.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있지만 추리소설이라기엔 아쉽고, 으스스한 분위기는 있지만 공포소설이라기엔 부족하다. 그런데도 미간에 주름 잔뜩 잡고 두근거리면서 읽게 만든다. 책읽기가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 있다면 이런 책들 때문이 아닐까.
‘바벨의 모임’이라는 수수께끼의 사교모임을 둘러싼 연작 소설인데, 사실 모임 자체가 사건의 중심에 서는 일은 없다. 상류계급의 영애들만 가입 가능한 문제의 독서모임 ‘바벨의 모임’의 멤버들이 각자 겪은 이상한 일이라는 편이 맞겠다. ‘마지막 한줄의 반전’이라지만 대개 짐작 가능하니 너무 크게 기대하지는 말 것. 책을 좋아하는 몽상가로 십대를 보낸 소녀라면 손톱을 마구 깨물며 부모에 대한 불만과 세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몸부림치던 성장기를 떠올리게 되는 대목들을 만나게 된다. 집사물 덕후라면 이 책에 각별한 애정을 느낄 듯. 소녀를 보필하는 소녀라니, 거참….
요즘 이런 작은 모임을
[도서] 후루룩 연작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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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책에는 두 종류가 있다. 언급되는 책을 읽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경우, 언급되는 책을 읽지 않으면 충분히 즐길 수 없는 경우.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은 후자에 속한다. 제목부터 그렇지 않나. 세계가 ‘두번’ 진행되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는 한번 진행된 적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정혜윤은 이번 책에서 고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이 고전의 제목과 내용은 대강 알지만 읽은 적은 없는 독자에 속한다면,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 이상을 얻기는 힘들다. 이 책들을, 카프카의 <변신>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었다면, 정혜윤은 그 세계가 다시 진행되는 언어의 숲으로 당신의 손을 잡아 안내한다. 맹세컨대 당신이 이 책들을 어제 읽었다 할지라도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을 읽으
[도서] 사랑하는 그 세계에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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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못하는 김 여사가 아니라 칼질 잘하는 심 여사라니 쫄깃하다. 쉰한살, 정육점 심 여사는 자식 먹여살리려고 흥신소 킬러가 되기로 결심한다. 미행하려면 안경 쓰고 무릎에 패치 몇장 붙여야 하는 우리네 엄마 같은 그녀가 냉혹한 킬러의 세계에 뛰어든다니! 놀랍게도 그녀는 흥신소 첫 미션, 전남편 재산 긁어먹는 찜질방 여주인을 야무지게 해치운다. 잠깐만. 정육점 경력이 아무리 길어도 그렇지, 금방 프로 킬러가 될 수 있어?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런 의심은 잠시 접을 만큼 설정이 재미나다는 것이다.
<심여사는 킬러>는 만화잡지 <팝툰>에 실린 작품으로 잡지 연재에 어울리는 구성을 갖추고 있다. 각 장에 심 여사와 주변인의 사연이 하나씩, 미니소설처럼 소개되는데 그들 이름이 제목이다. 심은옥, 박태상, 오신자…. 부모님 계모임에서 들어봄직한 이름들. 강지영 작가는 이들을 재래시장이나 유흥가 골목, 동네 찜질방에서 한번쯤은 마주칠 캐릭터로 감칠맛나게 그려낸다.
[한국 소설 품는 밤] 가장 보통의 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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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영의 비평집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에 실린 두편의 우정어린 발문에서 정성일은 ‘이상하다’라고 말하는 허문영의 질문으로 시작하여 허문영 비평의 욕망을 새롭게 밝히는 정치한 메타비평을 성취했고(발문1), 김혜리는 느리게 ‘말한다’는 허문영의 습관으로 시작하여 그의 몸의 기질과 글의 관계에 관하여 우아하게 중계했다(발문2). 나는 ‘대면한다’고 쓰는 허문영의 비평적 생존의 의지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이 책의 감상평을 짧게나마 대신하려고 한다. 그가 이 말을 얼마나 자주 쓰는지 의식해보지 않았으나 점점 더 허문영의 글쓰기에서 중요해지는 건 그것이며 내게는 들을 때마다 가장 울림이 깊은 그의 표현 중 하나다.
허문영은 꾸준하게 한국영화의 무언가를 만나길 청해왔다(1부, 한국영화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그 때 그는 공고한 용어에 의탁하지 않아도 혜안의 조감도가 가능하다는 걸 매번 입증함으로써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동시에 그가 만나기를 가장 즐겨했던 것은 그가 사랑하
[도서] 그 글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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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북디자인>은 1935년부터 2005년까지 출간된 펭귄 책 표지 디자인의 역사를 담았다. 한권의 책에 도판 500개. 현대 출판물의 역사를 아우르는 의미로도 부족함이 없는 저작이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펭귄 클래식’으로 가장 익숙한 출판사로 현대적이고 대담했던 초기 문고본 디자인부터 두루 눈에 익은 책들이 등장하지만 내용 면에서 낯선 시리즈도 있다. ‘펭귄 스페셜’이라고 불리는 TV 시사프로그램에 어울릴 법한 폭로적 저널리즘 시리즈가 대표적. ‘펭귄 스페셜’은 전운에 휩싸인 유럽의 분위기를 반영한, 신문과 잡지보다 깊은 읽을거리를 보급판으로 선보인 것이었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상식>(1940), <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중국>(1939), <왜 영국은 전쟁에 뛰어들었는가>(1939), <전쟁의 새로운 방법>(1940)과 같은 책들이 공격적인 수평선과 강렬한 타이포그래피의 표지로 선보였다. 이 시리즈는 1960년대 들어 각종
[도서] 책덕후 최후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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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소설 속 젊은이들더러 그렇게 무기력하게 살지 마, 라고 말한다면 꼰대 소리를 들을까? 어쩔 수 없다. 책을 보는 내내 한숨이 나왔단 말이다. 이 반짝이는 청춘들이 왜 그토록 밋밋하게 사는가. 주인공 ‘나’, 성실하게 편의점 알바 뛰는 모습이 예쁘기만 하다. 또 ‘나’의 지인들, 평균 이상으로 멋지다. 동료 J는 마르고 키가 크고 피부가 희어 뮤지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청년으로, 특별히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어 몇년간 알바를 하며 자유로이 살아왔단다. 또 J가 짝사랑하는 카페 알바, 별칭 물고기는 흉터를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길고양이와 낡은 책을 좋아하며 거리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을 줄 아는 아가씨다. 패션잡지 빈티지 의상 모델이 떠오르는 모습이다.
콤플렉스 없이 어여쁜 청춘, 상큼하다. 늘어지지 않는 산뜻한 문장들도 한몫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 단체로 무기력증에 빠진 모양이다. 꿈도 없고 야심도 없다. 사회질서에 편입되기 싫어하건만 바깥으로 탈주하고픈
[한국 소설 품는 밤] 이 상큼한 무기력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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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개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추위가 가시지 않았는데 시범경기가 치러지는 야구경기장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인파가 몰려 야구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딱 알맞은 때 <야구생활> 1호가 발간되었다. 각 팬덤을 대표하는 ‘야구생활자’들이 모여 만든 이 책은 잡지를 지향하는, 일단은 1호가 발간된 책인데, 시시각각 뜨거워지는 야구 팬덤의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2009년을 결산하고 2010년을 내다보는 의미의 팀별 에세이들이 실려 있어, 감격적이었던 추억이나 울컥 속상했던 순간을 정리하게 해준다. <프로야구 카툰>을 연재하는 최훈과의 긴 인터뷰도 실렀다. MBC ESPN 박상언 PD와 <해태타이거즈와 김대중>을 쓴 김은식, <리더 김성근의 9회말 리더십>을 쓴 ‘이데일리’ 정철우 기자 등이 필진으로 힘을 보탰다. 한참 야구열기가 뜨겁던 80~90년대와 참 많이 달라진 팬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망한’
[도서] 야구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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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혹은 나뭇잎 한장. 장편소설(掌篇小說)이나 엽편소설(葉片小說)이라고 불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콩트 모음집이다. 작은 판형에 290여쪽, 그런데 68편이나 실려 있는 건 그래서다. 이야기 하나가 두세 페이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설국>으로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도 유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의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책이다. 그가 젊은 날에 (이십대였던 1921년부터 1935년 사이) 쓴 이야기들이라 <설국>과 <잠자는 미녀> 같은 작품들에 이르는 단초가 되는 ‘발상’을 만날 수 있어 흥미롭다. 여자의 몸, 어린 여자의 몸, 생명, 삶, 죽음, 희생을 비롯한 죽음과 맞닿는 탐미주의적인 아름다움을 탐색하는 이야기도 있고, 예상외로 쿨한 연애담도 있고, 환상담도 꽤 있다.
이야기 내용 자체에 집중해 호불호를 가르는 일도 의미있겠으나, 그보다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 있다. “많은 작가들이 젊은 시절에 시를 쓰지만, 나는 시 대
[도서] 거장의 젊은 손바닥에서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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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다. “막 암전되는 화면처럼 어두운 눈”을 지닌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소년 같은 얼굴과 곧게 뻗은 팔다리, 매혹적인 목소리도 지녔단다. <바람이 분다, 가라>의 서인주 얘기다. 그림은 그리는 순간만이 중요하다며 캔버스 대신 곧 퇴색될 산성지를 택한 화가. 모두가 그녀에게 끌린다. 예술에 매혹되듯. 그리고 모두가 그녀의 내면을 속속들이 파악했다고 믿는다. 예술을 분석하듯. 서인주의 평생지기인 희곡작가 이정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맹렬하게 살던 서인주가 자살했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서인주의 죽음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그러나 본격 추리를 기대하면 곤란하다. 이정희는 서인주를 자살한 천재 화가로 미화하려는 평론가 강석원에 맞서 그녀의 죽음을 조사하기로 결정한다. 탐정이라면 서인주가 죽은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목격자와 증거는 있는지 조사하겠지. 대신 이정희는 서인주의 작업실에 침입해서 유품을 매만지며 기억을 더듬는다.
[한국 소설 품는 밤] 서늘한 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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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당신의 ‘고향 도시’에 생각해보라. 도시는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멜랑콜리와 그리움으로 가득한 영혼의 공간이기에, 그에 얽힌 감정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세계 최대 규모의 열두 도시에 살고 있는, 혹은 살았던 작가들이 ‘고향 도시’에 대한 글을 썼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났거나 오래 살았던 한 도시에 대해 사랑하고 미워하는 도시와 삶의 풍광을 자유롭게 그려냈다. <스테이>는 열두 도시에 대한 열두 작가의 글을 담았는데, 모두 다른 이야기지만 어찌보면 서로 닮아 보이는 감상을 자아낸다. 복합적이고도 복잡한. 냉소적이고 자조적이지만 애정을 부인할 수는 없는. 돌아는 가는데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모두 돌아버리게 만드는 현실에 대한 농담이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아마 당신이 가장 뼈아픈 감정으로 읽게 될 글은 김영하가 쓴 서울에 대한 글 ‘단기기억상실증’일 것이다. “서울은 어쩌면 정신과적 상담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미치지는 않았을지 몰라
[도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서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