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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지붕 아래 살며 일신의 영화를 도모하시는 어느 장로님을 볼 때면, 정말 천국이 있고 저 양반도 그곳으로 가는 것일까 오싹해진다. 특정 종교를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다만 종교에 헌신적인 국가가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다는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그게 사실일까 의심하게 되는 현실을 살고 있다.
종교와 사회의 관계를 사회과학적 시선으로 밝히는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는 그 어떤 나라보다 비종교적인 두 국가, 스웨덴과 덴마크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그 맥락을 짚어내려는 시도다. 종교를 불신하고 배척하는 태도가 아니다. 특정 종교의 교리를 따라 살지 않을 뿐이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한다, 전통이니까. 아이를 낳으면 세례를 받게 한다, 노모를 위해서. 하지만 죽은 뒤에 천국이 있다고 믿지 않으며, 지도자를 선출할 때 어떤 종교를 믿는지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불신지옥’을 믿는 사람들에게 스웨덴과 덴마크는 가장 ‘죄가 많은’ 곳인데
[도서] 불신지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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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에세이집은 밀란 쿤데라가 살면서 만나고 영향받은 예술가와 예술작품에 대해, 단순히 좋아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근원적인 의미에서 애착을 갖고 말하고 싶기 때문에 굳이 글로 써야 했던 예술의 이야기다. 밀란 쿤데라 전집 중에는 14번째다(현재 이가 빠진 상태로 <농담>부터 <삶은 다른 곳에> <웃음과 망각의 책> <불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느림>이 먼저 출간되었다). 첫 번째 글인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1부 ‘화가의 난폭한 몸짓’, 실존 측정기로서의 소설 몇편을 살피는 2부, 아나톨 프랑스에 대한 글부터 라블레와 베토벤을 경유하는 3부와 4부 등 이 책은 회화, 시와 산문, 음악, 그리고 예술의 사회참여를 두루 다룬다. 야나체크의 이름이 하루키의 <1Q84>로만 알려져 안타깝던 차에 7부 ‘나의 첫사랑’은 거의 수호천사를 발견한 기분이 들 정도로 멋지게
[요즘 뭐 읽어?] 불친절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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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긴 했다. 죽음의 숲은 실재할까? 정말 영능력자는 있을까? 러브돌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메이드 카페에서 일해본다면 어떨까? 난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오자와 가오루는 그 수많은 호기심을 대신 해결해주는 만화가다. 자고로 취재라고 하면, 무엇을 하기 위한 뒷받침 정도로 해석되기 마련이지만, <수상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는 오로지 취재를 위한 취재기다. 취재를 바탕으로 플롯을 짜는 게 아니라 취재담 자체를 만화로 그렸다. 흑백으로 실린 사진보다 과장법을 아끼지 않는 만화쪽이 더 웃긴다.
남성 불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생치료법을 받기로 한 작가. 최면요법을 통해 알게 된 전생은 몸파는 여자로 살다가 걸리는 애인들마다 돈을 떼어먹거나 가정폭력을 행사, 50대 중반에 죽은 사연이었다. ‘죽음의 숲’ 탐험 이야기는 총 3번에 걸쳐 나온다. ‘죽음의 숲’에 관한 도시전설에 잔뜩 긴장한 작가는 폐허와 죽음의 숲을 전문적으로 탐험하는 사람을 따라 숲에 갈 때마다 해골을 발견하
[도서] 우리는 진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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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을 처음 제대로 알게 된 사연은 몇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방송을 같이 하던 라디오 PD가 방송시간을 기다리며 ‘아는 동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아는 기자 중에 정말 재미있는 애가 있어.” 당시 주변 사람들의 잇단 자살로 언론을 피하던 여자 연예인의 독점 인터뷰 기사가 어느 주간지에 실린 직후였는데, 그 인터뷰를 성사시킨 게 바로 그 ‘재미있는’ 기자라는 말이었다.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는 이제 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요점만 말하면 아무와도 말하지 않겠다고 하는 ‘누나’들을 인터뷰 자리로 끌어내는 데 특출난 재능이 있다고 했다. 그가 일하던 잡지의 창간호에 실린 신정아 인터뷰 특종을 기억하고 있던 터라, 대체 어떤 비결이 있기에 그런 독점 인터뷰를 할 수 있냐고 물었다. 답은 간단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라, 들어주겠다. 그리고 어떤 편향성도 갖지 않고 기사를 쓰겠다”는 신뢰를 심어준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말하는 게 착하고 어수룩한데 열심히 설득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이기자도 누나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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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획하고 해설을 쓴 세계문학단편선집 시리즈 <바벨의 도서관>이 전 29권으로 완간되었다. 보르헤스의 걸작 <픽션들>에 수록된 유명한 단편 제목과 같은 이름의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백발의 보르헤스가 실명의 암흑에서 회상해낸 문학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가장 가까이 맞닿은 서사모음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는 물론 고딕소설의 기원인 벡포드, 환상소설의 선구자인 카조트, SF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힌튼을 비롯한 작가 40여명이 시리즈에 이름을 올렸다.
작품 선정 기준은 주관적이고 편향적이며, 그래서 다른 세계문학전집과는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 마치 보르헤스의 사적인 도서관에 자리를 허락받는 듯한 경험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유년기의 경험으로 인도받고 앞이 보이지 않는 그의 머릿속 문학 지도를 함께 더듬는 것 같은 재미를 준다.
이 시리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보르헤스의 작품 해설만을 모은 <바벨의 도서관-작품
[도서] 소설을 사랑한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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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참자>는 ‘2010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와 ‘문예춘추 선정 미스터리 베스트10’ 양쪽의 1위에 이름을 올렸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점은 ‘인간미’와 ‘캐릭터’, 그리고 ‘트릭’의 세 꼭짓점을 이해하기 쉽게 이을 줄 안다는 것. <신참자>가 특히 그렇다. 가가 형사라는 캐릭터는 매서운 형사보다는 선량한 동네 아저씨, 소시민에 가깝다. 보통의 경우에서라면 용의자로 낙인찍혀 매서운 추궁을 당할 사람들이 이 소설에서는 형사와의 대화를 통해 위로받는다. <신참자>는 아홉개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연작 단편 구성인데, 이혼한 뒤 혼자 살던 40대 여성 미쓰이 미네코가 목졸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 뒤 최근 관할서를 옮긴 가가 형사가 사건을 수사하며 피해자 주변을 탐문하면서 작은 거짓말과 비밀을 밝혀낸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살인사건과 관계있는 거짓말은 물론 아무 관계없는 거짓말도 아무렇지 않게 해버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가 형사는 굳이 필
[도서] 인생을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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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국어판 서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로사회>의 첫 문장은 이렇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항생제의 발명으로 바이러스적이었던 한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면 21세기의 시작은 신경증적이었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한병철은 이런 질병이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것임을 지적한다. 타자성은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피로사회>를 읽을 때 가능한 한 많은 단어들의 뜻을 저자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노와 짜증이라는 단어를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천재 백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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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정치다. FTA 문제가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 ‘노무현 FTA는 좋은 FTA이고, 이명박 FTA는 나쁜 FTA’라는 주장을 펴는 일은 어불성설일뿐더러 위험하다.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우파 신자유주의가 마음에 안 든다고 좌파 신자유주의로 갈 위험을 경고한다.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보수진영 못지않은 ‘웃기(지도 않)는 짓’ 580종 퍼레이드를 보여주고 있는 와중에 4월11일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진보진영의 정치인들과 진보를 자처하는 유권자들이 갖고 있는 ‘진보’라는 개념에 대한 가치판단이 사뭇 다르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매일의 뉴스를 봐야 하는 상황만으로 충분히 골치아픈데,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 먹고살 궁리가 더해진다. 이번 총선과 나아가 대선이 유권자의 ‘먹고사니즘’이 이념과 계급을 뛰어넘은 환상의 응집력을 보였던 지난 대선의 판박이가 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아니, 근본적
[도서] 먹고사니즘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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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안 좋은 상황에서조차 잘도 적응한다. 사랑받을 타이밍을 분간하지 못하는 상황보다 얻어맞을 타이밍을 알아챌 수 있는 쪽을 선호하게 된다. 적응이란 그런 것. 그래서 게을러진다. 혹은 두려워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사라 베이크웰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기 시작한 이유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커닝해볼까 하는 꼼수였는데 이게 웬걸. 생각했던 것과 내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단 <어떻게 살 것인가>는 몽테뉴와 그의 주저인 <수상록>을 다룬 책이다. <수상록>을 읽어주는 책 정도로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몽테뉴는 어떻게 살았기에 <수상록>을 썼을까”를 말한다(책을 1/3쯤 읽고 나서야 <수상록>을 읽어주는 책이 필요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는데, <수상록>은 살인무기로 써도 될 정도로 두껍다는 압박이 있으나 알랭 드 보통을 비롯한 현대 에세이스트들의 고조할아버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평범하고 불완전한 사람이 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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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은 온통 녹색이었다. 걸프전쟁 말이다. <CNN>을 통해 방송된 야간폭격장면은 이후 전쟁영화의 표현양식을 바꾸었다. 전쟁은 게임에 가까워졌다. 무한히. 피와 살을 전시할 수밖에 없었던 베트남 전쟁의 시각적 충격이 반전운동으로 이어졌다면 녹색 화면에서 작게 반짝이는 섬광은 마치 그게 인간의 죽음이 아닌 0과 1의 디지털 세상에 속한 듯 느끼게 만들었다. 미국 <CBS> 온라인 뉴스의 과학기술 전문기자인 피터 노왁이 쓴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는 그 녹색 화면을 다름 아닌 패리스 힐튼의 섹스비디오 유출사건과 연관짓는 데서 출발한다. 패리스 힐튼 섹스비디오에 나오는 속살은 화사한 분홍색이 아니라 온통 에메랄드빛. 야간투시기법으로 촬영된 화면이 부르는 기시감. 단순한 호기심은 파고들수록 소비재 전반에 대한 통찰로 이어져서, 비닐봉지부터 헤어스프레이, 비타민, 구글 어스까지 군에서 출발한 기술에 기반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포르노산업
[도서] 섹스와 전쟁, 손에 손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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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역시 누군가 24세 넘은 아줌마나 아저씨가 필요해.”
몇번을 읽었는지 셀 수 없지만 읽을 때마다 다른 대목에서 웃게 되는 강경옥의 <17세의 나레이션>인데 이번에는 방학 때 함께 놀러가기로 한 고등학생들의 대화에서 빵 터졌다. 생각해보면 나는 17살 때, 35살까지 살고 나면 모든 게 너무 다 정해져버려서 인생이 지겨워질 거라고 생각했고 그쯤에는 죽는 게 좋겠다고 결론냈었다. 선생님들이(생각해보면 당시 신생학교 선생이었던 그들 태반이 지금의 나보다 어렸다) 우리를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너희는 아무것도 안 해도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할 때 코웃음쳤고 “공부만 하면 된다는 게 얼마나 좋은 줄 아냐”는 훈계를 끔찍하게 경멸했었다. <17세의 나레이션>의 주인공 세영이는 상담에 응해준 대학생 오빠에게 털어놓는다. “17살도 세상은 살기 힘들어요.”
처음 읽었을 때는 그저 애틋한 연애물이었지만 <17세의 나레이션>은 국산 청소년 소설이 부재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17살도 세상은 살기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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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책은 길고도 다채로운 변천사를 가졌다. 90년대 초반에는 <세계를 간다> 시리즈가 바이블이었다. 일본 책을 중역했네 지도가 안 맞네 해도 대안이 없었다. 90년대 중반이 지나 배낭여행이 활성화되면서 가이드북이 하나씩 늘었고 2000년대는 여행에세이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직장에 사표를 쓰고 1년쯤 살다온 런던, 뉴욕, 파리 이야기라든가 하루에 1달러로 생활하는 타이, 베트남, 인도 이야기라든가 쇼핑을 위해 떠난 도쿄, 홍콩, 뉴욕 체류기라든가. 워낙 책이 많이 나오니 읽을 만큼 읽었다고 생각해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지 않는 한 여행에세이라는 장르는 늘 봄볕 드는 양지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게 된다.
<열대식당>은 타이,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에서 먹은 이야기를 모았다. 매연 그득한 길거리에서 사먹는 화려한 맛(달고 시고 매운)의 한 접시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그 후끈한 공기까지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순전히 먹기 위해 방문
[도서] 떠나려는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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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슨은 고유명사였지만 일반명사화되었다. 미스터리 소설에서 왓슨 역할이라고 하면 비중있는 조연이라는 뜻도 되고,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주인공인 남자 탐정과 공수관계를 형성하며 유사 연애를 지속하는 캐릭터라는 뜻도 되고, 탐정의 천재성을 기록하는 화자라는 뜻도 된다. 하지만 스릴러/하드보일드 소설의 주인공에게는 왓슨이 필요없다. 주인공의 파트너는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한데 그 파트너가 죽는 일도 있으며 대개의 경우 그는 ‘고독한 이리’다. 그는 불행한 과거사(특히 부모에 얽힌)로 번민하고, 헤어진 여자를 못 잊고, 술을 고래처럼 마신다. 그의 능력은 인정받기보다는 질시와 모함의 대상이 되며 묘하게 섹시한 구석이 있어 멀쩡한 여자들이 기꺼이 그의 품에 안긴다. 노르웨이의 소설가이자 뮤지션이자 저널리스트이며 경제학자이기도 한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의 주인공 해리도 그런 ‘고독한 이리’과다. <스노우맨>은 9권까지 나온 이 시리즈의 일곱 번째 책인데 데니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이 남자 섹시하다람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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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퀴즈. 답을 맞혀보시라. 스티브 부세미가 순진남으로 등장함. 영어 원제와 한국 개봉명의 느낌이 180도 가깝게 차이남. 스칼렛 요한슨이 주인공 친구로 나옴.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에 만들어졌음. ‘발칙한’, ‘소녀’, ‘성장’ 같은 태그를 달고 다니는 <주노>의 언니인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원작 <고스트 월드>의 대니얼 클로즈의 2010년작 그래픽 노블 <윌슨>이 출간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하릴없이 동네 ‘죽순이’로 시간을 보내며 투덜거리고 스토킹하고 섹스하던, 가짜에 대한 예민한 감식안을 지닌 두 소녀 이니드와 레베카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윌슨>의 주인공 윌슨은 아저씨이긴 해도 소녀들의 도플갱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한 페이지에 하나의 에피소드, 하지만 첫장부터 끝장까지 이어지는 내러티브. <윌슨>의 첫화 ‘우애’의 첫 대사는 “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인데 페이지 마지막 칸에 가면 윌슨은 분노하
[도서] 위대한 피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