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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생, 대학생일 때 방송가, 영화판, 가요 바닥이라는 단어를 썼다.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채로 규모가 작은 시장이었기 때문에 ‘판’이나 ‘바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지난 10월 26일, CJ문화재단과 <씨네21>이 함께하는, 미래의 스토리텔러를 육성하기 위해 진행하는 ‘스토리업’ 특강에서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그처럼 열악했던 과거의 ‘대중문화판’을 회고했다. ‘판’과 ‘계’가 어떻게 다르냐 물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이후 산업의 규모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영화는 물론 음악까지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가고 있다. 물론 그 둘을 합해도 이제는 게임시장 하나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이제 영화판이나 가요 바닥이 아닌 ‘음악계’와 ‘영화계’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는 서글픈 현실이다.
그날 임진모 평론가의 특강 내용 중 흥미로운 대목은, 세대가 완전히 분리된 음악과 달리 ‘손에 손잡고’ 볼 수 있는 영화를 향한 부러움이었다. 요즘 남녀노소 다
[주성철 편집장] 영화와 음악 그리고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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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봄/여름 헤라 서울패션위크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에서 막을 내렸다. 패션 디자이너 이한철은 젊은 남성복 브랜드로 고심한 흔적이 묻어났다. 헨델이 작곡한 오페라 <세르세>의 주인공이 부르는 <Ombra mai fu>가 불이 들어온 무대를 채웠다. 경건한 음악을 미성으로 부르는 고전 오페라는 거세 가수를 염두에 둔 음역으로 작곡했다. 그래서 현대에는 카운터테너와 남성을 연기하는 여성 성악가가 부른다. 안드레아스 숄의 1999년 음반이 떠오른다. 검정 테일러드 재킷과 카무플라주 MA-1 재킷, 짧은 메시지를 휘갈긴 크롭 상의와 과장되게 커다란 민소매 데님 재킷과 청바지를 입은 모델들이 무대를 점령했을 때는 노래가 마릴린 맨슨의 <Killing Strangers>로 바뀌었다. 옷깃과 헝클어트린 소매가 인상적인 라이더 재킷은 딱 지금 젊은이들의 옷이다. 고전 남성복과 워크웨어에서 영향을 받은 아이템이 가득하지만 간결한 디자인과 공식을 따르지 않은
[마감인간의 music] 안드레아스 숄 《Handel: Ombra mai fu》 (1999), 음악으로 패션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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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으로서의 페미니즘은 비판적 실천 학문이라는 계보 속에 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의 비판은 종종 파시즘적 광기를 동반한 비합리적 감정의 분출로 간주되거나(‘페미 파쇼’), 성차별 반대라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잔인해질 수 있는 나치(‘페미 나치’)로 묘사된다. 파시스트든 나치든 모두 지독한 국가주의자들인데,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외쳐왔던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어리둥절할 일이다. 페미니즘은 지금까지 보편으로 간주되어온 지식의 권위를 묻고 또 물으며, 권력의 작동 과정을 심문하고 그 자신이 권력이 되는 것을 경계해 왔고, 그렇기 때문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실천’은 페미니스트로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비판이란 무엇인가. 1978년 5월, 푸코는 ‘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비판이란 곧 ‘알고자 하는 용기’라고 정의했다. 앎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 앎을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라고 한다면, 무엇이 지식이고 무엇이 권력인지를 단순히 서술하는
알고자 하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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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맨>은 우주탐사 영화로서는 드물게 폐소공포의 감각을 부른다. 1960년대의 달 탐사선 내부는 극히 협소하고, 닐 암스트롱(라이언 고슬링) 가족이 거주하는 공동체는 외부 미국 사회로부터 단절된 캡슐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좁은 숏을 자주 쓴다. 이 영화의 많은 클로즈업에는 배우의 얼굴과 함께 다른 요소가 포함돼 있다. <퍼스트맨>에서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닐 암스트롱의 얼굴- 특히 눈- 과 거기에 비친 반영들이다. 바이저 위에 떨어진 태양빛과 지평선의 반영, 우주의 암흑과 마침내 착륙한 달의 광야까지. 이 영화의 풍경은 닐 암스트롱이라는 고독한 개인의 얼굴과 자주 포개진다. 셔젤 감독은 아폴로 11호가 찍은 영상을 LED 패널에 구현해 라이언 고슬링이 실제로 바라보며 연기하도록 했다.
10/09
<스타 이즈 본>은 운이 상승하는 한 사람과 하강하는 한 사람의 궤적이 교차하는 러브 스토리다. 두개의 선은 한점에서 마주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나는 달을, 달은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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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르네 랄루 / 목소리 출연 장 발몽, 미셸 일라이어스 / 제작연도 1982년
시간을 지배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능력과 시간을 지배하는 능력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당신은 무엇을 택하겠는가. 르네 랄루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 <타임 마스터>는 내가 지금까지 본 시간에 관한 영화 중 단연 돋보인다. 프랑스어 원제는 <Les Ma tres du Temps>(시간의 지배자)다.
어떤 과학자 부부가 3살 정도 된 아들 삐엘과 함께 우주를 여행하던 중 뻬르디르 행성에 불시착한다. 이 행성에서 부부는 엄청나게 큰 살인 말벌의 공격을 받아 죽게 되는데 부부는 죽기 전에 자신의 친구인 우주선 선장 자파에게 삐엘을 구해달라고 무전을 보내고, 삐엘에게는 무선마이크를 통신수단으로 쥐어준다.
자파는 친구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나는데, 우주선에는 자파의 여자친구와 자기 행성에서 보물을 훔친 뒤 달아나는 탐욕스런 왕자, 그리고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김종철 정의당 원내대표 비서실장의 <타임 마스터> 시간에 대한 외경심을 다룬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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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남인 채로 살았을 텐데.” 옛 연인을 만난 남자가 자신의 결혼에 관해 떠벌리는 중이다. 사랑 없이 그냥저냥 물 흐르듯 같이 있다가 한 결혼이란다.
KBS <최고의 이혼>은 일본 <후지TV>에서 방영된 동명의 원작을 리메이크한 드라마다. 남편 역의 대사는 같지만 ‘그런 일’은 양국이 다르다. 원작은 2012년 동일본 대지진 때, 걸어서 귀가하는 행렬 속에서 아는 얼굴을 만났던 것이 관계의 시발점이었다. 이들이 그나마 재난 속에서 불안감과 안도감을 함께 느꼈던 사이라면, 한국판의 인연은 사설보안업체 직원인 조석무(차태현)가 주거침입을 겪고 바들바들 떠는 강휘루(배두나)를 위로하며 시작된다. 불안감과 안도감은 휘루만 경험했을 감정이었다.
“당신은 아마 평생 모를 거야. 그만할래. 이제 당신 필요 없어.” 이혼서류를 내놓고 소파에 앉아 찐 고구마를 까먹던 휘루가 말한다. 같은 대사를 말하는 원작의 아내가 남편을 등진 채로 주방에 서서
[TVIEW] <최고의 이혼> 불안과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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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백>이 흥행 역주행을 이어가며 5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올해 초 ‘2018 한국영화 기대작’ 특집으로 <미쓰백> 이지원 감독을 미리 인터뷰하고, 용산CGV아이파크몰과 함께하는 ‘용씨네 PICK’ GV 시사회를 함께한 보람을 느낀다. 올해 초 그 특집 기사에서, 인터뷰를 가진 감독의 영화 중 <미쓰백>만 아직 배급사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언급한 것이 나름 도움이 됐다고 하니 그 또한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최근 GV 시사회에서 이희준 배우가 연기한 장섭 캐릭터가 어떤 ‘성취’를 이뤘다고 말한 것에 대해 뒤늦게 후회하는 중이다. 사실 그것은 ‘장면의 성취’는 될 수 있을지언정 ‘캐릭터의 성취’라고는 할 수 없는데, 성급하게 그런 표현을 썼던 것에 대해 굳이 변명하자면 다음의 이유가 있다. 바로 상아(한지민)와 장섭의 말다툼 장면 때문이었다. 한국영화 속 남녀의 말다툼은 언제나,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무언가를 내던지며 마무리되는 걸 익히 보아왔다
[주성철 편집장] 장면의 성취, 캐릭터의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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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절창하는 R&B가 별로 인기가 없다. 올해 상반기 큰 사랑을 받은 딘의 <Instagram>만 해도 고음이나 파워풀한 호소력이 아니라 끈적한 디테일과 분위기로 승부한다. 아이유의 10주년 싱글 《삐삐》도 편안하면서도 멋을 주는 디테일이 핵심이지 고음을 길게 끌면서 감탄을 부르지 않는다. 이런 트렌드는 R&B의 리더가 나얼에서 자이언티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젠 휘성의 <안 되나요> 같은 절창의 발라드를 들으면 좀 ‘옛날 음악’ 느낌이 든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게 또 아닌 것 같다. 유튜브에 구독자 168만명을 자랑하는 <창현 거리노래방>이란 채널이 있는데, 여기서 가장 큰 호응을 얻는 일반인들은 대개 파워풀한 성량과 고음의 쾌감을 선사하는 사람들이다. 얼리샤 키스, 임창정, 시아의 고음 후렴구를 정확한 음정과 떨어지지 않는 힘으로 소화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걸 보면 또 일반적인 가창력의 기준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마감인간의 music] 임창정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시, 임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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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EBS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한 허윤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과를 졸업한 언니들과 나>의 첫 장면은 감독이 제작한 단편영화의 엔딩 크레딧으로 시작한다. 다큐멘터리 속 화자인 나는 영화과를 졸업하고 영화를 만들어 원하던 감독이 되었다. 이 사실로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이유는 아마도 현실은 지금부터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다큐에는 화자를 포함해 모두 영화 만드는 일을 꿈꿨으나 영화와 무관해 보이는 일을 하고 있는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영화 찍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영화를 공부하는 동안 대출받은 학자금을 갚기 위한 것도 있다. 월세는 각자가 벌어 함께 부담하지만 그 또한 만만치 않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또 다른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은 언뜻 해묵은 ‘청춘의 현실과 이상’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로또 당첨 1년 후 근황”이라는 제목의 글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 드러나지 않은 지점을 생각하게 한다. 1년 전 로또 1등 당
결국 로또가 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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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아이>(2017)에 이어 올해 부산국제영화에서 공개된 신작 한국 독립영화들의 주요 관심사는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성인들로부터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미성년자다. 주로 10대 소녀인 이 인물들은 우연히도, 법적 보호자 대신 연고 없는 여자 어른들의 어깨에 기댄다. 성수대교가 끊긴 1984년 <벌새>(2018)의 중학생 은희(박지후)는 자신을 둘러싼 관계도 붕괴되고 있다고 느낀다. 사고로 부모를 여읜 <영주>(2017)의 영주(김향기)는 동생에게 좋은 보호자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던 끝에 아직 자기도 안아줄 팔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선희와 슬기>(2018)의 고교생 선희(정다은)는 위기가 닥치자 냉담한 부모와 상의하느니, 차라리 멀리 떠나 죽거나 완전히 다른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다.
10/04
1999년 <쥐잡이>로 데뷔해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까지 린 램지 감독이 내놓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생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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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미하엘 하네케 / 출연 장 루이 트랭티냥, 에마뉘엘 리바, 이자벨 위페르 / 제작연도 2012년
지난해 다리우스 콘지 감독과의 인터뷰 도중이었다. 만 3살에 운명처럼 영화와 사랑에 빠져버린 이야기에 이어, 무성영화 시대의 걸작부터 천천히 접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제7의 예술을 열렬히 경배하는 예술가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존경심이 들었다. 그날 밤, <아무르>를 다시 보았다. 그가 촬영감독으로서 잡아낸 눈부신 빛과 깊은 어둠을 따라가다보니 마지막에는 불을 삼킨 듯, 가슴이 뜨거워졌다. 슈베르트의 음악 속에 존재하는 천국과 지옥처럼 강렬한 대비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푸른 빛깔과 관조하는 듯한 카메라, 차가운 질감의 영상언어 너머의 불같은 에너지… <아무르>는 <하얀 리본>에 이은 미하엘 하네케의 또 다른 걸작이다.
2012년 <아무르>를 파리의 한 영화관에서 보았을 때, 주변에서 구급차를 불러주겠다고 걱정할
김나희 음악평론가의 <아무르> 왜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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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 허용되는 웃음의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KBS2 <언니들의 슬램덩크2>를 보며 생각한 적이 있다. 서열화, 무식배틀, 면박주기, 윽박지르기 등의 패턴으로 웃음을 만들었던 남성 리얼 버라이어티와 달리 절박한 상황에서 서로를 아끼며 열심히 방송을 준비하는 멤버들의 모습이 (시청률을 떠나) ‘여성 예능’의 모범처럼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유튜브와 VLIVE 앱에서 볼 수 있는 웹 예능 <판벌려2>는 두 세계의 사이에 있다. 컴백을 앞둔 ‘셀럽파이브’는 주장 김신영의 주장에 따라 걸그룹처럼 합숙하며, 휴대폰을 반납하고, 연애를 금지당하며, 식단을 제한당한다. 우리 사회에서 ‘걸그룹’의 이미지가 얼마나 인권침해적인 규범 위에서 만들어졌는지 풍자하려는 의도라면 좋았겠지만 그건 알 수 없고, 지금까지 <판벌려2>에서 웃음의 원천은 어처구니없는 룰에 반발하는 송은이, 신봉선, 안영미와 쓸데없이 호되게 기강을 잡으려는 김신영의 캐릭터에 있다. 휴대폰 없이 한
[TVIEW] <판벌려2> 웃긴 여자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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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 역시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특집이다. <호흡>의 권만기 감독, <메기>의 이옥섭 감독, <벌새>의 김보라 감독, <보희와 녹양>의 안주영 감독, <영하의 바람>의 김유리 감독, <아워바디>의 한가람 감독, <영주>의 차성덕 감독 등 7명의 한국 감독을 만났다. 반갑게도 올해는 여성 서사 영화들이 주목받았는데, 보통 남자배우와 여자배우에게 돌아가는 ‘올해의 배우상’도 <메기>의 이주영과 <아워바디>의 최희서, 두 여자배우에게 돌아갔다. 이상의 감독과 배우들은 평소 <씨네21>이 주목해왔던 이들이라 다시 한번 축하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영화제 인터뷰를 전하며 매번 가장 안타까운 것은 상당수의 독자가 영화를 보기 전이라는 사실이다. 올해 서울독립영화제에 소개되는 영화들을 비롯해 모든 영화들이 어서 개봉일을 확정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개인적으로는 원화평 무술감독 마스터클래스 소식
[주성철 편집장] 원화평 무술감독 마스터클래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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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에는 보통 오후 8시 조금 넘어 집으로 향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날짜는 10월 10일. 한데 오늘밤 귀갓길에 올해 들어 처음으로 ‘한기’를 느꼈다. 이럴 수가 있나. 2018년이 시작된 게 엊그제 같은데. 어쨌든, 이제 곧 겨울이 닥쳐올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준비 단단히 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에 이 노래, 마더바이브의 <Every Time You Call My Name>을 골라 감상했다. 마더바이브는 국내에 드문 비브라폰 연주자다. 비브라폰은 실로폰과 비슷하게 생긴 악기로 우리가 습관적으로 말하는 바로 그 소리,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소리를 낸다. 마더바이브의 전공은 원래 클래식이었다. 한데 유학 시절 재즈를 접한 이후 비브라폰 연주를 다양한 장르와 연계하기 시작했다. 재즈는 물론이요 펑크(funk), 탱고, R&B 등이 그의 경력을 관통하는 대표 장르들이다. 이번에 마더바이브가 발표한 싱글에는 <Mirror>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곡의 템
[마감인간의 music] 마더바이브의 <Every Time You Call My Name>, 좋은 소리를 듣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