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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디지털화되고 음악계 속도가 빨라지면서 아티스트들의 체력과 창의력도 전보다 빨리 소모되고 있다. 특히 일렉트로닉 댄스뮤직(EDM) 신에서 요즘 이 현상이 자주 목격된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많은 DJ 중 한명인 하드웰은 지난 9월 돌연 무기한 투어 중단을 선언하고 휴식기에 들어갔다. 언론과 팬들에게 보낸 입장문을 보면 그가 얼마나 지친 상태인지 짐작된다. “24시간 하드웰로 살다보니, 에너지, 사랑, 창의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생활이 거의 남지 않게 됐다.”
DJ 카니지도 11월 초 기약 없는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EDM 최전선에서 물러났다. 그의 경우는 좀더 심각하다. “정신 및 육체적 건강”을 언급하며 “위험신호를 더이상 묵과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다행이라 생각한다. 얼마간 그들을 볼 수 없어 아쉽지만 이제 아티스트들이 무조건 견디지 않고 솔직히 한계를 인정할 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재충전 뒤에 좋은 모습으로 돌아오면 그만이다. 팬들은
[마감인간의 music] 카이고 <Happy Now>, “이대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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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에서 출발해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휴전선 아래 파주까지 도착하는 세 남매의 여정을 함께하고 있다. 실은 지난 11월 2일부터 지금 촬영 중인 영화 얘기다.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경험을 만드는 행위다. 직간접 경험이 녹아든 시나리오를 토대로 스탭과 배우는 또 다른 실제 세계를 함께 창조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관객은 영화라는 그 경험의 결과물을 극장에서 경험한다. 4년 전, 그해 여름부터 겨울까지 진주에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썼다. 지금도 그 계절에 한 일이 시나리오를 쓴 건지 어느 가족을 ‘만난’ 일인지 기억이 종종 헷갈린다. 경험은 또 다른 경험으로 이야기가 되었고, 이듬해에 그 가족이 지나갔던 길과 머물렀던 장소를 되짚어 사진에 담았다. 이어서 만화를 그리는 작가가 그 사진과 시나리오를 가지고 꼬박 일년 동안 그들의 얼굴과 공간을 자신의 손으로 그려내는 경험을 했다. 이후 그 그림과 활자를 담은 책이 나왔고, 또 누군가는 감사하게도 만화로 먼저 세 남매와 가족을 만나
나에게서 너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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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가타부치 스나오 / 목소리 출연 노넨 레나, 호소야 요시마사 / 제작연도 2016년
2014년 곤 사토시의 미완성작 <꿈꾸는 기계>에 꽂혀 있던 나는 제작사 매드하우스와 연락하던 중 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마루야마 마사오 프로듀서가 <꿈꾸는 기계>를 미뤄둔 채 마파(MAPPA) 스튜디오를 설립해 창립 작품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의 한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장편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것. 제목은 <이 세상의 한구석에>. 감독은 <마이 마이 신코 이야기>(2009)의 가타부치 스나오. 그 후 3년이 지나고 2016년 10월 공개한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제19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에 소개되었고, 장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올해 가타부치 스나오 감독은 BIAF 포스터와 트레일러를 연출하는 한편 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마루야마 마사오·마키 다로 프로듀서는 곤 사토시 특별전으로 다시 방한했다.
김성일 프로그래머의 <이 세상의 한구석에> 그럼에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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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현지에서 먹힐까? 중국편>은 느긋한 기분으로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산둥 지방을 돌며 한국식 중화요리로 푸드트럭을 운영하게 된 이연복 셰프 이하 김강우, 서은수, 허경환 등 출연자들은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손발이 잘 맞으며 장사에 집중한다. 과도한 캐릭터 설정이나 ‘가족적’ 연출 대신 음식 장사의 어려움과 노련한 장사꾼의 대처를 볼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의 또 다른 재미는 다양한 손님들의 모습에 있다.
친구와 함께 온 중국인 청년은 서은수에게 한눈에 반해 짜장떡볶이를 주문한다. 둘이서 메뉴 하나만 시킨 게 궁상맞아 보일까봐 전전긍긍하다 추가주문도 한 그는 바닥에 떨어진 휴지까지 일일이 줍는다. 그런 친구를 위해 꽃 파는 아이를 찾아 꽃 한 다발을 산 친구는 “우리가 가고 나면 서은수에게 전해달라”고 말한다. 떨려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청년은 자리를 뜨면서 아이에게 “엄청 예쁘다고 말해줘”라고 당부한다. 그들이 남긴 것은 꽃다발과 휴대폰 번호가
[TVIEW] <현지에서 먹힐까?> 작업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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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김용 작가와 신성일 배우에 대한 추모글을 썼다. 하지만 뒤이어 세상을 떠난 스탠 리까지 겹치면서, 괜히 여운이 남는 데다 떠오르는 사람들도 있어 몇자 더 적으려 한다. 먼저 김용과 스탠 리는 함께 동서양의 판타지를 대표하는 이른바 ‘원천 콘텐츠’의 황제라 할 것이다. 김용 하면 자연스레 주성치가 떠오른다. 그가 연출을 맡은 <쿵푸 허슬>(2004)은 김용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합마공, 일양지, 양과, 소용녀, 신조협려 등 김용 소설에 등장하는 명칭을 사용하기 위해 하나당 1만위안씩 총 6만위안의 판권 사용료를 지불했다. 실제로도 가까운 사이라는 김용에 대한 애정은 깊은 것이어서, 이미 그는 김용 원작의 영화화인 <녹정기>(1992)에서 주인공 위소보를 연기한 적 있고, <무장원 소걸아>(1992)에서는 강룡십팔장, <식신>(1996)에는 암연소혼반(암연소혼장의 패러디)이라는 김용 원작의 무공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주성철 편집장] 김용과 신성일 두 번째 그리고 스탠 리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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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팬이라면 <My Way>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영화 <친구>(2001)의 유오성을 떠올릴 것이다. 뭐, 이 곡의 명성이야 두말할 필요 있겠나. 프랭크 시내트라가 1969년 녹음한 뒤 팝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건 일종의 상식에 속하는 영역이다. 한데 이 곡은 프랭크 시내트라 오리지널이 아니다. 프랑스 가수 클로드 프랑수아가 발표한 샹송 <Comme D’habitude>를 영어로 번안해 발표한 것이다.
내가 갑자기 오래된 팝 클래식을 언급한 까닭은 이렇다.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 프랭크 시내트라 버전을 감상하면서 ‘뭔가 좀 불편하다’ 싶었다. 그 이유를 곱씹어보다가 어느 순간 그만뒀는데 윌리 넬슨이 얼마 전 발표한 <My Way>를 감상하면서 비로소 알게 됐다. 일단 <My Way>의 가사를 보라. 자신의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겨우 한 소절 부를 수 있을, 그런 내용 아닌가. 그럼에도 프랭크 시내트라
[마감인간의 music] 윌리 넬슨 <My Way>, 곡을 해석한다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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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손등에 올라온 발진이 쉬이 가라앉지 않아 조금 겁을 먹고 병원을 찾았다. 나이 지긋한 의사 선생님은 대상포진을 걱정하며 호들갑을 떨던 나를 진정시키면서 그저 접촉성 피부염일 뿐이라고 약을 바르면 금방 괜찮아질 거라며 웃어 보였다. 지난 몇주간 만진 거라곤 노트북과 외장하드 밖에 없는데 대체 어디에서 무엇에 감염된 건지 알 수 없던 나는 다시 한번 오랜 피로 누적을 들먹이며 대상포진 의심을 시도했다. 하지만 인내심까지 많은 상냥한 선생님은 손을 너무 자주 씻거나 심한 미세먼지에 노출되는 등 다양한 요소가 원인이 될 수 있다며 혹시 출퇴근길에 공사 중인 곳이 있냐고 물었다. 생각해보니 편집실 근처에 두개의 큰 빌딩이 한참 올라가는 중이었고, 며칠 전부터는 하수도 공사까지 시작해 가까운 길을 두고 한참을 돌아가고 있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버스 정류장에 내려 걸어가는 도중에도 신축 빌라와 상점들이 생겨나고 있었네. 정류장 앞도 무슨 일인지 잔뜩 파헤쳐지고 있었고. 가만있자
서울은 공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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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재개봉하는 <페르세폴리스>는 마르잔 사트라피 감독의 자전적 그래픽노블에 움직임을 부여한 핸드드로잉 애니메이션이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기에 유년을 보내고 우여곡절 끝에 유럽으로 이주한 마르잔(키아라 마스트로이안니)의 성장기는 독특한 ‘액자’에 담겨 있다. 영화는 안정에 도달한 현재의 주인공이 타인에게 들려주는 향수 어린 추억담이 아니라, 여전히 불안과 결핍을 안고 사는 마르잔이 담배를 피우며 빠지는 회상이다. 그의 부모와 할머니는, 젠더 불평등이 만연한 폐쇄 사회에서 딸이 행복할 수 없음을 확인하자, 딸을 변화시키는 대신 떠나보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라며. 그리움에 공항까지 온 마르잔은 차마 테헤란행 티켓을 사지 못하고 대합실에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동시에 화면에서는 색채가 사라진다. 결말 즈음 영화가 다시 현재로 복귀하면 우리는 마르잔이 파리 공항에서 덧없이 보내는 하루가 이번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짐작에 이르게 된다.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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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평생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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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기타노 다케시 / 출연 안도 마사노부, 가네코 겐 / 제작연도 1996년
시작에 관한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피를 흘리며 링 바닥에 쓰러진 안성기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계속 해볼랍니다!”라고 외치는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날>(1980)을 좋아하고, 사랑했던 연인을 뒤로하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길을 떠나는 주성치의 <서유기 선리기연>(1995)을 좋아한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무래도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 리턴>이다. 목적 없이 부유하는 해파리 같은 고등학생 마사루와 신지. 수업은 흥미가 없어 학교에서는 노상 장난만 치고, 어른이 되면 뭐가 되고 싶으냐는 물음에 ‘프라모델’이라고 답하는 둘. 주위의 시선은 당연히 따갑기만 하고 어른들은 기대를 버린 지 오래. 언제나처럼 시시껄렁한 짓을 일삼던 어느 날, 권투 선수에게 두들겨 맞은 마사루는 그 선수가 다니는 체육관에 등록을 해버린다. 복수를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따라 구경
김보통 작가의 <키즈 리턴> 아직 상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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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과 에이트의 <심장이 없어>가 연이어 히트하던 시절, 친구들끼리 주고받던 농담이 있다. “살아 있나?” “노래는 부르네.” 여태 그러고 있으면 융통성 없단 소리를 들을 테지. SBS <흉부외과: 심장을 훔친 의사들>(이하 <흉부외과>)의 제목도 그저 (시청자의) 마음을 빼앗는다는 의미려니 했다. 정말로 첫회부터 의사가 심장을 훔쳐 달아날 줄이야.
대선후보에게 이식할 심장을 운반하던 태산대학병원 흉부외과 펠로 박태수(고수)는 수술방에서 그를 기다리는 집도의 최석한 교수(엄기준)를 등진다. 아끼고 따르던 선후배이자 파트너였던 이들의 분열을 되짚어가는 <흉부외과>는 의문과 반전을 수술방 안팎으로 짜넣는다. 하지만 생명과 직결되는 장기로 만들어내는 긴장은 윤리적인 거부감이 발생하기 쉬운 문제가 있다.
그 때문인지 드라마는 갈등이 빚어지는 응급과 이식수술 대부분을 의사들의 어머니, 형, 딸, 의사 본
[TVIEW] <흉부외과: 심장을 훔친 의사들> 심장이 정말 없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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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는 변동이 많았다. 무협 소설의 대가 김용 작가와 한국영화계의 큰 별 신성일 배우가 세상을 떠나면서 기존 편집안을 싹 바꿔야 했다. 송경원, 이다혜 기자가 김용에 대한 추억과 그의 작품들에 대한 헌사를 썼다. 나 또한 그로 인해 학창 시절 불면의 밤을 보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신성일 배우에 대해서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신성일 회고전과 야외특별전시를 준비하며 고인을 수차례 만났던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이 그 기억을 떠올렸다. 또한 기자들 저마다 <맨발의 청춘>(1964), <초우>(1966), <장군의 수염>(1968), <내시>(1968), <휴일>(1968), <별들의 고향>(1974), <길소뜸>(1985) 등 유독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들에 대해 썼다. 내가 더하고 싶은 작품은 이만희의 <원점>(1967)이다. 마치 장 피에르 멜빌 영화의 건조하고 쿨한 조직원처럼 근사하게 등
[주성철 편집장] 김용과 신성일, 그리고 남결영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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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시티팝을 종종 듣는다. 지금도 다케우치 마리야가 부르는 <Oh No, Oh Yes!>를 듣고 있다. 사실 이 곡은 시티팝이라는 장르를 통틀어 말하면 크게 유명한 노래는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장 매혹적인 시티팝 넘버로 남아 있다. 이 노래는 다케우치 마리야가 작사, 작곡했다. 시티팝의 아이콘 격인 <Plastic Love>의 주인공이자 위대한 뮤지션인 동시에 야마시타 다쓰로의 아내인 그분 말이다. <Oh No, Oh Yes!>는 그의 일곱 번째 앨범 《Request》에 수록돼 있다.
하지만 다케우치 마리야는 이 노래를 (1980년대 일본의 대표 아이돌) 나카모리 아키나에게 주기도 했다. 나카모리 아키나의 전성기 한가운데에 이 노래가 있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영상을 유튜브에서 본다면 누구라도 그녀에게 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케우치 마리야의 버전은 서정적이지만 나카모리 아키나의 버전은 농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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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인간의 music] 다케우치 마리야 <Oh No, Oh Yes!>, 시티팝의 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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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5일, 내가 미누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다. 사무실 앞에서 연행당한 그는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갇혔다. 말이 보호소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수감복을 입고 면회실의 아크릴 창 너머에서 친구들을 맞았다.
1992년 한국에 들어와 18년 동안 머물면서 그는 한국인과 이주민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다. 밴드 ‘스탑크랙다운’의 리더였던 그는 한국말로 이주민의 권리를 노래했다. 그와 나는 정부가 주최하는 다문화주의 세미나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을 비판한 건 나였고 한국에 고마워한 건 그였다.
보호소 면회실에서 그가 말했다. “나의 18년 한국 삶은 처절했다. 네팔의 가족들과 18년 동안 떨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은 가보지도 못했다. 남북이산가족을 제외하고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았겠는가. 만약 나의 18년 한국 삶이 가차 없이 부정된다면 나는 불효자로 네팔에 돌아가 아버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의 말에 모두가 울었다.
그러나 그는 네팔에 돌아가
미노드 목탄, 미누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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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실제 엔딩은 따로 있지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영화적 클라이맥스는 레이첼(콘스탄스 우)과 엘레노어(양자경)의 마작 게임이다. 전날 엘레노어의 아들 닉(헨리 골딩)으로부터 청혼을 받은 레이첼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엘레노어를 게임 룸으로 청한다. 관객은 청혼의 결과를 모른다. 엘레노어와 레이첼은 각각 동쪽과 서쪽에 앉고, 닉의 프러포즈에 대해 말을 주고받으며 동시에 손으로 안무하듯 마작의 수를 던진다. 마작은 화려한 손 움직임과 육면체의 패가 부딪혀 나오는 시청각과 촉각적 자극으로 영화에 자주 등장하지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이 시퀀스는 각별히 효과적이다. 레이첼은 포커에서 카드를 노출하듯 패를 보이고 엘레노어가 그 기회를 잡는 순간 타일을 뒤집어 게임 전체가 처음부터 자기 손 안에 있었음을 드러낸다. 당신의 승리는 내가 허락한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 클라이맥스는 경제학 교수인 레이첼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