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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 일하다 변호사가 된 다음 자주 받는 질문들이 있다. “변호사로 전직한 이유가 뭔가요?”, “강력범을 변호할 수 있나요?”, “돈을 많이 버나요?” 같은 무난한 질문도 있지만, 다소 곤란한 질문도 있다. 그중 가장 난처한 질문을 딱 하나 꼽자면 단연 “사건 맡은 경험으로 소설을 쓰기도 하나요?”다.
이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다. 상상해본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타인의 민감한 분쟁을 다루고, 비밀유지의무를 진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글은 아주 널리 퍼질 가능성이 있다. 세상 어느 누가 “일한 경험을 소설로 쓴다”고 말하는 변호사에게 자신의 사건을 맡기겠는가? 받은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것은 변호사로서나 작가로서나 직업윤리상 “그렇다”고 답할 수 없는 외통수 질문인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해 두 직업인으로 살아오며, 나는 이것이 비법조인/비소설가라면 떠올릴 만한 궁금증이라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일단 법조인은 발언권이 큰 직업
윤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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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오늘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일까? 심리상담센터지안원 원장 이신(김지수)의 초대로 모인 11명의 사람들이 술렁인다. 아파트 경비원 최경만(임하룡)은 “기왕이면 젊은 시절로 가야지 꼴랑 1년이 뭐냐”고 투덜댄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이미 수차례 ‘리셋’을 반복해온 이신은 주도면밀하게도 로또 추첨시간에 딱 맞춰 티브이를 틀고 당첨번호를 읊는다. 하지만 일년치 당첨번호를 모두 수첩에 메모해도 소용이 없다. 현재 시점의 내 육체와 정신이 모두 과거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몸에 지금의 ‘기억’만 보내는 것. MBC <365: 운명을 거스르는 1년>이 다루는 타임슬립의 얼개다.
기억을 보낸다는 의미가 뭘까? 기억과 의식이 동일하다면 현재 시점의 내 몸은 죽나? 아니면 평행세계의 내가 존재하게 되는 걸까? 당첨금이 가장 컸던 회차의 로또 번호를 외워가도 11명의 ‘리세터’가 몰린다면, 세금까지 제한 실수령액은 턱없이 적어지는 게 아
'365: 운명을 거스르는 1년' , 1년 전 오늘로 돌아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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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 스위치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 지난 3월 콘솔게임 역사상 최다 월간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한다. 글로벌시장 정보 업체 슈퍼데이터는 3월 전세계 디지털게임 매출액 또한 100억달러에 달한다고 전하며 코로나19 이후 게임 업계의 선전을 알렸다.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사회적 거리두기 시행과 더불어 전세계적으로 직격탄을 맞은 영화산업과 달리 방구석에서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은 엔터테인먼트를 안전하게 즐기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선택을 받게 된 것 같다. 더군다나 최근 뭇 게임이 구현하는 가상현실의 퀄리티는 이미 그 자체로 영화적인 경험과 맞먹는다. 영화 같은 드라마, 영화 같은 게임이라는 말이 있듯, 스토리텔링 산업의 최종 콘텐츠로서의 지위를 오랫동안 누려왔던 영화는 이제 게임을 비롯해 무서운 속도로 진화하는 여타의 콘텐츠 산업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시점에서 게임과 영화의 관계를 다시 고찰해봐야 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 이
[장영엽 편집장] 게임과 영화의 관계 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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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나는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 H와 종종 하교를 함께하곤 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진입로를 지나 학교 아래에 다다랐을 때 빨간 소형차를 보았다. “혹시 너희 2학년이니?” 차 앞에 서 있던 한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물었다.“네.” “나, 6반 제일이 엄마인데, 6반은 아직 안 끝났니?” 6반이라면 우리 옆 반이었다. 우리 반이 종례가 늦게 끝나서 하교 때 이미 그 반은 아무도 없었다고 답했다. 아주머니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집으로 가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시내에 있는 학원에 갈 거라고 하자, “제일이 데리러 온 건데, 제일이는 먼저 갔나 보네. 대신 아줌마가 너희들 학원까지 태워줄게”라고 했다.
친구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 올랐다. 제일이라는 친구의 존재를 그날 처음 알았다. 학원까지 가면서 아주머니는 우리의 이름을 물었고,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아들 제일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했다. 사는 곳이며, 아들이 나온 초등학교, 그가 가장
사월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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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Baby), 동물(Beast), 미녀(Beauty)가 등장하면 실패하지 않는다는 광고계의 ‘3B 법칙’처럼 한국 예능계에는 ‘남자, 아기, 백인’을 등장시키면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는 듯하다. 마침 MBC every1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이하 <어서와~>) 벨기에 편에 등장한 세 살짜리 아기 ‘우리스’는 이 세 가지 조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출연자다. 벨기에의 식민지배에서 비롯된 90년대 르완다 대학살을 다룬 르완다 편 직후에 벨기에 편을 편성한 제작진의 무지와 무신경에 대한 비판이 슬쩍 묻혔을 만큼, 예능에서 귀여움은 강력한 무기다. 그러나 <어서와~> 벨기에 편에서 드러난 건 또 다른 측면의 무지와 무신경이다. 여행에 참여하지 않은 우리스의 엄마는 원래 자신보다 남편이 아이를 많이 돌보기 때문에 둘이 같이 잘 지낼 거라며 걱정 없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제작진은 계속 ‘엄마의 부재’를 강조하며 ‘아빠 육아의 한계’를 웃음 포인트로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아빠가 애 보는 거 처음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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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는 금세 대답하면서, ‘당신은 시네필인가요’라는 질문에는 답을 주저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본다. 누가 봐도 영화광인 사람들조차 예외가 아니다. 영화를 사랑하고 즐기며, 영화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이들을 뜻하는 ‘시네필’이란 단어는 언제부턴가 대다수의 영화 팬들이 범접할 수 없는 권위와 거리감을 가지게 된 듯하다. 영화라는 매체예술의 외연이 확장되고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 또한 다각화된 이 시대, 지금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영화를 향한 사랑의 행위들을 설명하기 위해 시네필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씨네21> 창간 25주년을 기념하는 연속 특집의 세 번째 기획이자 마지막 특집인 ‘우리 시대의 시네필’은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했다.
<스크린>과 <로드쇼>, <씨네21>과 <키노>, 프랑스문화원과 서울아트시네마, 영화마당우리와 서울영화집단. 담론을 형성하는
[장영엽 편집장] 당신은 시네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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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공보물이 도착했다. 두툼한 분량이지만 다 읽는 데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후보자명과 정당명을 유권자에게 빠르고 확실하게 주지시키겠다는 실용적 목적으로 제작된 이 선거공보들을 읽는 심사는 답답하다. ‘미래, 기회, 경제, 통합, 위기, 국민, 개혁, 혁명’ 등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정당이 없고, 모든 문장에 느낌표가 남발된다. 그야말로 전력투구의 문장들이 눈앞을 어지럽힌다.
전면에 대문짝만하게 후보 얼굴 사진이 실리고, 뒷면에는 직업과 기족관계, 학력 및 경력, 재산 상황과 세금 납부 실적 및 전과기록이 적힌다. 이 작은 책자에 수십년의 인생사 세목을 구겨넣고, 그 와중에 정치적 비전까지 기입해야 하니 참으로 고단한 글쓰기였을 테다. 한데 바로 그 짤막한 문장 몇개, 후보의 시선 처리, 셔츠 소매 모양, 넥타이 색깔 따위가 그의 정치철학과 자아상을 반영하도록 면밀하게 계산된 ‘기호’라는 점이 선거공보의 묘미다. 모든 문장을 “충성” 운운하는 군사화된
코로나19 시대의 선거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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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지역사회에서 명망을 쌓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곁에 있는 삶. 완벽하다고 여겼던 세계가 완벽한 기만이었음을 알게 된 지선우(김희애)는 외도한 남편 이태오(박해준)의 가슴에 의료용 가위를 꽂는다. 선우의 상상 속에서다.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보며 선우가 느끼는 환멸에 공감하는 한편, 완벽함의 기준에 의문이 생겼다. 비에 젖은 양말을 현관에서 벗기 귀찮아 거실에 발도장을 찍고 다니는 남자. 조리 중인 갈비찜을 꺼내 쩝쩝거리며 뜯어먹더니 식탁에 흘린 양념 국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손가락만 춥춥 빨아대는 태오가 외도하기 전엔 괜찮았단 말이야?
원작의 남편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서 에서 방영한 <닥터 포스터>를 같이 보았다. 무능하긴 매한가지. 저쪽은 그래도 가사 노동과 아들 양육에 참여한다. 집을 나가라고 트렁크를 싸놨더니 만취해 기어들어온 태오가 ‘꿀물’을 달라고 했던 장면이 원작에선 그냥 ‘물’이다. 느릿한 좀비도 이 땅에
<부부의 세계>, 거짓과 헌신으로 유지되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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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잡지를 사봤어요.” 창간 25주년 기념 특대호를 출간한 뒤, 적지 않은 독자들로부터 받은 피드백이다. 10대, 20대 팬층이 두터운 김다미, 김혜준 배우가 표지를 장식한 <씨네21> 1250호는 다른 호에 비해 잡지 구독 문화에 익숙지 않은 독자들의 후기가 많았다. “잡지만의 느낌이 너무 좋다”며 종이의 질감과 긴 호흡으로 펼쳐진 기사들을 처음으로 체험한 젊은 세대 독자들의 들뜬 소감을 접하는 건 낯설지만 뿌듯한 경험이었다. <씨네21>이 누군가의 인생 첫 잡지가 된 점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앞으로도 젊은 세대 독자들이 잡지를 읽는 즐거움을 알아가는 데 유의미한 역할을 하는 책을 만들고 싶다.
간혹 10대, 20대 관객을 만나면 <씨네21>이 영화 전문 매체라는 점은 알고 있으나 주간지인지 월간지인지 잘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씁쓸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영상 콘텐츠를 즐기는 젊은 세대의 문화 소비 방식을 우리가
[장영엽 편집장] 경계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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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있소. 다 드시오. 먹고 싶은 만큼 드시오. 세상의 모든 롤빵이 다 여기에 있으니.” 빵집 주인은 부부에게 따뜻한 롤빵을 건네고, 그들은 밤새워 이야기를 나눈다. 부부는 불과 며칠 전 아이를 잃었다. 아이의 생일 케이크는 완성되었지만 그걸 먹을 사람은 없다. 그들은 밤새워 이야기를 나눈다. 며칠간 허기져 있던 배를 채우고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마지막 장면이다. 따뜻한 롤빵이 먹고 싶다. 나의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된 사람에게, 내가 느낀 환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 분노와 슬픔과 지겨움을 들려주고 싶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상실을 털어놓고 싶다. 아니, 다른 이에게 따뜻한 롤빵을 건네고 싶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나누고 싶다. 당신이 받은 냉대와 조소를 가만히 듣고 싶다. 당신의 아픔 근처에 내가 서 있다고 말하고 싶다. 밤새워 당신을 위로하고 싶다. 밤새워 같이 화를 내고 싶다.
세상의 모든 롤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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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살려고 하는 사람과 운동을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 코미디 TV 예능 프로그램 <맛있는 녀석들>의 스핀오프 웹 예능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이하 <시켜서 한다!>)의 주인공 김민경과 트레이너 양치승이 바로 그런 관계다. 벌칙에 걸리는 바람에 (엄밀히 말하면 아령 대신 아령이 용접된 테이블을 한손으로 들어올려 벌칙을 파괴하긴 했지만) 근력 트레이닝을 받게 된 김민경은 “오늘은 그냥 운동하기 싫은 날씨~”라고 구시렁대며 ‘HELL스장’에 나오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그가 알려주는 운동 꿀팁은 물 마시러 왔다 갔다 하며 쉬는 시간 늘리기, 트레이너가 시범 보여줄 때 영혼 없는 질문을 하며 시간 끌기다. 그러나 “열개만 더 해봐”, “진짜 마지막, 진짜 마지막!”이라는 악마의 속삭임으로 그를 움직이는 양치승도 만만치 않은 상대다.
톰과 제리 같은 두 사람의 티키타카와 함께 <시켜서 한다!>의 매력은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 민경장사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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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이 창간 25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자축의 시간을 갖기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나도 암담하다. 2019년 3월 마지막 주말 극장을 찾았던 183만 관객이라는 수치는 올해 3월 말 15만명대로 내려앉았고, 국내 최대 멀티플렉스 CGV는 전국 직영점의 30%에 달하는 35개 극장의 문을 닫았다. 현장의 상황도 심각하기는 매한가지다. 촬영이 중단되거나 지연되는 상황이 부지기수고, 어렵게 촬영을 이어가는 스탭들도 코로나19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관객이 극장을 찾지않고, 영화 제작이 중단되며, 수많은 영화산업 종사자들이 일터를 잃을 위기에 처한 2020년 4월은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엄혹한 시절로 기억될 것이다.
영화의 폐허에서, 국내 유일의 영상 주간지로서 <씨네21>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창간 25주년 기념 특대호로 제작한 1250호는 이처럼 무거운 질문을 안고 기획됐다.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 몸담아왔던 산업이 전
[장영엽 편집장] 영화의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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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al of the Story>를 해석하면 “이야기의 교훈”이다. 제목처럼, 가수 본인의 경험에서 따온 거라고 한다. 대체 어떤 시간을 통과해야 했기에 이 곡을 쓴 건지 귀 기울여 들어본다. “변호사가 물어봤죠/ 이 사람 대체 어디서 만난 거냐고/ 나는 말했어요/ 어린 시절에는 때로 잘 맞지 않을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거 아니냐고.”그렇다. <Moral of the Story>는 이 곡을 부른 가수 애시의 자전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다. 인터뷰에 따르면 그에게 이혼의 과정은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이걸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스스로를 의심했다고 애시는 고백한다. 비단 노랫말 때문만은 아니다. 첫인상은 ‘예쁘다’이지만 곡 전반에 은근하게 날이 서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뭐랄까. 멜로디가 잘 들리는 와중에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자연스럽게 가사를 찾아보게 되는 곡이라고 할까. 애시의 말을 좀더 들어본다. “살아가고,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내가 실수했다는
[마감인간의 Music] 애시 살고, 사랑하고, 실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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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원수한테라도 생리대는 빌려준다”는 말을 보았다. 생리대 무상배포 정책으로 설왕설래가 있던 중, 여성 동지에게 생리대를 안 빌려주는 사람은 없으리라는 맥락이었다.
저 문장을 보고 떠오른 일이 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집단따돌림을 당했었다. 따돌림을 당하면 교실이라는 공간을 시선과 거리를 중심으로 재해석하게 된다. 간단한 예로, 나는 맨 뒷자리나 맨 앞자리를 절대적으로 선호했다. 맨 뒷자리는 뒷문으로 들어가 바로 자기 자리에 앉으면 되어 부담이 적다. 맨 앞자리는 뒤에서 누가 나에 대한 말을 해도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잘 들리지 않으며, 정면의 선생님과 칠판만 보면 되어 시선 처리가 수월하다. 양쪽 다, 자기 얘기를 하니 내가 째려봤다느니 하는 뒷말을 들을 위험도 적다. 우리 반은 매달 자리를 바꿨는데, 나는 맨 앞줄이나 맨 뒷줄을 사수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했다.
생리대 얘기로 돌아가, 여학생 반에는 “생리대 있는 사람 나 하나만 빌려줘”라고 말하는 학생도 심심찮게
아무 사이도 아닌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