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피아노학원에 다니는 일은 거의 형벌이었다. 폐소공포증을 일으킬 만큼 비좁은 방, 7살의 나는 내 몸집보다 몇배나 큰 피아노와 독대한다. 선생님은 한번 연주할 때마다 획을 하나씩 그어 ‘바를 정’자 네개를 완성하라 했지만, 나는 그저 건반 위에 엎드려 있다. 내가 만드는 소음도 버거운데, 옆방 애도 나만큼이나 소질이 없다. 너무 시끄럽다. 나는 인심 쓰는 척 딱 한번 연주한 후, 바를 정 네개를 한꺼번에 그려 연습을 종료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난 모차르트는 아닌가보군.
초등학생 때 새로 만난 선생님은 엄마가 다니는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였다. 그분은 여성이고, 우리 집과 같은 아파트의 위층에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집에 피아노 두대를 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언어장애가 있는 그분은 자신이 먼저 연주하고 그다음 학생의 연주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건반 위에 올린 내 손이 계란을 쥔 모양에서 흐트러지면, 그분은 ‘바를 정’을 그리던 연필로 내 손등을 가볍게 쳤다. 그분이 뭔가 말하려고 메모지를 꺼내면, 나는 연주를 멈추고 그분의 HB 연필이 종이 위에 느릿느릿 글자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띵땅뚱땅 함부로 울려 퍼지는 소음이 아니라, 종이를 스치는 연필의 사각사각 소리가 들리던 기묘한 수업. 음악이란, 그토록 고요한 것이었다.
친구랑 놀다 귀가가 늦은 날, 나는 방과 후 곧장 피아노 수업에 간 것으로 알리바이를 조작했다. 하나 완전범죄를 확신하며 뒤늦게 선생님 댁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은 이미 인터폰으로 엄마와 모든 소통을 마친 후였다. 아직도 두 사람이 어떻게 얼굴이 보이지 않고 목소리로만 소통해야 하는 인터폰 대화를 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날 이후, 나는 비언어적 소통을 매개로 치밀한 계략을 짜는 웅장한 스케일의 스릴러 장르를 상상하며 혼자 전율한다.
어젯밤 나는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이용해 100여명의 수강생을 대상으로 강의했다. 수강생들은 비디오와 오디오를 모두 끈 채 까만 화면으로만 존재하고, 나는 우주에서 혼자 떠드는 기분이다. 마이크에 문제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 말이 시공을 넘어 수강생에게 닿기를 바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과거의 나는 고요 속에서도 배울 수 있었는데, 지금 나는 온갖 시청각 매체를 동원해 말하는데도 왜 불안할까.
허공에 부서진 내 목소리를 떠올리며 상념에 젖어 있을 때, 불현듯 어릴 적 피아노 수업을 떠올렸다. 사각사각 연필 소리, 내가 모르는 손동작과 함께 ‘끅, 꺽’ 소리를 내며 이야기하던 선생님. ‘채 말이 되지 못한 소리’라고만 여겼던 그 소리가 “‘음성언어’로 분류되지 않지만 심경과 감정을 탁월하게 전달하는 요소”라는 건 이길보라 감독의 글 ‘할머니, 베트남전쟁, 그리고 나’에서 배웠다. 그러고 보면,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언어는 본래 취약하고 불완전하며, 주변의 다른 ‘소리들’과 끊임없이 경합한다. 그걸 인정하고 온 마음으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비로소 어떤 소리, 동작, 표정, 눈빛은 언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