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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월, 조선어로 쓰이는 몇 안 남은 문예지인 <문장>에 ‘문학의 제諸 문제’라는 흥미로운 좌담 기록이 실린다. 대표적인 조선 문인들이 총출동한 이 좌담에서 ‘문학상’은 뜨거운 화두였다. 일본 문학계가 ‘조선예술상’을 제정해 조선문학을 오키나와문학·규슈문학 같은 ‘지방문학’으로 흡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태준이 “상의 명예가 받는 측에 있는지 주는 측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유행합니다”라며 말문을 열자, 시인 김기림은 “주는 측으로 먼저 명예도 있고 채산採算도 있겠지요”라고 시큰둥하게 답한다. 평론가 임화는 “타는 사람으로도 창피한 일”이라고 일축했다. 소설가 박태원이 “아이러니”라고 지적한 이 상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이쪽에서는 받는다는 말두 없는데 제 맘대로 준다고 정해놓고 떠든다는 것은 좀 우스워”라는 김기림의 일침,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명백히 냉소와 저항의 의미를 담은 일동의 “웃음소리笑聲”로 끝맺는다. 주는 측의 “명예”와 “채산”때문에
나쁜 전통과 ‘끊어진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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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범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남자 형사가 오열하는 이야기. 깊은 무기력에 빠져 있던 그들을 일으키기 위해서 또 다른 여성 피해자가 줄줄이 죽어나가는 드라마의 제목을 십수편은 댈 수 있다. 여성의 사체를 다양하게 전시하고 훼손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이야기인지 묻고 싶었고, 저항하지 못하는 상태의 여성 신체에 대한 도착증을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쪽 장르도 반복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변주되는 지점이 보인다.
OCN 드라마 <본 대로 말하라>는 약혼자를 잃은 천재 프로파일러 오현재 역의 장혁, 몸을 잘 쓰고 절권도를 구사하는 그를 전동 휠체어에 고정시켰다. 대신, 현장을 뛰는 것은 본 것을 사진처럼 저장해 기억하는 픽처링 능력을 지닌 시골 순경 차수영(최수영)이다. 앞서 오현재의 능력을 발견하고 성장시켰던 광역수사대 팀장 황하영(진서연)이 차수영을 알아보고 광수대로 차출했다. 극중 잔혹한 장면은 끊이지 않지만, 징벌의 의미로 전시되는 사체는 주로 남성이다.
<본 대로 말하라>, 범죄수사물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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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영화 <기생충>의 모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한국과 미국 LA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취재했고, 일본·홍콩·베트남·미국·캐나다·영국·프랑스·스페인으로부터 온 답신을 바탕으로 지난 9개월간 <기생충>이 그려온 궤적을 재구성해보았습니다. 김성훈 기자가 미국 LA에서 취재한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기생충> 4관왕 수상 기자회견이 <기생충>팀이 거쳐온 여정의 행복한 종착지라면, 김혜리 기자가로테르담에서 만난 봉준호 감독, 이주현 기자가 취재한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의 코멘터리는 지난해 5월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오스카 레이스까지 <기생충> 제작진이 겪은 흥미진진한 경험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도대체 <기생충>이 왜 이렇게 해외에서 인기인지’ 궁금했던 분이라면 임수연 기자가 취재한 <기생충>의 해외 배급사 관계자 8인의 답변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또 한국 포스터 못지않게 화제였
[장영엽 편집장] <기생충> 스페셜 에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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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he Oscar goes to…”라는 말에 이토록 가슴 졸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의 주요 제작진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수상한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기생충>의 후반부를 처음 보던 순간만큼이나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줬다. <기생충>의 수상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까닭은, 비단 한국영화 최초로 오스카상을 수상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봉준호 감독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이야기한 “1인치도 안되는 자막의 장벽”을 가진 비영어권 영화들이, 가장 영향력 있는 북미 시상식에서 할리우드영화와 동등하게 경쟁해 합당한 존중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기생충>의 작품상 수상이 일깨웠다는 점이 더욱 중요해 보인다. 오랫동안 높은 적중률로 아카데미 시상식 결과를 예측해온 <씨네21>도 작품상, 감독상 결과를 기존의 관습에 따라 예상했음을 이 자리를 빌려 반성한다. 가능성의 마지노선을
[장영엽 편집장] 영화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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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폴스’라는 밴드가 있다. 2019년에만 2장의 앨범을 냈다. 오는 2월 18일 열리는 브릿 어워드 시상식 중 ‘베스트 그룹’ 부문의 강력한 후보이기도 하다.
폴스는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멈퍼드 앤드 선스만큼이나 해외와 국내의 온도차가 극명한 걸로 유명하다. 톱 밴드로 널리 인정받지만 한국에서는 무명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다. 과연 그러하다. 2019년 5집 앨범 《Everything Not Saved Will Be Lost》를 2장으로 나눠 야심차게 발매했건만 제대로 리뷰한 글을 몇개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영국에서는 인기가 여전해 ‘Part1’이 차트 1위, ‘Part2’가 2위를 기록했다. 음반 전체를 추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루에도 노래가 셀 수 없이 쏟아져나오는 세상 아닌가. 80분에 달하는 2장을 꼼꼼히 감상할 팬은 많지 않을 거다.
이럴 땐 딱 한곡만 집중 타격하면 된다. <The Runner>가 그 대상이다. 이 곡은 록이 가져야 할 미덕
[마감인간의 Music] 폴스 <The Runner>, 현대의 록이란 이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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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는 두개의 사운드트랙이 등장한다. 에이드리언 챈들러와 라 세레니시마가 연주한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이 하나고, 영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찬트가 다른 하나다. 여인들 각자가 완전히 다른 음을 내어 만들어낸 불협화음은 이내 화음을 이루는 3개의 음으로 수렴되고, 곧이어 리드믹한 가사로 이루어진 몇개의 성부가 넓은 화음을 펼친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이 노래를 강렬하게 기억하리라. 그것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가 말하는 “살아 있는 음악”이며, 교회의 “죽은 음악”과 구별되고, 먼 밀라노의 극장에 가야만 들을 수 있는 ‘(살아 있는) 타지의 음악’과도 구별된다.
이 살아 있는 음악의 미스터리는 그 가사에 있었고, 음악의 특성이나 영화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볼 때 굳이 가사의 뜻을 알 필요가 없을수도 있었겠지만, 역시 여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셀린 시
완성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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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스티븐 달드리 / 출연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 / 제작연도 2002년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갔을 때, 마트에서 개봉한 지 몇해가 지난 영화의 DVD를 10달러도 안되는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니까 영어 공부를 핑계로 가끔 DVD를 한장씩 사모으곤 했다. <디 아워스>도 그렇게 보게 된 영화 중 하나였다. DVD에는 한글 자막이 당연히 없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이 영화를 완전히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정말 마법 같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내 영어 실력은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어른이 되었다는 기쁨으로 스무살을 정신없이 보내고 스물한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우울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내 나이가 너무 많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이가 없어서 돌아가서 한 소리 해주고 싶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물셋이 되었을 때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부모님에게 마
[내 인생의 영화] 한가람 감독의 <디 아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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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한 육아 예능 캡처 게시물에 ‘출산 바이럴’이라는 제목이 달린 것을 보았다. 게시물 주인공인 어린이의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에 미소 지으면서도, 착하고 예쁘고 민폐 끼치지 않는 ‘TV 속’ 아동만을 향한 성인들의 열광에 경계심이 들었다. 미디어는 어린이를 어떻게 비추어야 할까, 성인은 아동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모처럼 그 실마리를 제공하는 tvN 예능 <나의 첫 사회생활>은 5~7살 사이의 어린이들을 모아 관찰하며 소아정신과 의사 등 전문가와 실제 양육자인 연예인 패널들이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너 몇살이야? 나한테 까불면 안돼!” “내 형은 일곱살이야!” “우리 누나는 여덟살이야!” “우리 아빠는 열한살이야!” “우리 아빠 나이보다 적네.” “우리 아빠 열백살이야!” 제작진의 개입 없이, 교사의 개입도 최소화한 상황에서 담아낸 아이들의 ‘사회생활’은 결코 귀엽기만 하지는 않다. 서열을 따지고 허세를 부리고 거짓말하고 서로 다툰다. 아이도
<나의 첫 사회생활>, 동료 시민으로서의 아동 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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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납득할 만한 설명은 해줘. 미안하다고 한번 말하는 걸로는 부족해. 적어도 세번 이상은 미안하다고 해.”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가 교도소에 수감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딸 제니는 엄마가 왜 자신을 떠나야 했는지 듣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유가 어쨌건 사과를 받길 원한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제니, 아임 써리. 아임 써리. 아임 써리. 정말로 아임 써리.” 딸의 바람대로 사과하는 엄마를 꼭 껴안으면서도, 제니는 금자가 미안하다고 말할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금자가 용서를 구하는 장면만큼이나 그 사과를 받아들이는 딸의 태도에 주목했다는데 이 영화의 섬세함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번 말하든 두번 말하든 미안하다고 하면 다 해결되는 거 아니겠냐고 누군가는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곪을 대로 곪은 마음의 상처가 해소되는 순간을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그려봤을 당사자에겐 한번은 안되고 세번은 되는 나름의
[장영엽 편집장] 미안하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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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모임은 딩고와 84년생 동갑내기 래퍼 5명이 만든 힙합 프로젝트 이름이다. 더 콰이엇, 사이먼 도미닉, 염따, 팔로알토, 딥플로우. 이제 다모임의 뜻은 ‘둘도 없는 힙합 친구’다. 다모임은 4곡을 발표했다. 그중 가장 즐겨 들은 노래는 <Forever 84>다. 이 노래에 취향저격당했다. 성공을 블루지한 무드 위에서 이야기하는 노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노래에서 다모임 멤버들은 각자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소회를 털어놓는다. 그런데 특별히 우울해하지도 않고 뻐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톤은 담담함에 가깝다. 지난 세월 동안 많은 것을 헤쳐왔고, 나는 어릴 적 꿈을 이뤘으며, 밑바닥에서 시작해 이 자리까지 왔다고 말하지만 인정투쟁보다는 담담한 회상에 가깝다. “별보다 더 많은 수많은 밤을 나는 혼자 수놨지.” 염따는 전세기에 앉아 지난날을 떠올린다. 이게 끝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잠시 자축한 후 다시
[마감인간의 Music] 다모임 <Forever 84>, 삶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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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이 죽는 이야기를 잘 보지 못한다.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한다. 대부분의 픽션이 이에 해당한다. 이야기가 생사를 다루는 것은 어찌할 수 없을지 모른다. 생사는 중요한 화두니까. 당장 이렇게 말하는 나만 해도 죽음을 다룬 소설을 몇 편 썼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죽음을 꺼린다. 죽음에 대한 묘사를 꺼리고, 불필요한 죽음을 꺼린다. 영상물을 볼 때 이는 극에 달해, 나는 조연이나 단역이 많이 죽는 영화는 아예 보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가 제대로 존재하지도 못하다 몇초 만에 소멸하는 것을 견디기 어렵다. 많은 세계가 죽는 것 같아 괴롭다. 주요 등장인물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도 싫어한다. 어떤 영화나 소설이 새드엔딩일 것 같으면 스포일러를 꼭 미리 찾아보고, 아예 보지 않거나, 전반부를 조금 보고 뒤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기 전에 멈춘다. 내가 추리소설 독자일 수 있는 것은 아마 많은 고전 추리소설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죽음과 마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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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피터 위어 / 출연 짐 캐리, 에드 해리스 / 제작연도 1998년
밀레니엄을 앞두고, 사람들은 묘한 기대와 불안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 당시 영화쪽으로 진로를 변경하기로 마음먹고서 나도 매일 흔들리고 있었다. 미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가라앉혀주는 것도 영화였다. 안정제를 먹듯 매일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면서 현실과 이야기 속 가상 세계를 오가는 일상을 보내던 때가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면 수많은 거장들의 작품보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영화 <트루먼 쇼>가 먼저 떠오른다.
누군가의 삶이 전세계에 생중계된다는 이 영화의 설정은 너무나 유명하다. 태어나서 30년 동안 부모, 친구, 이웃, 심지어 아내 역할로 고용된 배우들과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트루먼(짐 캐리)은 우연한 몇몇 사건을 겪으면서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나의 삶이 진정 나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모든 순간들이 영화적으로는 코미디지만 그에게는 끔찍한
[내 인생의 영화] 김종민 프로그래머의 <트루먼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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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삽삽삽-.’ 복도 바닥을 스치는 교사용 슬리퍼 소리가 빨라진다. 뭔가 일이 생겼다. 교사가 학생들 틈에서 뛸 수 없으니 잰걸음으로 교무실로 향하는 소리일 때도 있고, 부서간 회의시간이 겹쳐 낭패를 겪는 교사의 발소리일 때도 있다. 학교 복도에 구두 굽 소리를 내는 이는 학생이나 교직원이 아닌 외부 방문객이다. 사립고등학교 기간제교사 채용 면접을 보러온 국어과 교사 고하늘(서현진)의 발소리도 외부인에서 내부인의 것으로 바뀌었다.
tvN 드라마 <블랙독>의 주인공은 교사들이다. 하나같이 검정색 슬리퍼를 신어도 정교사와 기간제교사의 처지는 같지 않다. 졸업하고 찾아오겠다는 학생들의 해맑은 약속에 기간제교사는 시선을 피하고 말끝을 흐린다. 교사는 맞는데 ‘진짜 교사’가 아니란다. 고하늘은 불안정한 위치에 놓인 교육현장의 당사자가 되어 복도 안쪽으로 걸어들어간다.
사고나 위기가 생기면 끊임없이 대응하고 수습하는 곳이 학교다. 보통의 교육계 고발 드라마라면 채용비리, 학교
<블랙독>, 정답이 없는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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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설 연휴엔 15년 만에 외가를 찾았다. 나에게 외가는 언제나 친척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다정하게 소란스러운 공간으로 남아 있다. 그 기억이 15년 전 다소 갑작스럽게 단절된 건 외할머니의 죽음 때문이었다. 방학 때마다 시간을 내 부러 찾곤 했던 외할머니의 공간에, 당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로 방문할 용기가 부족했던 것 같다. 2010년대를 훌쩍 떠나보내고 다시 찾은 외할머니의 정원은 태연자약하도록 그대로였다. 작은이모와 나는 그곳에 잠시 서서 고인의 부재를 사이에 두고 과거형의 대화를 나눴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통해 온갖 종류의 죽음을 간접 체험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음에도, 가까운 곳에 존재하던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오랜만의 외가 방문에 이어 예기치 못한 부고 소식을 여러 차례 들으며 설 연휴를 보내고 나니 죽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1월 말이다. 지난 1월 25일에는 <살기 위하여> <설
[장영엽 편집장] 어떤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