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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의 만남만으로도 가슴 뛰는 일이다. 이번호 특집은 바로 마틴 스코시즈의 <아이리시맨>이다. 아마도 그는 현재 가장 왕성하게 영화를 만들고 있는 중견 감독들에게, 여러 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현역’ 감독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교재 삼아 공부하고 있다. 최근 그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향에서 화제가 됐다. 첫 번째는 최근 개봉한 토드 필립스의 <조커>가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1976)와 <코미디의 왕>(1983) 사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영향권 아래에 있음을(누군가에 따라서는 그저 ‘카피’로 보일 수도 있을 법한) 고백하면서 새삼 그의 이름이 영화팬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두 번째는 이번호 특집에서도 관련 내용을 다뤘지만, 마틴 스코시즈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다”라 발언하며 논란을 낳았다. 개인적으로 후자의 경우 ‘마블 영화가 실사영화
[주성철 편집장] 마틴 스코시즈의 귀환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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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지미 롤랜드. 스스로를 지미 색스라 부른다. 그만큼 색소폰이라는 악기에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혹시 색소폰 불어본 적 있나. 색소폰, 그중에서도 지미 색스가 연주하는 알토색소폰은 함부로 덤볐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쉽게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 악기이기 때문이다. 알토색소폰은 소리를 내는 것부터가 어렵다. 강한 폐활량은 기본이요, 들숨과 날숨을 자기 뜻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많은 수의 악기, 예를 들어 피아노는 소리를 내는 것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한데 알토색소폰은 그렇지 않다. 나도 몇번 불어봤다가 포기했음을 고백한다. 지미 색스의 연주는 이런 측면에서 가히 경이로운 수준이다. 구미가 당긴다면 유튜브에 들어가서 ‘jimmy sax’라고 쳐보라. 맨 위에 8800만 클릭을 자랑하는 영상 하나가 뜰 것이다. 이 연주 하나만으로 지미 색스는 색소폰계의 스타 반열에 올랐다. 강렬한 에너지를 끊임없이 분출하며 창공
[마감인간의 music] 지미 색스 <No Man, No Cry>, 색소폰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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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최첨단의 전쟁 기계를 만드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전제로 두고 있지만, 동시에 어리석은 인간 종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이어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스토리상 시리즈의 ‘적장자’로 보이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역시 그렇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이번에도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서 온 살인 기계를 상대로 싸움으로써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엿본다.
디스토피아는 그리 멀지 않았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이대로 2050년이 되면 해수면이 1m나 상승해 거주지를 잃는 사람이 1억5천만명이 될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경고도, 빠른 속도로 유실되는 토지와 극단적인 기후변화가 이미 식량 생산량을 위협하고 있다는 유엔의 경고도 모두 도래할지도 모르는 디스토피아를 예고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밥을 굶으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그리고 집을 잃고 밥을 굶는 것은 어느 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극단적
디스토피아의 도래로부터 소중한 것을 지켜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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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5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내 이름은 돌레마이트>는 오늘날 블랙 무비가 장르로서 발휘할 수 있는 고유한 매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영화의 주인공은 랩과 힙합의 선조로 간주되는 미국의 실존 엔터테이너 루디 레이 무어(에디 머피). 선정적 운문을 비트에 실어 공연하던 코미디언 루디는 어느 날 영화의 파급력에 눈뜨고, 필름의 ‘필’자도 모르는 채 친구와 영화과 학생들을 모아 액션 코미디 <돌레마이트>를 무작정 크랭크인한다. 영화 <내 이름은 돌레마이트>가 흥이 오르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 일찍이 <에드 우드>(1994)를 쓴 각본가 스콧 알렉산더와 래리 카라제브스키는 최악의 테크닉과 최선의 열정이 뚝딱뚝딱 영화 한편을 지어 올리는 광경을 사랑스럽게 그린다. 에디 머피도 최상급 연기를 보여주지만, 웨슬리 스나입스, 다빈 조이 랜돌프, 키건 마이클 키 등 조연진도 틈만 나면 영화를 가로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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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직접 겪지 않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옛날 옛적 촬영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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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리들리 스콧 / 출연 해리슨 포드, 숀 영 / 제작연도 1982년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자주 듣는 질문이지만 난감하다. ‘제일’이라는 말엔 한편만이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입장에선 그러하다. 내 인생의 영화는? 이 질문엔 전광석화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영화가 있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82년작 <블레이드 러너>다. 기억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꿈틀거린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감정과 상황, 향후 비칠 자신을 위해 그 기억은 왜곡되고 나아가 정당화되며 삭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왜곡되지 않고, 잊히지 않고, 나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이 영화를 보았을 때고 이 영화가 내 인생 영화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명화극장>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 지금처럼 채널 선택권이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 지상파의 이들 방송은 내가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임과
[내 인생의 영화] 고명성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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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남자는 둘로 나뉩니다. 나랑 잔 남자, 앞으로 잘 남자!” 넷플릭스 <박나래의 농염주의보>의 주제는 명확하다. 남자를 좋아하고 연애를 많이 하고 섹스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 박나래는 말한다. “아침밥은 안 먹어도 아침에 꼭 하고 나가요.”
그는 자신을 정복자 칭기즈칸에 비유하며 ‘선비’ 남친을 꼬드긴 (그리고 실패한) 이야기와 원나이트 다음날 아침의 엇갈린 풍경에 대해서도 털어놓는다.
망설이면서도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재미있는 스탠드업 코미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잘하게 생겼잖아. (사이) 말을 잘하게 생겼다고요!” “근데 안 서. (사이) 결심이 안 선다고요!” 같은 패턴은 반복되고, 망한 연애와 섹스 이야기를 할 때 ‘한국 여자’로서의 사회적 맥락을 다 빼버리니 신랄함이 떨어진다. “비주류에 속하는 사람의 자학은 겸손함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말한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가 본다면 ‘이놈’ 할 것 같은 자기 비하 코드도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한국
<박나래의 농염주의보>, 시작이 반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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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고르라면, 거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양장점 주인(김미경)과 신애(전도연)가 나눴던 대화다. 그 주인은 신애의 충고대로 가게 인테리어를 밝게 바꿨더니 실제로 손님도 늘고 매상도 올랐다며 좋아한다. 영화의 어느 지점부터 웃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던 신애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감돈다. 바로 그 전 장면에서, 신애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하고 머리를 자르려고 미용실에 들렀다가 아들을 죽인 유괴범의 딸과 마주쳤었다. 소년원에서 미용기술을 배웠다는 그 딸도 살인자 아버지로 인해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신애의 마음이 다소 누그러들 수도 있으리라, 그 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신애는 “왜 하필 이 집이냐”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었다. 그런데 영화의 초반부, 밀양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신애가 처음 양장점에 들렀을 때 ‘가게 인테리어를 바꾸면 장사가 더 잘될 것 같다
[주성철 편집장] <82년생 김지영>의 배우들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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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 가-0123호. “안녕하세요. 대중교통 환승 제도를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는 시민입니다. 버스를 갈아탈 때나 다른 교통수단으로 환승할 때 기본요금을 다시 내지 않아도 되는 환승 할인 제도는 정말 합리적인 것 같아요. 사실 원하는 목적지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가 없을 때가 많거든요. 잘못 탈 때도 있고요. 그럴 때마다 요금을 다 내야 했는데, 이 제도 덕분에 이제 버스를 잘못 탔을 때도 조바심내지 않아도 돼요. 이렇게 좋은 환승 할인 제도가 인생에도 있다면 좋겠습니다. 정확히는 진로 이야기예요. 인생, 진로도 그렇지 않나요? 원하는 일을 하게 되기까지 한번에 환승 없이 도달하는 사람이 있냐고요. 잘못 타는 경우도 부지기수죠. 그렇게 잘못된 노선을 타서 환승해야 할 때는 수없이 많은 정류장 어딘가에 내려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일도 생겨나요.
정류장에 머무는 시간에는 일을 하지 않아요. 비노동 상태, 쉽게 말해 백수. 누구나 백수 상태를 겪습니다. 저마다의 이유로 일시적이든 장기적이든
인생 버스도 환승 할인,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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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영화가 무엇이냐고 묻는 문제가 국가고시에 나온다는데, 사람들이 많이 틀린다고 한다.” 이번호 한국영화 100주년 특집 관련 인터뷰에서,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전시·공연분과 위원장으로서 광화문 축제 총연출을 맡은 양윤호 감독은 1919년에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그만큼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의리적 구토>는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그해 10월 27일, 신파극단을 이끌던 김도산 감독이 만든 영화다. 상영 전날인 10월 26일자 신문에는 단성사의 창립자이자 경성의 유일한 조선인 극장주 박승필이 낸 영화광고가 실렸다. “조선에 활동사진극이 없어 항상 유감스럽게 여기던 바, 신파 활동사진을 거액 5천원을 투자해 경성 제일 명승지에서 촬영하여 여러분에게 선보일 것이니, 활동사진을 좋아하시는 여러분께선 보실 만한 것이올시다. 첫 조선 신파의 활동사진을 보러오세요.” 영화 제작자이기도 한 그가
[주성철 편집장] 한국영화 100년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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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퍼 자메즈의 신곡 <09년 왕십리>다. 제목만 봐도 특정 노래가 연상된다. 맞다. 이 노래는 김흥국의 <59년 왕십리>를 샘플링했다. 보도자료를 읽고 이 노래의 작업과정을 추측해본다. 자메즈는 대학 시절 친구들과의 우정에 관한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자메즈는 한양대학교 09학번이고 한양대학교는 왕십리에 있다. 09학번 왕십리가 떠올린 건 59년 왕십리다.
<59년 왕십리> 가사 중 주제에 맞는 구절(‘정 주던 사람은 모두 떠나고/ 서울 하늘 아래 나 홀로’)을 샘플링한다. 그 후 우정에 관한 랩과 후렴을 채워넣는다. 이 노래는 <59년 왕십리>의 ‘사운드’를 샘플링하진 않았다. 하지만 위화감이 거의 없다. <59년 왕십리>를 아는 이들에게 이 노래는 너무 편안하다. 아마 두 노래가 ‘브라스’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브라스를 중심으로 두 노래는 ‘무드’로 연결돼 있다. 참여진은 모두 준수한 퍼포먼스를
[마감인간의 music] 자메즈 <09년 왕십리>, <59년 왕십리> 다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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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진의 첫 업무는 “n포털에 ‘실내 포차’를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블로그 검색결과 1페이지 안에 ‘더진포차’ 맛집 후기가 노출”되게 하는 것이었다. 기계적으로 도배된 광고들은 더이상 소비자들을 매혹할 수 없기에 현대 마케팅 문법은 진화를 거듭한다. 구체적 개성을 지닌 가상인물의 블로그를 꾸며 자연스럽게 광고를 노출하는 것. 시간과 열정, 재능이 요구되는 일이다. 입사동기 예린이 “이 일이 좋아지지가 않아요”라며 낙담할 때, ‘프로다움’으로 무장한 경진은 “일을 못하는 거겠지”라며 우월감에 젖었다.
다만, 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가 경진이 운영하는 가상인물 ‘채털리 부인’의 블로그로 쪽지를 보내왔을 때, 경진의 두손은 싸늘하게 식었다. “채털리 부인님이 올린 후기를 보고 구매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자신의 한 아이는 죽고, 남은 아이는 평생 산소 공급 호스를 끼고 살아야 한다는 것. ‘채털리 부인님께도 무슨 일 있다면 연락 달라’는 염려의 쪽지. 그것은 경진이 2년 전에 작성한, 기억
“이 일이 좋아지지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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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 아스트라>와 <하이 라이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리안 감독의 <제미니 맨>을 아이맥스 2D로 관람했다. 초당 120프레임(120FPS) 촬영한 이 영화의 이상적 관람환경은 4K 용량의 HFR(High Frame Rate) 3D지만, 미국에서 2K로나마 120FPS 3D 관람이 가능한 극장도 14곳에 불과하고 국내에는 없다. 도리어 최신 TV가 의도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 구태여 왜?”라는 질문이 자연히 나온다. 리안 감독의 답은 자못 학자스럽다. <라이프 오브 파이>(2012) 당시 그는 3D 디지털 촬영을 처음 경험하면서, 블로킹과 시야 심도를 어떻게 통제해야 옳은지 혼란에 빠졌다. “디지털은 필름과 별개의 미디어다. 그래서 필름과 별개의 미학적 이상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리안을 HFR에 매달리게 했다. 내가 찾은 극장의 상영 조건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플라세보효과인지 프레임 내 모든 요소에 초점이 맞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루시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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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MBC에서 여성 기업인을 다룬 시대극 <국희>가 큰 인기를 끌었다. 김혜수가 연기한 민국희는 빵에 식용 글리세린을 발라 유통기한을 늘리는 방법을 고안하지만, 기술을 도둑맞고 가게는 철거된다. 시련을 기회로 전환하는 국희는 빵 대신 비스킷 사이에 크림을 바른 신제품을 출시한다. 경리사원이 얼떨결에 회사 대표직을 맡게된 tvN <청일전자 미쓰리>의 이선심(이혜리)은 부도 위기의 중소기업을 어떻게 살릴까. 신제품 개발?
대기업 협력업체로 부품을 납품하던 청일전자는 이미 자사 브랜드 청소기를 개발해 완제품을 생산했다. 그러니까, 선심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들이밀어 빛날 자리 같은 건 없다. 선심은 청일에서 재하청을 주는 업체 사장을 설득해 어음 결제일을 미루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돈과 소송이 얽힌 위기는 끊이지 않는다. “유리천장을 뚫고 말단 경리에서 사장까지 미친 승진을 하시더니 드디어 미친 활약이 시작되는가?” 빈정거림이 섞인 한 직원의 말이다. 미
<청일전자 미쓰리>,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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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 중국어판이 ‘중국의 아마존’으로 불리는 중국 최대 온라인 서점 당당에서 10월 16일 기준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앞서 출간된 일본에서는 인쇄부수 14만부를 돌파했고, 대만에서는 ‘가장 빨리 베스트셀러에 오른 한국 소설’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누적 판매부수 100만부를 돌파한 지 오래며, 현재 18개국에 판권이 팔렸다. 아무튼 괜히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한국이 제12대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있던 1982년, 중국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라는 말로 중국의 경제 발전을 본격적으로 이끌어간 덩샤오핑이 국가주석으로 있던 때였다. 쓰고 보니 이런 정보가 원작이든 영화든 이해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냐만, 그만큼 1982년이라는 시기와 사실상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그야말로 흔한 이름 김지영이라는 여성의 자리를 명확하게 각인시킨다.
<82년생 김지영>이 10월
[주성철 편집장] 82년생 김지영, 믿을 수 없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