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의 한 작고 오래된 서점이 문을 닫았다. 서점을 지날 때나 볼일이 없을 때도 근처에 일이 있으면 종종 들러보곤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다. ‘결국’이라는 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걱정은 그 서점이 처음 문을 열었던 십수년 전부터 있었다. 손님이 많진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오래된 습관이기도 해서, 마음에 드는 소박한 상점이나 가게들을 보면 이 가게는 어떻게 유지해 나가고 있을까? 유지가 될까? 벌이가 될까? 하는 걱정이 늘 앞선다.
그런 걱정은 가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지방 외진 곳에 들어선 아파트를 보면 한두 가구도 아닌 이 많은 사람이 여기서 무엇을 하며 먹고살까 궁금하고, 싱가포르처럼 작은 도시국가의 만원 전철 틈바구니에서도, 프랑스의 한적한 지방 도시의 밤 골목을 걷다가 드문드문 불이 켜진 집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학문적 연구를 시작했다거나 어떤 통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저 막연히 세상엔 사람들 얼굴들만큼이나 많은 일과 직장이 있고, 각자 그런 일 중 하나를 하며 살고 있을 거라는 얕은 짐작만 하고 넘길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사는가 하는 궁금함은 직접 해소하기가 쉽지 않다. 예의를 차리는 관계라면 어느 정도의 무례를 감수해야만 한다. 막상 격의 없는 관계라 해도 이런 질문에는 진지한 답을 듣기도 쉽지 않다. 대부분 웃음과 농담으로 넘겨버리거나, 겨우 짐작 정도 할 수 있는 짧은 답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어쩌다 보니 요즘은 내가 그런 대답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놓인다. 주로 ‘책이나 영화 시나리오를 써서 어떻게 먹고사세요? 영화 연출을 해도 고정 수입이 없을 텐데 생활이 가능한가요?’ 같은 질문들인데, 제대로 답을 했던 것 같진 않다. 적어도 내가 먹고사는 건 명확히 대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도대체 나 어떻게 먹고살고 있지?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지는 궁금증은 결국 자기에 대한 궁금증인 것 같다. 자기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을 결국 타인에게 묻는다. 스스로 그런 질문을 하고 있다 보면 한동안은 웅덩이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든다. 얼마 전 문을 닫은 그 서점도 어쩌면 웅덩이에서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해답을 찾지 못했겠지. 그렇게 웅덩이에 빠져 있는 기분이 들 때 누군가는 책을 보고, 또 누군가는 멘토를 찾아서 조언을 구하며 타인이 먹고사는 궁금증을 해결한다.
하지만 그렇게 접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그저 아주 작은 조각 하나를 들여다보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많다. 이럴 때 세상 사람들이 갖가지 방식으로 먹고사는 방법을 객관적이며 전문적으로 기록한 백과사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지 사람들이 각자가 속한 곳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삶을 지속하고 있는지만 알 수 있다면, 내 삶을 진단해볼 수 있는 기준점으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다른 썩 괜찮은 일을 해볼까 하는 상상력과 여력을 발휘해볼 여지도 있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때때로 웅덩이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을 덜어낼 수 있다면, 먹고사는 걱정이 조금은 줄어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