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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일 함부르크 예술대학교는 1600유로 상당의 장학금을 걸고 연말까지 총 3명의 대상자를 선발하기로 했다. 장학금 명목은 ‘능동적 무활동’. 즉 지원자는 자신이 선택한 한 분야에서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하지않겠다는 계획을 세워 심사위원을 설득해야 한다. 지원서에는 지원자가 답을 해야 하는 네 가지 문항이 있고 그 항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무엇을 하지 않고 싶은가/ 얼마나 하지 않고 싶은가/ 이 일을 하지 않는 게 구체적으로 왜 중요한가/ 왜 내가 이 일을 하지 않는 데 적합한 사람인가’. 이 프로젝트는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성공을 중시한다’는 현대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은 물론 타인과 공동체의 삶에 악영향을 미치는 성취와 목표 달성 중심의 사회에서 초점을 바꿔보자는 취지다.
이런 비판은 <피로사회>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저자는 시대마다 고유의 질병이 있는데 현시대는 ‘할 수 있다!’가 최상의 가치가 된 성과 중심의 긍정 사회가
불 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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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과자를 먹으며 스마트폰으로 SNS를 뒤적거리던 경위 한여진(배두나)이 몸을 일으켜 TV 볼륨을 키운다. 그가 경찰 고위 간부의 비리 뉴스에 반응하는 것은 자신의 직무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tvN 드라마 <비밀의 숲2>의 1회에서는 이쪽 귀로 들어와서 저쪽 귀로 빠져나가는 라디오 뉴스들, 망막에 들어와 정보로 취합되지 못하고 금세 까먹게 되는 뉴스 화면의 양이 너무 많았다. 생초보도 드라마를 이렇게 쓰진 않을 텐데. 왜일까?
검경수사권 조정이라는 이번 시즌의 이슈에 접점을 대지 못하다가 인물들의 좌표가 정리되는 2회부터 비로소 자세를 고쳐앉았다. 2년 전 서부지검 비리를 밝히는 특임팀 안에서 공조했던 검사 황시목(조승우)과 경위 한여진은 대검 형사법제단과 경찰청 수사구조혁신단 소속으로 각자 검찰과 경찰의 입장 양 끝에서 재회한다.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공덕동 서부 지검 포장마차는 사라졌고, 달라진 둘의 좌표에 한겹씩 덧씌워지는 장소가 함축하는 메시지는 이
드라마 <비밀의 숲2>, 검경 수사권 조정을 ‘비숲’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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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뉴웨이브 영화에 대한 최초의 기억을 떠올리자면 어김없이 한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고 정은임 MBC 아나운서다. 2000년대 초 라디오 프로그램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으로 영화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그의 존재를, 나는 안타깝게도 그의 부고를 알리는 기사로 처음 접했다.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가 얼마나 뜨겁게 영화를 사랑했는지 회고하는 영화평론가, 기자,영화감독들의 추모사는 정은임이라는 사람과 그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겼다. 정은임 아나운서를 추모하는 이들이 제작한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방송의 mp3 파일을 뒤늦게 웹으로 다운받아 들으며, 나는 대만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 차이밍량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영화를 보기도 전에 대만 뉴웨이브 영화를 사랑하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미 한참 전에 종영된 라디오 프로그램의 녹음본을 들으며, 아직 보지도 못한 영화를 만든 감독들에게
[장영엽 편집장] 2020년에 대만 뉴웨이브 영화를 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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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뇌병변장애인 작가 일라이 클레어의 책 <망명과 자긍심>에 사로잡혔다. 그는 장애를 ‘당대 사회조직이 물리적·인지적 손상이 있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아, 그들을 사회의 주류로부터 배제함으로써 야기되는 불이익이나 활동의 제약’으로 정의하는 마이클 올리버의 견해를 소개한다. 즉 “망할 놈의 학교 규칙이 내게 시간을 더 주지 않아서 시험에 실패한 것”이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한계”인 반면, “애덤스산이 내 발엔 너무 가파르고 미끄러웠기 때문에 정상에 오르기를 실패한 것”은 “신체적인 한계”와 관련된다는 점을 저자는 안다.
하지만 저자는 덧붙인다. “내 몸 안으로 향하는 분노”와 “비장애중심주의로 향하는 분노”의 분리가 늘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고. 예컨대, 저자는 ‘장애인에게 등산은 무리’라는 차별적·패배주의적 사고와 ‘장애인도 산을 오를 수 있다’는 장애 극복 신화를 모두 경계하며 산을 오르지만, 점점 가팔라지는 애덤스산 중턱에서 등반 중단을 결정하며 펑펑 울었다.
그 산은 나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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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기자는 일주일에 영화를 몇편이나 보나요?” 직무 탐구를 목적으로 한 특강에 참석하게 되면 어김없이 받는 질문이다. 영화를 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영화기자는 비전문가보다 많은 영화를 보지 않겠냐는 짐작이 내포된 질문이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한결같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스타워즈>와 같은 프랜차이즈물의 신작이 개봉한다면 복습 차원에서 전편을 다 몰아봐야 하겠지만, 기획 기사를 쓰기 위해 한편의 영화를 여러 번 돌려 봐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느 쪽이든 영화를 보는 데 물리적인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 건 매한가지다.
어느덧 업무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몰라도 영화를 오랜 시간 동안 보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사 구조가 복잡한 작품을 언론 시사에서 딱 한번 보고 기사를 작성해야 할 때가 더욱 두렵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개봉할 때마다 늘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드는 대상이다. 기억과 꿈, 마술과 물리학 법칙
[장영엽 편집장] 놀란 유니버스를 위한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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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주 내내 눈치를 봤다.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면서 창밖을 힐끔힐끔 보다가, 비가 좀 잦아들었다 싶으면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을 놓치면 당분간 기회는 없어!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뛸 시간이다.
나의 첫 러닝 기록은 2012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에 교환학생을 갔다가 10kg이 불어서 돌아온 바람에 푹푹 찌는 여름 더위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달리기라는 건 횡단보도를 급하게 건널 때나 지하철을 잡아 탈 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미국에 가보니 39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도 사람들이 길에서 러닝을 했다. 달리기를 단독으로 할 생각을 처음으로 해본 게 그때다. 뛰는 게… 재미있나? 하나도 재미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다들 하니까, 나도 한번 해보기로 했다. 미국에서 본 대로 나도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괜히 기분이 들떴다.
자신만만했던 태도가 무색하게 며칠 하다 말았다. 천천히 뛰는데도 숨이 턱을 넘어 코까지 차올랐다. 어렸을 땐 동네
일단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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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수학여행은커녕 입학식도 못 가봤고, 엠티라는 건 뉴스에서만 봤으며, 수영은 잘하는데 물놀이는 할 줄 모르는 데다, 언제나 많이 먹으면 안되고 놀면 그냥 ‘망하는’ 줄 알았던 사람들이 있다. E채널 <노는언니>는 박세리(골프), 남현희(펜싱), 곽민정(피겨스케이팅), 정유인(수영), 이재영·이다영(배구) 등 전현직 여성 운동선수 여섯명이 모여 말 그대로 함께 ‘노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보통, 방송 나오는 운동선수는 남자들이 많잖아요”라는 박세리의 말대로, 그동안 예능에서 자주 보지 못했던 여성 선수들을 다양하게 모은 기획부터 신선하다. 엘리트 스포츠 선수이자 여성인 이들의 이야기는 그동안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던 만큼 한층 더 흥미롭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운동을 시작해 대학교 3학년 때 은퇴하고 바로 코치가 된 자신이 ‘노잼 인생’을 사는 것 같다는 곽민정은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딸을 낳은 직후 2014년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던 남현희는 당시 출산
'노는언니', 우리 같이 놀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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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엽 편집장] 존재만으로 고마운
[장영엽 편집장] 존재만으로 고마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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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K팝 콘텐츠를 즐겨 보는 편이다. 즐겁고자 보는 것이니 늘 즐겁기만 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K팝 콘텐츠를 소비하는것은 때로 불편하고, 죄책감을 자극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무례한 중년 남자만큼 싫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불편한 콘텐츠가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애교(aegyo)다. 애교 콘텐츠란 아이돌에게 아기 혹은 어린이 흉내를 내도록 하는 것으로, “띠드버거(치즈버거)”,“기싱꿍꼬또(귀신 꿈 꿨어)”, “귀요미송” 따위가 있다. 아기 흉내라고는 했지만 진짜 영유아의 모습을 따라하는 것은 아니다. 귀여운 매력을 보이는 것과도 다르다. “애교 하나 해봐”라는 말이 요구하는 것은 정형화된 동작이다. 10대 후반부터 성인에 이르는 연예인들이 발음을 뭉개고 볼에 공기를 빵빵하게 채우거나 입술을 내밀며 한껏 과장된 표정을 짓는 등의 이상한 표현을 한다. 나는 이 애교 콘텐츠가 매우 불편하다. 애교 콘텐츠의 정형적 요소가 부정확한 발음, 사지를 가누는 법을 배울 때의
K콘텐츠와 인권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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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적>(2002) 이래 드라마 속에 검은 우의를 걸친 연쇄살인범이 수없이 등장했다. tvN <악의 꽃>의 반사회적 인격장애 캐릭터 도현수(이준기)도 우의를 입었다. 아버지가 저지른 연쇄살인의 공범 혐의로 수배 중인 그는 자신을 알아본 기자 김무진(서현우)을 지하실에 감금한다. 비가 퍼붓던 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의를 입은 채 그는 사지가 묶인 김무진의 입에 김밥을 하나씩 떼어 넣어준다. “입맛에 맞을 거야. 너희 집 근처까지 가서 사왔거든.”
무슨 사이코패스가 김밥을 사다 먹이나! 김무진의 위장에 김밥을 남겨 경찰 부검에 대비하려 했다는데 말은 무시무시해도 도현수의 실제 수고는 산 사람과 협상하는 쪽에 쓰인다. 서스펜스에 엮어내는 괴이한 유머는 유정희 작가의 장기. 도현수는 김무진이 포털사이트 지식인에 올렸던 질문, 자기 과거가 드러나면 기자직에 영향이 있을지 묻던 내용을 본인 입으로 읽게 한다. 36살 남성의 목소리로 낭독하는 글의 시작은 이렇다
'악의 꽃', 어떤 사이코패스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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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을 보았다. 8월20일 개봉하는 이 작품은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네개의 상을 수상한 이래 서울독립영화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무주산골영화제 등을 거치며 평단과 관객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영화를 미리 본 관객은 입을 모아 오즈 야스지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에드워드 양, 허우샤오시엔과 같은 아시아 감독들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그건 <남매의 여름밤>이 가족이라는 우주를 탐구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오래된 양옥집을 배경으로 아버지와 남매, 남매의 고모가 우연히 여름 한철을 같이 보내게 된다.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고, 낮잠을 자고, 창밖을 바라보며 소일하는 등 영화 속 가족은 같은 공간에 따로 또 함께 존재하며 하나의 우주를 이룬다. 신인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남매의 여름밤>은 지극히 일상적인 나날들 가운데 마법처럼 빛나는 순간들을 포착하는 데 능하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서서히 엄습해
[장영엽 편집장] '남매의 여름밤' 그리고 못다 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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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는 차량 내비게이션에 목적지 ‘OO 요양병원’을 입력했다. 동생에게 연락이 온 건 일주일 전이었다. “아버지가 우리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신대.” 치매로 요양병원에서 생활하시는 아버지가 코로나19로 병원에서 몇달째 면회를 불허하자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은 줄 알고 걱정한다는 소식이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의 치매 진행이 더 빨라졌고 결국 병원에서는 제한적으로나마 면회를 허락하기로 했다. 그렇게 P가 아버지를 만나러 나선 참이었다.
요양병원에 도착하자마자 P는 입구에서 체온을 측정했다. 그리고 비누로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쓴 후, 다시 꼼꼼히 손 소독제를 발랐다. 코로나19는 노인에게 더 치명적이라고 하지 않던가. P는 아버지를 위해 평소보다 더 주의를 기울였다. 그 후 임시로 마련된 대기실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대기실에 무심히 켜진 TV에서 주말 연속극이 방영되고 있었다. 드라마 속배경은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이었다. 하지만 화면 속 등장인물 중에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은 아무도 보
당신을 위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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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지루한 장마에 납량특집 콘텐츠가 보고 싶다면 유튜브 <강유미의 좋아서 하는 채널>에 찾아가 ‘도를 아십니까’ 롤플레이 영상을 클릭하자. 1분 안에 강남역 어딘가에서 사이비 종교 포교인에게 꼼짝없이 붙들린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수상한 머리띠와 안경, 상냥한 듯 기계적인 정체불명의 말투, 광기 어린 미소와 눈빛을 장착한 강유미는 영상에서 눈 뗄 수 없는 연기를 펼친다. 설문조사를 빌미로 말을 건 다음 ‘마음공부’와 ‘조상님의 은덕’을 들먹이더니 어떻게든 자기 말에 동의하게 만드는 기술은 점점 심장을 조여온다. “혹시 평소에 금방 피곤해지지 않아-요? 아니에-요? 자고 일어나도 금방 다시 또 눕고 싶고 그런 기분 없어요? (응시) 그런 적 한번도 없어-요? 살면서 한번도 없었다고요-? 그쵸, 있죠?” 음료수라도 ‘베풀어’ 달라는 그를 따라가 이것저것 갈취당하고 나면 어느새 조상님 제사상 앞에 서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살고 싶으시면 제사를 지내셔야 해요. 그렇
'강유미의 좋아서 하는 채널', 유투브의 강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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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나리오를 본편보다 먼저 접하게 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어떤 정보도 알지 못한 채 영화를 보는 것이 최적의 관람 환경이라고 믿지만, 영화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시사회에 앞서 시나리오를 보고 아이템을 기획하거나 인터뷰를 준비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뒤 극장에서 완성된 영화를 확인할 때마다 시나리오와의 간극을 생각해보곤 한다. 어떤 영화는 시나리오를 보며 상상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어떤 영화는 시나리오에서 예측할 수 없었던 충격과 감흥을 안겨준다. 후자와 같은 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영화라는 종합예술의 속성에 감탄하게 된다.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감독과 스탭들은 마법 같은 솜씨로 영화의 무드와 톤을 바꿔놓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몰라도 현장의 밖에 위치한 관찰자에게 영화의 제작 과정은 늘 놀랍고도 신묘한 우연의 연속으로 느껴진다.
1268호의 주제는 ‘비하인드 스토리’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겠다. 개봉 첫날 34
[장영엽 편집장] 영화의 뒤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