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책에서 보고 배웠다. 프랑스혁명에서 삼권분립과 함께 근대가 열렸고, 68혁명이라는 일종의 문화혁명이 있었다, 이런 건 다 책에서 본 것이다. 국가를 어떻게 견제하는가, 그게 민주주의라고 알았다. 최장집 교수의 고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달성한 시대 이후에 어떻게 새로운 도전을 맞을 것인가, 그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 민주주의는 한국에서 이루어졌는가? 글쎄올시다.
푸르동이라는 독일 경제학자가 마르크스 이전의 19세기 중반에 ‘산업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이때의 산업은 우리 식으로 하면 직장 민주주의 정도 된다. 국가가 아닌 경제 분야에서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68혁명을 경계로 노조가 강해지면서 회사 안에 민주주의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68혁명에 대거 참여한 여성들은 임신중절을 요구하면서 스스로 권력을 갖기 위한 노력을 했다. 이렇게 유럽은 일상생활 속에서 스스로 민주주의를 만들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는 국가 장치의 민주화에서 정지했고, 비슷비슷한 집단들의 권력 다툼만 남았다.
회사 안에서 벌어지는 직장 갑질에 대한 거부, 젠더 문제에 대한 미투 흐름에 이어 드디어 해묵은 학교 폭력에 대한 폭로가 연일 쏟아진다. 법리적으로만 보면 이게 참 황당한 일이기는 하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공소시효 같은 게 남아 있을 리도 없고, 휴대폰이 있던 시절이 아니라서 무슨 증거가 있기도 어렵다. 있는 것은 기억에 의존하는 누군가의 폭로뿐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이걸 지지하는 이유는, 집단 괴롭힘 등 우리 학교에 학폭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뒤늦은 문제 제기지만 현실의 문제를 풀기 위한 대중적 지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억울하게 지명된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알지만 대체적으로 “학폭은 안된다”라는 명제에 우리 사회가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젠더 이슈에 의한 미투, 학폭 미투 그리고 또 하나 특이 현상이 아동 학대가 많이 보도된다는 사실이다. 아동 학대가 갑자기 늘어난 게 아니라면 사회적 감수성이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큰 눈으로 보면 이건 가정 민주화 이슈다. 역시 생활 민주주의의 연장선이다. 정치 프로그램에서 밀려난 젠더, 가정, 학교, 이런 다양한 생활 민주화 논의가 터져나오는 게 일련의 흐름이다. 마치 압축 경제로 단기간에 경제를 성장시켰듯이, ‘압축 생활 민주화’를 보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발생하는 선진국 현상의 일환이다.
모든 압축된 현상은 거칠다. 그래서 부작용도 존재한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억울한 사람들이 생길 가능성도 매우 높다. 압축적 흐름과 섬세한 접근을 조화시킬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