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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가 20주년을 맞았다. 2000년 5월 20일, 칸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뒤 21세기 걸작 영화 목록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 작품의 시작을 기념하는 의미로 지난 5월 20일 각종 SNS 플랫폼에는 수많은 사진과 글이 쏟아졌다. <화양연화>와 처음으로 극장에서 만났던 순간을 추억하며 <씨네21> 홈페이지에서 아카이브 기사를 검색하다가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다. 지아장커 감독이 2001년 <화양연화>에 대해 쓴 리뷰다. 그는 20년 전 영화 <플랫폼> 상영을 위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 폐막작의 감독으로 부산에 온 왕가위와 조우했다고 한다. 지아장커는 부산에서 <화양연화>를 보지 못했으나, 영화제를 찾은 젊은 관객이 십중팔구 손에 든 <화양연화>의 팸플릿을 보고 이 영화가 밀레니엄 시대의 새로운 유행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화양연화>는, 지아장
전주에서 만나요, 천천히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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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Y가 출근 버스 안에서 졸아 종점까지 가버린 어느 날이었다. 그날 아침 마법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Y를 뺀 세상 전부가. Y가 출근한 직장에서는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집으로 돌아가자 그곳엔 다른 이가 아무 일 없듯이 살고 있었다. Y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는 존재하지 않는 번호였다. 문자 그대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와 정보만 증발해버렸다. 세상에 Y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Y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을 움직였던 것일까.
사라지고 싶다. Y는 최근 한숨을 내쉴 때마다 사라지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Y는 그냥 사라지고 싶었다. 어딘가 떠나버리거나 죽고 싶다는 것과는 달랐다. 그런 일들은 흔적이 남는 일이다. 자기 죽음으로 누군가에게 짐이나 혹은 감정적인 부담을 주기는 싫었다. Y는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증발했으면 했다. 나라는 존재 바깥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소거하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Y는 다른 사람을 추적해 개인정보를 캐내
완벽하게 사라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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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영씨가 증말 츤재라!” 누구도 이 말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신인가수 ‘둘째이모 김다비’까지 인정하더니 신뢰도가 200%로 뛰어버린다. “입 닫고 지갑 한번 열어주라 회식을 올 생각은 말아주라 주라주라주라주라 휴가 좀 주라~ 마라마라 야근하덜 말아라 낄낄빠빠 가슴에 새겨주라 칼퇴 칼퇴 칼퇴 집에 좀 가자~”라는 김신영의 신랄한 가사가 돋보이는 다비 이모의 데뷔곡 <주라주라> 뮤직비디오는 공개 1주일 만에 유튜브 조회수 170만건을 넘겼다. 물론 준비된 신인 다비 이모의 흥겨운 퍼포먼스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트로트가 대세인 요즘이라도 이렇게 뜨거운 반응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빠른 45년생이지만 철마다 직접 캔 약초를 먹고(겨우살이는 경동시장에서 떼오지 않지만 부군과는 겨우 산다고) 새벽엔 수영, 점심엔 에어로빅, 심야 테니스 사이사이 맥주 만(10000)cc 섭취로 다진 체력과 목으로 훌라후프를 돌리는 운동신경까지, 다비 이모는 타고난 댄스가수다. 3대째 오리
MBC '전지적 참견 시점', 얼른 섭외해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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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영화평론상 접수 마감이 3주 앞으로 다가왔다. 영화평론상과 관련해 올해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질문은 작품비평의 대상을 극장 개봉작에 한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지면을 빌려 답변을 드리자면 극장 개봉작과 더불어 2019년, 2020년 OTT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영화까지 범주를 넓혀 심사하려 한다. 영화평론상 공지를 처음으로 낸 3월 말에는 5월 무렵이면 극장 개봉하는 신작 영화의 편수가 예년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고,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통합전산망에 집계된 4월의 극장 관객수가 2004년 집계를 시작한 이후 최저를 기록했으며 5월 개봉예정작들마저 줄줄이 연기되고 있는 지금은 ‘2019, 2020년 국내 극장 개봉작’으로 대상을 한정했던 기존 영화평론상 작품비평 공모 기준의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지원자 여러분에게 혼란을 드린 점 양해를 부탁드린다.
바야흐로 혼란의 시대다. 언제,
[장영엽 편집장] 혼란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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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에피소드들로 가득한 책 <다크룸>은 미국 페미니스트 수전 팔루디가 격조했던 아버지로부터 한통의 이메일을 받으며 시작된다. 폭력적인 가부장 ‘이슈트반 팔루디’가 성전환수술을 받은 후 ‘스테파니 팔루디’로서 보낸 것이었다. 그녀는 긴 설명 없이 오직 ‘사진’으로만 말하고자 했는데, 그건 평생 광고사진 촬영과 영화 제작을 해온 아버지에게 익숙한 방식이었다. 그리하여 책은 어린 시절 ‘깜깜한 방’에서 벌 받듯 자신의 내면 일부를 ‘어두운 벽장’에 가둬온 아버지가 ‘암실’에서 사진 편집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거듭 변형·창안해온 이야기, 그럼에도 다 설명되지 않는 서사의 ‘검은 공백들’을 메우려는 수전 팔루디의 이야기다.
‘원본과 사본’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챕터에서 스테파니는 자신의 거주지인 헝가리로 찾아온 수전에게 ‘정통’ 헝가리 민속문화를 보여주려 애쓴다. 그런가 하면, 수많은 사진들을 자기 생애사라며 보여주는 스테파니에게서는 “항상 무언가 수정하는 사람의 냄새
‘원본과 사본’에 대한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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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워런트는 영국 왕실 납품 업체에 주어지는 품질 인증서다. 고층아파트에서 가장 살기좋은 층수도 로열층이라 부른다. ‘로열 또라이’도 있다. 교도소에 죄수 신분으로 잠입한 국가정보원 산업보안팀 소속 백찬미(최강희)가 그렇게 불린다. 내키는 대로 활개를 치고 다니다가 교도소 내 왕따 폭력 현장을 단신으로 제압한 찬미를 두고 죄수들은 ‘로또(로열 또라이)’라 부른다. 미치광이처럼 보여도 뭔가 다르다고 해서 ‘로열’이 붙었다.
SBS 드라마 <굿캐스팅>은 국정원 요원들의 목숨을 앗아간 산업스파이를 잡으려 대기업에 위장취업한 세명의 여성 요원 이야기다. “실력도 최고, 똘끼도 최고”로 평가받는 찬미는 현장 경험이 전무한 IT 분야 특채 사원 임예은(유인영)과 국내 안보파트 24년차 베테랑이자 슬슬 ‘관절에 바람에 들기 시작’한 황미순(김지영)과 팀을 이루자니 걱정이 많다. 그런 찬미가 새벽 6시 특훈을 지시하자, 예은이 아이가 있어서 새벽은 곤란하다고 답하는 대목이 있었다.
'굿캐스팅', 편견을 버리면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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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연휴 기간 동안 <GV 빌런 고태경>을 읽었다.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 <투 올드 힙합 키드>와 극영화 <사브라> <메이트>를 연출한 정대건 감독의 첫 장편소설이다. 온 힘을 다해 첫 장편영화를 만들었으나 “관객수 987명, 평점 5.2, 달랑 4개의 댓글, 그리고 빚 300만원”만 남게 된 어느 초짜 영화감독의 ‘방황의 시간’을 좇는 <GV 빌런 고태경>은 유머러스한 제목과 달리 한국영화계의 멜랑콜리한 풍경을 조명한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이다.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감독의 영화가 쏟아져나오던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시절,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영화학교에 입학한 주인공은 첫 장편영화가 흥행에 참패한 뒤 영화 현장지원, 입시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재능으로 반짝이던 동기들은 하나둘 영화의 꿈을 접고, 영화 찍다 헤어진 배우 출신의 전 남친은 독립 장편영화의 주연을 맡으며 ‘<씨네21>이 주목하는
[장영엽 편집장] 당신의 차기작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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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없다. 세상일이 그렇게 명쾌할 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견디질 못해서 스스로 명쾌하다고 주장하는 의견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복잡한 세상에서 내 한몸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해가며 더 복잡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듣고 그걸 정답이라고 믿는다. 잘못된 이야기를 정답으로 여기거나, 어느 정도 옳은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그 믿음이 과도하게 작동하는 경우, 어떤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는 1995년 옴진리교 교주의 주도하에 도쿄 지하철에서 벌어진 사린 가스 테러 사건을 배경으로, 그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고있는 르포르타주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더그라운드>에 이어 옴진리교에 속해 있었던 신자들을 인터뷰한 <약속된 장소에서>를 출간했는데, 이렇게 방대한 작업을 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정답은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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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니까 이건 대한제국 국민 말도 들어봐야 한다. 입헌군주제 정말 괜찮은 건지. SBS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에서 대한제국 황제 이곤(이민호)은 부산에서 정7품 백마 맥시무스를 타다 대한민국 서울 광화문에 떨어졌는데, 여기가 평행 세계임을 금세 알아채지만 “나는 나라서 나인 사람이라”(줄이면 ‘내가 낸데’) 황제로서의 애티튜드를 당당히 유지하며 홀로 으쓱댄다.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면서도 세금을 내기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라는 황제는, 재킷의 다이아몬드 단추를 팔아 명품 쇼핑과 스위트룸 투숙에 탕진하면서도 태연하다.
대한제국이 대한민국과 거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근대국가라는 점은 이곤이란 인물을 둘러싼 위화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80년대생 이곤이 양쪽 세계에서 종종 던지는 농담은 “참수다”인데,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의 세자 이창(주지훈)도 “삼족을 멸할 것이다” 같은 농담을 했지만 그는 조선시대 사람이기라도 했다. 대한제국 황실은 종묘사직이
'더 킹: 영원의 군주', #세상에_이런_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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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4월 말 5월 초마다 찾아오는 연휴에 대한 기억은 전주라는 도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맘때가 되면 어김없이 <씨네21> 기자들은 전주국제영화제에 갈 채비를 했다. 화창한 날씨와 영화의 거리를 가득 메운 관객. 극장에서는 화제의 신작 영화가 온종일 상영되며 수많은 맛집들이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더랬다. 이 익숙하고도 즐거운 풍경을 올해는 누릴 수 없다는 자각이 생각보다 큰 상실감을 안겨주는 것 같다. 이번호 국내뉴스에서 자세하게 소개했지만, 5월 28일 개막하는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며 ‘무관객 영화제’로 운영될 예정이다. 그동안 해외 유수 영화제들이 오프라인 행사를 취소하고 온라인 상영을 계획한다는 소식을 지면을 통해 전해왔으나, 매년 연례행사처럼 찾던 국내영화제에 실질적이고 직접적으로 불어닥친 변화야말로 2020년의 국제영화제가 처한 위기를 절감하게 한다. 영화제의 근간이었던 극장과 관객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 영화제 관계자
[장영엽 편집장] 극장, 관객, 그리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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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 일하다 변호사가 된 다음 자주 받는 질문들이 있다. “변호사로 전직한 이유가 뭔가요?”, “강력범을 변호할 수 있나요?”, “돈을 많이 버나요?” 같은 무난한 질문도 있지만, 다소 곤란한 질문도 있다. 그중 가장 난처한 질문을 딱 하나 꼽자면 단연 “사건 맡은 경험으로 소설을 쓰기도 하나요?”다.
이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다. 상상해본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타인의 민감한 분쟁을 다루고, 비밀유지의무를 진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글은 아주 널리 퍼질 가능성이 있다. 세상 어느 누가 “일한 경험을 소설로 쓴다”고 말하는 변호사에게 자신의 사건을 맡기겠는가? 받은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것은 변호사로서나 작가로서나 직업윤리상 “그렇다”고 답할 수 없는 외통수 질문인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해 두 직업인으로 살아오며, 나는 이것이 비법조인/비소설가라면 떠올릴 만한 궁금증이라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일단 법조인은 발언권이 큰 직업
윤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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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오늘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일까? 심리상담센터지안원 원장 이신(김지수)의 초대로 모인 11명의 사람들이 술렁인다. 아파트 경비원 최경만(임하룡)은 “기왕이면 젊은 시절로 가야지 꼴랑 1년이 뭐냐”고 투덜댄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이미 수차례 ‘리셋’을 반복해온 이신은 주도면밀하게도 로또 추첨시간에 딱 맞춰 티브이를 틀고 당첨번호를 읊는다. 하지만 일년치 당첨번호를 모두 수첩에 메모해도 소용이 없다. 현재 시점의 내 육체와 정신이 모두 과거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몸에 지금의 ‘기억’만 보내는 것. MBC <365: 운명을 거스르는 1년>이 다루는 타임슬립의 얼개다.
기억을 보낸다는 의미가 뭘까? 기억과 의식이 동일하다면 현재 시점의 내 몸은 죽나? 아니면 평행세계의 내가 존재하게 되는 걸까? 당첨금이 가장 컸던 회차의 로또 번호를 외워가도 11명의 ‘리세터’가 몰린다면, 세금까지 제한 실수령액은 턱없이 적어지는 게 아
'365: 운명을 거스르는 1년' , 1년 전 오늘로 돌아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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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 스위치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 지난 3월 콘솔게임 역사상 최다 월간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한다. 글로벌시장 정보 업체 슈퍼데이터는 3월 전세계 디지털게임 매출액 또한 100억달러에 달한다고 전하며 코로나19 이후 게임 업계의 선전을 알렸다.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사회적 거리두기 시행과 더불어 전세계적으로 직격탄을 맞은 영화산업과 달리 방구석에서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은 엔터테인먼트를 안전하게 즐기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선택을 받게 된 것 같다. 더군다나 최근 뭇 게임이 구현하는 가상현실의 퀄리티는 이미 그 자체로 영화적인 경험과 맞먹는다. 영화 같은 드라마, 영화 같은 게임이라는 말이 있듯, 스토리텔링 산업의 최종 콘텐츠로서의 지위를 오랫동안 누려왔던 영화는 이제 게임을 비롯해 무서운 속도로 진화하는 여타의 콘텐츠 산업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시점에서 게임과 영화의 관계를 다시 고찰해봐야 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 이
[장영엽 편집장] 게임과 영화의 관계 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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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나는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 H와 종종 하교를 함께하곤 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진입로를 지나 학교 아래에 다다랐을 때 빨간 소형차를 보았다. “혹시 너희 2학년이니?” 차 앞에 서 있던 한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물었다.“네.” “나, 6반 제일이 엄마인데, 6반은 아직 안 끝났니?” 6반이라면 우리 옆 반이었다. 우리 반이 종례가 늦게 끝나서 하교 때 이미 그 반은 아무도 없었다고 답했다. 아주머니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집으로 가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시내에 있는 학원에 갈 거라고 하자, “제일이 데리러 온 건데, 제일이는 먼저 갔나 보네. 대신 아줌마가 너희들 학원까지 태워줄게”라고 했다.
친구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 올랐다. 제일이라는 친구의 존재를 그날 처음 알았다. 학원까지 가면서 아주머니는 우리의 이름을 물었고,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아들 제일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했다. 사는 곳이며, 아들이 나온 초등학교, 그가 가장
사월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