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만한 영상을 찾아 스트리밍 사이트의 목록을 훑는다.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시원한 여름을 위한 공포 특집’, ‘혼밥족을 위한 드라마’ 같은 분류명이 붙은 포스터 목록이 나타난다. 여기도 남자, 저기도 남자, 여기는, 어디 보자, 남자 다섯에 여자 하나…. 몇번이나 화면을 다시 당겨 보다가, 결국 포스터에 남자만 있어도 장르상 납득은 된다 싶은 선협물을 고른다. 은거해 음악으로 마음을 나누며 산다는 노인이 네명 등장한다. 남자 셋에 여자 하나다. 심지어 남자1은 현을 타고 남자2는 무공이 높고 남자3은 높은 벼슬을 했고 어쩌고인데, 여자1은 남자1의 아내란다. 이 조연 네명은 2화 만에 습격을 받고 사라졌지만, 개운치 않은 마음은 남는다.
성비가 맞지 않는 콘텐츠는 더이상 즐겁지 않다.
의식해 추구한 변화가 아니다. 소비자운동적인 행동도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보고 재미없는 것은 피하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전체 등장인물들의 생물학적 성비가 맞지 않는 영화나 드라마, 남자들끼리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재미가 없다. 시사나 교양 프로그램도 진행자의 성역할이 지나치게 구습적이면- 남자는 설명을 하고 여자는 추임새를 넣는다든가- 내용이 아무리 알차도 그 전달자의 성별 편향성이 거북해 어쩐지 보다 말게 된다. 소비자운동이 아니기 때문인지 남자가 많아도 설정을 나름 납득하면 여전히 재미있게 보기는 한다. 그래서 요즈음은 선협물이나 역사물만 계속 보고 있는데,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내가 향유하는 속도가 빠른 이상 이 그릇은 금세 바닥을 드러낼 터다. 아니면 내가 무공을 쌓는 남자들‘만’ 보는 것에도 질려버리거나.
성별 반전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성역할에 대한 대단한 도전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콘텐츠 안 세계에 언제나 남자가 더 많은 것이 피곤하다. 콘텐츠에서 표현되는 성비가 실제 사회인구의 구성 성비가 아니라 사회 내 성별이 갖는 ‘발언권’의 비율인가 싶을 때에는 거북해진다.
적은 수의 여성 캐릭터에 여러 특징을 몰아넣다보니 여성 캐릭터의 완성도나 일관성이 대체로 남성 캐릭터보다 부족한 경향이 있는데, 이것도 재미를 크게 떨어뜨린다. 하나의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세명이 각자 일 잘하는 사람, 밥투정하는 사람, 가족에게 냉정한 사람이라는 캐릭터를 여유롭게 구축하는 사이에 여자 한명이 혼자 일 못하고 밥 잘 먹고 가족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인 식이다. 잘 조형된 남성 캐릭터와 과중한 설정을 짊어지고 있지만 나와 지정 성별은 같은 여성 캐릭터 사이에서 몰입하지 못하다가 어영부영 아예 시청을 그만둔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남자가 더 많을까? 다섯명이 있으면 남자가 세명, 여자가 두명. 열명이 있으면 현실에서 소위 여초 직군이 배경이라도 반 이상이 남자.
영상 콘텐츠를 볼 때마다 ‘지금부터 이 화면 속 세계는 남초’라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설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딱히 여자가 몰살당했다거나 성별 취업 제한이 있다는 가정이나 설명도 없이 대충, 안이하고도 집요하게, 아무 장면에서나 남자가 더 많다.
잠깐, 이건 그냥 설정 구멍이잖아. 생각해보니 이렇게 커다란 설정 구멍을 알아서 메우며 봐야 하는 콘텐츠들이 재미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래, 그렇구나. 덜 만든 작품들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