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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표지 사진에 검은 옷과 흰 리본으로 조의를 표하고 싶다구요” 영화사를 통해 표지 촬영 때 미군들에게 죽은 여중생 효순, 미선이에게 조의를 표하고 싶다는 류승범의 의사를 전해 듣고, 아주 잠깐이나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류승범과 공효진 두 배우가 등장한다면 응당 명랑한 에너지가 넘치리라는, 언제부턴가 자연스레 그들에게 기대해온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제안. 공효진도 흔쾌히 동의했다는 류승범의 아이디어에, 몇초간이었지만 올해의 마지막인 송년호 표지로 혹 너무 무겁진 않을까 하는 갈등도 스쳤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리고 참 건강한 활기를 띤 그들답다는 모종의 반가움과 미더움 역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생각했죠.” 형 류승완과 박찬욱, 김지운 감독은 삭발까지 했는데, 배우라 당장 머리를 깎을 순 없지만 뭔가 해야겠다 싶었다는 게 나중에 들은 류승범의 말이다.
공효진이 먼저, 류승범이 조금 늦게 스튜디오에 들어선 겨울날 오후. 분명
<품행제로>의 두 배우 류승범, 공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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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뒤에 돌아오겠다던 관객과의 약속대로, <반지의 제왕>은 지난 12월 19일 전후 세계 극장가에 화려하게 귀환했다. 아직 공식 집계가 이뤄지진 않았지만, 국내 극장만 해도 이미 개봉 주말까지 예매 매진을 기록하면서 최소 30만 관객의 환대를 예약하며 돌아온 것이다. <반지의 제왕:반지원정대>(이하 반지원정대)의 웅장한 서막을 잇는 3부작의 2악장은 <반지의 제왕:두 개의 탑>(이하 <두 개의 탑>). 이미 3부작을 동시에 촬영했던 피터 잭슨은, 매 편마다 꼬박 1년이 걸린다는 편집 및 후반 작업으로 올해를 보냈다고. <데드 얼라이브> <천상의 피조물> 등 저예산 B급 호러영화를 주로 만들어온 뉴질랜드 감독이 2억7천만달러를 들여 찍은 <반지의 제왕>은 할리우드의 거대한 도박이었지만, <반지원정대>는 세계 시장에서 8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뒀다. <두개의 탑> 역시 전작
<반지의 제왕> 시리즈 감독 피터 잭슨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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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균 감독은 좀처럼 ‘감독님’으로서 폼을 잡거나 점잔을 빼는 일이 없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LG애드에 들어갔던 내력을 묻는 질문에 “광고를 하면 매일 연예인들하고 논다고 그래서”라고 답하는가 하면, 좋아하는 감독은 “히딩크”란다. “추진력, 선수들에 대한, 내 경우라면 배우가 되겠지만, 신뢰, 그것도 이름값을 떠난 실력 자체에 대한 믿음, 긴장 속의 여유” 등등 설명까지 덧붙이며. 20대의 성적 에너지와 섹스를 둘러싼 해프닝을 적나라하게 담아내면서 늦깎이 대학생 은식의 우직한 순정을 보여주는 그의 최근작 <색즉시공>만큼, 거침없는 성격이랄까.윤제균 감독은 지난해 12월, <조폭 마누라> <달마야 놀자> 등 전국 관객 400만명 이상을 동원한 조폭코미디의 대열에 합류한 <두사부일체>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렀다. LG애드 전략기획팀에 4년간 몸담았던 그는, 99년 세계 인터넷 광고 공모전에서 LG그룹의 동영상 광고로 대상을 수상했던
˝관객이 웃는다, 행복하다˝,<색즉시공> 윤제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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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희는 깔끔한 사람이다.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못 하는 것을 깨끗하게 가린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필모그래피는 지금보다 훨씬 많거나, 적어도 한편은 더 많을 것이다. 인터뷰 시작 전 커피를 권했을 때 지진희는 “아니요”라고 조용히 거절했다. 커피는 원래 마시지 않는다면서. “커피는 향과 맛이 달라서 이중인격 같아요. 향은 달콤하지만 맛은 쓰잖아요.” 그리고 그는 녹차를 마셨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주관이 뚜렷하고, 커피의 향과 맛을 분리해 느낄 정도로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는.
지진희는 6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연기자가 된 경력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보통 직장인의 생리를 알 대로 다 안 뒤, 전혀 다른 세계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회사원으로서 지진희가 한 일은 디자인과 광고사진 촬영이었다. 어느 날 건너건너 아는 (그러니까 거의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연기자 데뷔를 권유받았고, 그는 마치 커피를 거절하듯 거절했다
느릿하게, 하지만 탄탄하게, 의 지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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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소년을 냉동시키고 싶어한다. 열다섯살이 되고 열여섯살이 되어도, 홀마크 카드에 그려진 복숭아빛 뺨의 귀여운 꼬마 마법사로 머무르도록. 어른들이 소년의 굵어진 이목구비에 소스라치고, 한 옥타브 낮아진 음색에 펄쩍 뛰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러나 애초에 대니얼 래드클리프(13)에게 호그와트 입학 허가가 떨어진 가장 큰 이유는 예쁘장한 얼굴이 아니었다. 사실 해리 포터 오디션 장만큼 미소년이 흔했던 장소가 지구상에 또 있었겠는가.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가 끝없이 끌어안고 싸워야 할 대상이 절대반지라면 해리 포터에게는 흉터가 있다. 해리의 번개모양 흉터는 아들 대신 죽어간 엄마의 축복인 동시에, 원수 볼드모트와 해리의 영혼이 하나였던 찰나의 흔적이고, 명성의 표지이며 저주의 낙인이다. 그런데 흉터는 언제나 소년의 앞머리에 가려져 있다. 누구도 정체를 알지 못하는 비범함은 평범 속에 은폐돼 있다. 평소의 해리는 시험을 지겨워하고 얄미운 상대가 나자빠지면 좋아라 웃어대는
마음속 단 하나뿐인 해리 포터,대니얼 래드클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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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컬쳐 박무승(42) 대표는 좀처럼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 매년 ‘파워50’에 이름을 올리지만, 정작 그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전형적인 금융권 출신. 창투사인 국민기술금융에서 15년 동안 투자심사역을 맡았다. 영화쪽에 눈을 돌리게 된 건 97년부터다. 이후 <퇴마록> <이재수의 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텔미썸딩> <행복한 장의사> <해피엔드> 등 10편의 작품에 투자했다. 그가 주목받은 것은 전액 투자한 <반칙왕>이 성공을 거두면서부터. 지난해 2월부터는 국민기술금융에서 떨어져 나온 KM컬쳐의 대표를 맡고 있다. 영화 외에도 음반 등의 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정작 충무로에선 “투자 결정에서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평가를 들어왔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다르다. 그동안 ‘씨 뿌려왔던’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갔기 때문. 이미 개봉한 <중독> 외에도 &l
<중독> <이중간첩> 투자, <품행제로> 제작한 KM컬쳐 대표 박무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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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니 닐슨은 자신의 직업이 불명예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냉정한 배우다. 서른여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와 혼자 키우는 열한살짜리 아들을 짊어진 닐슨은 그 무게에 걸맞은 현실적인 판단력을 지녔다. “연기는 항상 어느 정도 천박하고 하찮은 일로 여겨졌어요. 어떤 시대엔 배우는 축복받은 묘지에 묻히는 일조차 허락받지 못했죠. 우리 배우들은 언제나, 약간은 아웃사이더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것이 뒤늦게 빛을 본 배우의 자기비하는 아닐 것이다. 열다섯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지방극단 무대에 섰던 닐슨은 초라한 시작과 서른이 넘어서야 찾아온 명성을 한줄기로 아우르는 넓은 품을 지녔다. 흑백영화 시대 여배우처럼 약점없는 외모를 가진 그녀가 어딘지 어머니처럼 보이는 까닭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닐슨은 애정없이 자라 비뚤어진 남동생의 사랑을 받는 <글래디에이터>의 로마제국 왕녀 루실라로 이름을 알렸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서른넷이었다. 처음 대사 연습을 하는 자리에서
추운나라에서 온 여배우,<스토커>의 코니 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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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눈, 뾰족한 턱, 깡마른 몸. 그런 염정아는 빙산의 일각이다, 라는 걸 그녀를 만나고 얼마 안 되어 알게 되었다. 편안한 웃음, 친절한 태도, 솔직한 이야기. 직접 만나 본 염정아는 ‘모난’ 이미지보다는 ‘둥글둥글한’ 느낌이 더 강한 사람이었다. 왜 사각의 화면은 그녀를 그렇게 뾰족뾰족해 보이게 하는 걸까 의아한 생각이 들 만큼. 염정아를 만난 건 그녀의 새 영화 <H>의 기자시사회가 있기 하루 전 날이었다. 그녀의 ‘다른’ 모습에 놀란 다음날, 그런데 삼차원의 실제 공간에서 그리 모나지도 마르지도 않아 보이던 그녀는, 영화 속에서 영락없이 종이인형 같은 평소의 이미지 속으로 쏙 숨어들어가 있었다. 카메라는, 염정아를 늘 그렇게 ‘변신’시키는 것 같았다.
염정아가 3년 만에 출연한 영화 <H>는 <양들의 침묵>과 <쎄븐>, 그리고 얼마간은 그녀의 전작 <텔미썸딩>을 연상케 하는 범죄스릴러다. “<텔미썸딩>에서는 용
신작 로 3년만에 돌아온 염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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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소야 나 최영의야.” <넘버.3>에서 불사파 두목 송강호의 명언으로 남은 그 대사를 기억하시는지. 집채만한 황소 수십 마리와 드잡이를 하다가 가뿐히 메다꽂았다는 장수 최영의, 아니 최배달의 존재가 미미하게나마 스크린에 드러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세계 모든 격투기를 제압하는 등 무패의 신화를 일궜던, 극진 가라테의 창시자 최배달의 생애가 방학기씨의 동명만화 <바람의 파이터>를 토대로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흘러나온 것이 2년 전. 문제는 제작진이 단순히 최배달의 ‘대역’이 아닌 ‘현신’을 찾는다는 데 있었다. 진짜 싸움의 냄새를 알고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고행에 가까운 수련 과정을 오롯이 따를, 그리하여 실제 무술의 고수들과 겨룰, ‘될 성부른 떡잎’을 찾아내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서프라이즈! 그 문제의 ‘파이터’로 낙점된 이는 기성 배우도 무술인도 아닌, 가수 비였다.
“네가 무도(武道)를 알아?” 비의 캐스팅 소식이
세계구 연기자,자신있습니다!<바람의 파이터>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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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발레리 르메르시에)는 다음날이면 애인의 집으로 이사해 그와 함께 새 생활을 꾸려갈 예정이다. 그처럼 자신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기 바로 전인 금요일 밤에 로르는 친구와 함께 식사하기로 약속을 해두었다. 차를 몰고 시내로 나선 로르. 하필이면 그날 밤은 엄청난 교통정체가 일어난 날이어서 그녀는 도로 위에서 꼼짝도 못할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로르는 장(뱅상 랭동)이라는 낯선 남자를 자기 차에 태워주게 된다.
클레르 드니의 신작 <금요일 밤>(2002)은 새로운 삶을 눈앞에 둔 한 여자가 그 전날 밤 동안 겪게 되는 짧은 외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이렇게 간단히 이야기하면 사실 이런 유의 영화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만든 사람이 클레르 드니라는 동시대 프랑스영화의 출중한 시인이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말이지 그녀는 이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특유의 관능적인 형식미 안에 담아냄으로써 한편의 아름다운 영화를
부산영화제 심사위원으로 내한한 프랑스 감독 클레르 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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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살에 문신과 청바지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여자. “거울을 안 보는 것이 내 젊음의 비결”이라지만, “아름다움은 몸이 아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지만, 5살 연하의 애인 커트 러셀 앞에서 젊음을 유지하고 싶어 전신박피수술도 감행한 여자. ‘고고댄서’로 스물에 무대에 올라 60살을 내다보는 지금 여전히 할리우드 무대를 누비는 여자. 세번의 이혼을 하고, 세명의 자녀를 두고, 그러나 아직도 머리를 기르고 애정전선에서 은퇴하지 않은 여자. 미국인들이 ‘완벽한 몸매’라 칭했던 젊을 적 그대로, 아직도 몸 전체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사는 여자. <죽어야 사는 여자> <행복했던 여자> <조강지처 클럽>의 골디 혼이 <와일드 클럽>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이미지와 딱 맞는, ‘왕년의 그루피’ 수젯이 되어서.
<와일드 클럽>에서 골디 혼은 그루피족으로 젊은 시절 화려하게 날렸던 중년 여성 수젯을 연기했다. 그루피는, 골디 혼이 실제로 종종
˝섹슈얼리티는 마음가짐˝,<와일드 클럽>의 골디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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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안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특히 대중 앞에서 일방적으로 소비되었던 사람이라면 더욱더. 펄럭펄럭 걷거나, 피식피식 웃거나, 곧잘 실없는 소리를 해대는 오락프로그램에서, 핏대 선연한 목으로 누구보다 진지하게 열창하는 무대 위에서, 몸에 입은 듯한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쳐 보이며 연민과 동질감 그리고 웃음을 주었던 스크린 안에서, 임창정은 모두 다른 색을 지니고 있다. 모두들 그를 안다고 할 수 있지만 누구도 그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순 없다.
90년, 열입곱살에 무작정 뛰어든 <남부군>을 시작으로 충무로 단역생활을 거쳐 “매니저 형이랑 지하방에서 라면 끓여먹는 게 다였던” 그의 삶은 <비트>과 함께 일대도약을 맞았다. “<비트> 끝나고서는 다르더라구요. 술먹고 자고 일어나니 호텔 스위트 룸이더라니까. 그때 정말 영화 같았어요. 사람 인생 이렇게 바뀌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후 9장의 앨범을 내고 꾸준한 인기를 유지한 ‘스테디셀러’ 가수
진짜진짜 온몸을 던졌어요,<색즉시공>의 임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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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리치는 50년이 넘도록 일본에 살면서 일본문화와 영화에 관해 글을 써온 사람이다. 1946년 요코하마항에서 처음 일본과 마주했던 리치는 낯선 땅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어느덧 일본과 영어권 국가를 잇는 다리가 되기에 이르렀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가 영어권 국가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도 리치의 공로가 컸다. 수십권의 책을 펴내 일본영화와 문화를 알린 리치는 아직 옛 모습이 남아 있는 도쿄 부근 우에노에서 광범한 저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 글쓰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이미지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그는 스스로 실험영화를 만들기도 했던 왕성한 활동가. 날마다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고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는 날이 없다는 리치는 일본보다 훨씬 늦게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한 한국영화로선 부러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으로 한국을 찾은 리치를, 영화평론가 임재철씨가 만났다. 그 자신도 일본영화에
영화평론가 임재철,일본영화 전문가 도널드 리치를 만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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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는 일본의 ‘촬영소 시스템’이 잘 작동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많은 우수한 감독들이 별다른 제약없이 자신들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60년대 들어 조락의 기미를 보이던 촬영소들은 70년대 들어 결정적으로 붕괴해버리고 만다. 그러한 붕괴의 과정을 설명한다면.무엇보다 감독과 제작자 사이에서 권력이 이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즈나 구로사와 같은 감독들은 제작자들이 함부로 뭐라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이들의 작품은 흥행도 어느 정도 보장됐을 뿐 아니라 작품성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케이션 촬영을 싫어했던 오즈는 촬영소 내에 비싼 세트를 지어서 영화를 찍었지만, 쇼치쿠는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60년대 컬러텔레비전의 보급이 활발해지면서 관객은 놀라울 정도로 격감했다. 그렇게 되자 영화사는 촬영소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비싼 영화’와 예전 방식을 고집하는 감독들을 피하게 되었다. 60년대
영화평론가 임재철,일본영화 전문가 도널드 리치를 만나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