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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감독은 미술대학을 나왔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림’ 그리는 데 능하다(조소를 전공했지만 그 또한 스케치가 필요한 일 아닌가). 우선, 그는 부산국제영화제가 탄생할 당시 영화제의 성격과 방향 등 커다란 밑그림을 그리는 데 큰 공헌을 세웠다. 부산프로모션플랜(PPP) 또한 그가 그린 그림의 일부였다. 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을 그만둔 뒤에도 그는 다시 부산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영화 촬영을 지원하는 부산영상위원회를 만든 것이다. 그러던 그가 이번에는 또 다른 대형 캔버스에 손을 댔다. 한국 최초의 영화마켓인 아시안필름마켓을 창설한 것이다. 10월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 동안의 숨가쁜 일정을 마친 첫 아시안필름마켓에 관해 박광수 감독, 아니 공동 운영위원장에게 들었다.
- 첫 번째 아시안필름마켓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 애초 기대했던 것만큼은 이룬 것 같다. 우선 기존의 PPP와 부산국제필름커미션·영화산업박람회(BIFCOM)이 지난해보다 훨씬 좋아졌다. PPP의 경우
올해 첫 개장한 아시안필름마켓의 박광수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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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차’는 사람을 잡아먹는 반신반귀(半神半鬼)의 존재다. 시체처럼 푸른빛을 띠고 있는 야차는 불교에서 전해지는 온갖 신(神)의 하나이면서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들려주는 괴담 속의 식인귀이기도 하다. 류승완 감독이 준비하고 있는 <야차>는 비유적인 의미가 아닌, 공포영화에 어울릴 법한 진짜 야차가 등장하는 영화다. 궁금했다. <주먹이 운다>로 잠깐 다른 장르를 건너다본 류승완 감독은 순수한 액션의 쾌감을 추구하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시절이 떠오르게 하는 <짝패>를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무협과 호러를 교배했다고 알려진 <야차>를 선택하게 되었을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두 번째 단편 <악몽>이 공포영화이긴 했지만, 류승완 감독과 공포영화의 만남은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은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직 시놉시스도 완성되지 않아 정말 할 말이 없다”면서 걱정스러운
무협공포물 <야차> 준비 중인 류승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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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의 연기는 산문보다는 시에 가깝다. <여자, 정혜>를 시작으로 <가을로>에 이르기까지 김지수가 연기한 배역들에서는 감정의 파고가 쏟아져나온다기보다 은은히 배어나왔다. 격정적인 대사나 극적인 표정 변화가 아닌 그 사이의 알쏭달쏭한 감정의 잔물결은 시구의 풍부한 상징과 함축처럼 여백을 남겼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자주 등장하지 않아도 영화 내내 가득한 존재감. <박수칠 때 떠나라>의 정유정은 출연 빈도로만 보면 아주 작은 역할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이고, 사건의 열쇠를 쥔 여인이었다. <가을로>의 민주 역시 그렇다. 그녀는 회상장면에서나 존재 가능한,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여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있다. 말로 설명하는 대신 그 존재로 인물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김지수와 김지수가 생각하는 <가을로>는 그래서 닮은꼴이다. “예쁜 시 한편 읽은 것 같다. 풍경화 같은 느낌이
여자는 여백에서 빛을 낸다, <가을로>의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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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여행을 떠난다. 길에 새겨진 연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그는 10년간 닫아두었던 마음을 조금씩 열어간다. <봄날은 간다> 이후 5년 만에 ‘멜로’로 돌아온 유지태는 다시 한번 부재의 아픔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허물어질듯 위태로워보였던 소년은 스스로의 발걸음으로 상처를 치유해가는 남자가 됐다. “실화를 소재로 했고, 리얼리티와 판타지가 공존하는 특별한 멜로영화라는 점에 끌렸다. <가을로>는 영화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진심이 담긴 작품이다.”
목포, 경주, 태백 등으로 이어지는 <가을로>의 여행길은 무려 60곳이 넘는 로케이션을 통해 완성됐다. 촬영 당시 연극 <육분의 륙>을 병행하던 유지태는 몇달간 차 안에서 잠을 자고 연습하며 전국 각지를 밟는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정말 고통스러웠다. 어찌나 힘들었던지 메니에르병이라고 중심 감각을 잃는 병도 얻었다.” 고된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가
남자는 소리없이 깊어진다, <가을로>의 유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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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씨는 직접 만나보니 완전히 여장부다.” “지태씨는 나보다 어리지만 무게감있는 배우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면 <가을로>의 비극적인 연인이라기보다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보듬을 줄 아는 오누이 같다. 촬영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 아름답기로 소문난 장소들을 찾아다녔던 두 사람이 추위와 폭설 때문에 고되고 길었던 긴 겨울 동안 호흡을 맞춘 덕분이리라. 그래서, 민주(김지수)가 곁에 없어도 현우(유지태)는 아스라한 그녀의 존재를 느낄 수 있고, 민주는 현우의 환상 속에서 밝게 미소지을 수 있다. <가을로>에서 과거와 현재는 뒤섞이고, 사실과 환상은 경계없이 넘나들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확고한 존재감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일 것이다. 촬영장에서,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동안에도 김대승 감독과 셋이 두런두런 수다를 떨며 크게 웃던 모습은 <가을로>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두 사람에게 서로를 아련히 바라보며 슬픈 듯
가을, 그리고 남과 여, <가을로>의 유지태,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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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범죄의 재구성>에서 감쪽같은 솜씨로 관객을 속여넘긴 최동훈 감독의 두 번째 장편 <타짜>는 “눈보다 빠른 손”으로 서로를 속고 속이는 타짜들의 이야기다. 지난 추석, 한국영화의 접전 속에서 최다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에서 감독은 한층 능수능란한 비주얼을 선보인다. 전작부터 함께 기술을 연마한 동갑내기 친구, 최영환 촬영감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혼이 담긴 구라’의 경지에 오른 화면을 선보인 최영환 촬영감독에게 ‘사기의 기술’을 캐물었다. 두번 놀랐다. 도무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어색하다며 사진 촬영을 위한 포즈를 한사코 거부하는 굳건한 고집에 한번. “촬영이 보이지 않는 촬영” 등 일반적인 촬영감독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되뇌는 촬영의 원칙을 반복하지 않는 솔직함에 한번. 기술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결국,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촬영에 대해 “그냥 막 찍는다”든가, “후진 화면”이라고 말해버리는 말투
‘저렇게도 찍네!’라는 말이 좋다, <타짜> 촬영감독 최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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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남자들의 거룩한 수다
장진 감독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곧잘 해온 감독이었다. <아는 여자>를 제외한다면 그의 영화들은 아이처럼 그림자놀이를 하고, 킬러지만 말투가 곱고, 강도이면서도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남자답지 않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 때문에 <거룩한 계보>는 장진 감독과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영화로 보였다. 질펀한 전라남도 사투리로 상대의 기를 꺾으며 한번, 두번, 세번, 정확하게 마음먹은 횟수만큼 사람 몸에 칼을 찔러넣는 조직폭력배들의 영화인 <거룩한 계보>. 그러나 이 영화의 남자들은 또한 함께 부르던 노래를 나지막한 휘파람으로 불어 친구에게 생존의 신호를 보내고, 죽은 줄 알았던 친구의 휘파람 소리에 엉엉 울어대는 연약하고 빈틈 많은 존재이기도 하다. 조직에 버림받은 치성(정재영)과 형제보다도 아꼈던 친구의 복수를 막아야만 하는 주중(정준호)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칼을 들이댈 것일까.
이런 영화를
<거룩한 계보>의 감독 장진과 주연배우 정재영, 정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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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호가 분한 역할들은 실생활에서 만났다간 큰일날 사람들이다. 화폐위조 기술자 휘발유(<범죄의 재구성>), 룸살롱 영업상무(<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전국을 돌며 도박판을 벌이는 타짜 박무석(<타짜>)…. 그런데 이 사람들, 어쩐지 다 딱하고 안쓰러운데다 귀여운 구석이 있다. 김상호가 맡은 역할들은 악당이라 해도 악의 축이기보다는 생계형 하수인이고, 목구멍이 포도청인 것으로 치면 일용직 노동자들과 맥을 같이한다. 생김새 역시 비장하고 사악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몸을 곧추세워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보다 어깨를 움츠리고 양 옆 눈치를 보는 모습이 익숙하다. 김상호가 <범죄의 재구성>을 첫 작품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낯익고 친숙한 인상을 주는 이유는 그의 인간적인 면이 뚝뚝 묻어나는 연기에 있다. 자연인 김상호가 그의 영화 속 페르소나와 얼마나 같고 다른지는 짧은 인터뷰 시간으로 다 헤아리기 힘들었지
<타짜>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배우 김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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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던 모진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그가 흘끔, 엿보였다.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남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클 것 같은 이 남자는 왜 내가 아닌 거니, 소리 지르는 대신 허리를 굽힌 채 상대의 눈동자를 응시하는 것으로 사랑을 고백했다. 대니얼 헤니는 그렇게 각인됐다. 비현실적이리만치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또 그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영혼의 아픔마저 헤아리려던 사려깊은 젊은 의사 헨리(<내 이름은 김삼순>)로 스타덤에 오른 그는 우연 섞인 만남에 온몸이 휘청거리는 쾌활한 매니저 필립(<봄의 왈츠>),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미지의 남성이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찍히’고 만 어리버리한 한국어학당의 외국인 학생, 수줍게 다가오는 낯선 사랑의 전조(올림푸스, LG싸이언, 빈폴 광고)였을 때도 비슷한 가면을 쓰고 있는 듯했다. 이제, 그런 그가 바뀌었다. “로빈은 하버드를 졸업한 지적이고 자신감 있는 인물이다. 부침이 많은 성격에 가끔씩은 화를 내고 가끔
컴백 헤니 컴백, 의 대니얼 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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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이 할리우드로 보낸 최고의 선물.” <타임>은 장쯔이를 그렇게 평했다. 장쯔이가 신작 <야연>과 함께 9월18일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그를 숙소 W호텔에서 만났다. 어린 시절 고된 무용 수업을 견디다 못해 베이징댄스아카데미를 도망치기도 했던 소녀는 할리우드를 놀라게 한 배우로 성장했고, 지금은 아시아 스크린을 호령하는 여신으로 거듭났다. 쿠키를 오물거리며 쾌활하게 웃는 장쯔이의 얼굴은 스물일곱살의 8년차 여배우보다는 <와호장룡>의 완을 연상시키는 소녀의 풋풋함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야연>의 화면에 나타난 그는 어느 때보다 고혹적이고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자아낸다. 장이모, 리안, 왕가위, 로우예, 스즈키 세이준 등 당대의 거장들과 작업한 장쯔이는 대륙의 대표 흥행감독 펑샤오강의 영화에서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궁금했다.
-오랜만에 중국에서 촬영했다. 펑샤오강 감독과도 처음 작업인데 수많은 시나리오 중에
<야연>의 장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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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스필버그’ 펑샤오강이 한국에 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대륙 인민을 웃고 울리던 흥행감독 펑샤오강은 <야연>으로 처음 국내 관객과 만난다. <야연>은 중국에서 개봉 4일 만에 700만달러를 벌어들였고, 최종적으로 2500만달러 이상의 박스오피스 성적을 거둘 전망이다. 장이모와 첸카이거가 무협대작으로 깜짝흥행을 선보였다면 펑샤오강은 <갑방을방> <몰완몰료> <수기> <따완> <천하무적>을 비롯한 히트작을 양산하며 근 10년 가까이 중국을 대표하는 인기감독으로 군림했다. ‘설영화, 블랙코미디의 일인자’였던 펑샤오강이 웃음기를 지워버린 비극 <야연>을 만든 심경이 궁금했다. W호텔에서 만난 펑샤오강은 처음 만든 비극 <야연>과 서민적인 영화의 중요성에 대해 느릿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2000년대 초반 무협대작은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게다가 주특기인 코미디를 배제하고 고전 비
<야연> 감독 펑샤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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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호 대표는 매의 눈과 코뿔소의 다리를 동시에 가진 사람이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CF감독으로 오랫동안 필드를 지킨 워커 홀릭기 다분한 이 CEO는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과 주저없는 추진력으로 업계에 정평이 나 있다. 2000년 광고제작사로 시작한 옐로우필름은 광고, 뮤직비디오를 제작해왔고 올해 초 <연애시대>로 드라마 제작에 뛰어들었다. 또한 2006년 실리샌드를 통해 코스닥시장에 우회상장했고 바른손, 몬스터 등의 매니지먼트사를 식구로 꾸리면서 만만치 않은 캐스팅 파워까지 얻었다. 또한 배두나, 김민준, 오윤아, 이진욱이 출연하는 <썸데이>가 공중파가 아닌 OCN에서 첫 방영되는 것으로 한 차례 언론으로부터 “지상파와의 전면전”이라는 호들갑스러운 관심을 받기도 했고, 2007년 초 방영 예정으로 올해 11월부터 제작에 들어갈 <에이전트 제로>는 설경구, 손예진, 차인표라는 화려한 라인업 이외에도 대한민국 최초의 시즌제 드라마라는 점에서 상
드라마 극본 공모전 주최하는 (주)옐로우앤실리샌드 오민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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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선 무대에서 쓰러지기 전까지 배우를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나이가 들수록 소홀히 여겨지다가 쓸쓸히 퇴장하는 곳이 충무로다. 20년 넘게 주인공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안성기와 박중훈이 답한다. 1988년 <칠수와 만수>, 1993년 <투캅스>, 1999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7년 만에 그들이 <라디오 스타>로 손을 잡았다. 20여년에 가까운 우정의 세월, 20여년의 버디무비 같은 몇몇 순간을 그들에게 청해 들었다. 언제나 변하지 않고 거기 앉아서 엽서를 읽어주고 신청곡을 틀어주는 DJ들처럼 그 남자들은 거기 있었다.
순댓국 냄새와 배기가스 냄새가 뒤엉킨다. 낙원상가의 생기는 <칠수와 만수>, 그리고 <라디오 스타>의 생기와 닮았다. <칠수와 만수>를 다시 20년 만에 찍는 촬영현장 같기도 하다. 둘이 만난 첫 영화는 변두리 인생 영화였다. <라디오 스타
둘일 때 가장 빛나는 별, <라디오 스타>의 안성기, 박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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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왜 만나자고 한 거예요?” 인터뷰 도중 공형진이 대뜸 물었다. 개봉을 앞둔 <가문의 부활: 가문의 영광3>에 출연해서? 이번 영화에서 선한 눈매와 어울리지 않아 뵈는 악역을 맡아서? 민망하고 딱하게도, 적절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뭘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묻나, 싶었을 뿐이다.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로 데뷔한 지 17년째. 공형진은 언제나 한결같다. 그 한결같음 때문에 “나를 왜 만나자고 했느냐”는 돌발 질문에 꿀먹은 벙어리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변신에 목말라하지도 않고,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그는 그동안 빛나지 않는 빈자리를 쉼없이 메워오면서 ‘코믹배우’, ‘감초배우’ 같은 그닥 달갑지 않은 수식을 얻었지만, 여전히 “대중이 원한다면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는 촬영현장에서와 달리 나긋한 말투로 조근조근 답변하는 그의 말을 뒤로하고 인터뷰 장소를 빠져나올 무렵 불쑥 궁금증 하나가 떠올랐다. “
<가문의 부활: 가문의 영광3>의 공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