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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착은 막내 정유미였다. 화사하게 틀어올린 앞머리에 금색 핀을 꽂은 그가 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종달새처럼 조잘거린다. 어두웠던 스튜디오가 오월의 정원처럼 밝아진다. 순서대로 오기로 약속한 걸까. 두 번째로 늘씬한 공효진이 성큼성큼 들어선다. 얼굴이 CD만한 그는 소주잔을 호쾌하게 털어넣듯 툭툭 말을 건넨다. 드디어 문소리가 왔다. “컨셉이 이게 뭐야? 우리가 안 예쁘다는 거야”라고 볼멘소리로 농담하는 큰언니 앞에 사람들이 움찔한다. 그는 불만을 표시할 때도 솔직하지만, 진행도 시원시원하다. “소풍이니까 앉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문소리의 제안에 <가족의 탄생> 버전 ‘풀밭 위의 점심’이 탄생한다.
“영화 찍기 전에는 언니가 진짜 무서운 줄 알았다.” 공효진의 한마디. “야, 그거 봉태규가 퍼트린 헛소문이야.” 문소리의 대답. 소품으로 쓰인 와인을 열면서 세 여자의 입담도 열렸다. “아, 맛있는 안주 가져올게.” 휑하고 사라진 문소리가 도시락통을 들고 돌아왔다. 깨가
<가족의 탄생>의 문소리, 공효진, 정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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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감독이 더 좋다. 텍스트보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더 괜찮다는 이야기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그야말로 영화는 별론데 그걸 만든 사람은 영화보다 좀 낫다는 평가일 수 있으니 말이다. 에릭 쿠의 영화들을 보고 그를 만난 뒤의 느낌은 틀림없이 영화보다 감독이 더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유는 위와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그가 가진 잠재력이나 에너지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들이 이제까지의 영화들을 완성태라기보다는 미래에 놓인 단단한 디딤돌로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자산이 많다. 부유한 집안에서 예술적 취향을 가진 어머니의 지원을 받고 자라 마음 깊숙이 기댈 곳이 있다. 또 네명의 아들이 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이 흔히 맹세하듯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사랑하는 포메라니안 강아지도 있다. 또 광고회사도 경영하고 있기 때문에 죽어라 하고 상업영화를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게다가 유머 감각도 뛰어나고, 친화력은 A플러스다.
한옥 미장 센느에
김소영 영상원 교수가 만난 <내 곁에 있어줘>의 에릭 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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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오프사이드>는 이란과 바레인의 월드컵 예선전이 벌어지는 동안, 금녀(禁女)의 장소인 축구경기장에 들어가려는 소녀들의 고군분투를 그렸다. 그들은 경기가 진행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울타리 안에 갇혀서 자신들을 감시하는 군인들과 티격태격하면서 맞선다. 그러나 작은 버스에 실려 어디론가 향하던 소녀들과 이들을 호송하던 군인들은 결국, 이란이 바레인을 이겼다는 소식에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 속에 한마음으로 축제를 즐긴다.
<오프사이드>를 연출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키아로스타미의 연출부 출신이다.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모습을 담은 그의 데뷔작 <하얀 풍선>에는 대선배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후 그는 사회의 모순을 정직하게 바라보거나(<순환> <붉은 황금>)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거울>)을 선보이면서 자신의 영화가 단순히 선배의 전략을 답습한 것이 아님을 쉼없이 증명
<오프사이드>로 전주영화제 찾은 자파르 파나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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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사생결단> 촬영지 부산에 놀러갔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다는 바닷가 폐공장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사나운 바닷바람이 부서진 벽 사이로 들이쳤고 숨을 쉴 때마다 먼지가 뿌옇게 끓어올랐다. 매서운 밤공기를 겨우 텐트가 막아주고 있었고, 최호 감독은 조용히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찍는 게 <사생결단>이 아니라 <후아유> 같은 세련되고 조용한 멜로인 것 같았다. 류승범이 간간이 정적을 깨는 농담과 활기찬 걸음소리를 들려줬을 뿐이다. 최호 감독의 취재일지에서 아주 심한 발냄새가 난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얼마나 구두 밑창이 해졌는지 훔쳐볼걸 그랬다. 평단과 관객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데도 그는 담담했다. 월드컵 때마다 간헐적으로 겨우 세 작품을 만든 것에 대해 스스로를 가리켜 월드컵 감독이라고 농담을 했다. 그때 윙윙거리며 살을 파고들던 겨울바람보다 최호 감독의 속이 더 독하고 강했던 것 같다. 거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머리 세고, 수줍게 인
<사생결단> 감독 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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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동 시민의 숲에서 사진촬영을 하기로 약속했다. 차승원은 2시간 정도 늦게 도착했다. 지난주부터 계속된 목감기 때문에 급히 병원에 다녀온 길이라 했다. 한가한 오후 땡볕이 필요한 사진이었는데 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차승원은 본론부터 물어왔다. 본의 아니게 늦었지만 전체 일정에는 차질이 없게 해주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제가 알아서 잘 할 수 있습니다. 모델 10년, 영화배우 10년을 합쳐 20년을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 있으면서 그는 효율과 효과의 법칙들을 많이 체험한 듯하다.
법칙 하나, 될 만한 것에는 목맨다
“홍보 활동을 예로 들면, 나는 될 만한 것에는 목을 매서 하는 성격이다. 가짓수는 몇개 안 된다. 될 법하지 않은 것은 건드리지도 않는다. 이 사람은 맡기면 다 열심히 한다고 생각해서 이것저것 다 하라고 하면 그건 아니란 말이다. 그럼 나는 어느 순간 확 놓아버린다.”
될 것에 매달려 최선을 다하는 차승원은 다가올 미래를 종종 내다보
<국경의 남쪽> 배우 차승원이 살아가는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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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5-8-13-21…. <다빈치 코드>의 개봉을 앞둔 톰 행크스(50)의 커리어는 한 숫자가 앞의 두 숫자를 합한 값과 같은 피보나치 수열을 연상시킨다. 시트콤에서 출발해 견실한 코미디언으로 자리를 굳힌 그는 유머와 페이소스가 어우러진 페니 마셜의 드라마 <빅>과 <그들만의 리그>, 노라 에프런의 로맨틱코미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스타성을 공인받았고 이어 승부수를 던진 <필라델피아>(1993)와 <포레스트 검프>(1994)가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따내면서 일약 할리우드의 거물로 도약했다. <댓 씽 유 두>(1996)로 시작한 감독 경력도 톰 행크스는 지극히 안전한 방식으로 가꿨다. 성공을 거둔 출연작 <아폴로 13>과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뿌리를 둔 TV 프로젝트 <지구에서 달까지>(1998), <밴드 오브 브라더스>(2001)를 통해 연출
Mr. 할리우드, 루브르에 가다, <다빈치 코드>의 톰 행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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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은 강한 인상을 가진 배우다. 나직하고 무게있는 목소리를 지닌 그는 <지구를 지켜라!>의 그로테스크한 형사와 드라마 <야인시대>의 미와 경부, <친구>의 위협적인 깡패처럼 악역이나 주인공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그에겐 다른 모습도 있었다. 한때 구국을 외치던 엘리트 청년이었지만 지금은 택시기사 아내에게 얹혀사는 시트콤 <달려라 울엄마>의 ‘이 선생’은 집착이나 폭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마르고 날이 선 듯한 외모를 비집고 떠올랐던, 허영도 있지만 따뜻하고 유머러스했던 중년 남자. 이재용은 영화 <도마뱀>에서도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의 모습과는 다른 인물을 연기한다. 주인공 아리(강혜정)의 삼촌인 서정 스님은 부모 잃은 어린 조카가 여인이 되기까지, 한 걸음 거리를 두었지만 넉넉한 애정으로 감싸안아, 운명과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인물이다. 불혹을 넘긴 이재용은 아직도 보여주지 못한 모습이 더
<도마뱀> 배우 이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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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홍련>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쓰리 몬스터> <달콤한 인생> <너는 내 운명>…. 영화사 봄(대표 오정완)이 최근 3년 동안 제작한 작품 목록이다. 줄곧 화제작을 뿌리며 충무로의 고급 부티크로 불리던 봄에 ‘의아스런’ 변화들이 잇따르고 있다. 순수 작가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봄에서 홍상수 감독의 신작 <해변의 여인>을 만든다거나 송일곤 감독이 로맨스영화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첫 번째다. 영화사 봄과 감독 둘 중에 어느 쪽이 심경 변화를 일으켰거나 애초부터 우리가 몰랐던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다. ‘이 영화 한다더라, 아니다 엎어졌다’ 등 소문만 무성하던 고현정의 첫 번째 영화가 <해변의 여인>이란 소식이 그 뒤를 이었다. 그 사이 ‘충무로 법률고문’이던 조광희 변호사가 영화사 봄의 (사실상의) 부사장으로 가기로 했고, 이유진 대표 프로듀서가 독립해 ‘영화사 집’을 차렸으며, 안수현 프로듀서
<해변의 여인> 제작하는 영화사 봄 오정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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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동의 어느 권투연습장에서 이준기를 만났다. 연습 중이던 사람들이 체육관 한쪽에 얌전히 앉았다. 기자와 스탭들 곁에 여자 한명이 바짝 서 있다. 이준기와 동갑이며 이준기 팬이라고 한다. 사인 받아도 되겠느냐고 묻는 얼굴이 너무 간절하다. 사진촬영이 끝나면 사인을 받게 해주겠다고 매니저가 말했다. “웬일이야. 너무 감사합니다.”
자리를 커피숍으로 옮겨 인터뷰를 했다. 시작한 지 10분도 안 돼서, 이준기가 등지고 앉은 쪽의 문이 딸랑거리며 열린다. 여자 두명이 지나가는 척하면서 소곤거린다. “이준기야, 이준기야.” 커피숍 내부에 있던 어떤 손님이 근처 친구에게 전화라도 건 모양이다. 야, 여기 이준기 와 있다. 빨랑 와서 봐. 4월17일, 이준기의 생일날 네이버 검색어 순위 2위에 ‘happy birthday to junki’가 올랐다.
전지현, 이효리, 문근영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을 때(물론 이들은 지금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건 그저 인기가 아니라 신드롬이었다. 어느 날
예쁘게 날아서, 열정으로 쏜다, <왕의 남자> <플라이 대디>의 이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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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자찬을 넘어 오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 많이 성장했어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데뷔한지 이제 6년. 그동안 프로배우로서 의식이란 게 생겼어요. 배우도 직업인이라는 거, 그냥 삘대로, 감수성대로 하는 건 시대가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이제 나 류승범이 좋건 싫건 때와 장소에 맞춰, 대중의 요구에 맞춰, 자신을 변신시킬 수 있게 됐어요. <사생결단>에서 맡은 상도라는 캐릭터도 철저한 직업정신으로 무장한 놈이에요. 마약상인데도 마약에 전혀 손을 대지 않거든요. 독종 중에서도 최고 독종이라 부른다는 그 녀석을 완벽히 연기하기 위해 촬영 기간에 스스로 금주령을 내렸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 때조차 깨끗한 느낌, 이성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거든요.
저한테는 연기 노하우가 하나 있어요. “어찌 됐건 영화는 끝난다”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거예요. 한번 맘을 딱 먹으면 그때부턴 힘든 것도 없고, 고민되는 것도 없어요. 그렇게 스스로
류승범이 말하는 배우 류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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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이 돌아왔다. <단적비연수> 이후 6년 만에 영화계로 컴백한 것이다. 그런데 그 선택이 뜻밖이다. 그가 출연을 결정한 영화 <실종>은 네 아이의 갑작스런 실종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는 서스펜스스릴러다. 게다가 최진실이 맡을 혜정이라는 캐릭터는 ‘<헨젤과 그레텔>에서 과자의 집에 살고 있는 마녀를 연상시키는’ 사이코다. 혜정은 외딴섬에서 펜션을 운영하면서 자기만의 세계 속에 빠져 사는 여성으로, 갑자기 펜션으로 찾아온 네 아이를 감금하고 괴롭히는 인물이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미스터 맘마> <마누라 죽이기>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고스트 맘마> <편지> 등의 영화를 통해 만인의 연인 또는 만인의 아내 역할을 했던 최진실로서는 의외의 방향전환인 셈이다. 그러고보면 최진실의 ‘변신’은 지난해부터 예고된 바였다. TV드라마 <장밋빛 인생>에서 최진실은 남편의 외도와
<실종>으로 6년만에 영화에 복귀하는 최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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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생결단>에서 황정민이 형사이고 류승범이 마약상이라기에, 역할을 뒤집어봤다. 두 배우 모두 1분의 시간도 어기지 않고 스튜디오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중고 철제책상과 타이프라이터를 준비해놓고 어설프게 써내려간 짧은 쪽대본을 쑥스럽게 내밀었다. 용의자 황씨는 체리주빌레 맛 브라보콘을 훔치지 않았다고 우기고, 황씨를 잡아온 류 형사는 “내가 형사만 안 했으면 전과 20범 되고도 살아남았을 놈이야”라고 윽박지른다는 내용이었다. 막판 반전을 포함해 기자가 준비한 시나리오는, 오직 두 배우 덕분에 너무나 그럴싸한 누아르로 만들어지고야 말았다. 취조가 다 뭐냐는 듯 라면을 후루룩 먹더니 짜증난다고 인상쓰면서 다리나 떨고 앉아 있는 뺀질이 용의자 황씨. 목소리 깔고 바르게 앉아서 “조사하면 다 나와~” 하다가 “저놈 어떻게 잡지” 하는 수십 가지 표정을 짓고 나서 결국 신발을 냅다 벗어버리는 류 형사. 두 배우는 쪽대본의 미완성된 캐릭터를 완성시키고 주어진 상황을 애드리브 주고받
인정사정 볼 것 많다, <사생결단>의 황정민 & 류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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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성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TV단막극 촬영 때문에 <마법사들>의 무대인사에 자주 참석하지 못했다. 인터뷰 전날 있었던 무대인사 때, 일본에서 영화를 미리 본 팬이 꽃다발과 선물을 가져왔었다는 말을 홍보담당자에게 전해 들은 그의 반응은, 언뜻 시큰둥하게 들렸다. “장동건이나 이병헌 이런 사람 주려고 가져왔는데 그냥 들고 가기는 뭣하고, 그런 거였을 거야.” 설핏 웃음이 스쳐가는 표정은 “여러 번 봤다는 관객도 있었다”라는 말에야 “야아, 신나네”라는 답으로 이어졌다. <마법사들>에 대해 그가 들었던 가장 인상적인 찬사는 “DVD가 나오면 책꽂이에 꽂아놓고, 쓸쓸할 때 맥주 마시면서 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쓸쓸하지 않아도 늘 술을 함께 마시는 친구들과 찍은 <마법사들>은 세세한 작전이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술 먹고 궁상 떨면서 그러잖나, ‘인생 뭐 있나’. ‘아마 우리는 60살, 70살이 되어서도 똑같을 거야, 술 먹고 여자 얘기
“연기를 하지 않는 법부터 배웠다”, <마법사들>의 장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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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곤 감독은 2000년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35만원짜리 비디오영화 <너무 많이 본 사나이>로 명성을 얻었다. <너무 많이 본 사나이>는 우연히 살인장면을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하게 된 청년이 그 테이프를 비디오 가게 반납기에 넣은 다음 살해당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살인자는 미친 듯이 비디오를 빌려다가 문제의 테이프를 찾으려 하지만, 영화를 정말 좋아하게 되어 히치콕의 숭배자를 자처하기에 이른다. 히치콕을 인용하며 코미디와 스릴러를 혼합한 <너무 많이 본 사나이>는 독특한 아이디어로 지지를 받았지만, 아마추어의 서툰 솜씨라는 비판에도 직면해야 했다. 그 이후 <너무 많이 본 사나이>의 속편인 <감독 허치국>을 만들고 <재밌는 영화> 시나리오를 썼던 손재곤 감독은 첫 번째 극장용 HD 장편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다시 한번 관객을 만나게 됐다. 서른이 넘도록 키스도 못해본 남자와 여러 번 살인을
<달콤, 살벌한 연인>의 손재곤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