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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두 남자의 하모니
<타짜>의 평경장과 <방과후 옥상>의 남궁달이 만났다. 그것도 부자지간이다. 주말 이른 아침, 공덕동의 뒷골목과 놀이터를 거니는 백윤식과 봉태규의 얼굴은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의 한 장면처럼 다정하다. 난간에 올라서는 사진기자에게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조심해”라는 백윤식의 걱정어린 음성도 평범한 아버지의 그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이혼녀 미미(이혜영)를 차지하기 위해 이종격투기로 대결하고, 이부자리에 서로를 묶고, 험담을 늘어놓는 불꽃 튀는 연적이기에 사진 촬영 중에도 묘한 긴장감이 언뜻언뜻 묻어나지만. 코미디언 밥 호프의 “웃음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고, 급기야는 희망으로 돌려놓는다”는 말처럼 그들이 보여주는 악다구니와 충돌은 관객에게는 그저 유머로 여겨질 터. “임상수 감독, 독특한 코믹 연기, 흥행의 안전판”이라는 공통분모의 두 남자는 충무로에서 일명 ‘연기파’로 불린다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의 백윤식, 봉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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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론 달라도 인간은 공통분모가 있다”
신동일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방문자>는 영화과 시간강사 호준(김재록)과 신학도 계상(강지환)이 만나 서로 이해와 우정을 쌓아가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 다소 껄렁해 보이기까지 하는 냉소적 지식인과 순수하고 강건한 종교론자가 우정을 맺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영화는 그걸 향해 고집을 세우며 나아간다. <방문자>는 어떻게든 긍정적인 변화를 품으려고 하며, 보이는 서로의 간극을 뛰어넘어 보이지 않는 더 큰 이해의 연대에 다가서려 한다.
신동일 감독은 올해 두 번째 영화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였고 호평을 얻었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그의 인물들은 의외로 이해의 결렬 관계로 나아간다. 즉,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방문자>와는 정확히 반대로 신뢰를 쌓았던 두 친구가 어떻게 파국을 향해가는지를 다룬 영화다. 그의 두 번째 영화는 인물
첫 장편영화 <방문자> 개봉하는 신동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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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근식 감독이 말했다. “두 배우가 이미 멋지고 예뻐서 내가 별로 할 게 없고, 공짜로 가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지난 8월 영화 <그해 여름>의 촬영현장 공개 때 여기저기 났던 기사들 중에 실린 멘트다. 감독의 말은 아마도 이런 속뜻을 내포하고 있지 않았을까. 멜로영화 속의 이병헌과 수애, 같이 있기만 해도 말이 되고 그림이 되는 조합. 배우 이병헌과 멜로 장르의 궁합지수는 이미 많은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우리가 확인해왔던 바이고, 배우 수애와 멜로 장르의 궁합지수는 (<가족> <나의 결혼원정기>에서는 명징하지 않았지만) 모 브랜드 커피CF만 보더라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녹음해서 간직하고 싶은 나지막하고 편안한 목소리, 뇌리에서 곱씹게 되는 다정한 말투, 벽에 붙여두고 싶은 그윽한 눈빛에 있어서 이병헌과 수애는 서로 닮기까지 했다. 두 사람에 관해 부정할 수 없는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의 속성은 멜로영화 <그해 여름>이 개봉하면 가장 큰
그림 같은 배우, 그림 같은 멜로, <그해 여름>의 배우 이병헌·수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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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감사 질의 도중 인터뷰에 응하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잠깐의 인사 뒤에 “국정감사 해야 하는데…”라고 말을 흐리더니, 상대가 인터뷰 준비를 하는 동안 중계 모니터를 보면서 문답을 체크하느라 정신없다. 오죽했으면 곁의 보좌관이 말상대를 자처하고 나섰을까. 국회 정무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김영주 의원. 3년 연속 국정감사 모범생으로 뽑힌 그는 올해에는 공정거래위원회 국감 때 거대 멀티플렉스의 독점에 대한 폐해를 지적해 영화계 안팎의 주목을 끌었다. 1970년대 중반 서울신탁은행 실업팀 농구선수로 활동했고, 1980, 90년대에는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 상임부위원장을 지냈으며, 이제는 의정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그를 만나 영화계까지 오지랖을 휘날린 이유를 캐물었다.
-3년 연속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뽑혔다. 올해 국감에서도 초반부터 피감기관 이외의 이슈들까지 건드려 주목을 끌었는데.
=나보다는 보좌관들이 고생을 많
국감에서 멀티플렉스의 독과점 지적한 김영주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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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머무르는 장소마저 자신의 무대로 만들어버리는 배우들이 있다. 배우면 당연한 것 아니겠나 싶지만, 모두 그렇진 않다. 체화된 몸의 리듬, 나름의 철학과 믿음의 실현이 있을 때 그렇게 되고, 오광록이 그렇다. 조연으로 많이 등장한 오광록을 주연보다 더 뚜렷하게 기억하게 되는 것도 영화 속에서 그가 만들어낸 ‘자기 무대화’의 독창적 능력 때문일 것이다. <잔혹한 출근>에서도 오광록의 자리는 분명하다. 만나보니 말도 연기의 리듬과 비슷하여서, 끝났나 싶어 물어보려 하면 다시 이어지고, 덧붙이나 싶어 기다리면 그냥 쳐다보고 있다. 특유의 굴곡이 있다. 오랫동안 시어와 함께 살아 그런지 어떤 답변은 거의 시적이다. 종종 쓰인 말줄임표는 더듬거리는 시간을 활자화한 것이 아니라, 천천히 생각하고 말하는 시적 침묵의 시간을 대신하여 쓰였다. 최근 출연작 <잔혹한 출근>과 그 밖의 삶과 연기의 몇 가지에 대해 느리게, 느리게 오광록이 말한다.
-텃밭 가꾸기는 잘되고 있나
<잔혹한 출근>의 오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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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은 외로웠다. <공공의 적2>에서 강철중이 내지르는 교훈적 대사들은 공허했다. <사랑을 놓치다>의 우재의 눈빛은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 중무장한 설경구가 돌아왔다. “<열혈남아>를 기점으로 내가 잃었던 뭔가를 붙들어보려고 한다”던 설경구가 연기한 <열혈남아>의 재문은 제목처럼 ‘더운 피’로 그득하다. “직업은 조폭인데 별로 싸움도 안 해. 눈에 힘도 많이 안 주고. 그런데 좀 묘해”라고 눈앞의 설경구가 말한다. <역도산> <공공의 적2>를 마무리한 그는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8개월 동안 푹 쉬고 있을 때 <사랑을 놓치다>보다 <열혈남아>가 그를 먼저 찾아왔다. “아무 관계도 없는 세 사람의 관계가 일주일 만에 모두 변해버린다는 이야기야. 가슴에 뚫렸던 구멍이 메워지는 영화라고 할까. 죽이려는 상대를 바로 만났다면 후다닥 해치우면 그만인데, 죽일 놈 엄마가 중간에 딱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열혈남아>의 설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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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잡지계, 그리고 영화판이라는 정글에서 하이에나처럼 으르렁거리며 살던 그는 어느 날 홀연히 고요한 호숫가로 떠났다. <연합뉴스>와 <한겨레> 기자를 거쳐 <씨네21>의 창간 편집장을 지냈던 조선희씨는 2000년 소설가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고, 이후 에세이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 장편소설 <열정과 불안>, 소설집 <햇빛 찬란한 나날>을 잇따라 발표했다. ‘<씨네21> 전 편집장 조선희’보다 ‘소설가 조선희’라는 칭호가 익숙해지면서 그는 계속 문학의 산수(山水) 속에서 우아한 학처럼 살아갈 것만 같았다. 그러던 그가 6년 만에 영화계로, 정글로 돌아왔다. 9월25일 그가 원장으로 부임한 한국영상자료원은 이 정글 속에선 호젓한 암자 같은 곳이지만, 추진하고 지속시키고 마무리지어야 할 일이 너무 많기에 그는 다시 3년 동안 하이에나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 국정감사라는 “큰 시험”을 나흘 앞둔 10월2
신임 한국영상자료원장 조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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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프를 하다> 만든 뒤에 마케팅팀에서 이걸 동성애영화가 아니라고 해달라고 해서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하고 난 뒤 후회가 많았다. 그 뒤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인터뷰는 영화 만든 다음에 내가 영화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과정인 것 같다.” 김대승 감독은 열의 넘치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연이어 달려온 언론과의 릴레이 인터뷰 후반부라 지칠 만도 한데, 일반 관객을 상대로 한 공식 첫 상영이었던 부산영화제에서의 반응을 묻는 말에 “영화제작자들이 안부전화해주는 횟수로 대강 반응을 알 수 있는데 적지 않았던 걸 보면 그다지 나쁜 것 같지는 않다(웃음)”며 농담까지 던지는 여유를 보였다. 김대승 감독은 “이제 세편밖에 안 만든 감독인데…”라며 종종 겸손의 예를 갖추다가도, 영화의 어떤 부분에 행여 미심쩍어하는 티라도 내면 열정적으로 다시 설명을 쏟아냈다. <가을로>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정직한 최선의 목소리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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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로> 감독 김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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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혁이 입을 열었다. 저음의 목소리에서 단단하게 여며진 상처가 느껴졌다. 만인의 연인이자 지독한 속물인 줄리앙. 김주혁이 풀어낼 다음 사연은 “사랑따윈 필요없다”는 그의 것이다. “기존에 하던 역할이 아니었고 조금 섹시한 면도 있고 해서 탐이 났지요. (웃음)” <YMCA 야구단>의 오대현, <싱글즈>의 수헌, <프라하의 연인>의 최상현, <광식이 동생 광태>의 유광식, <청연>의 한지혁, ‘넘버 원 호스트’ 줄리앙은 곧고 번듯했던 이들과 다른 서슬 퍼런 남자다. “과거의 아픔이 있는 놈이에요. 표현은 냉소적이지만 사랑을 간절히 원해요. 사랑을 못 받고 자라왔기 때문에. 그 앞에 그 사람의 아픔을 꿰뚫는 여자가 나타난 거죠.”
어울리지 않는다는 여론에, 잘나가던 일본 드라마가 원작이라니 모험이 아닐 리 없었다. “나를 가장 괴롭힌 건 원작이에요. 원작과 달라야 해 부담스러웠는데 이건 정말 한심하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걸 뭘
남자, 부드럽게 도발하다,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김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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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이 눈을 감았다. 환하게 빛나던 미소가 사라지고 조금은 불편한 어둠이 찾아왔다. ‘아직은 사랑을 모른다’고 노래하던 소녀가 이젠 ‘사랑따윈, 필요없다’고 말한다. 냉소적인 어투에서 아련한 상처가 느껴진다. <댄서의 순정> 이후 1년여. 학교로 돌아갔던 문근영이 생채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영화의 제목은 <사랑따윈 필요없어>, 역할은 세상에 마음을 닫은, 눈이 보이지 않는 소녀 민이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당시) 딱 저 같았어요. 무언가 세상에 의미를 잃어버린, 하지만 사랑을 바라는 모습. 그냥 제 마음을 민이로 표현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올해 초 문근영은 대학입시와 관련 구설에 시달렸다. 비난의 요지는 그녀가 정시로 대학에 가겠다고 말한 뒤, 수시로 입학을 했다는 것. “오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크게 변명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의도가 조금 달랐다는 거, 이러면 변명이 되는데. (웃음) 그래도 사람의 미래라는 게,
소녀, 껍질을 벗다,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문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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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시간을 물들인다, 가을
<사랑따윈 필요없어>는 애정에 굶주린 남녀를 보듬는 멜로물이다. 눈이 먼 류민(문근영)에게 줄리앙(김주혁)의 목소리가 와닿을 때 둘은 비슷한 상처를 지녔음을 직감한다. 빚에 허덕이던 줄리앙은 친오빠로 가장해 민에게 접근하지만 그의 연기는 의아하게도 류민의 마음을 녹인다. 사랑의 마법은 줄리앙 역시 물들이고 두 사람은 어느새 은근한 감정에 휩싸인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시선이 어긋나 생기는 어려움은 물론 원작인 일본 드라마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의 지명도 역시 부담스럽긴 마찬가지. 게다가 두 배우, 나이차가 15살이다. 김주혁이 장진영, 엄정화, 김혜수, 전도연과 짝을 이룰 때 문근영은 국민여동생으로 칭송받았음을 떠올리면 낯선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어색하진 않았을까. 연기 호흡은 좋았을까. 많은 미디어에서 그들의 나이차를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치부할 때 불안한 마음이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어스름 속에서 포즈를 취한 두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김주혁, 문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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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감독은 미술대학을 나왔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림’ 그리는 데 능하다(조소를 전공했지만 그 또한 스케치가 필요한 일 아닌가). 우선, 그는 부산국제영화제가 탄생할 당시 영화제의 성격과 방향 등 커다란 밑그림을 그리는 데 큰 공헌을 세웠다. 부산프로모션플랜(PPP) 또한 그가 그린 그림의 일부였다. 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을 그만둔 뒤에도 그는 다시 부산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영화 촬영을 지원하는 부산영상위원회를 만든 것이다. 그러던 그가 이번에는 또 다른 대형 캔버스에 손을 댔다. 한국 최초의 영화마켓인 아시안필름마켓을 창설한 것이다. 10월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 동안의 숨가쁜 일정을 마친 첫 아시안필름마켓에 관해 박광수 감독, 아니 공동 운영위원장에게 들었다.
- 첫 번째 아시안필름마켓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 애초 기대했던 것만큼은 이룬 것 같다. 우선 기존의 PPP와 부산국제필름커미션·영화산업박람회(BIFCOM)이 지난해보다 훨씬 좋아졌다. PPP의 경우
올해 첫 개장한 아시안필름마켓의 박광수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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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차’는 사람을 잡아먹는 반신반귀(半神半鬼)의 존재다. 시체처럼 푸른빛을 띠고 있는 야차는 불교에서 전해지는 온갖 신(神)의 하나이면서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들려주는 괴담 속의 식인귀이기도 하다. 류승완 감독이 준비하고 있는 <야차>는 비유적인 의미가 아닌, 공포영화에 어울릴 법한 진짜 야차가 등장하는 영화다. 궁금했다. <주먹이 운다>로 잠깐 다른 장르를 건너다본 류승완 감독은 순수한 액션의 쾌감을 추구하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시절이 떠오르게 하는 <짝패>를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무협과 호러를 교배했다고 알려진 <야차>를 선택하게 되었을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두 번째 단편 <악몽>이 공포영화이긴 했지만, 류승완 감독과 공포영화의 만남은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은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직 시놉시스도 완성되지 않아 정말 할 말이 없다”면서 걱정스러운
무협공포물 <야차> 준비 중인 류승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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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의 연기는 산문보다는 시에 가깝다. <여자, 정혜>를 시작으로 <가을로>에 이르기까지 김지수가 연기한 배역들에서는 감정의 파고가 쏟아져나온다기보다 은은히 배어나왔다. 격정적인 대사나 극적인 표정 변화가 아닌 그 사이의 알쏭달쏭한 감정의 잔물결은 시구의 풍부한 상징과 함축처럼 여백을 남겼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자주 등장하지 않아도 영화 내내 가득한 존재감. <박수칠 때 떠나라>의 정유정은 출연 빈도로만 보면 아주 작은 역할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이고, 사건의 열쇠를 쥔 여인이었다. <가을로>의 민주 역시 그렇다. 그녀는 회상장면에서나 존재 가능한,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여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있다. 말로 설명하는 대신 그 존재로 인물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김지수와 김지수가 생각하는 <가을로>는 그래서 닮은꼴이다. “예쁜 시 한편 읽은 것 같다. 풍경화 같은 느낌이
여자는 여백에서 빛을 낸다, <가을로>의 김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