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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가 엄마가 됐다. 정확히 말해 친엄마는 아니지만 하여간 어쩌다보니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 유흥업소를 전전하다 병을 얻어 한 남자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된 그녀는 졸지에 한 아이와 꽤 긴 동거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서로 경계하고 무시하고 살지만, 혼자서 너무나 오랜 외로움을 견뎌왔던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된다. <열한번째 엄마>의 김혜수에게선 <타짜>의 요염한 모습도, <바람피기 좋은 날>의 생기발랄한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변신’이라는 측면에서 <좋지 아니한가>의 철부지 이모의 연장선이라 할 것이다. 영화에서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가만히 누워 철지난 음악을 듣거나, 바람이 쐬고 싶으면 마당으로 나가 무표정하게 담배를 피우는 것 정도다. 아이의 비상금을 뒤져 김밥과 떡볶이를 사다 먹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게 삶에 대해 무심하면 할수록 아이에 대한 사랑은 더 커져만 간다.
이처럼 김혜수가 누군가
[김혜수] 정 마담에서 마이 마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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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잔혹하다. 특히나 그것이 스러져가는 탄광촌 광부의 삶이라면 더더욱. 사고를 당하고, 실직하고, 진폐증 진단을 받고, 집은 철거되고. 숨과 함께 들이마신 탄가루가 서서히 폐를 잠식하듯 지뢰처럼 매복한 절망들은 작은 출구조차 남겨놓지 않은 채 그를 집어삼킨다. <검은 땅의 소녀와>의 아버지, 최해곤의 절망을 마비된 듯한 체념의 얼굴로 그려낸 것은 연극판에서 뿌리가 깊은 배우, 조영진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영성이 충만한 낯빛으로 교화를 선언했던 <밀양>의 유괴범 박도섭을 기억한다면, 그의 얼굴이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조금 더 시곗바늘을 돌려본다면 이발 의자에 누워 짧은 오수로 안식을 찾는 고독한 통치자(<효자동 이발사>)가 떠오를 것이다.
이윤택 사단 ‘연희단 거리패’의 일원으로 서울연극제 남자연기상,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 등을 수상했고, 스크린에서도 점차 영토를 넓혀가고 있지만 사실 조영진은 45년 인생 동안
[조영진] “연기가 내 삶을 확 바꿔놓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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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두나의 손놀림, 전도연의 눈웃음, 임수정의 시선, 공효진의 말투, 김정은의 울먹임에 비교할 만하다. 반쯤 말과 섞여서 터져나오는 흐느낌과 울 때 빨개지는 그 코의 자연적인 반응이 좋다. 게다가 애교인 것도 같고 능청인 것도 같은 약간의 비음은 언제나 초현실적이다. 엄지원이 지닌 몸의 세세한 감각이 좋다. 하지만 기록적일 만큼 아름다웠던 <극장전>의 영실을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엄지원의 역할은 그녀의 구체적인 감각이 돋보이기보다 스스로의 말처럼 남자들이 염원하는 이상적 이미지에 초점이 맞춰진 쪽이었을 것이다. 혹은 그 이미지 중에서 영실의 이미지가 가장 압도적이었다.
<스카우트>의 세영도 어쩌면 이미지다. 하지만 잔인했던 시대의 70년대 학번, 80년 광주의 활동가라고는 해도, 영화의 정서 안에서 어딘가 귀여운 소시민의 캐릭터로 포현되어 있는 것이 긍정해줄 만한 부분이다. 대학 1학년 새내기로 같은 과 선배이자 야구선수인 호창(임창정)을 만나 풋사랑에 빠졌지만
[엄지원] 시대를 건너온 순수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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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숙은 우리 엄마라기보다는 친구의 엄마다. 홈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미소로 반기는 친구의 엄마는 시장통에서 반찬을 팔고, 연속극에 눈물을 짜는 우리 엄마를 멋쩍게 만든다. 데뷔 이후 줄곧 그런 우아함의 태왕으로 살아온 김미숙에게는 네개의 신물이 있었다. 라디오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던 낭랑한 목소리와 미술을 사랑하고 플루트를 즐겨부르는 지성미, 거기에 <로비스트>의 해리가 말했듯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와 따뜻하고 자상한 엄마의 이미지. 덕분에 그녀의 후배 여배우들은 “미숙 언니처럼 되길” 바랐고, 평론가들은 한국에서 여배우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담론에 김미숙이란 이름을 꼬박꼬박 새겨넣었다. “후배들이 ‘김미숙 선배처럼 늙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준다면 정말 좋겠다. 외향적인 것보다는 인격적인 문제라든가, 삶의 태도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본이 된다고 하면 민망하고, 실망스럽지만 않았으면 좋지 않을까. (웃음)”
본인은 “우아함을 없앨 수 없다는 게 나의 가
[김미숙] “나의 최대 단점은 우아함을 없앨 수 없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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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 배우에서, <쉬리>의 여전사로, 그리고 <로스트>의 월드 스타로. 미국에서 배우의 꿈을 키우던 김윤진이 20대 중반에 고국에 돌아온 뒤 정확히 10년 동안 걸어온 행보다. 그의 시원스런 베팅이 이번에는 숨가쁜 스릴러 <세븐데이즈>에 이르렀다. 전도유망한 변호사지만, 홀로 키우는 딸에게는 언제나 미안한 엄마, 유지연은 거짓말처럼 딸을 납치한 누군가에게서 위험한 제안을 받는다. 딸을 살리고 싶으면 살인범을 무죄로 석방시킬 것. 김윤진이 전작 <6월의 일기>에서 따돌림당하다 자살한 아들을 위해 연쇄살인범이 된 잘못된 모정을 연기했음을 떠올려본다. 아이는 물론 결혼도 안 한 여배우의 것이라기엔 사뭇 의아한 선택이지만 방점은 모성이 아니다. 어머니이되 한없이 자애롭지 않고, 여자이되 무작정 기대지 않는다. 피해자일 때 당당하고, 가해자일 때 애처로워 보일 줄 아는 그는, 전형성과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한결같이 꼿꼿하고 뜨거운 태도로
[김윤진] 스릴러가 사랑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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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인 줄 착각했다. 이문식은 올해 1월 개봉한 <마파도2>에도 나왔고, 드라마 <쩐의 전쟁>에도 특별출연으로 등장했다. 그가 일상생활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은 고작해야 10개월 정도. 그런데도 그의 얼굴이 오랜만이라고 느꼈던 것은 아마도 그의 2006년이 매우 떠들썩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필두>로 생애 첫 주연작을 맡았고, <구타유발자들>로 이전에 보여준 코믹 조연배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연기를 보여주었는가 하면, 이준기와 함께 출연한 <플라이 대디>에서는 17kg을 감량하며 신체의 한계에 도전했다. 드라마 <101번째 프로포즈>도 그의 2006년을 바쁘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한 여자를 향한 애달픈 사랑을 가꾸던 달재는 이문식 자신도 “이 얼굴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라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인물이었다. 하지만 모든 작품들은 “장렬히 전사했고”, 그 탓에 많은 언론
[이문식] “지금, 미치도록 연기가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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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곳엔 머물 수 없다.” <무시시>의 오다기리 조는 말한다. 벌레로 아파하는 사람을 치유하며, 산에서 산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떠도는 무시시는 기이하게 변해가는 자연에 몸을 맡긴다. 우루시바라 유키가 만들고, 오토모 가쓰히로 감독이 영상으로 옮긴 이 세계에서 그는 모든 걸 그대로 받아들이고 흐름에 자신을 맞추는 남자다.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벌레를 보고, 불가사의한 능력을 운명의 무게로 짊어진 존재. 영화는 이 불가사의함의 화자로 오다기리 조를 택했다. 수많은 영화와 캐릭터를 통해 끊임없이 방황하고 고뇌하는 배우 오다기리 조는 절대적인 고독, 무(無)로 돌아가는 여정에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린다. 어려서부터 영화관을 탁아소 삼아 지냈고, 미국에서 홀로 2년간 유학했으며, 존 카사베츠와 짐 자무시의 영화를 좋아하는 남자. 그는 연극 <드림 오브 패션>으로 데뷔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밝은 미래>에 출연했으며, 이누도 잇신 감독의 <메
[오다기리 조] 고독한 여행자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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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엔틴 타란티노는 아홉살이 되던 해에 부모와 함께 존 부어맨의 <서바이벌 게임>을 봤다. 아홉살에 그 영화를 본다고 누구나 타란티노가 되는 건 아니지만, 타란티노가 아홉살에 그 영화를 보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악동 역시 태어나지 못했을 거다(혹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잘 알려진 걸작 <서바이벌 게임>이 부어맨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는 사실 거장이라는 멋들어진 칭호를 화려하게 받아본 적은 없는 남자고, 특정한 영화적 경향이나 지리적 특징으로 묶어서 읽기도 난감하다.
물론 그를 쉽게 읽을 수 있는 몇 가지 키워드는 존재한다. 자연과 인간의 투쟁, 현대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 미국의 신화에 대한 철저한 해체.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한번도 포기해본 적이 없는 현재진행형의 작가라는 사실이다. <포인트 블랭크>(1967), <서바이벌 게임>(1972) 같은 걸작들을 낳으며 전도유망
[존 부어맨] “우리는 과연 현재를 바꿀 만한 의지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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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처럼 천천히 가는 것 같아요.” 이지상, 임창재 감독의 단편영화에 출연하면서 서정은 제 이름을 새로 지었다. 예명이니 무슨 뜻이 있는 건 아니었다. 평소 어감이 좋았던 ‘서’ 자를 따서 성으로 썼고, 본명에서 한 자를 따와서 ‘정’이라는 외자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배우로 살았던 10여년의 삶을 돌아보니 남들보다 한참 느렸다. <박하사탕>을 시작으로 <섬> <거미숲> <녹색의자>, 그리고 곧 개봉을 앞둔 <경계>까지 출연작을 세어봐도 얼마 안 된다. 물론 다른 배우들처럼 스타덤의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섬>을 끝내고 난 직후에는 그의 집 앞에 매니지먼트 회사들이 자신의 소속사로 오라며 러브콜을 경쟁적으로 보내기도 했고, 한때 그 또한 시류에 따라 TV에도 얼굴을 내밀었으나, 그닥 큰 흥미나 자극을 느끼지 못했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무 뜻이 없던 ‘서’가 ‘천천히 서’가 아닐까 싶었던 것
[서정] “감정이 말라 비틀어질 정도로 꾹꾹 눌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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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양해훈이 누구기에?”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양해훈 감독과 그의 장편 데뷔작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10월까지 잊을 만하면 되새겨지는 이름이었다. 2006년 서울독립영화제와 인디포럼에서 화제작으로 떠오른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올해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관객영화평론가상’을 받았고, 지난 10월12일에 폐막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와이드 비전 부문에서 상영되었다. 게다가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를 편집하던 도중에 만든 단편 <친애하는 로제타>는 한국영화로는 6년 만에 칸국제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제 순방의 해로 보낸 지난 시간이 양해훈 감독에게는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영화제가 별로 재밌지는 않다. 나는 그냥 관객을 만나서 내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즐겁더라. 그외 다른 건… 글쎄… 축제가 끝나고 생기는 허망함이 오히려 짙은 것
[양해훈] “당분간은 현실에 발을 붙인 판타지를 만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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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원의 영화는 위험했다. 강원도 시골 총각으로 분한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희철이나, 반항과 애교를 함께 품고 있던 <늑대의 유혹>의 태성, 사형수의 세월을 눈물과 사랑으로 토해냈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윤수는 모두 강동원이란 피사체가 갖고 있는 이미지를 배반하고 위협했다. 큰 키와 작은 얼굴, 여리게 떨어지는 팔과 몸의 라인은 영화란 텍스트를 담아내기에 서툴러 보였고, 슬랩스틱코미디(<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친근함, 애달픈 사랑(<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뜨거운 눈물은 마치 그의 것이 아닌 양 어색해 보였다. 그의 정적인 이미지를 최대한 살려낸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조차 그는 애교 섞인 대사와 누나란 호칭 앞에서 왠지 주저하는 것 같았다. 웃음을 주기에 그는 냉정해 보였고, 사랑을 하기엔 다소 무심해 보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두 남녀의 애절한 사연보다는 강동원과 이
[강동원] 미스터리를 유영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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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댄스 관객상 수상 이후 올해의 인디영화로 꼽힐 정도의 흥행을 기록한 음악영화 <원스>의 신데렐라 이야기가 지구 반대편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9월20일 국내 개봉하여 3주 만에 6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고, 10개관이었던 개봉관은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나 지난 10월11일에는 17개에 이르렀다. 거리의 악사와 그의 음악을 알아본 이민자 소녀의 수줍은 사랑 이야기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불어넣은 것은 바로 음악. 이 성공담의 진짜 주인공을 존 카니 감독이 아닌, 두 주연배우 글렌 한사드(남자)와 마르케타 이글로바(소녀)로 꼽아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유명 밴드 ‘더 프레임즈’(The Frames)에 몸담았던 카니 감독은 자신의 초저예산 장편이 성공하기 위해 실제 뮤지션이 배우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밴드의 리더이자 감독의 오랜 친구 글렌 한사드가 합류했고, 한사드는 체코 순회공연 때 만난 마르케타 이글로바를 끌어들였다. 영화보다는 음악을, 대중적 성
[글렌 한사드, 마르케타 이글로바] “관객도 보는 내내 우리의 우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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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궁녀>는 지엄한 경고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궁녀로 궐에 들어오면 살아선 궁을 나가지 못한다”, “궁녀가 정절을 지키지 못하면 참형에 처한다”. 영화 속의 궁녀와 영화 밖의 관객에게 궁녀의 삶이 가진 비통함을 일러주는 이 목소리는 배우 김성령의 것이다. 1988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당선된 뒤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연기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녀에게 <궁녀>는 자신의 두 번째 영화였던 <숲속의 방> 이후 15년 만의 영화계 복귀작이다. “정말 너무하지 않나? 왜들 그렇게 안 찾아주시던지… 내가 그 15년을 울면서 보냈다니까. (웃음)” 그녀의 말대로 극중에서 감찰상궁으로 분한 그녀의 연기는 지금껏 좋은 배우가 없다고 투덜거리던 한국 영화계가 얼마나 게을렀는지를 깨닫게 만든다. 궁녀들의 잘못을 단속하고 궁궐의 소란을 막는 한편, 그 자신도 권력에 기대려는 욕망을 품은 감찰상궁은 ‘쥐불이글려’라는 궁녀들만의 입단속 행사를 주관
[김성령] “어느 순간 나도 오기 같은 게 생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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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과 대화를 트는 일은 별로 쉽지 않다. 그는 깐깐하고 딱딱한 주제를 건드리는 대화에 얼른 호기심을 느끼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재영은 단순한 얘기를 좋아하고, 허허실실한 농담의 리듬을 한번 타기 시작하면 넘실넘실 그 리듬을 계속 이어간다. 바깥에 쏟아지는 소낙비 소리에 묻힐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느린 말투로, 꾸준히. <웰컴 투 동막골>(2005), <나의 결혼원정기>(2005), <마이 캡틴 김대출>(2006), <거룩한 계보>(2006) 그리고 장진 감독의 조감독 출신, 결국은 장진 패밀리의 일원인 라희찬 감독의 데뷔작 <바르게 살자>(10월18일 개봉예정)에 이르기까지 그의 최근 커리어를 보면 가장 먼저 읽히는 건 안정된 직업배우로서의 성실함이다. 김유진 감독의 사극 <신기전>을 찍으면서 “지금까지 했던 걸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액션”을 하느라 살이 많이 내린 그는, 얇은 이목구비가 도드라진 얼
[정재영] 유쾌한 그 남자의 리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