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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정은 매번 꼬리를 자르고 도망쳤다. <나비>의 유키도, <올드보이>의 미도도, <웰컴 투 동막골>의 여일도, <연애의 목적>의 홍도 그랬다. 강혜정은 스스로를 한계치까지 밀어붙여 만들어낸 캐릭터들을 마치 꼬리를 잘라내듯 남기고 도망쳤다. 그래서 강혜정이 연기한 여자들, 유키와 미도와 여일과 홍은, 영화가 끝나도 생명을 잃지 않고 피와 살이 남은 꼬리처럼 꿈틀거린다. 비릿하고 아프고 가슴 저린 여자들. <도마뱀>의 주인공 아리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도마뱀>은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여자 아리와 끝없이 기다리는 남자 조강의 기이한 로맨스다. 자신을 만지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옮는다고 믿는 소녀 아리는 어느 날 갑자기 소년 조강 앞에 나타난다. 둘의 살이 처음으로 닿은 날, 조강은 홍역에 걸리고 아리는 사라진다. 그로부터 10년 뒤에 나타난 아리는 사랑이라는 홍역을 대신 조강에게 남겨놓고 떠나간다. 그리고….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 소녀, <도마뱀>의 강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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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월간잡지 <베니티 페어> 3월호 표지에 두 여배우의 누드 사진이 실렸다. (본 사람들은 알 텐데) 모델은 키라 나이틀리와 스칼렛 요한슨이다. 키라 나이틀리는 상체를 세우고 앉아 있고, 스칼렛 요한슨은 길고 부드럽게 배를 깔고 누워 있다. 키라 나이틀리의 자태도 아찔하지만 우리를 정말 숨막히게 하는 것은 스칼렛 요한슨의 곡선이다. 새하얗고 풍만한 그녀의 전신은 르네상스 시대에나 존재한다고 믿어졌던 고상하고 부드러운 여인의 그것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베니티 페어>는 정확했다. <베니티 페어>는 이 시대 다른 여배우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스칼렛 요한슨만의 특징을 사진 한장으로 이야기했다.
1984년생 스칼렛 요한슨은 1985년생 키라 나이틀리와 함께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20대 초반의 스타들이다. 아역배우 출신으로서 스칼렛 요한슨은 <호스 위스퍼러>(1998)에서 상처와 닫힌 마음을 가진 소녀 연기로 주목받았고, <판타
여신, 강림하다, <매치포인트>의 스칼렛 요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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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쉬>는 올해 오스카의 가장 커다란 이변이었다. 리안이 감독상을 수상하러 연단에 오르는 순간, 사람들은 <브로크백 마운틴>이 당연히 작품상을 가져가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폴 해기스의 호기있는 데뷔작에 주목했던 미국 내 비평가들은 <크래쉬>의 수상을 그리 이변이라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다. 인종적 균열을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어놓는 휘발성 문제로 인식하는 미국인에게 온갖 인종과 계급과 마음이 충돌하는 <크래쉬>는 지금 가장 고통스러운 미국의 초상이었을 테니 말이다.
폴 해기스는 이미 1988년에 미니시리즈 <30대>(Thirtysomething)로 두개의 에미상을 거머쥔 TV계의 귀재였다. 그가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오던 TV를 떠난 것은 지난 2004년. 권투 매니저가 쓴 단편소설 하나를 장편으로 개작하겠다는 우직한 꿈 때문이었다. 캐스팅이 완료되고도 영화화가 지연되자 해기스는 각본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보냈고, &
<크래쉬>로 오스카 작품상 수상한 폴 해기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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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냄새 밴 일상을 반듯하게 닦아내는 주부이면서 동시에 가녀린 흰 목덜미를 드러내고 흰 치마를 하늘거리는 판타지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철없는 가족을 생활로 이끄느라 악다구니를 퍼부으면서도, 피아노 앞에 앉아 남자들을 구원의 여인에 대한 환상으로 취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이율배반적인 연기가 가능한 한줌의 배우를 떠올리면, 어슴푸레 잔향으로 떠오르는 배우가 있다. 이따금 연극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곤 하던 김호정이 긴 휴지부를 마치고 영화 <모두들, 괜찮아요?> <피터팬의 공식>으로 안부를 물어왔다. <꽃피는 봄이 오면> 이후 오랜만의 봄나들이다. 10년 동안 감독 지망생인 남편을 거둬먹이는 악바리 무용학원장(<모두들, 괜찮아요?>)이면서 동시에 밑바닥까지 내려간 고등학생에게 구원의 여인으로 다가온 음악교사(<피터팬의 공식>)로서 말이다.
-2001년 <나비>로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상받은 이후 그리고 2004년
<모두들, 괜찮아요?> <피터팬의 공식>의 김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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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 온 지 3일 됐어요.” 최지우를 한국에서 본 건 꽤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지난 4개월간 <TBS> 드라마 <윤무곡-론도>의 촬영을 위해 일본에 가 있었다. 2004년 일본에서 히트한 드라마 <겨울연가> 덕분이다. 슬픈 사랑에 눈물 흘리며 아름답게 미소짓는 극중 인물 유진은 일본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했고, 그녀는 어느새 그들의 ‘지우히메’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녀의 이미지는 다소 심심했던 게 사실이다. 드라마 <천국의 계단>의 정서는 유진의 연장선 같았고, <피아노 치는 대통령>의 교사 역할도 그저 그랬다. 이제 그녀의 연기는 재미없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2006년 4월, 또 다른 멜로영화 <연리지>가 찾아왔다. 죽음을 앞둔 시한부 인생의 사랑 이야기다. ‘또 눈물멜로야’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던 순간, 그녀의 항의가 들려왔다.
“이번 영화는 눈물샘만 자극하는 최루성 멜로가 아니에요. 혜원은 매우
유진을 넘어, 지우히메를 넘어, <연리지>의 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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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이었다. 송일곤 감독의 <마법사들>에 정웅인이 출연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그런 혼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무런 정보없이 <마법사들>의 포스터를 본 누군가라면, 정웅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마법사들>은 <두사부일체> 혹은 <투사부일체>와 같은 코미디영화라고 예단할지 모른다. 정웅인에게도 <마법사들>은 결과를 알 수 없는 모험이었다.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욕구가 “마그마처럼 들끓었지만” 그도 서울예대 동기인 장현성과 송일곤 감독을 만나기 전까지 그리고 96분의 살인적인 실험을 막상 몸으로 겪기 전까지, 그의 선택이 어떤 마법을 피워올릴지 전혀 몰랐다. 개봉을 앞둔 지금, 그는 <마법사들>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까. 본인은 스스로 부족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하지만, <마법사들>은 배우 정웅인을 다시 보게 만드는 영화
송일곤 감독 신작 <마법사들>에 출연한 정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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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다, 박용우와 최강희. 이들은 데뷔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외모가 이상하다거나, 연기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마스크로, 주연보다 빛나는 연기를 보여줬다. 다만, 이들이 재능을 펼치기엔 TV가, 스크린이 좁았을 뿐이다. 지난 10여년의 세월이 억울하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영화계의 현실이다. 그래서 스타되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어렵다고 하지 않나. 그리고 2006년 4월, 드디어 이들이 전면에 나섰다. 제목만 들어도 수상해 보이는 로맨스, <달콤, 살벌한 연인>은 30살이 넘도록 연애를 한번도 못해본 남자 황대우(박용우)와 몬드리안도 모르는 미술 전공 학생 김미나(최강희)의 사랑 이야기다. 박용우는 <올가미> 이후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고, 최강희는 <여고괴담>과 <와니와 준하> 이후 오랜만에 스크린을 찾았다. <혈의 누>에서 강렬한 연기를
<달콤, 살벌한 연인>의 박용우 & 최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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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희_ “큰일에 대범하고, 작은일에 집착해요”
<러브 미 이프 유 대어>의 소피 역, 꼭 해보고 싶어요. 엉뚱한 게임과 질투에 빠지는 모습이 좋았어요. 저랑 안 어울린다고요? 그래요. 사람들은 다 제가 매우 밝고 명랑하기만 한 줄 알아요. 그런 이미지를 좋아하시고요. 라디오 프로그램(현재 최강희는 <최강희의 볼륨을 높여요>를 진행한다)에 나오신 게스트 분들도 “강희씨, 생각했던 거랑 달리 성격이 내성적이에요”라고 하세요. 제가 내성적이죠. 먼저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거는 성격이 못 돼요. 새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고요. 물론 ‘얇고 넓게’는 할 수 있어요.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죠. 하지만 그건 싫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할래요.
그렇다고 제가 어둡기만 한 건 아니에요. 저는 낮과 밤의 모습이 매우 다르거든요. 낮에는 활발하기도 하고 사람들과 웃고 잘 지내요. 그런데 밤에는 칙칙해요. 그냥 방 한쪽에 웅크리고 있어
<달콤, 살벌한 연인>의 박용우·최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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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피리 오기민 대표는 별난 취향의 소유자다. 후배들을 불러모아 자신이 만든 요리를 내놓고, 알록달록한 신발을 사모으고, 들기도 어려운 가구를 직접 만들어 쓰고, 보트 위에서 혼자 낚시에 잠기길 좋아하고, 축구를 보면서도 구슬을 꿰고, 자가용이 아닌 소형 스쿠터를 타고 출퇴근한다. 그런 오 대표이지만 당분간은 그의 취향을 만끽할 여유가 없을 듯하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에서 표준제작 규약을 전담하다 스크린쿼터 문제가 터졌고,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 대책위 정책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모두들, 괜찮아요?> 개봉을 준비해야 했고, 얼마 전에는 아이필름의 공동대표직까지 수락해 두집 살림을 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위해 마술피리를 찾았던 그날도 그는 다섯달 만에 촬영을 재개한 박광수 감독의 <눈부신 날에> 부산 현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갑작스러운 복통이 계속돼 며칠째 고생하고 있다는 오 대표. 그건 아무래도 과민성 스트레스로 인한 탈이 분명했다.
<모두들, 괜찮아요?> 개봉 앞둔 마술피리 오기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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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과외하기> 속편이야? 권상우와 김하늘이 깜찍발랄코믹하게 등장하는 <청춘만화> 포스터를 보고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을 것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 두 사람이 보여줬던 시너지 효과가 아직도 생생하다. 첫 번째 주연작과 첫 번째 코미디를 통해 본인들도 미처 몰랐던 매력을 발산한 이들이 재회한 것이다. 13년 동안 티격태격 우정을 쌓아왔던 동갑내기 친구, 지환과 달래.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굳이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여 틈만 나면 말싸움, 몸싸움을 이어가는 이들의 미래는 영화의 제목처럼 뻔하고 흔하다. 그러나 이 젊은 배우들은, 그처럼 친근한 이야기를 보고 싶고 궁금하게 만든다. 장난스럽게 눈을 흘리면서 스스럼없이 포즈를 취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를 지우지 못하던 중, 문득 주변을 돌아본다. 그들을 바라보는 관계자들 모두의 눈이 마냥 웃고 있다. 함께하는 모습이 그처럼 관객을 즐겁게 하는 커플이 그리 흔한 건 아니다.
달콤, 흐뭇한 연인, <청춘만화>의 권상우 & 김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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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주가 35도를 가리키는 비현실적인 2월의 일요일. 방콕의 수쿰윗 99 구역에 자리한 프로덕션 ‘필름 팩토리’의 문을 두드렸다. 위시트 사사나티앙 감독은 촬영 중이었다. 그가 찍고 있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CF였다. 위시트 사사나티앙 감독에게 CF는 기분전환용 일거리가 아니다. 낙숫물이 고이길 기다리듯 장편영화의 투자를 끈기있게 추진하면서 부지런히 CF를 연출하는 것은 위시트 사사나티앙 감독의 일상이다. CF는 그에게 생계 기반일 뿐 아니라 장편영화에서 시도하려는 기법을 테스트해보는 호사스런 실험실이기도 하다. 어렵사리 착수한 장편영화에서 시행착오를 범하는 사치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 광고주는 그 사실을 아냐?”고 묻자 감독은 의젓한 개구쟁이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물론 낙숫물이 대야를 채우려면 만만찮은 시간이 필요하다. 데뷔작 <검은 호랑이의 눈물>(2000) 이후 4년 걸려 두 번째 영화 <시티즌 독>(2004)을 내놓은 위시트 사사나
<시티즌 독>의 위시트 사사나티앙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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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스토리의 감성이 계산된 틀 안에서 더욱 자극적일까. 김지수와 조재현의 <로망스>는 세심하게 짜맞춘 상업영화다. 하지만 감독이 문승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지나치게 전형적이어서 오히려 실험영화처럼 느껴진다. 그는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폴란드 국립영화학교 우츠의 첫 한국인 유학생이자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제자답게 <이방인> <나비> 등 전작은 작가로서의 야심이 뚜렷한 작품이었다. 디지털로 작업한 <나비>는 어디서 어떻게든 찍는다는 다큐멘터리적 원칙을 SF틀과 맞춘 ‘무모한’ 도전이었고 국내외 평단은 그 가치를 높이 샀다. 감독의 전사를 생각할수록 <로망스>는 야릇한 영화다. 사실 <로망스>는 <이방인>이나 <나비>와 굉장히 다른 스타일의 영화이지만 어딘가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듯 사는 이들과 그 사연에 매력을 느끼고 다루고 있다는 점에선 비슷하다. 또 즉흥적인 현장성이 지배했던 &
<로망스> 감독 문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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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정우성을 보고 넋이 나갔더랬다. 그래서 그와 만나기로 한 날, 밤잠까지 설쳤다.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거짓말 조금 보태 3월의 햇살보다 반짝거렸다. 한데 자신을 예전의 청춘스타로 보지 말아달라 부탁했다.
의아한 마음에 묻는다.
“그럼 당신은 어떤 사람이죠?”
정우성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행복한 배우”라고 대답한다.
잠자코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린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나는 배우가 외로운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영화가 아무리 공동작업이라 해도 연기하는 순간엔 철저하게 혼자잖아요. 또 이곳(연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신념과 의지도 있어야 하고. 그러니 배우란 참 외로운 일이죠. 그래요. 이건 내가 <데이지>의 박의를 보며 느꼈던 것과 같아요. 혜영(전지현)에게 첫눈에 반한 박의는 매일 같은 시간 데이지 꽃을 선물하는 것으로 자신의 불같은 마음을 견뎌
외롭지만 행복하다, <데이지>의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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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털리 포트먼의 형형한 눈빛은, 삭발한 머리보다 인상적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린 소녀였을 때부터 그랬다. <레옹>의 마틸다는 킬러 앞에서 마릴린 먼로를 흉내내며 자신을 드러낼 줄 알았다. 12살 어린 나이에 성적 대상으로 낙인 찍힌 것이 두고두고 끔찍한 일이었다고 반복해 말하지만, 자신이 하는 몸짓이, 표정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고서도 소녀는 끔찍할 정도로 요염한 롤리타가 될 줄 알았다. <스타워즈> 프리퀄 시리즈와 함께 10년을 보내면서 소녀는 여인이 되었다. <클로저>를 통해 <레옹>의 기억을 환기시킨 동시에 그 벽을 뛰어넘었다.
우연히도, <레옹> <스타워즈> <클로저>에 이르는, 그녀를 기억하게 만든 굵직한 작품들에서 포트먼은 헤어스타일로 인물을 표현했다. 머리 색깔을, 스타일을 바꿀 때마다 포트먼은 새로운 환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브이 포 벤데타>에 이르러 포트먼은 삭발을 했
성인 마틸다의 또다른 도전, <브이 포 벤데타>의 내털리 포트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