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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충무로 파워50’에 순위가 처음 매겨진 이래 강우석 감독은 한해도 빠짐없이 ‘넘버원’을 차지했다. 하지만 올해 그 8년의 아성이 흔들렸다. 박동호 CJ엔터테인먼트 대표에게 1위 자리를 넘기고 한 계단 내려앉은 것. 시네마서비스의 모기업이었던 플래너스가 CJ에 넘어간 지난해 이후 그의 입지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1천만 관객이 지지한 <실미도>로 1년을 버텼지만, 자본력의 한계라는 벽은 너무 높았다. 특히 CJ, 오리온, 롯데 등 대기업이 본격적으로 영화산업의 본류를 장악하면서 시네마서비스의 파워는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하지만 충무로 토착자본에 대한 지지는 예상 외로 강하다. 그가 파워50 집계의 마지막 순간까지 1, 2위를 오르내릴 수 있었던 데는 대기업 자본에 대한 거부반응이 영향을 끼쳤을 거다. 항상 한국 영화산업의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었던 그의 능력에 대한 신뢰 또한 한몫 했으리라. 그와의 인터뷰는 순위집계 막바지에 이뤄졌다. 해마다 이맘때면 “파워 1위는
<씨네21> 집계 파워50, 9년만에 1위 놓친 강우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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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잭 니콜슨.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시대를 거쳐 살아남은 배우들에게는 아슬아슬한 리비도가 있다. 환갑을 넘은 나이에도 동공은 살짝 맛이 가 있고, 그림자는 의심스러우며, 가련한 뱃살만 감춘다면 등덜미의 섹시함 역시 여전하다. <택시 드라이버>(1976), <이지 라이더>(1969), <대부>(1972)의 기운이 아직은 쇠락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 그에 반해 더스틴 호프먼의 노년은 조금 초라해 보인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훌륭한 성격파 배우는 예전의 아우라를 손에서 놓아버린 듯했다. <졸업>(1967)과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 샘 페킨파의 <분노의 표적>(1971)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오랜 추억을 더듬는 듯 아련했다. 그는 늙었고, 차분했고, 조금 심심했다.
그런 이유로, 지난 10여년간의 더스틴 호프먼은 할리우드의 살아 있는 등신불 취급을 받아왔다. <졸업> 이후
호프먼다운 지극히 호프먼다운, <미트 페어런츠 2>의 더스틴 호프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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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코미디영화의 대표선수가 돌아왔다. 그것도 웃음 한점 없이 조선시대 수사관의 굳은 표정으로. 바특하게 자른 헤어스타일로 성큼성큼 스튜디오에 들어서며, 전 국민이 광고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 좋은 미소로 시원스레 인사한다. <신라의 달밤>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특사> <선생 김봉두> <귀신이 산다>로 내달린 흥행보증수표 차승원. 5타수 5안타라서 여섯 번째 타석 <혈의 누>가 부담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5타수 5홈런이면 부담이겠지. 하지만 사실 1루타, 2루타 혹은 에러로 출루한 경우도 있었다. 흥행은 수치가 전부지만, 내 기준에서 보면 흥행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고 답한다. 질문을 할 때마다 이거냐 저거냐라고 단순하게 물으면 여지없이 날카롭게 되받아온다. 정확히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는 묻는 사람이 무안하지 않도록 씩 웃는다. 화법이나 행동거지에서는 여우라면 이런 여우가 없고, 영화를 대하거나 자신을 평가하는 엄격함
코미디 대표선수의 수상한 귀환, <혈의 누>의 차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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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의 얼굴이 달라졌다. 보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웃음,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망울 등 특유의 매력은 여전하다. 그러나 <댄서의 순정>의 개봉을 앞두고 만난 그는 더이상 “나는 사랑을 아직 몰라~”라며 막춤을 선보이던 여고생 보은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전직 최고의 스포츠 댄서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위장결혼으로 밀입국을 감행한 당찬 조선족, 갖은 노력 끝에 댄스 실력도 인정받고 사랑도 이뤄내는 스무살의 장채린이다. 자신의 나이에 맞는 배역을 맡아 작품마다 조금씩 성장해왔던 그가, 드디어 성인의 문턱에 다다른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배우 문근영 역시 달라졌다.
<댄서의 순정> 기술시사를 앞둔 그는,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이젠 두렵다고 말한다. 첫 영화 <연애소설>에선 자신이 나오는 장면만 나오면 안절부절못했고, <장화, 홍련>에선 영화가 무섭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영화 전체를 책임졌
<댄서의 순정>의 배우 문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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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24일에 크랭크업한 영화 <연애의 목적> 쫑파티 자리에서 박해일은 제작사 싸이더스의 직원에게 인터뷰 하나만 잡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숨돌릴 새 없이 차기작 <소년, 천국에 가다>를 촬영하게 됐는데, 몰입이 쉽지 않다고, 인터뷰를 씻김굿 삼아 자신의 몸에 물들어 있던 주인공 유림의 얼룩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금 젖었어요?” <연애의 목적>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첫 대사다. 스물여섯된 고등학교 영어교사 이유림이 스물일곱의 교생실습생 최홍(강혜정)에게 학교 운동장 벤치에 앉아 건네는 말. <연애의 목적>은 맘에 드는 여자 앞에서 ‘한번만 같이 자자’고 애처럼 조르는 남자와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걸 왜?’라고 묻는 여자의 팽팽하고 제법 아찔하며 리드미컬한 연애담이다. 박해일이 연기한 유림은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들과 좀체 묶이지 않는다. 차이는 있지만 전작의 캐릭터들은 공통적으로 그에게서 맑은 얼굴과 깊은 음성
<연애의 목적>의 배우 박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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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하고 폭력적인 만화에 탐닉하고 밤이면 사나운 몽상에 뒤척이는 10대 남자애들에게 연필을 쥐어주자. 그리고 환상의 여자 친구를 그려보라고 속삭이자. 몇분 뒤 당신의 손에는 아마도 제시카 알바(24)와 몹시 닮은 소녀의 초상화가 들려 있을 것이다. 그녀는 오목하고 볼록하고 터질 듯하다. 도도한 눈동자, 금세라도 토라질 듯 도톰한 입술, 모카빛 윤기가 흐르는 동그란 어깨, 쿨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경멸로 살짝 이지러진 눈썹. 제시카 알바를 이루는 모든 곡선은, 호르몬을 주체 못하는 소년들의 기도에 대한 천상의 응답이다. 만화가 약속한 판타지를 한치 오차없이 충족시켜줄 것을 요구하는 탐욕스런 10대 마니아들을 상대해야 할 <신 시티>와 <판타스틱 포>의 영화제작자들이 제시카 알바를 ‘최종병기 그녀’로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블론드의 야망’(blond ambition). 15년 전 마돈나가 그녀의 투어에 붙였던 타이틀은 제시카 알바의 2005년을
21세기가 원하는 천사의 얼굴, <신 시티>의 제시카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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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가늘고 긴 실루엣, 허리께로 물결치는 긴 생머리, 산머루처럼 검게 젖은 눈동자. 이런 식으로 윤소이의 외적인 특징들을 나열해보면, 소설과 만화 속에서 수줍게 고개 숙인 청순가련한 소녀가 겹쳐 떠오른다. 연약하고, 의존적이고, 결정적으로 ‘사랑밖에 난 몰라’ 하는 스타일. 그런데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
윤소이의 표정과 몸짓과 목소리에는 그런 소녀가 없다. 군살없는 날렵한 몸매를 닮은 담백한 웃음과 말씨에는 내숭이나 청승이 들어설 곳이 없다. 긴 팔다리가 그리는 시원시원한 몸의 언어를 듣고 있으면, 뭇 감독들이 그에게 연달아 ‘칼자루’를 쥐어주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무림의 고수로 분했던 그는 연초부터 중국에서 무협영화 <무영검>을 찍고 있다. 그 사이에 찍은 <역전의 명수>는 온갖 장르가 망라된 풍자코미디지만, 어리버리한 주인공을 자신의 복수에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주도권은, 칼자루는
그녀를 바라만 봐선 알 수 없는 것들, <역전의 명수>의 윤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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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진은 운이 좋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영화를 그만두고 나서 13년 만에 <2009 로스트 메모리즈>를 찍은 그는 4년이 채 못 되는 사이 <이중간첩> <말죽거리 잔혹사> <범죄의 재구성>처럼 인상적인 영화들로 새로운 필모그래피를 채워왔다. 탤런트로 인상이 굳어진 배우에겐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운이라고 하기엔 뭔가 서운하다. 현명하고 고집있게 나이 먹은 남자, 라고 하면 조금은 비슷할까. 느닷없이 스크린에 나타난 천호진은 대의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후레이센진 리더로, 무뚝뚝하면서도 속깊은 <이중간첩>의 정보부 상사로, 어린 남자는 품을 수 없을 그늘을 내비쳤었다. 그리고 그 그늘은 <주먹이 운다>에서도 제몫을 찾는다. <주먹이 운다>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거리에서 매를 맞으며 돈을 버는 퇴물 복서 태식(최민식)을 그저 바라보는 국숫집 주인 상철
<주먹이 운다>의 배우 천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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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우지와 이구아나에 열광하는 생물학자이자 군인이며 자기 배를 째서 총알을 뺄 정도의 명의인데다가 첼리스트이기까지 한 전쟁터의 로맨티스트(<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 기숙사 책상을 2층 창문에서 내던지며 자폐아 같은 천재 존 내시에게 프린스턴대학의 낭만을 가르치던 허구의 존재(<뷰티풀 마인드>), 도덕의 전문가인 척하다가 애인을 팔아먹고 급기야는 애인에게 총으로 뒤통수를 맞는 마을의 바보(<도그빌>).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낯선 캐릭터, 부드러운 연기, 리드미컬한 영국식 영어로 이상한 존재감을 만든다는 것이다. 또 하나를 들자면 이 모두는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금발에 조금 길어 보이는 지적인 얼굴이라는 점을 빼면 딱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의 변신은 매번 유달랐다. 아마 이런 변신술의 선배들을 찾자면 멀게는 로버트 듀발과 존 말코비치, 가깝게는 베니치오 델 토로가 있을 터이다. 약삭빠르거나 이기적이거나 마초적 완력을 쓰
담백한 남자의 영국식 유머, <윔블던>의 폴 베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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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태양>은 태풍을 거쳐 태양을 맞이한 젊음의 이야기다. 공장직조된 교복만큼 평범하게 살아가던 고등학생 소요(천정명). 스케이터들을 캠코더에 기록하는 한주(조이진)는 변두리에서 서성이던 그를 인라인스케이트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곳에서 책임감이 강한 갑바(이천희)와 자신만의 견고한 세계를 지닌 모기(김강우)를 만난 소요는 인라인스케이트에 젊음을 걸기로 마음먹는다. 다만 청춘의 절정기란 금세 사라지기도 하는 것. 태풍이 몰아치면 아이들은 나이를 먹을 것이고 세상도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로 희망없는 소녀들을 감싸안았던 정재은 감독은 인라인스케이트에 두발을 담고 길거리를 질주하는 청춘군상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카메라는 지나치게 흔들리지도, 쓸데없는 장난을 치지도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고 직사광선을 직시하던 카메라는 터져나올 듯한 젊음을 있는 그대로 건져내고, 그렇게 생생한 프레임 속에는 젊은 네명의 배우 김강우, 천정명, 이천희, 조이진의
떠올라라! 젊은 태양, <태풍태양>의 김강우·천정명·이천희·조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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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파도>가 심상치 않다. 소재며 캐스팅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비관적인 예측이 대부분이었던 이 영화가 개봉 2주가 지난 지금, 전국관객 120만명을 조용히 넘어섰다. 제작사인 코리아엔터테인먼트의 창립작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슬리퍼 히트만큼은 아니어도 예상외의 선전임은 분명하다. 코리아엔터테인먼트 이서열 대표는 <동갑내기…> 때부터 간간이 이어졌던 인터뷰 요청을 계속해서 거절해왔다. 몇편의 작품으로 승부를 던지기 이전에 우연히 성공한 초짜로 비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마파도>보다는 현재 준비 중인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싶다는 조건을 걸고. 외화를 수입하고, 비디오를 출시했던 베어엔터테인먼트를 책임졌던 그가, 제작쪽으로 업종을 전환한 지 이제 4년. 그간 이서열 대표는 세편의 영화를 극장에 걸었고, 현재는 두편의 영화를 제작 중이며, 그의 손에는 수면 밑에서 기회를 엿보는 10여편
<마파도> 제작한 코리아엔터테인먼트대표 이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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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같은 맑은 눈과 새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인상적인 사이타마 출신의 1980년생 여배우. 하지만 카메라의 앵글이 조금만 바뀌어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천변만화의 얼굴을 지녔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다케우치 유코는 미소녀와 귀부인이 공존하는 얼굴을 가졌다. 그것은 올해 클로즈업으로 단순하게 촬영된 그녀의 첫 화장품 광고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 한국에서 처음 그녀의 얼굴을 알린 모 크림치즈 광고와 현재의 모습을 대조하다가 깜짝 놀라는 국내 팬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지난해 2월 국내에 방영된 <런치의 여왕>의 무기타 나쓰미 역은 <환생>의 애절함과는 대조를 이루는 귀엽고 털털한 그녀의 이면을 팬들에게 안겨주었다. 실제 성격도 “장난기가 심하고 술을 마시면 우는 버릇”이 있다는 서글서글한 타입.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수건을 말아 입에 물고 소리를 내지른다”거나 “다시 태어나면 피땀과 눈물이 뒤섞인 결투가 하고 싶기 때문에 남자가 되고
발랄과 순수 사이,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다케우치 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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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여름, 대학로의 한 극단 연습실에서 배우 고두심을 처음 만났다. 제주 4·3 항쟁의 소용돌이를 지나며 신산스런 삶을 살아온 한 여인의 삶을 그리는 <느영 나영 풀멍 살게>(너하고 나하고 풀면서 살자라는 뜻)라는 연극이었다. 그의 고향이 제주도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고, 그렇다면 가족사에 뭔가 사연이 있지 않을까 싶었고, 혹시라도 그런 게 있다면 기사 쓰기 좋겠다는 욕심부터 내면서 찾아갔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시 마을을 불태우려는 것을 막으려던 친할아버지가 지붕 위에서 불타 돌아가셨습니다. 4·3의 응어리는 제주도민 전체의 것이죠.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역입니다.”(그는 이 연극으로 4·3에 대한 생각이 두터워졌고 그뒤로 4·3 때 추모제에 가서 사회를 보는 등 봉사를 해오고 있다.)
10년 만에 다시 만나면서 또 지레 욕심부터 냈다. (착한) 며느리와 (억척스런) 어머니는 고두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지 오래. 너무 일찍 ‘여
삶을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엄마>의 고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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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은 요즘 바쁘다. 우선 제작사 씨네월드의 대표로 할 일이 많다. 한편으론 <황산벌>에 이어 또 한편의 사극영화의 촬영을 준비 중이다. 삼국시대의 전장을 지역별 사투리의 경연장으로 뒤덮고, 희극과 비극을 한자리에 모아봤던 <황산벌> 이후 그의 두 번째 연출작의 제목은 <왕의 남자>(제작 이글 픽쳐스)다. 폭정의 시간으로 기록되어 있는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광대와 왕이 서로의 역할을 비추면서 한판 놀아보고, 맞장떠보는 영화다. 크랭크인 준비까지 다 해놓고 기다리다, 영화계 병풍으로 주인공 역의 배우가 군대를 가는 바람에 다소 지연되긴 했지만, 6월경 드디어 촬영 예정이다. 그의 사극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계속된다. 그 얘기를 나눴다.
-<왕의 남자>는 시나리오 분위기만으로 보면, <황산벌>하고 비슷한 면이 있다.
=사극은 원래 비극이 많다. 사극을 소재로 찾다보면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과 사건에 관심
<황산벌> 이어 <왕의 남자> 연출하는 이준익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