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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에 뭐했어?” “그냥 집에 있었어. 기념일을 챙기는 스타일이 아니라.” 천우희와 김남길의 대화를 듣고 며칠 전이 김남길의 생일(3월 13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남길에게 생일은 특별한 ‘어느 날’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그는 “특별함보다 일상의 소소함으로부터 오는 행복감”을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평범한 이들의 마음속 상처를 보듬는 영화 <어느날>을 선택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멜로라는 드라마틱한 장치를 끌어오지 않고서도 남자와 여자의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말할 수 있다고 믿는 이 영화는, 최근 삶의 본질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진 배우 김남길에게 좋은 힌트가 되어줬다고 그는 말한다.
-<어느날>의 출연을 처음에는 고사했다고. 다시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에는 어른 동화 같은 느낌의 작품을 내가 잘 소화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촬영하
[커버스타] 본질을 더듬는 마음으로 - <어느날> 김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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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남매라고 해도 믿겠다. 스튜디오에 들어선 천우희와 김남길의 모습이 그렇다. 생일을 그냥 별일 없이 보내버렸다는 김남길의 말에 “밥이라도 같이 먹을걸”이라고 다정한 말을 건네는 천우희와 촬영 도중 분위기 전환을 위해 소소한 농담을 건네던 김남길의 모습을 보며 촬영장에서 그들이 주고받았을 합을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이윤기 감독의 신작 <어느날>은 한국영화계의 개성 넘치는 캐릭터를 도맡아왔던 천우희와 김남길의 일상 연기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시각장애인 미소와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보험조사원 강수가 바로 두 배우가 새로 입은 옷이다. 육체는 죽어가고 있지만 정신은 누구보다 명징하게 살아 있는 여자와 몸은 멀쩡하지만 정신이 죽어가는 남자는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볕 좋은 어느 날, 천우희와 김남길을 만나 <어느날>의 현장에서 그들이 공유했던 어떤 것들에 대해 물었다.
[커버스타] 다정한 교감 - <어느날> 김남길·천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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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맞지도 않는 헐렁한 군복을 입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패잔병이 돼 덴마크군의 포로가 된 독일 소년병들. 그들은 독일군이 덴마크 서해안 해변에 매설한 지뢰 해체 작업에 투입된다. <랜드 오브 마인>은 이 실화를 극화하면서 전쟁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역전시킨다. 독일 소년들의 얼굴은 먼지와 피로가 뒤덮여 엉망이다. 작은 실수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들의 얼굴엔 저항과 체념과 절망의 그림자가 더해진다. 그때부터 소년들의 얼굴이 하나씩 구별되기 시작한다. 10여명의 소년병들 중 세바스티안(루이스 호프만)은 신중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조심스레 희망을 품어보는 소년이다. 동료들을 다독이며 지뢰 해체 작업을 해나가는 세바스티안은 자신들을 관리하는 덴마크 군인 칼 라스무센(로랜드 몰러)과 우정도 쌓아간다.
죽음의 해변에서 꿋꿋이 삶의 의지를 지켜가는 선한 얼굴의 세바스티안은 독일 묀헨글라트바흐 출신의 1997년생 루이스 호프만이 연기했다. 루이스 호
[who are you] 희망과 의지의 얼굴 - <랜드 오브 마인> 루이스 호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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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웠던 시대, 4·13 호헌조치가 내려지고 6월항쟁이 일어났던 1987년. 영화 <보통사람>은 평범한 한 경찰이 유혹에 놓이고 선택을 하게 되는 궤적을 좇는 영화다. 시대 속 가장 보통의 삶을 호출한 영화의 이면엔 서성경 미술감독의 노력이 있었다. “주인공은 픽션이지만 시대적 배경은 최대한 진실하게 보였으면 했기에 고증을 많이 신경 썼다.” 시대를 가장 근접하게 재현해내기 위해 성진(손현주)의 집은 부산의 철거촌에 오픈 세트로 지었다. 1980년대 시대상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재개발 지역 빈 주택들의 마감재, 문짝 등을 ‘득템’했고, 지방의 장판집을 뒤져 옛날 벽지와 장판들을 찾아냈다. 성진이 일하는 경찰서와 대폿집에는 당시 유행했던 컬러인 ‘옥색’을 포인트로 사용해 친숙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단지 고증에만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아카이빙된 당시 기사 사진들을 숱하게 찾아본 그는 “그 시대엔 세뇌시킨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애국심을 강조하는 슬로건과 표어, 포스
[영화人] <보통사람> 서성경 미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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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깊은 이야기다. 요시다 슈이치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분노>는 평범한 부부의 살인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현장엔 ‘분노’라는 글자만이 남겨져 있고, 1년 후 세명의 용의자가 등장한다. 하지만 <분노>는 범인을 쫓는 추리물이 아니다. 내 곁의 누군가가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불신과 두려움에 관한 드라마다. 혹은 믿음에 대한 질문이라고 해도 좋겠다. 여러 인물 군상의 내면을 동등하게 건드리는 원작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압축할 것인가. <분노>는 이상일 감독이 내놓은 해답이자 일본영화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는 지표다. 한자리에 모은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하는 역대급 캐스팅과 최고의 스탭들이 혼신을 다해 만든 높은 완성도의 영화로 매 장면 만족스럽다. <분노>의 이상일 감독을 만나 한층 깊어진 그의 영화 세계에 대해 물었다.
-<악인>(2010)에 이어 다시 한번 요시다 슈이치의 원작을 바탕으로 했다. 이번에는 단행본이 나오기 전부터
[씨네 인터뷰] "응어리진 분노를 묘사하고 싶었다" - <분노> 이상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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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스 핸들링은 토론토국제영화제(이하 TIFF)의 집행위원장이자 토론토를 대표하는 문화센터 벨라이트 박스(TIFF Bell Lightbox) 대표다. 1994년 TIFF에 몸담은 그는 영화제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한 일등공신이자 벨라이트 박스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지난 2010년 설립해 운영하는 토론토 문화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에서 주최한 서울시의 시네마테크 건립과 운영 현황을 논의하는 워크숍 ‘영화의 미래를 위한 건축: TIFF Bell Lightbox’와 ‘프로그램의 재발명: 영화센터의 현황과 전망’ 참석차 지난 3월 15일 한국을 찾은 피어스 핸들링을 만나, 시네마테크의 중요성과 운영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올해 TIFF 42주년이다. 1994년부터 프로그램 위원장, 예술위원장을 거쳐 집행위원장을 맡으며, 30년 이상을 영화제와 함께했다.
=그러고보니 초반부터 함께했다. 처음 참여했을 때만 해도 작고 새로운 신생 영화제였다. 하지만 T
[people] 피어스 핸들링 토론토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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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고 에너지 넘친다. 요한 필립 애스백은 2008년 닐스 아르덴 오플레브 감독의 <두개의 세계>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 덴마크 출신의 라이징 스타다. <루시>(2014), <벤허>(2016) 등 규모 있는 작품은 물론 <왕좌의 게임> 등의 TV시리즈에도 잇따라 출연하며 착실히 단계를 밟아나가고 있는 중이다. 메이저(스칼렛 요한슨)를 보조하는 철벽의 파트너 바토 역을 맡은 그는 원작의 오랜 팬이었다며 이번 영화에 출연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와 달리 풍성한 표정으로 장면을 재현해주는 모습에서 영화에 대한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진중하지만 따뜻한 내면을 지닌 바토와 점점 겹쳐 보였다.
-<공각기동대> 원작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봤나.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은 진즉부터 팬이었고 시로 마사무네의 만화는 나중에 봤다. 내가 어릴 땐 덴마크에서 만화를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웃음) 오시
[people]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요한 필립 애스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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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이하 <공각기동대>)의 내한 스타 중 줄리엣 비노쉬를 발견한 이라면 누구나 ‘왜?’라는 의문을 품을 만하다. 숱한 거장들과 함께 인간의 깊은 내면을 표현해온 줄리엣 비노쉬를 SF 블록버스터라는 생소한 장르에서 만나다니, 이색적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왜 그녀가 필요했는지 단번에 이해할 것이다. 줄리엣 비노쉬는 메이저(스칼렛 요한슨)를 탄생시킨 과학자 닥터 오우레역을 맡았다. 존재만으로 화면을 장악할 배우가 필요했을 테고, 그런 의미에서 줄리엣 비노쉬는 완벽하다. “반복은 폭력”이라던 배우, 아니 예술가는 즐거운 마음으로 새로운 모험을 만끽 중이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는 봤는지. SF나 사이버펑크 장르에 관심이 있었나.
=내겐 미지의 영역이다. 처음 스크립트를 받았을 때 전혀 알 수 없는 단어들로 채워져 있었다. (웃음) 이해할 만한 체계가 없었다고 할까. 당연히 거
[people]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배우 줄리엣 비노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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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영 매거진>에 연재된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 만화를 오시이 마모루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뒤, <공각기동대>가 SF와 사이버펑크물에 끼친 파급력은 절대적이었다. 원작의 방대한 세계관은 물론, 극장판 애니메이션과 TV애니메이션, 소설, 게임 등 가능한 모든 장르로 제작된 원작의 ‘무게’는 무거웠다. 제작사 드림웍스가 기획 개발에만 6년 넘게 투자했다는 후문이다. ‘원작의 열렬한 팬’임을 자처한 루퍼스 샌더스 감독은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2012)을 연출한 후 지난 3년간 온전히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의 미래세계를 스크린에 구현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원작에 대한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참여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대학 시절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를 접했다. 당시 유일하게 꽂힌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5년 전쯤 시나리오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얘기를 들
[people]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루퍼스 샌더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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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라인>은 작업 대출계에 발을 들인 대학생 민재(임시완), 민재를 작업 대출의 세계로 인도하는 소신 뚜렷한 석구(진구), 야망이 큰 행동대장 박 실장(박병은) 그리고 이들을 잡겠다고 모인 검경 수사대가 서로를 쫓고 또 물먹이는 이야기다. 서류를 불법으로 조작해 신용대출이 불가능한 이들에게 은행권 대출을 받아주는 작업 대출 업자들은 돈의 흐름에 밝은 사기꾼이다. <원라인>은 하이스트 무비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한탕을 노리는 사기꾼들의 사기행각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현실의 정밀묘사를 통해 돈에 대한 욕망과 돈이 굴러가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소홀히 하지 않는다. 단편 <일출>(2015), <하얀돼지>(2012), <디지털 무비>(2011), 독립 장편 <떨>(2006) 등을 만들며 다양한 실험을 해온 신인 양경모 감독은 장르의 전형을 영리하게 취하고 피하면서 영화에 자신만의 개성을 새겨넣는다. “조금이라도 다
[people] <원라인> 양경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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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한 감독은 인터뷰 전날 “술을 많이 마셨다”고 말했다. 장편 데뷔작이자 코미디영화 <히어로>(2013) 이후 약 4년 만에 내놓은 영화라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모태펀드로부터 투자를 거의 받지 못해 만만치 않은 펀딩 과정을 겪었고, 세상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개봉조차 불투명했던 영화가 아닌가.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영화 <보통사람>은 1987년 형사 성진(손현주)이 안기부의 기획 수사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누구나 기획 수사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섬뜩하고, 그럼에도 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 사람은 보통사람이라고 강조한다.
-1975년 전국을 돌며 17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 김대두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들었다.
=신문의 ‘오늘의 역사’ 코너에 ‘최초 연쇄살인마 김대두’라는 기사가 눈에 띄어 찾아봤다. 연쇄살인마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을까. 과거 기사를 찾아 읽었는데 이상했던 건 그가 잡히
[people] <보통사람> 김봉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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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 장혁은 <화산고>(2001)에서 노랑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고 시도 때도 없이 장풍을 쏴댔다. 타고난 공력을 주체하지 못해 여덟번이나 퇴학을 맞고 화산고에 전학온 김경수가 되는 길은 사실 험난했다. “그토록 두려움에 떨었던 와이어 액션 연기를 찍은 지도 벌써 나흘째. 경수가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튀어나가는 장면을 찍기 위해서도 와이어를 쓴다. 그런데 몸이 영 말을 듣지 않는다. 거짓말 아니라 서른몇번쯤 땅바닥을 굴렀다. 결국엔 카메라를 머리로 받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감독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기에, ‘열정, 패기, 젊음밖에 없슴다’라고 앙다문 소리를 했다.” 장혁이 직접 쓴 <화산고> 촬영일지 중 한 대목이다. 속마음이 그대로 담긴 이 촬영일지를 읽다보면 장혁의 연기 욕심이 데뷔 초부터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꾸준히 절권도를 연마하며 몸과 마음을 수련해온 장혁은 어느덧 반항적인 청춘의 얼굴을 지나 노련한 배우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 <보
[메모리] 변치 않는 연기 욕심 - 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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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이었다. <추노>의 이대길로 대변되는, 뜨겁고 정의로운 역할을 주로 맡아온 장혁이 안기부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역을 맡다니. 인터뷰에서 또 한번의 반전이 이어졌다. 소탈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장혁은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그리고 풍성하게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섬세한 비유와 은유들을 동원하는 달변가였다. 40대의 초입, 한순간도 방만해지지 않고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도전 중이라는 장혁과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보통사람>은 혼란하고 어두웠던 1987년의 이야기다. 시나리오를 읽어본 느낌은 어땠나.
=먹먹하고 막막했다. 80년대에 나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성진(손현주)의 아들 민국이 정도의 나이였고, 그 나이 땐 운신의 폭이 적었으니까. 체험해서 알게 된 것과 학습해서 알게 된 것간의 괴리가 있지 않나. 후자의 세대였지만, <보통사람> 속에 들어가 연기하면서는 직접 체감하는 느낌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안기부 실장 규
[커버스타] 감정을 지우는 감정 연기 - <보통사람> 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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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위대하게>(2013), <숨바꼭질>(2013), <악의 연대기>(2015), <더 폰>(2015)까지 연이어 액션, 스릴러 영화에 출연하며 차갑고 어두운 곳에서 운신했던 손현주는 <보통사람>에서 오랜만에 조금은 풀어져도 좋은 소시민의 모습을 슬쩍 꺼내 보여준다. 그의 희극적 면모는 이내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이의 사투로 이어지며 서사에 깊은 굴곡을 만들어낸다. 1980년대, 오직 나라와 가족을 위해 살았던 형사 성진이 된 손현주는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보통사람은 또 누구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안고 <보통사람>에 뛰어들었다. “주향은 백리, 화향은 천리, 인향은 만리라고 하지 않나. 김봉한 감독과 함께 ‘사람’의 얘기를 담고자 했다.” 손현주는 이 작품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고 진한 향으로 남길 희망했다.
-그간 드라마를 통해 서민적인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그러다 스릴러의 주인공이 되었고 다
[커버스타] 평범함을 지킨다는 것 - <보통사람> 손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