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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8년 만이다. 정지우 감독과 배우 최민식이 같은 영화에서 조우한 건. 1999년, 새로운 세기에 대한 기대와 흥분이 교차하던 세기말의 한국에서, 최민식은 전도유망한 청년 감독 정지우의 장편 데뷔작 <해피엔드>에 출연했다. 단지 행복하고 소박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뿐이었던 중산층 남성, 민기의 추락과 절망이 최민식의 허망한 얼굴에 아로새겨졌다. 모든 것을 잃은 민기가 억눌러 왔던 분노를 폭발하는 <해피엔드>의 결말은 당대의 한국영화, 어쩌면 지금의 한국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굉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민기의 선택을 이해할 순 없지만 연민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최민식 덕분이었다. 언젠가 그는 “나쁜 놈이든 좋은 놈이든 뚝 떨어져서 보면 모두가 다 측은하다”며 배우로서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감정이 세상에 대한 연민임을 말한 적 있다. “훨씬 더 깊어졌지만 내면의 맹렬함은 여전했다. <해피엔드>의 민기를 선배가 지금 연기했다면 어땠
<해피엔드> 최민식 - 슬픈 눈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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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원 감독과 배우 문근영의 만남이 예사롭지 않다. <명왕성>(2012), <마돈나>(2014) 등을 연출하며 소외된 계층과 그들을 내친 자본주의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담아냈던 신수원 감독은 <유리정원>을 통해서 조금은 색다른 변화를 꾀했다. 역시 사회로부터 소외받는 주인공들이 등장하지만 미스터리와 판타지를 오가는 이른바 신수원식 ‘리얼 판타지’를 선택한 것. 한때는 앳된 외모로 국민 여동생이라 불리던 문근영이 배우로서의 성숙한 모습, 혹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유리정원>은 감독과 배우 모두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문근영이 연기하는 주인공 재연은 오직 연구밖에 모르는, 선천적인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과학도. 전혀 튀지 않는 평범한 차림새와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에 가까운 무뚝뚝함이 항시 묻어나는 재연이라는 옷을 선택한 문근영의 속뜻이 궁금해졌다. 오랜만의 주연작이지만 그래서 더욱 도전적으로 보이는 영화 <유리정원
<유리정원> 문근영, “감독과 나의 언어의 장이 닮아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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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장르를 ‘최민식’으로 풀면 된다.” 정지우 감독이 한 이 말은 <해피엔드>(1999) 이후 18년 만에 함께 작업한 배우 최민식에 대한 단순한 상찬이 아니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 임태산(최민식)의 사랑하는 약혼녀 유나(이하늬)가 어느 날 죽은 채 발견되고, 딸 미라(이수경)가 유나의 살해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시작된다. 소중한 것들을 한꺼번에 잃을 위기에 처한 남자 임태산의 선택과 고민 그리고 행동이 <침묵> 서사의 동력이자 관건이다. 어쩌면 정지우 감독도 그런 뜻으로 한 얘기인지도 모른다. 정지우 감독의 말을 들은 최민식은 “‘<침묵>의 장르는 최민식’이라는 말이 고맙기도 하지만 사실 좀 낯간지럽다. 겸손을 떨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침묵>은 현재 정지우 감독의 생각과 감성, 가치관 그리고 기술, 그 모든 게 녹아 있는 작품”이라고 감독에게 공을 돌렸다. 스튜디오에 들어온 최민식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
<침묵> 최민식 -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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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새로운 얼굴이 궁금하다면 이가섭을 주목하라. 첫 주연작인 임태규 감독의 <폭력의 씨앗>에서 이가섭은 한국 군대 문화의 폭력에 노출된 군인 주용을 연기한다. 강압적인 선임들과 말 안 듣는 후임 사이에서 하루 동안 주어진 주용의 외박은 악몽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폭력은 군대뿐만 아니라 주용의 가정에까지 드리워져 있다. 롱테이크로 주용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카메라에 노출된 채, 이가섭은 이 사회의 폭력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표현해낸다. 안정된 연기와 신선한 마스크로 영화의 톤을 잡아준 배우 이가섭을 만났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의 호평과 수상(한국경쟁부문 대상, CGV아트하우스상) 이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첫 주연작인데 지금 심경은.
=<폭력의 씨앗>이 스페인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감독님과 다녀왔다. 나로서는 모든 게 처음이다. 주연도 처음, 영화제 초청도 처음, 해외에 간 것도 처음, 너무 좋아하던 <씨네21> 인터
<폭력의 씨앗> 이가섭 - 내면의 불안이 드러나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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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사무국을 이끌고 있는 김광호 사무국장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만 12년을 몸담은 영화제 베테랑. “영화제가 정상화될 수 있다는 것을, 그동안의 투쟁과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22번째 영화제 준비에 총력을 기울이던 중 김지석 부집행위원장 겸 수석프로그래머라는 든든한 버팀목을 잃고 말았다. “김 선생님이 마치 ‘너희도 22살 성년이 됐으니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줘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아”서 마음을 흐트러뜨릴 수가 없었다.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이 직접 구상했던 아시아 독립영화인들의 네트워크 ‘플랫폼 부산’을 론칭한 것은 올해 영화제의 첫 성과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아시아 다큐멘터리 공동제작 대담, 지아장커 감독의 필름 메이커스 토크, 필름 펀드 토크 등 여러 의미 있는 행사를 진행했다. 김광호 사무국장이 “많은 아시아 독립영화인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또 그들이 자체 프로그램을 개발해 동반 성장할 수
김광호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장 - 올해의 목표는 영화제의 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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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신부의 행적을 기리는 추모 다큐멘터리’라는 설명은 <내 친구 정일우>를 포괄하기에는 한참 모자란다. 이 영화는 추모의 형식이 아닌 김동원 감독의 필모그래피의 한가운데 놓아 보아야 한다. 늘 대상과의 스킨십을 중시해온 감독은 그것이 불가능해진 상황 앞에서 4명의 화자와 기억을 더듬는 방식을 취한다. 나의 기억을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비교, 대조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동 기억 쓰기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정일우 신부에 관한 완성된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끊임없이 쓰이는 다큐멘터리다. 매체 인터뷰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개봉을 결정했던 감독은 인터뷰 장소에 들어서자마자 계약 위반임을 강조했다. 더군다나 5개월 예정의 남미 여행을 앞둬 마추픽추와 티티카카를 그리는 감독에게 신촌의 한 카페 안은 너무도 좁아 보였으리라. 인터뷰 내내 “신부님이 도와준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했던 김동원 감독은 정일우 신부를 생각하다가 잠시 촉촉해진 눈가를 슬쩍 닦
<내 친구 정일우> 김동원 감독, "정일우 신부님이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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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드>에서 오승훈은 연극 <언체인>의 주연으로 발탁된 버릇없는 톱 아이돌 영우를 연기한다. 영우는 베테랑 연극배우 재하(박성웅)를 만나 연기에 재미를 느끼고 그와 겁 없이 사랑을 나눈다. 고등학생 때까지 농구선수로 뛰다가 20살이 넘어 새로운 길에 도전한 오승훈은 드라마 <피고인>(2017), 연극 <나쁜자석>(2017), <렛미인>(2016) 등으로 연기의 재미를 맛보았고, 영화 데뷔작 <메소드>로 강렬한 신고식을 치른다. 배우로서의 신조는 “스스로에게 떳떳하자”. <메소드>의 문을 여는 알 파치노의 말, “오로지 진실할 뿐이다. 거짓을 말할 때조차도”라는 문장이 자연히 떠오른다.
-<메소드>로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을 걸었다.
=생애 첫 레드카펫이었다.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을까? 이 환호 소리 중에 나를 향한 소리도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고,
<메소드> 오승훈 - 치명적인 매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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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로 읽을 때와 재하(박성웅)와 영우(오승훈)가 키스하는 광경을 직접 볼 때 느낀 감정이 많이 달랐다.” <메소드>에서 윤승아가 연기한 희원은 대학로에서 메소드 연기로 유명한 배우 재하의 오랜 연인이다. 재하가 연극 작업을 함께하게 된 후배 배우 영우와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면서 재하, 영우 두 남자 사이에서 서사의 균형을 위태롭게 유지하는 역할이다. 주로 드라마에서 밝고 귀여운 면모를 보여주었던 까닭에 배우로서 좀더 큰 욕심을 내고 싶은 상황에서 만난 <메소드>는 윤승아에게 “배우 인생의 터닝포인트” 같은 작업이라고 한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봤나.
=힘주고 봐서 목에 담이 온 것 같다. (웃음) 촬영 마지막 날, 스탭들과 함께 ‘조금 더 찍으면 안돼?’라는 말이 나올 만큼 호흡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작품을 만나기 쉽지 않은데.
=한번도 없었으니까.
-희원은 남자친구인 재하가 상대역인 영우와 가까워지는 모습을 지
<메소드> 윤승아 - 나를 보여준다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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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박성웅이 주로 보여준 캐릭터는 눈에 힘준 인물이었다. 장르영화 속 악역이거나 센 캐릭터이거나. 평소의 그가 유머러스하고, 장난기 많으며, 솔직하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만 알 뿐이다. <메소드>에서 박성웅이 연기한 재하는 배역에 몰입해 연기하기로 정평이 난 연극배우다. 연기에 관한 한 강한 신념을 가진 그는 아이돌 스타 영우(오승훈)와 함께 연극을 준비하다가 배역의 감정에 휩쓸려 사랑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실제 모습과 닮은 구석이 많은 캐릭터인 데다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설정인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인 까닭에 재하는 박성웅에게 “도전”이었다.
-영화는 어땠나.
-빡빡하게 진행됐던 촬영 상황과 현장 환경 등을 고려했을 때 아주 만족한다.
-재하는 박성웅의 실제 모습 중에서 솔직하고 부드러운 면모와 닮은 구석이 많던데.
=하하하. 역시 아는 사람은 안다니까.
-악역이나 센 캐릭터를 주로 맡아온 까닭에 출연 제안이 들어왔을 때 반가웠을 것 같다.
=너무 해
<메소드> 박성웅 - 솔직하고 부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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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아와 영화에서 연인 사이고, 얘(오승훈)와 키스 신도 찍었는데 뭘. (웃음)” 사진기자가 박성웅에게 “얼굴을 윤승아씨와 오승훈씨쪽으로 좀더 가까이 다가가줄 수 있나”라고 요청하자 박성웅은 선뜻 포즈를 취한다. 부산국제영화제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서울에 올라온 까닭에 호흡이 척하면 척이다. <메소드> 촬영 마지막 날, 배우와 스탭들이 “한달 더 찍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던 것도 “팀워크가 좋았던 덕분”이다. 11월 2일 극장 개봉하는 영화 <메소드>는 메소드 연기로 정평이 난 배우 재하(박성웅)와 아이돌 스타 영우(오승훈)가 연극을 작업하다가 서로에게 이끌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재하의 오랜 연인 희원(윤승아)은 둘의 관계를 불안해하며 지켜본다.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영화와 달리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세 배우는 마치 친남매 같다. 다음 장부터 세 배우의 <메소드> 작업기를 전한다.
<메소드> 박성웅·윤승아·오승훈 - 연기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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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여자. 2049년의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하는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아나 데 아르마스가 연기하는 조이는 월레스사가 프로그래밍한 ‘꿈의 안드로이드’다. 개봉 전, 조이는 ‘블레이드 러너 K의 연인’ 정도의 인물로 알려졌는데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고 나면 제작진이 왜 조이에 대한 설명을 꺼렸는지 알 수 있다. 그녀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놀라움 중 하나다. 매 순간 자유자재로 겉모습을 바꾸며 사용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조이는 매력적인 인공지능이다.
<블레이드 러너 2049>를 통해 드니 빌뇌브의 세계로 걸어들어온 아나 데 아르마스는 올해 서른살인 쿠바 출신 여자배우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영화의 오디션을 보는지도 알지 못한 채, 오디션에서 또 다른 SF영화 <엑스마키나>의 한 장면을 연기했다고 한다. 아나 데 아르마스의 매력은 이국적인 외모와 신비로움, 그리고 강인함에 있다. 아나 데 아르마스
<블레이드 러너 2049> 아나 데 아르마스 - 당신이 꿈꾸던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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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가 어려울 때도 참가자 수는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 오는 10월 14일부터 17일까지 부산 벡스코 전시홀에서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필름마켓의 김형래 실장은 활발한 거래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특히 필름마켓이 주관하는 행사 중 올해로 3회를 맞는 엔터테인먼트 지적재산권(E-IP)마켓의 ‘북투필름’과 ‘E-IP 피칭’은 각각 원작 소설 9편과 웹콘텐츠 IP 9편을 선정해 피칭 행사를 연다. 업계의 지속적인 관심을 반영해 추천제로 운영하던 ‘E-IP 피칭’을 올해부터 북투필름과 함께 공모제로 전환하기도 했다. 김형래 실장은 마켓 기간에 외부 행사가 많아진 점이 올해의 변화라고 강조한다. 바른손(주)과 영화제가 협업한 ‘VR 시네마 in BIFF’ 포럼 행사와 필름펀드 토크, 올해 발족한 저작권해외진흥협회(COA)가 주관하는 저작권 관련 포럼도 마켓 기간에 함께 열려 참가자들이 영화 관계자들과 만날 수 있다. 이는 모두 아시아필름마켓이 일종의 플랫폼으로서 영화화가 가능한
김형래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필름마켓 실장 - 마켓을 넘어 하나의 플랫폼이 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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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택 감독의 세계에서 어머니는 변방의 존재다. 이제껏 부자(父子) 관계(<똥개>(2003), <미운 오리 새끼>(2012))를 포함해 남성들의 연대와 균열을 주로 그려온 까닭에 어머니는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다(심지어 전작과 스타일이 여러모로 달랐던 최근작 <극비수사>(2015)조차도 두 남자(김윤석, 유해진)의 공조 수사를 그린 작품이었으니까). 곽경택 감독의 13번째 장편영화 <희생부활자>는 ‘희생부활자’(RV)라는 비현실적인 설정 때문에 관객과 머리싸움을 치열하게 벌이는 장르영화인 줄 알았는데, 진한 모성애를 담아낸 ‘곽경택판 <죄와 벌>’이었다. 예기치 못한 사고 때문에 죽임을 당했던 어머니 최명숙(김해숙)이 어느 날 갑자기 되살아나 집으로 돌아온 뒤, 아들 진홍(김래원)에게 칼을 들고 달려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론시사회가 끝나자마자 만난 곽경택 감독의 얼굴은 오랜 편집을 드디어 마무리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무척
<희생부활자> 곽경택 감독, "어머니를 얘기하다보니 감정이 원초적으로 변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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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박인환, 나문희 부부로 출연.’ 1998년 <조용한 가족>의 개봉에 부쳐 탤런트 나문희의 스크린 진출은 일간지의 주요 소재였다. 1961년 MBC 라디오 1기 공채 성우로 데뷔, 드라마 배우로 각인됐던 나문희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조용하지도 않을뿐더러 이상한 아웃사이더가 모인 ‘조용한 가족’. 정리해고 당한 아버지가 개업한 산장에는, 만화책 보며 뒹구는 삼촌(최민식), 폭력 전과를 둔 아들(송강호), 얌전한 척만 하는 큰딸(이윤성), 그리고 기기묘묘한 어린 딸(고호경)이 있었고, 나문희는 오합지졸 가족들을 규합하는 유일한 잔소리꾼 어머니였다. 코믹과 스릴러가 교배된 <조용한 가족>은 김지운 감독을 알린 작품이자 돌아보면 배우 캐스팅 조합이 기적에 가까웠던 작품이지 싶다. 당시 <씨네21>이 주최한 제1회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작이었고, <아이 캔 스피크>의 공동 제작사인 명필름의 세 번째 제작 작품이었다. 부러 연기하지 않아도
<조용한 가족> 나문희 - 여전한 그 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