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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소수자들의 악몽이다. 건강하고 총명한 아이들은 팔이나 다리가 하나 부족하다는 이유로 유치원 입학을 거절당하고, 사내들은 직장인 아내가 차려준 아침밥을 꼬박꼬박 얻어먹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임금도 받지 못한 채 구타에 시달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출근길 지하철 옆자리는 종종 비어 있으며, 기업들은 ‘키 160cm 이상, 몸무게 50kg 이하’라는 항목을 구직란에서 지우지 않는다. 심지어 이 나라의 학생들은 대학에 가야만 사람 취급을 받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 제작한 <별별 이야기>는 이처럼 우리 곁에 당면한 인권문제를 손에 쥐고 여섯명의 감독들이 어우러낸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이다. 지난 2003년 제작된 <여섯개의 시선>이 다분히 성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였다면, <별별 이야기>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인권위의 고민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6개의 단편들이 구사하는 기법과 소재는 다양하다. <강아지 똥>(2
옴니버스 인권 애니메이션, <별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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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사랑이 변한다고 믿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너는 내 운명>은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가 던진, 사랑은 변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읽힌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둘의 믿음은 한결같고 전혀 흔들리는 법이 없다. 극중 은하의 말투를 흉내내서 이렇게 되물을 수 있을까.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고? 진정? 그런데 박진표 감독은 허진호 감독의 맞은편에서 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은수가 볼 수 없는 지점에서 답한다. 사랑이란 두 개인 사이의 일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 사는 두 개인 사이의 일이라는 게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지점이고 입장이다.
목장에서 젖소를 키우는 석중(황정민)은 은하(전도연)만 좋아하는 순정의 남자다. 은하를 쉬게 하기 위해 티켓을 끊고, 아예 커피까지 타준다. 정말 쉬게 해주겠다는 거다. 진정? 진정 그렇다. 석중은 남자들 무의식 깊숙이 잠복해 있는 순정을 호명한다. 그러나 감독은 예리하게 그 순정의 한
사랑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너는 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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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랑이란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하자, 영화 <고백>(L’accompagnatrice)의 주인공 소피는 무심히 대꾸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난 늘 혼자였어.” 만약 토니 타키타니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이치카와 준 감독의 <토니 타키타니>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원작에 쓴 첫 문장을 첫 내레이션으로 삼는다. “토니 타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정말 토니 타키타니였다.” 일본식 성에 미국식 이름을 덧붙인 그 별난 이름은 주인에게 고립의 운명을 점지한다.
영화의 프롤로그는 토니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한 주석이자 아버지 쇼자부로(잇세 오가타) 반생의 요약이다. 재즈 트롬본 주자 쇼자부로는 상하이에서 춤의 스텝을 밟듯 청춘을 보낸다. 포로수용소에서조차 사형을 면하고 귀국한 그는 전쟁이 그를 고아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결혼한다. 그러나 허약한 여인은 아들을 낳고 사흘 뒤 숨진다. 정교한 모래성
편재하며 영속하는 외로움의 연대기, <토니 타키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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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영화를 재미있게 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원전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 그러나 무슨 영화가 패러디될지는 전혀 모르고 볼 것. 고로, <무서운 영화> 제3탄을 기다려온 이들에게 이하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바란다.
비오는 밤, 가슴 큰 두 금발 미녀(그중 하나는 파멜라 앤더슨이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TV를 보고 있다. “TV는 질색이야. 머리 아프거든.” “전자파 때문에 그래. 뇌세포가 죽는다고.” 구시렁거리던 두 사람, 갑자기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댄다. 이유인즉 전자파가 실리콘을 축소시킨다는 것. 한바탕 난리를 떨고 가까스로 TV를 끈 그녀들. 자못 심각해져, 보고나면 전화가 온다는 이상한 비디오테이프에 대해 얘기한다. 그때 갑작스레 울리는 전화벨 소리. 패러디영화의 아성, <무서운 영화>의 세 번째 문이 열린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와 <스크림> <엑소시스트
패러디영화의 아성, 그 세번째 문, <무서운 영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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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서 종려나무는 기다림의 상징이었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환영하던 군중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이 종려나무 가지라고 했다. 폭풍우로 배가 표류하게 되자 며칠을 머무르면서 봉애(조은숙)와 정순(김유미) 모녀의 도움을 받았던 최 선장(이경영)이 하룻밤을 보낸 정순에게 꼭 돌아오마며 두손에 쥐어준 것도 작은 종려나무 한 그루다. 종려나무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수난의 시작을 알리는 고통의 나무이기도 했다. 정순이 받아든 종려나무 한 그루가 숲을 이룰 때까지, 끝내 돌아오지 않았던 최 선장은 정순에게 고통이고 괴로움이다.
그 하룻밤으로 태어난 딸 화연(김유미)은 언젠가는 종려나무 숲을 없애버리겠다며, 한마디 약속에 평생을 기다림으로 보낸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젊고 유능한 변호사로 거제도 조선소에 오게 된 인서(김민종)가 자신에게 사랑을 느끼고 결혼을 약속할 때도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종려나무숲에 얽힌 봉애와 정순의 사연을 고스란히 껴
옛이야기가 지닌 담백함의 미덕, <종려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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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사랑을 택했던 소녀, 그녀가 사랑에 실패하고 이미 어색해져버린 우정으로 다시 돌아오는 시점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사랑과 우정을 두고 지지부진하게 갈등하다 끝나는 멜로영화들에 비해 이 영화의 시작은 우선, 신선하다. 엄연히 성인인 20대 여성을 소녀라 부르는 것이 못내 어색하지만, 영화 속 그녀들은 아무리 보아도 소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다소 엉뚱하긴 하지만, 이 영화의 핵심은 그녀들의 어색한 만남이 아니라 그녀들이 여전히 ‘소녀’라는 데 있다. 연령으로는 분명 성인이나 아직도 부서질 듯한 감수성 속에서 파릇파릇 자라는 두 인물. 사랑을 끝낸 그녀들이 다시 만나는 순간도, 나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요정 같은 그녀들도 싱그러운 건 분명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이 이 영화의 전부이다.
사실, 영화 속 두 여성은 편의점 아르바이트, 개와 산책하는 아르바이트 등의 잡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친구 집에 얹혀사는 신세이다. 그녀들에게는 뚜렷한 꿈도 없어 보
지나치게 착하고, 지나치게 예쁜 멜로 영화, <개와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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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소년이 도시에 홀로 버려진다면 어떨까. 더욱이 오랫동안 숲에서 익힌 빠른 몸놀림으로 이종격투기 선수가 된다면. <더 독>은 미국 땅에 버려진 중화의 늑대소년을 등장시킨다. 주인공 대니(이연걸)는 이중성을 가진 존재다. 그가 가진 소년의 순수함과 늑대의 강인함이 전환되는 기폭장치는 바로 개목걸이다. 목걸이가 풀리는 순간 그는 숲의 늑대로 돌아간다. 깊게 팬 주름이 거슬리지만 눈빛을 보면 이연걸에게 대니는 적역이다. 42살의 이연걸은 더이상 토니 자처럼 날아오를 수는 없지만, 속도감 넘치는 정권을 중심으로 한 손동작은 여전히 발군이다. 특히 거장 무술감독 원화평이 설계한 화장실 격투장면은 이연걸의 전광석화 같은 팔꿈치 공격과 폐쇄적인 공간이 어우러져 독특한 액션 미학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대니는 어렸을 때부터 불한당인 바트에 의해 사육된다. 바트(밥 호스킨스)는 대니를 개처럼 기르면서 해결사로 써먹는다. 평소처럼 바트를 따라나선 대니는 우연히 시각장애인 피아노 조율사인
이연걸의 독특한 액션 미학, <더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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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버스 퀴어 멜로물인 이 영화는 특히 남성 동성애에 집중하면서, 보길도라는 공간과 동백꽃이라는 소재로 단단하게 묶여 있어, 구성상의 통일성 결여라든가 주제끼리의 충돌과 같은, 옴니버스 구성이 빠지기 쉬운 함정들을 잘 피해나간다. 게다가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안 되었던지 택시 운전사 진욱이 각 작품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영화를 여는 첫 번째 작품은 최진성 감독의 <김추자>이다. 고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만나 사랑했던 두 남자가 원치 않게 헤어져 9년 만에 재회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김추자는 왕근의 딸 이름이기도 하고, 그의 연인이었던 춘하가 늘 입에 달고 다녔던 노래들을 부른 가수이기도 하다. 왕근은 연인에 대한 기억을 딸 이름에 아로새김으로써 여전히 옛사랑과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영화는 소문준 감독의 <떠다니는, 섬>인데, 여기서 ‘섬’은 보길도를 지칭하는 지리적 이름인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는 섬이 있다’의 그 섬이기도 하다. 둘
옴니버스 퀴어 멜로물,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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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마루는 ‘거칠다’와 ‘높은 곳’을 뜻하는 우리말 ‘마루’를 합한 것이니 직역하면 ‘거침없는 고수’쯤 된다. 거칠마루는 무협사이트 무림지존닷컴의 최고실력자다. 나 홀로 무술을 단련하는 이들은 온라인 위에서 글로만 떠다니는 그를 동경하는 동시에 의심한다. 오프라인의 육체는 그의 글처럼 정말 고수일까, 그의 인격은 무술만큼 빼어날까. 마침 거칠마루가 자신을 드러내겠다며 8명의 무술인들을 선택해 강원도 오지로 초대한다.
거칠마루와의 멋진 대련을 꿈꾸며 캠핑카에 오른 이들이 진짜 무술인들이라는 건 이 영화의 큰 개성이다(직업연기인은 천장지구 역의 성홍일 한명이다). 택견, 우슈, 씨름, 무에타이 등을 연마하며 챔피언 타이틀을 고루 나눠갖고 있는 이들에게 와이어 액션이나 스턴트 대역은 불필요할 것이다. 실제 무술인들이 실제에 가까운 날것의 무술을 예고하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거칠마루>는 영화의 본령으로 돌아간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글과 말로만 떠다니는 거칠마루의 불투명한
고매한 무술의 세계, <거칠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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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수년 전만 해도 <빛나는 거짓>만큼이나 불친절하고 낯선 스타일의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독립디지털장편영화제작지원 및 배급지원에 힘입어 단관개봉이나마 비로소 극장에서 빛을 보게 된 <빛나는 거짓>은, 안 된 이야기지만 만인을 위한 영화는 결코 아닐뿐더러 그렇다고 해서 일부의 열광적인 지지를 끌어낼 법한 그런 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의 연출자인 채기는 개개의 숏 하나하나에 부여된 엄격함과 독자성이 두드러졌던 실험적인 단편 <애절한 운동>과 <빛 속의 휴식>, 좀더 추상적인 시각적 실험을 시도해본 <목록> 연작 등으로 그간 한국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아왔던 인물이다.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인 <빛나는 거짓>은 스스로가 그간의 단편작업을 통해 보여주었던 영화적 실험을 좀더 긴 호흡으로 담아내고 확장시키려는 시도이다.
채기의 단편 <애절한 운동>에
사적이고 시각적인 일기, <빛나는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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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본때를 보여주마. 그게 바로 나다. 여기는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나라니까.” 묵시록적인 도시의 이미지들에 섞여 들려오는 폴 제프리(존 딜)의 무시무시한 다짐의 목소리다. 그는 감시 카메라를 비롯하여 각종 기기들을 장착한 개조 차량을 몰고 거리를 쏘다니며 목표물을 찾고, 터번을 쓴 아랍인만 보면 테러리스트 용의자로 취급하며, 그들이라면 세탁물 세제로도 폭탄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의심하며 뒤를 쫓는 전직 특수부대원 출신이자 과거의 망령으로 얼룩진 과대 피해망상의 애국주의자다. 그의 전화벨 소리조차 미국의 국가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다시 내 집, 내 조국으로 인도해주셔서…. 오래 떨어져 있어서 낯설지만, 돌아와서 기쁩니다.” 폴 제프리가 미국의 안존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혹은 그렇거나 말거나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말하는 그때, 멀리 이스라엘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들어
혼돈의 땅, 미국에 보내는 편지, <랜드 오브 플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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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만파운드 상당의 마약을 둘러싸고 정신나간 갱단, 세르비아 민병대 출신들, 마약 도매상, 판매책, 중개상, 그리고 또 여러 세력들이 어지럽게 뒤얽힌다. 게다가 배경이 영국이라면, 어떤 영화가 떠오르지 않나.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를 연상케 하는 <레이어 케이크>는, 아니나다를까 이 두 영화의 프로듀서였던 매튜 본의 감독 데뷔작이다. 하지만 초록은 동색이라는 속담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다. <레이어 케이크>는 영국 범죄영화라는 장르의 궤도를 돌고 있지만 범죄와 범죄자들을 단지 얄팍한 영화적 재미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던 ‘영상 테크니션’ 가이 리치의 영화와 달리, 범죄라는 악의 고리에 사로잡힌 영혼들을 보여주려 한다.
끝끝내 이름이 밝혀지지 않으며 엔딩 크레딧에도 그냥 ‘XXXX’로 적힌 주인공(대니얼 크레이그)은 스스로를 갱스터가 아니라 ‘마약을 취급하는 비즈니스맨’이라 규정하는 인물이다. 그는 케임브리
범죄라는 악의 고리에 사로잡힌 영혼들, <레이어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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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작가 로알드 달은 어린아이처럼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개만 먹으면 코스요리를 맛볼 수 있는 풍선껌이나 녹지 않는 아이스크림, 민트로 이루어진 풀밭은 군것질거리에 애틋해하는 철없는 사람만이 생각해낼 수 있다. 아마도 로알드 달은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에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초콜릿과 캔디가 넘쳐나고, 공장의 주인이 창조자처럼 군림하며, 심술궂은 아이들을 마음대로 혼내줄 수 있는. 그러므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상상의 세계와 그 원천이 꿈처럼 녹아드는, 거친 손길이 그 둘을 분리하고자 한다면 생명을 잃고 시들어버릴, 완벽하게 고립된 창조물일지도 모른다. 이 고집 센 동화를 어떻게 다른 장르로 옮겨놓을 것인가. 그 자신 또한 기괴한 환상의 창조자이자 거주민인 팀 버튼은 그에게 어울리고 그만이 가능한 방법을 선택했다. 팀 버튼은 신이 나서 과자로 만들어진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어린아이처럼 초콜릿 공장을 건설했다. 천진하
광활한 상상의 세계, <찰리와 초콜릿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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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에 활동한 미국 복서 짐 브래독은 뉴욕의 설움 많은 아일랜드계 이주민 2세였다. 5남2녀가 바글거리는 집에서 태어나 갖은 잡역부 일로 가계를 돕던 그는 스물한살 되던 1926년에 라이트 헤비급으로 프로에 데뷔했다. 치르는 경기마다 초반에 KO승을 올리며 승승장구하다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패한 해가 1929년. 공황으로 모든 것을 잃고 오직 생계를 위해 싸웠는데 뭣 때문인지 그는 5년간 22전16패의 기록만 남겼다. 그러다 또 뭣 때문이었는지 기적처럼 재기했다. 햄 한 조각 먹지 못한 스물아홉의 체력으로 젊고 유망한 헤비급 복서들을 제쳐내더니 브래독은 1934년, 경기 중 몇명의 숨을 끊어놓았다는 챔피언 보유자와 맞붙게 됐다.
이 ‘뭣 때문인지’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영화 <신데렐라 맨>은 끈질기고 처절한 스포츠 드라마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정신병을 지닌 천재 수학자의 실화에서 아름다운 부부애와 노벨상 수상이라는 극적인 감동을 찾아내 영화 <뷰티풀
링 위의 힘겨운 투쟁, <신데렐라 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