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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제의 오페라로 더 잘 알려진 <카르멘>은 프랑스인 작가이자 고고학자였던 메리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사랑에 구속되지 않는 팜므파탈 카르멘, 그리고 그녀에 대한 호세의 집요한 사랑과 파멸은 엑조티즘과 맞물리면서 잘 팔리는 이야기로 자리잡았다. 19세기 메리메의 글에 매혹적 소재였던 스페인의 이 ‘비극과 사랑’은 21세기 영화에서 탐스러운 볼거리로 재림한다. 스페인의 메이저 프로덕션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영화 <카르멘>은 19세기 중반 스페인의 거리를 감각적으로 재현해낸다. 붉은 톤의 강렬한 화면은 사랑의 열정뿐만 아니라 대자연과 고대 유적, 투우, 스페인 미인들을 전시한다.
그리고 이 시선의 중심에 집시여인 카르멘(파즈 베가)의 몸이 있다. 영화는 작가 메리메의 분신일 프로스퍼(제이 베네딕트)에게 들려주는 호세(레오나르도 스바라글리아)의 회고담을 통해 카르멘에게 다가간다. 그곳에서 카르멘의 몸은 호세가 욕망하는 대상이지만 결코 소유할 수 없다. 그렇기 때
자아도취에 빠진 카르멘의 스페인, <카르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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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 듣고 예쁜 아내.’ 그건 남자들의 실로 오랜 꿈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그들의 꿈은 ‘돈도 잘 버는 말 잘 듣고 예쁜 아내’로 업그레이드된다. 그리하여 등장한 ‘슈퍼우먼 콤플렉스’. 더욱 피로한 인생을 살게 된 건 여자들이요 그 콤플렉스의 수혜자는 남자들이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다른 모든 조건은 기꺼이 발전시키면서도 오직 ‘말 잘 듣는 것’만은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아내들이 있다. 그러자 잘나가는 아내들에게 언제나 딸려오는 부록, 주눅든 남자들이 큰 맘 먹고 비굴한 혁명을 시작한다. 아이라 레빈의 소설을 영화화한 1975년의 <스텝포드 와이프>는 끔찍했지만, 2004년의 그것은 웃긴다. 공포 대신 코미디를 선택한 시도는 미리 말하자면 싱겁기 그지없는 오락영화로 귀결되었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방송사 사장 조안나 에버트(니콜 키드먼)는 단 한번의 억울한 사고로 해고를 당한다. 부사장이자 조안나의 남편이기도 한 월터(매튜 브로데릭)는 미련없이 사표를 던지고 조안나와 아
주눅 든 남자들에게 선사하는 백일몽, <스텝포드 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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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혜성같이 등장하여 광고계에서 갈고닦은 화려한 비주얼로 영화계의 ‘때깔’을 바꿔놓았던 일군의 감독들 중 선두주자는 단연 토니 스콧이었다. <탑건>이라든가 <악마의 키스> <폭풍의 질주> <트루 로맨스> <크림슨 타이드> 등으로 명성을 날렸던 토니 스콧은 90년대 중후반에 들어오면서는 방향을 잃은 듯했다. 토니 스콧보다 훨씬 스타일리시하고 야심만만한 신진감독들이 속속 등장했고, 90년대 후반에 내놓았던 <더 팬>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스파이 게임> 등의 액션스릴러들은 여전히 근사한 화면을 보여주지만 그에 걸맞은 내러티브의 개연성과 깊이를 잃은 채 표류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토니 스콧의 위치는 화려했던 과거에 비해 몹시 어정쩡해졌다. 그러던 차에 그가 <미스틱 리버>의 작가 브라이언 헬겔런드와 손잡고 A. J. 퀸넬의 하드보일드한 소설 <맨 온 파이어>를 영화화한다고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복수극, <맨 온 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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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 센스>(1999) 이후 반전(反轉)은 꽤 오랫동안 영화의 트렌드였다. <디 아더스> 같은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진 스릴러부터 충무로 호러와 멜로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막판 뒤집기’ 기술은 위세를 떨쳤다. 급기야 “이제 반전없는 호러를 보고 싶다”는 푸념까지 나왔다. 그동안 M. 나이트 샤말란은 무엇을 했던가? 웬만하면 우아한 환멸을 표하며 180도 다른 영화를 내놓을 법도 하건만 그는 <언브레이커블>과 <싸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빌리지>에 착수했다. 미친 발명가처럼 나사 하나를 비틀면 전체가 변형되는 기계 장치를 연신 고안했다. 물론 “돈이 되니까”라고 일축할 수도 있겠지만, 명예욕을 지닌 감독으로서 샤말란의 태도는 가히 저돌적이다. “반전 유행은 끝났다. 경찰 불러!”라고 외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빌리지>는 꿋꿋이 만들어졌다.(*주- 이하 기사는 스포일러로 간주될 수 있는 정보를 포함합니다).
‘언브레이커블’ 샤말란 스타일, <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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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내내 여름만 있는 나라에서 산다면 어떤 단어로 희망을 표현할 수 있을까. 늦가을에서 봄을 향해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는 <꽃피는 봄이 오면>은 정직한 제목 그대로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영화다. 겨울이 가고 나면 봄이 오겠지. 이를 악물지 않아도, 시간을 앞당기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면. <꽃피는 봄이 오면>은 이처럼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환희로 솟아오르는 기복없이 한 남자의 세 계절을 연필 스케치처럼 담담하게 담아내려 한다. 절망조차 하지 못하고, 체념만 웅크리고 있는, 지리멸렬한 인생. 그러나 밋밋하고 초라할 뿐이던 그 남자는 긴 겨울을 견디면서 봄을 봄으로 느낄 수 있는 에너지에 조금씩 연료를 더해간다.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현우(최민식)는 재능은 없어도 자존심은 있는 트럼펫 주자다. 돈을 위해 음악을 하면 안 된다고 믿는 그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밤무대에 서는 일만은 끝내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떠나보낸 옛
한겨울 탄광촌에서 봄을 발견한 남자, <꽃피는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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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감독과 배우의 욕망을 그물로 엮어낸다. 그러나 그 그물은 ‘내가 너의 욕망을 읽어주지’라고 말하며 사실은 자신의 욕망에 배우의 욕망을 꿰맞추는 위대한 감독의 손아귀 안에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배우에겐 고통을”이라는 어느 감독의 말에 덧붙여 이 영화는, 배우와 스탭의 고통을 통해 ‘감독에겐 창작의 환희를!’이라고 외친다. 감독과 배우의 욕망이 엇갈리면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의 묘한 숨막힘은 감독의 컷 사인과 함께 사라지고 스크린 위에는 오직 감독의 머릿속에서 정렬된 욕망이 자리잡는다. 이 영화는 <아메리카의 밤>에서 트뤼포가 보여준 영화에 대한 애정과는 달리 감독의 깐깐한 자의식과 욕망을, 심지어 창조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숱한 ‘못할 짓’들을 진지하고 유머러스하게 다룬다. 그 중심에는 여신 같은 감독과 ‘바보 같은’ 남자들이 있다.
감독 잔느(안 파릴로)가 자신의 자의식이 온전히 살아 있는 영화를 찍기 위해 수많은 난관을 뚫고 나가는 과정에서 그녀를 지탱하는 키
<팻 걸>의 제작과정 훔쳐보기, <섹스 이즈 코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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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출간된 쥘 베른의 소설 가 단숨에 수많은 소년 소녀들을 매혹시켰던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황당무계한 난제를 논리정연한 과학적 이성으로 격파해나가는 필리어스 포그라는 캐릭터가 안겨주는 신선함(마치 추리소설을 읽을 때와도 비슷한 쾌감), 그리고 서구 제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대영제국’ 신사의 눈을 통해 보는 세계 각국의 다채로운 스펙터클이 안겨주는 엑조틱한 즐거움 말이다.
이번에 <웨딩 싱어>의 감독 프랭크 코라치에 의해 영화화된 버전의 는 필리어스 포그(에서 매혹적인 주인공 토니 윌슨으로 등장했던) 대신 그의 하인 파스포트(성룡!)에게 비중을 두는 변화를 단행했다. 고향 마을을 지키기 위해 머나먼 유럽에서 동분서주하는 재치있는 파스포트가 바로 필리어스 포그의 세계일주 내기를 성사시키는 장본인이며, 위험천만한 여행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팀장 역할도 파스포트가 맡는다. 그에 따라 필리어스 포그는 원작에서처럼 냉정한 영국 신사의 전형적인
성룡표 ‘19세기 말 세계 기행문’, <80일간의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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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형통의 변론을 위해 여기저기 불려다니다가 아예 상투의 시장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말, ‘욕망’. 그것에 대해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이루어 소중하게 그려내는 희귀한 예가 바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이다. <나쁜 교육>은 그 욕망의 관계들을 자신만의 영화적 구조로 완전하게 집도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알모도바르의 신작이다.
촉망받는 영화감독 엔리케(펠레 마르티네즈)는 새 영화를 구상 중이던 어느 날, 누군가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는다. 지금은 앙겔(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라는 이름으로 배우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이그나시오로 불렸던 엔리케의 첫사랑. 새 영화에서 배역을 맡고 싶다며 찾아온 앙겔은 엔리케에게 시나리오 한편을 건네준다. 엔리케는 그것을 읽어내려가며 상상과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가톨릭 기숙사에서 엔리케와 이그나시오가 보냈던 혹독한 어린 시절, 그곳의 교장이었던 마놀로 신부와의 사건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시나리오에 매혹되어 영화를 만들어가던 중에
끝나지 않을 열정의 천일야화, <나쁜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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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꼭 네 집을 사야 한다.” 지긋지긋한 셋방살이를 마감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나는 아버지가 외아들 필기(차승원)에게 남긴 유언은 다름 아닌 ‘내집 장만’이었다. 버젓한 조선소에서 기사로 일하는 그가 야간엔 대리운전을 하며 ‘투잡스’ 대열에 낀 것도, 슈퍼마켓에서 부득불 10%를 깎아대는 알뜰한 생활을 한 것도 따지고보면 아버지의 유언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거제도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집을 장만하게 된 필기가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린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그 집에는 딱 한 가지 사소하다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으니, 그건 귀신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기가 아무리 ‘귀신 잡는 해병’ 출신이라지만 소파를 춤추게 하고 식칼을 날려보내며 ‘이 집에서 나가라’고 협박하는 귀신의 존재는 두려움 그 자체다. 피눈물 모아 애써 마련한 집을 귀신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한 필기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김상진 감독의 7번째 영화 <귀신이 산다>는 <
김상진표 코미디영화의 새로운 시도, <귀신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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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원년 MBC 청룡 어린이 회원이었던 나는 삼미 슈퍼스타즈를, 그들과 청룡이 맞붙는 날이면 한시름 놓았던 팀으로 기억한다. 나와 친구들은 웬만하면 지는 그 팀을 ‘삼미 슬퍼스타즈’라고 불렀던 것도 같다. 물론 페이소스 따위를 스포츠에서 구하기에 우리는 너무 어렸다. “약체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팬이라 좋은 것은 패배를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라고 자랑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쿨한 수필을 읽은 것도 훨씬 나중 일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열등생과 아웃사이더는 영화의 오랜 스타다. 그들의 성취담은 영화가 스토리라는 것을 갖게 된 이래 환영받는 소재였다. 이 테마에 대한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꾸준한 매혹은 약자의 반격을 그린 내러티브에 내장된 파괴력을 증명한다. 엄밀히 말해 <슈퍼스타 감사용>의 주인공 감사용은, 복원해야 할 실존 인물이라기보다 고전적 약자 히어로의 속성을 뭉뚱그린 일종의 기호다. 과연 <슈퍼스타 감사용>은 예고편부터
어느 꼴찌 투수의 찬란한 나날, <슈퍼스타 감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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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대원으로 복무했던 크리스 본(더 록)은 8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다. 그는 아버지의 제재소에서 일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제재소는 일손이 부족해서 이미 3년 전에 문을 닫았다. 새로 생긴 카지노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일은 하지 않고 술과 도박에만 빠져 지내고 있다. 친구들과 함께 카지노에 들른 크리스는 카지노가 속임수를 써서 이익을 늘리고 마약까지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카지노 주인 제리에게 매수당한 보안관은 크리스의 고발을 묵살한다. 분노한 크리스는 친구 랜디(조니 녹스빌)의 도움을 받아 자기 손으로 제리와 그 부하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한다.
<워킹 톨>은 낯익은 주인공과 스토리에 기대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원안이 된 1973년작 <워킹 톨>은 더티 하리처럼 총과 각목을 손에 쥐고 부패에 대항하는 보안관 버포드 푸서를 끌어들여 두편의 속편과 TV시리즈를 만들어낼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실존인물 버포드 푸서가 전직 레슬러라는 점을 생각한다
감정을 허용하지 않는 딱딱한 레슬러의 분노, <워킹 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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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비너스에는 마음의 상처를 방치한 채 익명 속에 숨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호텔의 웨이터 겸 손님들의 식사와 빨래를 책임지는 ‘초난’(구사나기 쓰요시), 한때 유능한 의사였으나 지금은 알코올 중독인 ‘닥터’(가가와 데루우키)와 그의 ‘와이프’(나카타니 미키), 꽃가게 주인이 꿈인 ‘소다’(조은지), 킬러 흉내를 내는 ‘보이’(이준기), 그리고 이들을 묵묵히 지켜보는 호텔 주인 ‘비너스’(이치무라 마사치카)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가이’(박정우)라는 남자와 ‘사이’(고도희)라는 소녀가 호텔을 찾아오면서, 각자의 시간들은 서로 부대끼며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생기없는 초난의 시선을 통과한 호텔 비너스에서 시간의 흐름은 마치 부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빛바랜 화면은 사람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바닥을 보여주기를 반복한다. 바닥은 계속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과도하게 분절된 숏들은 탭댄스의 리듬을 타고 따끔거린다. 시간은 고여 있거나 지속성을 지니지 못하고,
초난강식 소통을 위한 실전 가이드, <호텔 비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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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말해두자면 <시크릿 윈도우>에서 스릴러의 만듬새 자체는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어떤 결말이 유도될지 피해자 모트 레이니(조니 뎁)와 가해자 존 슈터(존 터투로)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정도는 중반 즈음에 쉽게 눈치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이곳저곳에 묻어나는 원작자 스티븐 킹의 체취와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의 대성공으로 블록버스터계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 또다시(!) B급 정서로 돌아온 조니 뎁의 원맨쇼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과 영화들)을 사랑하는 이라면 <시크릿 윈도우>를 보는 내내 전작의 흔적들을 비밀스럽게 만끽하며 즐거운 상상을 거듭할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가 고요한 호숫가의 표면을 훑다가 창문을 통해 외딴 오두막집으로 넘어들어가 쓰다만 문장이 깜빡거리고 있는 노트북 화면으로, 그리고 거울로 다가가 소파에서 자고 있는 작가 모트 레이니를 보여주는 긴 오프닝 시퀀스
B급 정서로 돌아온 조니 뎁의 원맨쇼, <시크릿 윈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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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물리적인 공간이 있다. 그리고 이곳을 두고 두개의 상충하는 관점이 존재한다. 이것을 평화롭게 유지시키는 것은 수용소의 담벼락 같은 것들이다. 이 담장을 넘고 관점을 넘어 두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관찰자의 시점이 있다. 그리고 얼마 뒤 두 세계관이 부딪쳐 굉음을 내고 폭발한다. 이때, 대조와 명암이 분명한 카니발의 생명력과 광휘가 엿보인다. 이상이 구조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묘사하면서도 언뜻 판타지처럼 보이는 남미 리얼리즘의 전통이다. 헥터 바벤코는 <거미여인의 키스>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수용소의 장벽을 사이에 두고 관점과 관점 사이를 넘나드는 남미 스타일 전통의 시각적 쾌감을 사랑한다.
브라질 최대 도시 상파울루의 도심에 자리한 남미 최대의 교도소, ‘카란디루’의 정원은 3500명, 실제 수용인원은 7천명이다. 열악한 환경과 물리적 통제불능 상태에 빠져 이 대형 감옥 안에는 마약 거래와 에이즈가 창궐한다. 그리고 1992년 폭동이 일어난다. 진압과정에서 111명의
‘그곳에도 인간이 살고 있었네’, <카란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