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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더이상 이 세상에, 혹은 그 어느 세상에도 그가 부재한다는 깜깜한 절망감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세계 어딘가에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면, 살아남은 자는 견딜 수 있다. <화이트 노이즈>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죽은 자의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다. 그런데 죽은 이의 음성은 산 자의 꿈이나 무당을 통해 들려오지 않는다. 그것은 괴기한 형상과 목소리로 컴퓨터와 라디오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기록과 녹음을 통해 분석되는 죽은 자의 소식. 그것은 더이상 낭만적이거나 반갑거나 슬프지 않고 다만 소름끼친다.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존(마이클 키튼)은 어느 날부터인가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자동응답기와 라디오를 통해 음성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컴퓨터 모니터에 흐릿한 형상으로 나타나 죽음의 위협에 당면한 사람들을 도우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 영화에서 존을 죽은 자와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
현대 과학기술의 무서운 힘, <화이트 노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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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온다고 불평하는 남자를 여자가 위로한다. “누구나 가끔은 잠 못 이뤄.” 그녀를 향해 돌아누우며 남자가 말한다. “나는 1년 동안 못 잤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고갱이 그린 예수처럼 여윈 몸과 움푹 팬 눈자위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고 증언한다. 원인 모를 장기적 불면에 시달리는 기계공 트레버 레즈닉 역의 크리스천 베일은 185cm의 몸을 55kg까지 감량했다. 체중조절도 이쯤 되면 스턴트다. 원래 깡마른 배우를 쓰는 편이 쉽지 않았을까? 하지만 <머시니스트>는 관객으로 하여금 “사람이 어쩌다 저렇게 망가졌을까?”라고 절실히 묻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영화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객이 평소 모습을 기억하는 스타가 필요하다.
밤새 깨어 있는 트레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지 않을 때면, 공항 24시간 커피숍의 웨이트리스 마리아(아이타나 산체스 지온)와 창녀 스티비(제니퍼 제이슨 리) 곁에서 안식을 구한다. 일터에서 그는 노동법을 거론할 만
영화광이 조립한 공포 기계, <머시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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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아웃>은 필립 카우프만의 연출 작품이다. 그가 만든 <외계의 침입자>(1978)나 <필사의 도전>(1983)은 수준급이다. 그는 할리우드 대중주의와 장인의 연출력을 능수능란하게 교합하는 것으로 인정받을 만한 감독이다. <블랙아웃>은 노련한 그 장인의 손길이 스릴러 장르에 미쳤다는 점에서 흥미를 자아낸다. 게다가 새뮤얼 잭슨, 애슐리 저드, 앤디 가르시아로 엮은 삼각편대는 기대할 만한 배역진이다. 영화에서 그들의 연기는 훌륭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나쁘지는 않다. 문제는 영화의 방만한 구조다.
제시카(애슐리 저드)는 끔찍한 사건으로 부모를 잃은 나쁜 과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자 경찰계의 대부인 존 밀스(새뮤얼 잭슨)의 도움을 받아가며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샌프란시스코 강력계 경관이 된다. 시기의 눈총들이 거세지만 제시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른 남자들과 달리 동료 경찰 마이크(앤디 가르시아)만은 그녀를 이해
방만한 구조의 스릴러 영화, <블랙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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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은 빚을 대신 받는 청부업자가 영화제작에 뛰어드는 코미디 <겟 쇼티>의 속편이다. 10년 만에 제작된 이 영화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조지 클루니의 표적> <재키 브라운> 등에 재료를 제공한 작가 엘모어 레너드의 소설에 기대고 있다. 그렇다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들이닥치는 난관, 궁지에 몰려도 냉정한 주인공, 하나씩 장애물을 격파하는 묘기. 또 한번 존 트래볼타를 기용한 <쿨!>은 그런 공식에 충실하고자 한다.
빚받으러 LA에 왔다가 영화제작자가 된 갱스터 칠리(존 트래볼타)는 쓸데없이 속편이나 강요하는 할리우드에 염증을 느껴 영화판을 떠나려고 하고 있다. 때마침 친구 토미(제임스 우즈)가 러시아 마피아에게 살해당하자 칠리는 미망인 이디(우마 서먼)를 도와 파산 직전이었던 토미의 음반사업에 뛰어든다. 그가 발견한 신인은 악덕 매니저에게 붙들려 고생 중인 린다 문(크리스티나 밀리언). 칠리는
<겟 쇼티>의 속편, 이번에는 음반시장이다, <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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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발만 떼도 하늘이 뱅뱅 도는 어지럼증을 앓고 있는 엄마(고두심)는 수십년째 해남 땅을 벗어난 적이 없다. 막내딸(채정안)의 결혼날짜가 다가오자, 엄마의 한숨은 깊어간다. 목포 시내에서 열릴 결혼식에 무슨 수로 참석한단 말인가. 젊어서 사별한 남편은 아내의 꿈길에 찾아와 능청맞게 등을 긁어달라 하고는, 걸어서라도 막내 결혼식에 꼭 가라는 당부를 전한다. “밥 있제? 밥 좀 도라.” 잠에서 깬 엄마는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며칠은 족히 걸릴 긴 여정에 몸을 싣는다.
몇해 전 <인간극장>에 소개된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었다는 <엄마>는 ‘엄마가 가는 길’이 주인공인 영화다. 치명적인 어지럼증을 극복하고, 엄마는 어떻게든 딸의 결혼식장에 당도할 것이다. 설령 그 길이 악명 높은 월출산 구름다리로 이어져 출렁거리고, 비바람이 몰아쳐 시야가 막히고 걸음을 내딛기 힘들어도, 걱정된답시고 따라나선 자식들이 저희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꼴을 보는 일이 있어도
정서적으로 다가가는 길 위의 드라마,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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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티 댄싱2>는 한물간 무용수들의 재기담이다. 천재 안무가 알렉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무용단은 추모공연을 계획한다. 한번도 세상에 내보이지 못했던 알렉스의 작품 <침묵의 몸짓>을 소화해낼 수 있는 무용수는 초기 멤버였던 크리사(리사 나이미)와 트래비스(패트릭 스웨이지), 맥스(조지 드라 페나)뿐. 7년 전 <침묵의 몸짓>을 연습하던 중 사고로 뿔뿔이 흩어졌던 세 사람은 다시 한번 도약을 꿈꾸며 연습실에 모인다. 하지만 지난날의 용병들은 늙고 지친 몸과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남몰래 트래비스의 아이를 키워온 크리사와 스스로의 에고로 가득한 트래비스는 ‘파르되(주인공들의 2인무)’를 온전히 소화할 수 없고, 맥스는 늙은 무용수로서의 육체적인 한계에 다다른다. 세 사람은 과거를 극복하고 또다시 무대 위에서 만개할 수 있을까.
<더티 댄싱2>는 낡은 퇴물들이 또 한번 생의 빛나는 순간을 맞이하는 과정에 대한 영화다. <열정의 무대
한물간 무용수들의 재기담, <더티 댄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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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를 넘긴 여성들의 최대 고민은 무엇일까. 성적 욕구? 경제적 독립? 사랑? 현실에서는 결혼이 이 세 가지 고민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가장 안전한 길이라 인식되지만, 사실 결혼은 이 모두를 불만족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모든 고민을 해결해줄 동화 속의 왕자님이 결코 존재할 수 없음에도 여전히 그 왕자님과의 결혼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수많은 그녀들의 이야기에는 성과 경제와 결혼이 함께 붙어다닌다. 그것이 과장된 성 그 자체만 존재하는 남성 중심적인 ‘침대 이야기’들과 다른 점일 것이다. 역시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영화의 내용은 여성의 성이 아니라 위의 고민을 한번에 해결하려는 여성들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들로 채워진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갑작스런 독립을 하게 된 세 여성들. 그녀들에게는 480유로와 낡은 차 한대뿐이다. 부동산을 전전하지만 그 돈으로는 마땅한 집을 찾을 수 없다.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보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결국 그
싱거운 신데렐라 성공담, <걸스 온 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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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라2>의 영어 제목은 도덕적 죄를 뜻하는 ‘The Sin’이다. 타이어 제목 또한 ‘불륜’ 혹은 ‘간통’을 의미한다. 미리 말하면, <잔다라2>는 <잔다라> 속편이 아니다. <잔다라>는 적나라한 성애묘사로 1966년 출판죄자 곧 판금됐던 타이의 소설. 2001년 흥행감독 논지 니미부트르의 동명의 영화 또한 검열위원회의 3심을 통해서야 개봉 허가를 받아냈을 정도로 뜨거운 문제작이었다. 한국에서 개봉한 몇편의 타이영화 중 <잔다라>는 종려시의 육체를 앞세운 탓에 제법 인지도가 있는 편. 그런 후광을 빌리기 위해서였을까. 타이엔 없는 타이영화 <잔다라2>가 한국에서 개봉하게 됐다.
재밌는 건 수입사가 제멋대로 붙인 제목이지만, 내용이 턱없이 다르진 않다는 점. 영문 모르면 현대판 버전 혹은 속편이라고 믿을 법도 하다. <잔다라>에는 매맞고 자란 저주받은 아들 잔이 커서 아버지의 둘째부인 분령과 정을 통
<잔다라>의 가짜 속편, <잔다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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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USA 선발대회는 1편에서 끝났다. 다시 미인대회에 나갈 수는 없을 테니, 샌드라 불럭이 반짝거리는 보석에 명품 핸드백을 들고 미모를 뽐낼 기회는 없어진 것일까? 그럴 리가. <미스 에이전트> 때 기미를 보인 샌드라 불럭의 공주병 증세가 본격적으로 개화한다. <미스 에이전트2: 라스베가스 잠입사건>에서 그레이시(샌드라 불럭)는, 미스 USA 대회로 너무 유명해진 나머지 현장근무를 하기가 불가능해진다.
문제는 세계 평화에 앞장서는 초절정 인기녀 그레이시가 실연을 당했다는 것. 미인대회 우정상에 빛나는 그녀는 전편의 미남 수사관 에릭(벤자민 브랫)에게 차인다(그것도 전화로). 상사가 현장 근무 대신 제안하는 것은 ‘FBI 홍보요원’이 되라는 것. 실연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그레이시는 상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FBI의 ‘얼굴’이 된다. 한편, 너무 터프해서 팀워크에 문제가 있는 여자 수사관 샘(레지나 킹)은 그레이시와의 마찰 끝에 그레이시가 TV쇼에 출연해
여성 버디무비, <미스 에이전트2: 라스베가스 잠입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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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작품이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클루리스> <엠마>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통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오만과 편견>을 각색한 <신부와 편견>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 형식(뮤지컬)과 문화권(인도)을 초월해 사랑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슈팅 라이크 베컴>의 거린다 차다 감독의 <신부와 편견>이 극장과 TV, 동시 개봉이라는 특이한 형태로 소개된다.
인도 암리차르의 박시 가문에는 아름다운 네딸이 있다. 박시가의 어머니는 네딸을 돈 많은 집에 시집보내느라 혈안이 되어 있는데, 이들 앞에 부유한 독신남 발라지(네이븐 앤드루스)와 다아시(마틴 핸더슨)가 나타난다. 큰딸 자야는 발라지와 첫눈에 반해 사랑을 키워가지만, 미국의 호텔 재벌 다아시는 둘째딸 랄리타(아이쉬와라야 라이)와 서로 끌리면서도 티격태격한다. 박시가의 어머니는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
영화의 발리
인간이라면 응당 누려야 할 즐거움, <신부와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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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영화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린이 관객을 타깃으로 하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가장 기본적인 성공요건은 무엇일까? 상대적으로 집중력이 산만한 어린이들을 90분여 동안 그 작품에 몰입시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난제를 풀기 위해 일본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원작이 만화이고 TV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극장용으로 제작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유희왕>은 1996년 일본 만화주간지 <소년점프>에 연재한 이래 총 38권의 단행본과 총 224화 분량의 TV시리즈, 게임소프트 회사 코나미에서 출시되어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유희왕 카드게임’ 등의 원천소스가 된 만화이다. 극장판 <유희왕>은 원작 만화의 시작과 똑같이 학교에서 거의 왕따 수준의 나약한 소년 ‘유희’가 게임가게를 하는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천년퍼즐을 풀면서 ‘어둠의 유희’가 등장하게 되는 시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유희’가 천년퍼즐을 풀자 5천년 전 세상의
원작 팬들에 대한 확실한 팬서비스, <유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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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집을 나갔다. 장남 아키라(야기라 유야)는 ‘동생들을 부탁한다’는 쪽지를 힐끔 보고는 엄마가 남긴 돈을 꼼꼼히 세어보고, 바로 밑의 여동생에게 당분간 엄마가 안 올 거라고 일러준다. 동생도 놀라는 기색없이, 세탁기를 마저 돌린다. 그렇게 계절이 세번 바뀌었다. 돈은 진작 떨어졌고, 전기도 수도도 끊겼다. 처음으로 다 같이 외출하던 날, 그들은 아스팔트 보도 틈에서 솟아난 잡초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누가 버리고 갔나봐. 불쌍하다.” 아이들은 작은 손으로 거둬들인 잡초에 이름을 붙이고 정성껏 보살핀다. 기왕이면 먹을 수 있는 야채를 키우지 그랬니, 엄마의 새 주소로 찾아가면 됐을 텐데, 하는 탄식어린 충고는 부질없다. 그건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궁핍하고 위태로워 보이긴 해도, 아이들의 우주는 그 자체로 싱그럽고 풍요롭다.
17년 전 도쿄에서 있었던 실화를 토대로 한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강조하는 것처럼 “
슬프지만 아름다운 성장의 기록,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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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이 운다>엔 세 가지 이야기가 포개져 있다. 하나는 매를 맞으며 돈을 버는 퇴물 복서, 다른 하나는 소년원에서 권투로 갱생하는 복서 이야기이며, 그리고 마지막은 둘이 만나서 싸우는 이야기이다. 류승완 감독의 체취가 물씬한 것은 당연히 소년원 복서 이야기이다. <주먹이…>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이>에 이은 막장 인생 3부작이라 부를 만하다. 아니 이것은 <죽거나…>의 류상환(<주먹이…>에서도 류상환)의 성장담이다.
<죽거나…>와 <피도 눈물도…>에서 류승완은 이전의 한국영화에 없던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발이 부르터라 뛴 취재기록이거나 직접 살아본 체험이 아니면 건져내기 어려운 막장의 느낌, 그리고 기습적으로 내지르는 펀치 같은 별난 캐릭터들(이를테면 <죽거나…>의 깡패 태훈)은 젊은 작가 류승완의 훈장 같은 것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폭력교사를 두
굴곡진 삶과 그 안에 숨겨둔 희망, <주먹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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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삶에 대한 미련을 보여주는 증거일까 아니면 엄정한 선택의 결과물일까. 이에 대해 영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색다른 소재로 동시대의 욕망을 예민하게 포착했던 김영하의 동명원작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들려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인물, 한번도 자신의 모습을 영상에 담아본 적이 없는 행위예술가 마라(추상미), 사랑이 게임인 양 거짓 속에 진심을 담는 호스티스 세연(수아), 쿨한 죽음을 동경한 끝에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폭주족 커트(최성호)는 조금씩 다른 이유로 죽음을 곁눈질한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헐거운 연결고리로 작가이자 카운슬러이며 자살도우미인 S(정보석)가 등장한다.
아마도 감독은 원작의 아우라를 최대한 스크린에 옮기기 위해 고심했을 것이다. 마라와 세연은 소설 속 미미와 유디트와 거의 유사하고, 우연한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는 커트는 새롭게 추가된 캐릭터다. S가 베니스에서 만나는 홍콩 여자의 에피소드는 마라와 세연의 에피소드에 분배되
시효가 다한 소재와 진부한 방식,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