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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은 같은 발화의 형태를 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반대의 뜻을 헤아려야 하는 단어다. 몸을 치장하는 화장(化粧)이 생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 시신을 불에 태우는 화장(火葬)은 죽음을 향한 가장 직접적 통과 절차다. 임권택 감독은 김훈 작가의 단편 <화장>을 토대로 이 정반대의 두 육신에 직면한 중년의 남자, 그 심리를 여행한다.
암투병 중이던 아내(김호정)의 임종을 맞은 화장품회사 마케팅팀 중역인 오 상무(안성기). 그는 죽어가는 아내를 간호하는 동안, 회사에 새로 들어온 홍보팀 대리 추은주(김규리)에게 마음을 뺏기는 자신을 발견하고 고뇌한다. 한 남자의 내면을 화면에 옮긴다는 점에서, <화장>은 사건과 역사가 내재된 캐릭터들이 주를 이루었던 앞선 101편의 임권택 감독의 작품과 차별화된다. 오 상무의 내면 탐구는 회사와 병원이라는 한정적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모던한 장소와 현대인의 심리로의 진입이라는 변화는 기존 임권택 영화와는 사뭇
정반대의 두 육신에 직면한 중년의 남자 <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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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가렐과 루이 가렐은 지금의 프랑스 영화계에서 가장 매혹적인 예술적 콤비다. 아버지 필립 가렐이 사랑이라는 테마를 탐구하며 영화의 다양한 질료를 사려깊게 직조하는 설계자라면, 아들 루이 가렐은 아버지가 설계한 영화적 시공간 속을 거닐며 필립 가렐 영화의 무드를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필립 가렐의 신작 <질투>는 이들의 다섯 번째 협업이자, 이들의 사적인 역사가 영화의 중요한 자양분이 된 작품이다(필립 가렐의 아버지 모리스 가렐은 20살 무렵 자살을 시도했고, 이 에피소드는 <질투>의 주인공 루이(루이 가렐)의 에피소드에 반영됐다). 가난한 연극배우인 루이와 여배우 클로디아(안나 무글라리스)가 사랑에 빠진다. 클로디아는 재기하기가 쉽지 않고 긴 공백기에서 비롯된 두려움과 공허함에 대해 루이에게 위로받길 원하지만, 남자에게 연인보다 더 중요한 건 연극이다.
땅콩은 까기 어렵지만 그래도 맛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먹게 된다고 <질투>의 등장인물들은 말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섬세한 포착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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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외로운 사람들은 다 어디에서 왔을까.”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 그 여자>(이하 <그 남자 그 여자>)는 비틀스의 동명 노래 <엘리노어 릭비>의 한 구절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제작된 영화다. 여기 외로운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코너 러들로(제임스 맥어보이), ‘그 여자’의 이름은 엘리노어 릭비(제시카 채스테인)다. 남자와 여자는 한때 사랑했고, 함께 보금자리를 꾸렸고, 아이라는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아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 행복했던 부부가 서로 각자의 길을 가게 만들었다.
모든 관계에는 각자의 사정이 있다. <그 남자 그 여자>는 누구에게나 타인에게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내밀한 감정이 있다는 점을 서사의 동력으로 삼는 영화다. 누군가가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일들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고, 한번 벌어진 관계의 틈을 좁혀나가는 데에는 곱절의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그 남자 그 여자>가 사랑
두 남녀 각자의 사정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 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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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명의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결혼과 관련된 30대 여성의 고민을 녹여낸 작품이다. 가게에서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던 인연으로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수짱, 마이짱, 사와코상. 이들은 각자 자기 일을 가지고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어딘가 조금씩 모자란다. 카페에서 일하는 수짱(시바사키 고)은 매니저와 서로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정작 그와 연결된 건 그녀의 동료다. 마이짱(마키 요코)은 유부남과 동거 중이다. 그녀의 유부남 애인은 집안일이 생길 때마다 번번이 마이짱과의 약속을 깨버린다. 사와코상(데라지마 시노부)은 오랜만에 재회한 동창과의 결혼을 고민한다. 그러나 사와코상에 대한 동창의 유일한 관심은 오직 그녀의 임신 가능성인 것 같다. 세 여성은 가끔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영화에서 강조되는 것은 수다나 그 무엇을 통한 고민의 일시적인 해소가 아니다. 세 여성의 사연을 굳이 연결 지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 때문에 영화는 세명의 이야기를 느슨하게 연결한 옴니
30대 여자들의 고민과 성찰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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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다. 베라라는 여인이 주인공인데, 그녀는 누군가의 누나이자 연인이자 흠모의 대상이다. 그녀가 맺어온 관계에 중점을 두고 전쟁의 참상을 돌아본다. 베라(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집안의 반대와 여성을 억압하는 상황에 맞서 작가의 꿈을 키운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베라는 독학으로 옥스퍼드에 입학한다. 에드워드(태론 에거턴)는 누나의 상황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든든한 동생이다. 에드워드의 친구 빅터(콜린 모건)는 베라를 짝사랑하지만 변변한 고백조차 못한다. 그사이 베라는 문학도 롤랜드(키트 해링턴)에게 마음을 뺏긴다. 어느 날 전쟁이 발발하고 세 남자는 참전을 결심한다. 이들의 영향으로 베라는 학업을 중단하고 종군 간호사가 된다. 무언가 쓰기(write)를 원했던 베라의 욕망은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옳은(right)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바뀐다. 그러나 전시 상황에서 그녀의 유일한 관심은 주위 사람들이 그저 무사하기를(alright) 비는
베라 브리튼의 회고록을 담은 실화영화 <청춘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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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시코탄 섬, 준페이와 칸타 형제는 동화 <은하철도의 밤>을 좋아하는 아버지 타츠오의 영향을 받아 기차놀이를 즐기면서 은하철도를 타고 우주를 여행하는 걸 상상한다. 그해 8월,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곧 러시아 사람들이 섬에 들이닥친다. 마을이 어수선한 가운데 아이들은 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학교를 다니고, 준페이와 칸타는 러시아 장군의 딸 타냐와 우정을 쌓는다. 하지만 마을 방위대장인 타츠오가 체포되고, 얼마 후 주민들도 섬 바깥의 수용소로 끌려간다. 고된 수용소 생활 중에도 준페이와 칸타는 아버지를 찾아나서기로 한다.
<은하철도의 꿈>의 도처에는 미야자와 겐지의 걸작 동화 <은하철도의 밤>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다. 동화를 원작으로 둔 건 아니다. 주인공 형제의 이름은 소설의 지오반니와 캄파넬라에서 빌려왔고, 소설 속 아름다운 대사들은 주인공 형제의 대사를 통해 내내 등장한다. 전후의 피폐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중심에
환상적인 이미지가 주는 시각적 쾌감 <은하철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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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수선을 가업으로 잇고 있는 맥스(애덤 샌들러)는 매일이 지루하다. 열심히 일하지만 벌이는 시원찮고, 연애는커녕 친구라 할 만한 사람도 가게 옆 이발소의 지미(스티브 부세미)와 아픈 노모가 전부다. 평소와 다를 바 없던 하루, 건달 손님이 맡기고 간 비싼 구두를 신어보고 맥스는 신발 주인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걸 알게 된다. 비결은 대대로 내려오던 낡은 수선기계. 소소하게 변신 놀이를 즐기던 중 맥스는 어릴 적 집을 나간 아버지(더스틴 호프먼)로 변해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한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준다.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기 전까지는 그를 판단하지 말라.” 토머스 매카시 감독은 인디언 속담을 되뇌다 <코블러>를 구상하게 됐다. <스테이션 에이전트>(2003), <비지터>(2007) 등 뜻밖의 사람을 만나며 희망에 닿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온 감독이기에 이번 영화 역시 타인과의 관계라는 테마가 중요한 시
신발을 신으면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다 <코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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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규 감독의 전작 중에서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1996)는 전생의 사랑을 SF로 풀어낸 이야기였으며, <쉬리>(1999)는 서로에게 총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두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첩보 액션물로 그린 작품이었다. <은행나무 침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2004)까지 잇따라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기록을 갈아치우며 흥행 신기록 제조기라 불렸던 그가 <마이웨이>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영화가 <장수상회>라는 로맨스 드라마인 건 다소 낯설다(물론 <장수상회> 직전에 찍은 단편 <민우씨 오는 날> 역시 드라마 장르이긴 하다).
장수상회라는 마트에서 일하고 있는 성칠(박근형)은 깐깐한 남자다. 진열된 상품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다시 정리해야 성이 풀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조금이라도 보이면 버럭 소리부터 내지른다. 마을 재개
감동의 반전이 있는 영화 <장수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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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뉴욕, 유류 회사를 운영하는 아벨(오스카 아이삭)은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전 재산을 쏟아붓고 대출까지 받아 땅을 사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한다. 최근 잇달아 기름을 훔쳐가는 무장 강도 때문에 회사의 신용이 떨어진 것이다. 여기에 검찰까지 회사의 회계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하자 아벨은 진퇴양난에 처한다. 그는 과연 자신의 사업을 지킬 수 있을까, 이를 위해 필요한 150만달러의 자금을 무사히 마련할 수 있을까.
<마진 콜: 24시간, 조작된 진실>과 <올 이즈 로스트>에 이은 J. C. 챈더의 세 번째 장편 <모스트 바이어런트>는 파국을 묘사하는 감독 특유의 솜씨가 십분 드러난 작품이다. 전작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곤경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던 J. C. 챈더는 이번 작품에서도 같은 테마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특히 주목할 것은 주인공의 목을 서서히 죄는 느리고 묵직한 리듬이다. 어떤 사건에 따른 결과를 즉시 보여주는 것
느린 리듬으로 다가오는 파국 <모스트 바이어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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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연구생 프래니(앤 해서웨이)는 모로코에 머물던 중 동생 헨리(벤 로젠필드)의 사고 소식을 듣는다. 통기타를 메고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던 아마추어 뮤지션 헨리는 혼수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프래니는 헨리가 남긴 흔적을 더듬다 동생이 싱어 제임스 포레스터(조니 플린)의 광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프래니는 때마침 내한한 제임스의 공연장으로 찾아가 그에게 동생의 데모 CD를 전달하며 동생의 존재를 알린다. 이후 제임스가 병실에 직접 찾아와 헨리를 위해 노래를 불러준다. 이를 계기로 프래니와 제임스는 사적인 만남을 시작한다.
음악을 매개로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음악 멜로물의 공식과도 같다. <송 원>이 차별화되는 지점은 혼수상태에 빠진 동생이라는 매개체를 하나 더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유목민의 생활상을 연구하기 위한 프래니의 여정은 헨리의 사고 이후 동생의 과거를 더듬는 여정으로 대체된다. 그 과정에서 만난 제임스는 5년째
음악으로 들여다본 관계의 속성 <송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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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닉(반 디젤)과 멤버들은 범죄조직 소탕 후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전작에서 처리한 범죄조직의 리더 오웬 쇼의 형 데카드 쇼(제이슨 스타뎀)가 동생의 복수를 위해 멤버들을 차례로 공격한다. 특수부대 출신 용병 데카드 쇼의 난입에 맞서 정부요원 페티(커트 러셀)가 도미닉을 돕는다. 페티는 납치당한 해커 램지(내털리 에마뉘엘)의 구출을 의뢰하고 도미닉은 멤버들을 다시 모아 반격을 시작한다.
거대하고 시끄럽고 가차 없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유독 국내에서 평가절하됐다. 무려 7편까지 개봉한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23억8천만달러의 흥행 수익을 거둔 괴물이다. “경찰서도 털었고 탱크랑 붙고 전투기까지 떨어뜨렸지만 이건 무리다”라는 개그 담당 멤버 로만 피어스(타이레스 깁슨)의 투정처럼 속편이 나올 때마다 더 큰, 더 놀라운, 더 짜릿한 볼거리를 제공해왔다. 시리즈가 거듭됨에도 활력을 잃지 않는 비결은 확장이 아니라 거꾸로 단순함에 있다. &
슈퍼카들의 무한질주 <분노의 질주: 더 세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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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모든 것의 에너지원으로 쓰이는 마을 윈드랜드. 평화롭던 어느 날, 까마귀 마녀는 소중한 바람을 만들어내는 마법의 바람개비를 훔쳐 마을을 망치기로 마음먹는다. 늘 바람개비를 지켜온 거북이 할아버지가 마녀 일당에 납치당하고, 바람개비가 멈추자 마을은 금방 황폐해진다. 윈드레인저 6인방은 바람개비를 되찾으려고 하지만, 오히려 그걸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고 만다.
<윈드랜드>는 이탈리아의 애니메이션 시리즈 <펫 팔스>의 두 번째 극장판이다. 우리에게는 꽤 낯선 이름이지만, 현지에서는 공영방송 <Rai 2>를 통해 10년간 156개의 에피소드를 방영했을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구가한 작품이다. 그래서일까? 강아지, 고양이, 토끼, 병아리, 오리, 개구리로 이루어진 주인공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는 그들 각자를 보여주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초반을 스윽 지나간다. 결국 여섯주인공 중 누구에게도 관심을 갖지 못한 채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를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윈드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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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공포영화에서 희생양이곤 했던 미모의 금발 소녀가 <팔로우>에선 주인공이다. 제이(마이카 먼로)는 남자친구 휴(제이크 웨어리)와 데이트한 뒤 관계를 가진다. 휴는 관계 후 돌변하여 이제 무언가가 제이를 따라다닐 거라고 경고한다. 제이의 친구들은 헛소리로 여기지만, 제이는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자신을 따라다님을 느낀다. 휴는 이것이 섹스로 전이되는 저주이며,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해서 넘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제이는 그녀를 짝사랑해온 폴(키어 길크리스)을 비롯한 친구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을 따라오는 존재들을 피해 다닌다.
<팔로우>는 정중동의 미학을 지닌 공포영화다. 깜짝 놀라게 하거나 유혈이 낭자한 잔인한 장면 따윈 없다. 주인공을 위협하는 불특정한 실체인 ‘그것’들은 점잖다. 절대 뛰지는 않고 걷기만 하는 양반이기에, 숨가쁜 추격 같은 것도 없다.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360도 회전하며 주인공의 주변을 찬찬히 훑고, 등장인물이 알아채기 전
정중동의 미학을 지닌 공포영화 <팔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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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에서 5년간 재임하며 3번의 우승을 안겼지만 2011년 불미스럽게 퇴출당한 김성근 감독은 그해 말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의 사령탑을 맡는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목받지 못했거나 팀에서 방출된 선수들이 모인 팀은 기대보다 훨씬 낮은 기량으로 연패를 면치 못한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 특유의 혹독하지만 사려 깊은 훈련을 거듭하며 점차 승률을 올려가고, 소속 선수들이 속속 프로팀에 입단하는 성과까지 만들어낸다.
국내 첫 번째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는 “열정에게 기회를”을 모토 삼아 야심차게 창단했지만 3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파울볼>은 고양 원더스의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담은 다큐멘터리다. 한국 최초라는 의미만큼이나 큰 상징이었던 김성근 감독과 그를 따르는 원더스 선수들의 모습으로 채워졌다. 한때 메이저리그까지 진출했던 최향남, 다승왕에 오르며 프로팀 코치로도 활동했지만 다시 선수의 자리로 돌아온 김수경, 잠시 팀을 떠났다가 복귀
슬픔을 비집고 떠오르는 평범한 깨달음 <파울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