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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누군가 전해준 민식 형의 인터뷰 기사 내용에 의하면 우린 아직도 불화중인 게 분명하다. <해피엔드>를 만들며 끝내 합의하지 못한 몇 가지 부분이 그에게는 깊은 상처로 남은 모양이다. 누군가와 마주보고 앉아 얘기중이었다면 이 정도에서 소주 한잔 탁, 털어넣고 묵묵히 앉아 있으면 좋을 것인데….
문득 <파이란>의 TV 광고에 민식 형의 마지막 멘트 “파이란” 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표정과 몸짓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의 목소리. <해피엔드> 시나리오를 쓰며 모니터 앞에서 수백번 중얼거렸던 서민기의 대사들이 그의 목소리를 타고 꿈틀거리기 시작했을 때 느꼈던 전율이 떠올랐다.
민식 형은 움직이지 않는 장면에서 특히 훌륭하다. <해피엔드>를 촬영하면서 나는 그에게 카메라를 가까이한 채 계속 길게 찍을 수 있었다. 멈춰 있는 장면을 길게 찍을 수 있다는 것은 프레임 안에 걸 만한 내용이 이어진다는 의미이며, 배우가 역 속에 ‘
배우 최민식 [4] - 정지우 감독이 귀띔하는 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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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를 볼 때마다 히죽 웃는다. 내가 우스갯소릴 한 것도 아니고 내가 먼저 웃음을 짓는 것도 아닌데 그저 나를 볼 때마다 히죽 웃는다. 카페에서든 술집에서든 한쪽 구석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 나를 보고 그렇게 웃음을 짓는다. 그렇지만 한번도 왜 웃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그도 왜 웃는지 한번도 말한 적이 없다. 그냥 나를 보고 히죽 웃거나 빙그레 웃어주는 게 기분이 좋았다. 왜 웃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고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래도 알 만하니까 서로 그러고 있는다.
최민식 선배는 그런 사람이다.<조용한 가족> 때, 그가 나오는 신을 준비하며 모니터 앞에 앉아 있으면, 배우가 왔는데도 감독이 배우에게 다음 찍을 장면에 대해 멘트도 안 하고 별다른 주문도 안 하고 그저 모니터 앞에 앉아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거나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는데도 그런 나를 보고 그냥 히죽 웃거나 낄낄거리기만 한다(또는 송강호와 같이). “여기서 어떤 표
배우 최민식 [3] - 김지운 감독이 귀띔하는 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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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영혼으로 사막 건너기
“죽을 맛이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에요.”
좋건 나쁘건 한번 그은 감정의 선이 일필휘지 끝까지 달리는 연극과 달리 단절과 훼방의 연속인 영화 연기를 도대체 어떻게 끌고 가느냐는 질문에 최민식은 그렇게 답한다. 연기 테크닉의 기초를 가르치는 교본은 있지만 가공의 영혼을 몸 안에 들이는 법은 세상 어느 책에도 씌어 있지 않다.
영화 속 인물을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접신’하는 것은 배우 혼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크랭크인 날짜 전에 완수해야 할 숙제라고 그는 말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라는 표현에서 힘줄이 툭툭 불거질 것 같다.
최민식의 그 ‘미치고 환장할’ 노릇은, 연기는 물론 망치질하고 스폰서 잡고 소품 나르며 소극장에서 살다시피한 대학 생활의 마지막 장(章)이었던 동국대 연극영화과 4학년 때 박종원 감독의 <구로 아리랑>(1988)에 프락치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시작됐다. <썸머타임>의 박재호 감독이 조감독을 하고, 임
배우 최민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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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의 무당, 연기의 신과 춤추다
배우들의 사진 촬영 장면을 구경하다보면 연극계 출신 혹은 전업 영화배우들과 주무대가 TV인 연기자들의 다른 점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전부는 아니고 대체로 그렇다. 연기 경력이나 인기도에 관계없이, 전자에 속한 연기자들은 대개 사진 찍히는 걸 어색해하거나 불편해 한다. 대신 TV에서 주로 활약하는 스타들은 사진기자가 특별한 요청을 하지 않아도 갖가지 표정과 동작을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들도 짧으면 한 시간 길면 서너 시간씩 걸리는 사진 촬영이 즐겁지만은 않겠지만, 연극계 출신에 비하면 그래도 훨씬 자연스럽다. 그들의 이미지에 기대야 하는 영화지로서야 이 편이 더 고마운 건 말할 것도 없다.
최민식은 사진 찍기를 부담스러워하는 배우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에게 표지사진 촬영을 요청했을 때 첫반응은, 이미 몇 차례 촬영을 경험했는데도, “혹시 그냥 인터뷰만 하면 안 되겠느냐”는 조심스런 반문이었다. 배우가 사진 찍는
배우 최민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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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G 한국영화제와 우디네영화제, "아시아의 새로운 영화" 환대세계를 향한 한국영화의 발걸음이 가볍다. <춘향뎐>이 5월5일 미국 61개 도시에서 개봉했고 <공동경비구역JSA>는 5월26일 일본의 280여개 극장에서 대대적으로 개봉하는 등 올해 들어 한국영화를 받아들이는 해외의 눈길이 유달리 따스해진것을 느낄 수 있다. 이같은 환대에 발맞춰 한국영화는 아시아와 미주를 거쳐 유럽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최근 벌어진 이탈리아의 우디네영화제와런던의 ‘LG 한국영화제’는 한국영화에 대한 유럽의 관심을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런던과 로마의 <씨네21> 통신원이유럽에서도 서서히 불기 시작한 한국영화의 상큼한 봄바람을 담아왔다. 편집자LG 한국영화제, 런던관객과 행복한 대면런던은 유럽에서도 한국영화의 불모지 같은 곳이었다. 런던에서 한국영화를 보려면 매년 한번뿐인 런던영화제를 기다리거나, 아주 드물게 아트하우스에걸리는 영화들(지난해 초의 <거짓말&
유럽에 부는 한국영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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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8일(금)11:00평화의 가장자리에서13:00귀환없는 평화?14:10필드 다이어리15:40록, 종이, 미사일16:00나지 알 알리17:00팔레스타인, 땅의 역사18:00119발의 총성+319:10개막식20:00세개의 보석 이야기22:00군인일기5월19일(토)11:00기억의 노예12:50119발의 총성+314:00세개의 보석 이야기16:00애니모음17:10팬지와 담쟁이*18:40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볼리비아 일기20:30대지의 소금22:10처벌에 맞춘 범죄5월20일(일)11:00필드 다이어리12:30팔레스타인, 땅의 역사13:30나지 알 알리14:30옛날 이야기*15:40기억*16:40칠레전투118:30칠레전투220:10칠레전투321:40칠레 지울 수 없는 기억5월21일(월)11:00귀환없는 평화?12:10정착민들13:20쇼아116:00쇼아218:10쇼아320:40쇼아45월22일(화)11:00유령을 부르며12:10전투지대13:30날 놓아줘15:20스코츠보로:미국의 비극16:50레
상영일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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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시린 초겨울에 피던 인권영화제가 늦봄 언저리에 둥지를 튼다. 5월18일부터 23일까지 6일 동안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아트큐브에서열리는 ‘5.5인권영화제’를 기점으로 행사를 주최하는 인권운동사랑방(대표 서준식)이 올해부터 개최 시기를 봄으로 공식 조정한 것. 연말에영화제를 치를 경우 다른 행사 일정들과 겹쳐 주목도가 떨어지는데다 서울 이외 다른 지역 순회영화제를 원활하게 진행하는 데도 이 일정이 편하기때문이다. 상영공간을 대학 내 강당이 아닌 도심 내 일반 상영관으로 옮겨온 것도 달라진 점이다. 상영관인 아트큐브의 경우 좌석 수가 77석밖에되지 않아 고민이지만, 전문적인 상영공간인 만큼 사운드를 비롯해 관람 환경은 좋아진 셈. 인권영화제쪽은 대학생뿐만이 아니라 소외계층을 비롯한시민들의 참여가 예년보다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칠레전투> <쇼아>를 비롯 42편 상영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모두 42편. ‘다시 보는 명작선’의 19편은 지난 영화제
새 둥지 틀고, 인권의 봄을 기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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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개막작 기자회견이 그렇지만 <물랑루즈> 시사회 직후 열린 기자회견은 수백명의 기자가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날렵하고화사한 차이나풍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니콜 키드먼과 긴 은발머리를 뒤로 넘긴 감독 바즈 루어먼에 가려 이원 맥그리거나 존 레귀자모가 초라해보인이날 기자회견에서 호주 기자들은 시종 “이걸 호주영화라고 부를 수 있냐”는 질문을 던져 좌중을 썰렁하게 만들었다. 감독은 영화의 국적에대한 거듭되는 질문에도 짜증내지 않고 기자회견 분위기를 유쾌하게 끌고갔다.[호주 기자 A] 나는 몇년간 파리 물랭루주가 위치한 지역에 살았다. 그곳에는 호주 여자들이 많았는데 호주와 물랭루주를 연관시켜본다면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바즈 루어먼 이 영화는 연극적 특성을 띠고 있다. 나의 의도는 음악이많이 들어간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물과 세계가 변화하는 모습을 담으려고 했다. 이 영화를 위해 몇년 전 파리에 머물면서 보헤미안과19세기 말 물랭루주 모습에 대한 자료를 수집
<물랑루즈>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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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9일 54회 칸영화제 개막, 개막작은 바즈 루어먼의 <물랑루즈>지중해에 쏟아지는 햇살은 어딘가 다르다. 빛을 머금은 비취색 바다가 속삭이듯 일렁이면, 칸의 5월은 아직 코트를 벗지못한 파리 사람들을 비웃듯 여름 분위기를 뽐낸다. 바닷가엔 온통 수영복의 남녀 혹은 토플리스 차림의 여인들이 시선을 현혹시키지만 오래 지켜볼구경거리는 아니다. 칸의 눈부신 여름이 시작되는 곳은 해변이 아니라 팔레 드 페스티발의 붉은 계단이다. 5월9일 저녁 6시, 제54회 칸영화제의개막을 알리는 팡파르와 함께 연미복을 입은 남자들과 우아한 드레스의 여인들이 좌우로 의장대가 호위하는 팔레의 계단에 들어서자 약속이라도한 듯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이날은 특별하다. 신과 여신들이 1년에 한번 지상에 내려오는 때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신전처럼 웅장한자태를 드러내며, 영화제 행사 대부분이 열리는 건물인 팔레는 늦은 오후를 밀어내고 신비감과 황홀경에 입맞춘다.올해 이곳에 모인 이들이 목청높이 부른
54회 칸영화제 개막 The 54th International Film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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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다 그렇듯 ‘대책없는’ 대학 졸업반. 스스로 “무엇에도 탐닉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표현하긴 하지만, 손원평(23)씨는 영화책도 실컷 읽고 비디오숍 선반의 테이프도 몽땅 섭렵하고, 독립영화협의회 워크숍에서 16mm영화도 만들어볼 요량으로 이번 학기를 휴학했다. 영화의 여러 부분을 체험한 뒤 영화 세상 어디쯤에 몸을 부리면 좋을지 결심하기 위해서다. 도리어 제일 욕심났던 꿈은 시나리오 작가였고 평론상 수상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그는, 채 익지도 않았는데 솥의 뚜껑이 열려버린 것 같아 난감하다면서도, 좋은 예감과 의욕을 감추지 않았다. 서강대 사회학과 휴학중이며 지난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본심에 오른 경력이 있는 손원평씨는, 멸종 위기에 처한 호출기 이용자이기도 하다. 삐삐 사용법을 까마득히 잊은 기자는 그에게 연락을 취했다가 ‘퍼니 파우더’의 인트로 음악을 꽤 오래 감상해야 했다.
-영화를 주로 어떻게 접했나.
=책에도 영화에도 파묻혀 사는 편은 아니다. 혼자 보
제 6회 씨네21 영화평론상 [7] - 우수상 당선자 손원평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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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놀이의 한계
손오공의 머리카락에서 나온 300명의 분신 중 어느 것이 진짜 손오공인지를 판단해야 하는 요괴의 고민처럼, 수많은 사람이 존 말코비치의 가면을 들고 서 있는 이 영화의 섬뜩하면서도 기발한 포스터는 영화를 보기 이전부터 우리를 헷갈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사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늑대인간>이나 <슈퍼맨> 혹은 <마스크> 등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의 다중적인 캐릭터에 관해 언급하는 영화들은 많았다. 그러나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말코비치의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정체, 즉 ‘누가?’의 문제이다.
‘과연 누가 존 말코비치가 되는가?’라는 질문에서 우리는 이 영화가 위의 영화들과는 매우 다른 각도를 취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동일인물이며 디에고와 조로도 같은 사람이다. 다만 이들은 지킬이면서 하이드일 수 없고 멍청한
제 6회 씨네21 영화평론상 [6] - 손원평 작품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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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절된 시선에 대한 웃음
영화를 보는 관객은 오만 가지 생각과 느낌을 가질 수 있으나 적어도 극장 안에서 정식으로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두 가지 표현은 울거나 혹은 웃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관객이 영화 속 캐릭터나 캐릭터가 봉착한 상황에 대해 슬퍼하거나 감동을 받았을 때이다. 이것은 감정이입, 일치감의 확보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영화 속 캐릭터와 관객이 그 어느 때보다도 일체된 경우이다. 반면 영화를 보면서 웃는다는 것은 관객과 배우의 단절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관객이 캐릭터나 캐릭터가 놓인 상황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패러디와 블랙코미디는 단지 즉흥적인 관찰적 웃음을 뛰어넘는 요소를 지니는데, 그것은 스크린 안에서 펼쳐지는 사건 자체에 대한 웃음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원작영화나 연상되는 사회적 이슈를 환기하면서 나오는 뒤틀어진 시선 자체에 대한 웃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들
제 6회 씨네21 영화평론상 [5] - 손원평 이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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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 물리를 공부하면서 그는 “이걸 공부하면 죽음에 대해 다뤄볼 수 있지 않을까?”생각했다. 그러나 삶의 비밀을 캐는 소년의 호기심은, 철학으로 영화로 쑥쑥 발걸음을 옮겨갔다. 물리교육과 2학년 때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셩에 가입한 유운성(29)씨는 영화보다 영화매체의 역사와 본성을 다룬 책들에 먼저 이끌렸고, 그 책들이 그린 지도를 좇아 영화와 연분을 맺었다. 졸업 뒤 광고회사에 잠시 몸담았다가 지난해 말 짧았던 회사원 생활을 접었다. 지금은 보습학원 물리 교사로 저녁시간을 보내며 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성실한 독서로 다듬어진 치밀한 사고 회로와 개별 영화와 감독을 향한 깊숙한 시선은 지루한 수고를 마다않는 정통파 평론가를 예감케 한다.
-좋아하는 글의 예는.
=이 정도의 비평을 쓸 수 있다면 참 좋겠구나 했던 글은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였다. 그 책에서 예시한 영화 가운데에는 도저히 구해볼 수 없는 영화도 있었는데,
제 6회 씨네21 영화평론상 [4] - 최우수상 당선자 유운성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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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시간
브레송과 베리만에게 악이란, 아무런 가치판단의 기준도 지니지 못한 채 그저 주어져 있을 뿐인 세계와 그 속에 던져진 인간의 행위 자체이다. 즉, 평가되지 못하고 오로지 기술될 뿐인 사건들의 총체야말로 악 자체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영화 속에서 악은 세계에 대한 가치중립적인 명명(命名)에 다름 아니다. 브레송의 영화에서 세상의 질서에 개입해 들어오는 은총에 대한 갈망은, 베리만의 인물이 외침과 속삭임에 대한 신의 응답을 갈망하는 것에 비교될 수 있다. 결국 이는 가치에 대한 갈망이다.
브레송과 베리만은 <팡세>의 파스칼처럼 현실의 밑바닥에 놓인 심연을 응시하며 불안해한다. 무한에 대한 인식, 즉 현실에는 경계가 없고 바깥도 없다는 인식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응답의 주체 혹은 전적 타자가 자리할 곳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반면, 히치콕이나 브뉘엘에게 악이란 가치중립적인 세계에서 가치를 창출하려고 시도하는 인간행위에 붙여지는 이름으
제 6회 씨네21 영화평론상 [3] - 유운성 이론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