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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세월이었다. 목소리를 다시 직접 마주하기까지 그는 얼마나 ‘멀고 먼 길’을 돌아온 걸까. 32년 전, 한대수는 동시대 젊은이들의 마른 가슴을 축여주는 젊은 가객이었다. 막걸리처럼 걸쭉한 목소리로 외치는 <물 좀 주소>나 “장막을 걷어라”라고 이상향에의 동경을 읊조리는 <행복의 나라로>는 김민기의 수일한 노래들과 함께 70년대 청춘들의 성가 목록에 올랐다. “목적이 있어서 작곡한 건 아니었다”며, “내 삶을 노래하자니 자연히 둘러싼 현실도 담겨 오더라”는 말대로 그의 음악이 설사 사적인 몽상에 가까웠다 해도, 거기 스민 자유의 내음은 암울한 현실에 위안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은 노래할 자유를 잃고 미국으로 떠났고, 우리에게 한대수는 오랫동안 음반 몇장과 함께 목소리로만 남아 있었다. 그가 고국의 무대를 다시 찾은 것은, 대중음악과 한국 록음악사에 대한
“나는 아직 목마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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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감독과 영화는 별개인가? 윤: 그런데 에서 보면 육체관계라는 게 아예 없죠, 놀이동산 갔다 와서 군대 얘기 하면서 무서우니까 살짝 팔짱끼는, 그거 하나였는데 <봄날…>에서는 구체적이 됐어요. 찍을 때, 내 생각에는 감독 자신이 육체관계가 아니라도 사랑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하고.허: 은 연애하기 전 이야기고….윤: 거기서도 의도만 있었다면 충분히 설정 가능했죠.허: 왜 그랬을까…. 어쨌든 만들고 났더니 제가 연애하면서 여자 손도 안 잡고 그런 남자로 생각을 해서…. (일동 웃음) 절대 그런 게 아닌데. (웃음)윤: 한국에서는 감독과 작품을 동일시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순수한 영화를 찍었다고 해서 감독도 순수한 사람으로 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는 거죠. (일동 폭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영화 하면서 내가 만드는 세계는 나의 정확한 거울일 수도 있지만 내가 꿈꾸는 세계일 수도 있어요. 내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순수한 것
“잠이 안 와서 수면제 먹어봤나요, 사랑 때문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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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갈까, 나도 궁금허: <소름>은 어떻게 만들게 됐어요?윤: <소름>은 내가 만든 중편 <메멘토>를 장편으로 하고 싶었다가 그게 돈이 없어서 못했어요, 미국에서. 한국에 와서 준비하다가 한번 고쳐가지고 해보려고 했는데, <메멘토> 찍을 때 불만이, 너무 현실하고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었거든요. 너무 인텔리적이고, 현학적인 느낌도 강했고. 그래서 서민의 이야기로 하려 했는데…. 그게 의도대로 됐으면 어머니도 즐거워하셨을 텐데. (일동 웃음)허: <메멘토>를 봤거든요. 의외였어요. 봤을 때의 느낌이나 기억들이. 히스토리에 대한 것을 먼저 듣고 봐서 그런지, 굉장히 감성적인 느낌이 많았던 것 같아요.윤: 개인적으로 영화를 찍으면서 늘 갖는 불만이, 시나리오를 할 때나 사랑을 다룰 때도 평이하게 간다고 찍는데 결국은 뒤틀려서 난해해지고…. 뭐 그런 것들이 불만이에요. 외부에서 보면 그게 강점인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내
“잠이 안 와서 수면제 먹어봤나요, 사랑 때문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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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과 <소름>의 윤종찬 감독. 멜로와 공포, 장르적으로 양 극단에 서 있는 두 감독은 얼핏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보이지만, 둘에게선 어떤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분명 장르에 속하는 영화를 만들긴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경계선을 넘어가버린다는 점 말이다. 멜로 아닌 멜로영화를 만드는 허 감독이나 공포 아닌 공포영화를 만드는 윤 감독이나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되새김질하고 추억한다는 면에서 ‘반성적’ 영화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말쑥한 청담동 카페에서 시작해 쩍 벌린 입에 보쌈을 쑤셔넣는 맛이 일품인 주점으로 이어진 두 감독의 대화는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구도의 여행담을 공유하는 자리로 보였다. 이날 대담은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 한편으로 시작, 남녀의 사랑에 대한 속깊은 이야기를 거쳐 결국 감독의 자아와 작품의 관계, 감독이라는 일의 즐거움과 괴로움에 관한 이야기로 마무
“잠이 안 와서 수면제 먹어봤나요, 사랑 때문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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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 나이가 들면서 좀더 재미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더 자주 한다. 운동도 좀 하고 취미도 즐기고. 난 게으르다. 그래서 강박관념이 많아지고 생활 자체가 닫혀 있는 것 같다. 나야말로 생활을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홍상수 감독님 영화를 보고 도움을 얻어야겠다.운동장 ‥‥> 에도 나오지만 운동장의 느낌을 많이 좋아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날 오후 집안 어른 중 누군가가 학교로 나를 데리러 왔다. 할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퇴해서 교실을 나와 가로질러 걷던 운동장의 기억이 아직도 강렬하다. 연출부로 일한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도 안성기씨가 자신의 어린 모습을 보는 운동장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더라. 마루 ‥‥> 평소에도 열려 있는 공간을 선호한다. 마당과 하늘, 비와 햇빛을 볼 수 있는 마루가 좋다. 일본 가옥들은 전통적인 열린 구조를 잘 현대화한 것 같아 부럽다. 영화 속 상우네 집은 어렵게 찾았는데, 모든
“우리 할아버지도 상우 할머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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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명백하고, 지나치게 의미심장한인물의 김정과 움직임을 하염없이 응시하는 연출은, 그러나 일부 숏의 길이를 애매하게 만들기도 했다. 다소 길을 잃고 연장된 듯 보이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은수가 술 취해 퇴근한 날 밤의 승강이처럼 좀더 끌어줬으면 싶은데 덜컥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봄날은 간다>를 로 부터의 진전이라고 부르기에는 정당한 망설임이 따른다. <봄날은 간다>는 관습적 멜로드라마의 평탕한 대로를 외면하지만, 데뷔작에서 이미 확고한 영화적 비전을 내비친 감독의 두 번재 작품으로는 상당히 안전한 길을 택했다. 유지태와 이영애의 캐스팅을 빼고도 <봄날은 간다>는 영화 내적으로 꽤 많은 확실한 패를 소매 안에 숨기고 게임을 한다.동시녹음 엔지니어라는 주인공의 직업, 세대를 가로지르는 삶의 교감을 대변하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라는 인물 설정은 지나치게 의미심장하고 상우네 식구들이 사는 정겨운 변두리 한옥은 너무 명백하게 소멸과 향수의 정취를
사랑이 `여기` 있었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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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의 어느날, 허진호 감독은 혼자서 전주행 밤차에 올랐다. 일곱살에 서울로 가족이 이사오기 전까지 살았던 그 도시는 , 소년의 머릿속에서 느리게 조금씩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열차 안에서 파는 술을 사서 마셨어요. 옆자리의 대학생들이 어느 학교 몇 학년이냐고 물어봐서 무슨 대학교 2학년이라 거짓말을 했던 것 같아요. 전주는 기억과는 달랐어요‥‥. 친척집에는 들르지 않았고, 그냥 만화가게에서 자고 새벽에 올라왔어요." 왜 그날 갑작스런 여행을 생각했을까 물으려는데 대답이겠다 싶은 토막난 말들이 스쳐간다. "작은아버지가 불던 휘파람 소리, 친구들과 올라가서 놀았던 동산, 뭐 그런‥‥." 사라진 것들의 호출에 이끌려 먼 외출을 감행하고 조용히 귀가했던 엉뚱한 열일곱살 소년은 나이를 먹어 영화감독이 됐다. 열렬하게 집요하게 소원한 건 아니었다. 일년 반쯤 다닌 전자회사를 그만두고 전공한 철학 공부를 더 할까, 다른 일을 해볼까 일년쯤 물끄러미 생각하다가 들어간 영화아카데미에
사랑이 `여기` 있었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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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신문광고가 주가 되던 시절, 카피는 영화의 또다른 얼굴이었다. “사랑하거던… 부뜰지 마라. 가슴은 썩어도 그대 사랑이 깃들 곳은 남으리라.” <용서받기 싫다>(1964)는 한 여대생(엄앵란)을 연모하는 조각가(신성일)가 그녀의 육체를 유린한 깡패 일당에게 복수한 뒤, 자수하여 십년형을 언도받는다는 내용. 카피에 신파 멜로의 기운을 흠씬 불어넣었다. “착한 아씨 이쁜 아씨 우리 아씨 계동 아씨”는 같은 해 아세아극장에서 개봉한 <계동아씨>의 카피. 계동아씨로 나오는 최은희를 부각시키되, 단순반복 4자나열 어구로 입에 올리기 쉽게 만든 경우다. 1967년의 <일본천황과 폭탄의사>의 경우는 멜로적인 설정이 어색했는지, 애초 카피에서 이를 설득하는 듯하다.“필살의 폭탄용사! 그는 처절한 레지스탕스의 정의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도 뜨거운 피를 지닌 매력적인 남성이기에 그를 사모하는 조국 여성과의 사랑의 삼각 갈등은 어떻게 헤어날 것인가.” <월하
뽕도 따고, 금메달도 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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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 시대의 우울을 녹인 ‘속곳 바람’1981년 불황, 불황, 불황. 신군부의 군화정치에 짓밟힌 것이 영화뿐이겠느냐만, 한가위 명절에도 극장들은 상영중인 영화 간판을 계속 걸거나 창고 속 영화들을 다시 꺼내는 수세적 방책으로 일관했다. 김영애, 원미경 주연의 <빙점 ’81>도 꽁꽁 얼어붙은 추석에 재상영을 거듭했고, <닥터 지바고> 등의 외화들도 당시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극장들에겐 요긴했다. 그러나 영화가 어둠 속에서 생명을 얻는 빛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도 있었다. <바람불어 좋은 날>과 함께 리얼리스트가 되어 돌아온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25만5817명)이 추석을 관통, 연장상영됐다. ‘언제나 거기 있던’ 임권택 감독이 <만다라>(12만8932명)로 재발견된 것도 이때였다. 외화로는 <차타레 부인의 사랑>(26만3513명), (28만4285명), <캐논볼>(20만4
보따리 풀어라, 대목에 한몫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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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울고 돈에 웃었다, 극장가 1962 ~ 1997추석은 극장에 손님이 꼬이는 날이다. 그것도 할리우드영화보다는 한국영화가 더욱 그렇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모든 공력을 쏟아붓는 시점이 여름방학 성수기라면, 추석은 짧긴 하지만 한국영화 흥행을 위한 텃밭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영화 배급사는 이 시기가 되면, 촉각을 곤두세운다. 하지만 지난 40년의 흥행사가 말해주듯, 항상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한국영화의 암흑기 시절이던 70년대에는 심지어 재상영작 외화들의 포진에 밀려 극장을 잡지 못한 한국영화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제는 한국영화가 한가위 잔치뿐 아니라 한여름 치열한 전투에 뛰어들 만큼 체력이 좋아진 게 사실이지만, 그러기 위해선 40년이란 세월을 부대껴야 했다.1960년대 - 70원 주고 본 2500만원짜리 블록버스터1962년 관람료 70원 시절이라고 ‘블록버스터’가 없을까. “총제작비 2500만원, 엑스트라 10만명 동원, 말 300필 공수.” <화랑도>는 당시
보따리 풀어라, 대목에 한몫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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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완이 편집한 귀성 음반 14트랙이제 다시, 피할 수 없는 길을 가야 할 때가 왔다. 무사들은 모래바람을 가르며 사막을 건너고 <파리 텍사스>의 해리 딘 스탠튼은 기억상실의 끝없는 벌판을 건너지만, <이지 라이더>의 두 히피는 멕시코에서 미국 북부로 넘어가는 국도를 오토바이로 달리고 <아이다호>의 거지들은 히치하킹을 하여 지평선까지 뻗은 도로를 달린다. 그러나 4천만 남한 민중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수한 길을 가야 한다. 바로 `주차장으로 변한 고속도로`다.. 이 로드무비의목적지에는 무엇이 있나? 고향이 있다. 고향은 문젯덩어리다. 빚은넘치고 노동력은 부족하다. 더구나 거기에는 노령의 귀신들, 부모님이 산다. 노부모는 이 땅 최대의 사회무
길 위의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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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관에서 매표에 실패했을 때<봄날은 간다> 대신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이루어질 듯 말 듯한 사랑의 줄다리기를 찾아 극장으로 가셨던 분들. 도우메 게이의 알싸한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서보라. 기오 시모쿠의 처럼 사랑을 겪는 주인공들의 미묘한 감정을 잘 찾아들어가지만, 그보다는 밝고 젊은 이야기들이 그려진다. 신주쿠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변변치 않은 남학생 우오즈미, 그의 곁에 까마귀를 데리고 다니는 묘한 여자아이가 찾아온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을 눈치채기도 전에 옛날의 여자친구 시나코가 먼 도시에서 돌아오는데….도우메 게이, 학산문화사, 현재 2권 발간<무사> 대신 <바람의 나라>거대한 화면에 펼쳐지는 호쾌한 무사들의 액션을 무엇으로 대치하랴. 다만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인간들의 ‘진정한 이야기’를 느껴보려면, 김진이 만든 <바람의 나라>를 방문해보시라. 특히 이름만 빌려간 온라인 게임의 환상에 질린
만화 클리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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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꼴보기 싫다면<시어머니 죽이기>명절은 무슨 얼어죽을. 고생한 보람도 없이 눈치와 핍박만 받고 퍽퍽한 팔다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 며느리들이여. 이 만화를 집어들어라. 단 시댁 식구들에겐 책 표지라도 눈에 뜨이지 않게 조심할 것. 잘못하면 패륜 범죄자로 낙인찍힌다. 겉으로는 시어머니를 극진히 공양하는 며느리. 그러나 틈만 나면 시어머니를 죽일 시도를 하는데. 역시 만만찮은 존재가 시어머니. 목을 조르는 며느리를 그대로 엎어치며 레슬링 한판을 벌인다. 그렇게 땀을 흘리고 나서는 ‘오랜만에 운동을 하니 좋구나’, ‘어머니 여전히 건강하시네요. 오래 사시겠어요’라는 능청스러운 대사를 주고받는데, 어찌 보면 우리네 마음속 깊숙한 곳에 감춰둔 감정을 꼭 집어내는 것 같기도 하다. 니카이도 마사히로, 서울문화사, 전 1권<우당탕탕 괴짜 가족> 친척들이 잔뜩 모이면, 그 아이들도 우루루 몰려 쌈박질에 장난질에 난리법석을 피운다. 우리 자식 간수도 어려운데, 저렇게 몰
만화 클리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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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전1 도박하다 파산했다면언제부터인가 모르게 명절 하면 떠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고스톱이 되어버렸다. 친지들간의 화목을 도모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갖다댈 수도 있겠지만 명분은 그저 명분일 따름. 돈 잃고 웃음 짓는 이는 없는 법이며 한술 더 떠서 지갑에서 먼지만 폴폴 날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보면 울화가 치미는 것이 인지상정일 게다. 그래도 인심 좋은 친지에게서 개평이라도 조금 얻어냈다면 그 돈으로 뭘 할까?돈벼락 안 떨어지나?도박의 귀신들이 보여주는 화려한 테크닉을 감상하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길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사실 홍콩산 도박영화들- <지존무상> <정전자> <도성>- 이 제격일 게다. 그러나 이쪽 영화에 취향이 각별하지 않은 사람들도 제법 있을 듯싶으니 눈을 다른 쪽으로 돌려보자. 기왕에 돈은 잃은 것이고 바라건대 어디서 일확천금이라도 주어진다면? 잠시나마 이런 몽상에 빠져 보고 싶은 사람들에겐 먼저 <웨이킹 네드>(Waking N
횡재수다(橫財數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