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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아이들은 일요일 아침이면 늘 TV 앞에 모였다. 마법의 성 위로, 펑 하고 터지는 불꽃놀이. 디즈니랜드의 풍경이 펼쳐지면, 미키마우스와 도널드 덕 등 친숙한 얼굴들이 등장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이상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유년 시절의 통과 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이미지들은 거의 무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미키 마우스라든지 도날드 덕, 거짓말을 해서 코가 길어진 피노키오의 얼굴이나 하늘로 훌쩍 날아가는피터팬의 몸짓은 필요할 때마다 바로 연상되는 원초적인 기억이다.1923년 월트 디즈니(1901∼66)가 형 로이와 함께 ‘디즈니 브러더스 촬영소’라는 이름의 애니메이션제작소를 차린 이래, 디즈니 애니메이션은그림동화나 안데르센 동화 이상으로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20세기의 동화,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20세기의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감동시키고,또 돈지갑을 열게 했을까. 거기에는 어떤 비결이 숨어 있고, 디즈니는 어떤 전략으로 성공을 거듭해왔을까.월트 디즈니 탄생 100주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요 작품사 - 동화보다 아름다운, 캔디보다 달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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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틀란티스Atlantis: The Lost Empire6월15일 개봉 예정제작 돈 한 감독 커크 와이즈(<노틀담의 꼽추> <미녀와야수>)음악 제임스 뉴턴 하워드(<다이너소어> <식스 센스>)출연 마이클 제이 폭스, 제임스 가너, 클로디아 크리스틴, 짐 바니, 존 마호니아틀란티스가 있다고 믿는 밀로 태치는 독자적으로 연구를 계속한다. 어느 날 탐험가였던 할아버지가 그린 지도를 발견한 밀로는,할아버지의 친구와 함께 일행을 모아 전설의 제국 아틀란티스를 찾아간다. 노틸러스호를 타고 바다 밑으로 향한 탐험대는 거대한 로봇오징어의 습격을 받는다. 겨우 탈출에 성공한 밀로 일행은 마침내 낯선 곳에 다다르게 된다. 할아버지의 지도 하나에 의존하여 과거에멸망한 제국을 찾아가는 밀로 일행에게는 끊임없이 재난이 닥친다. 70mm 시네마스코프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몬스터주식회사Monsters, Inc.2001년 11월 개봉 예정제작사 PIXAR 출연 존
애니메이션 라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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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티스>에서 <스웨팅 불리츠>까지,미리 보는 2001∼2003년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전략지난 2월14일, 뉴욕의 거리는 꽃다발의 물결로 가득했다. 밸런타인 데이. 한국에서는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지만, 이곳에서는 연인이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다지는 날이다. 2001년 여름부터 2003년 가을까지 디즈니가 준비하는 애니메이션의 프리젠테이션이 열리는 소니링컨 시어터로 가는 길마다 빨간 장미 다발을 든 배달원들이 분주하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사람들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묘한 기분이 들었다. 낯선 이국에서, 타인의 사랑의 징표를 보는 것은 더욱 낯설었다.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주익숙하고 정감있지만, ‘다른 세계’.센트럴 파크를 끼고 돌면 나오는 링컨센터, 그 건너편에 자리잡은 소니 링컨 시어터는 아이맥스관도 하나 있는 큰 멀티플렉스다. 앉으면 꺼질 듯뒤로 젖혀지는 기능적이면서도 아주 편한
뉴 디즈니 프로젝트 2001-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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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번의 구타를 통해 성장을 쟁취하는 프랑수아 트뤼포식 애증의 학교가 낯간지러운 자본주의와 만났을 때, 여자는 권투주먹에 처참하게맞으면서도 남자에게 한번 더 핸드폰을 ‘때려’ 줄 것을 간청한다. ‘400번의 핸드폰’이라는 피학적 존재 호출에 달뜬 엽기적인 그녀는 아마남자 친구에게 자기가 오늘은 술 한잔을 ‘쏘’겠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사격과 사정이 혼동되고, 가학과 피학이 전도되며, 메시지가 마사지가되는 엽기문화의 흔적들.엽기 , 열정이 아닌 유행모두가 행복하게 끝나야 하는 영화 <해피엔드>의 행복이 종치는 마지막은 최보라의 불륜에 보복하는 서민기의 잔혹한 살해 축제였다. 그것을축제라고 하는 까닭은 최보라의 살해 신이 단지 최보라를 죽이는 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반복된 칼부림을 통해 분출하는 광폭한 충동 자체에 있는것 같기 때문이다. 반면 김기덕 영화에서 섹스를 본다는 것은 고통과 허기가 뒤범벅된 관계의 극한까지 가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목안에 낚싯바늘을 넣고
한국영화의 이상한 경향, 코드5 - 난무하는 가학과 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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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게 즐거워서가 아니다. 단지 진지해지는 게 두려울 뿐이다. 한국영화가 산업화라는 목표를 세운 90년대, 사회는 그 구성원들 모두에게가벼워지기를 요구했다. ‘80년대를 극복하지 마라, 그냥 잊어라’라는 말이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감겨왔다. “풍자냐 죽음이냐”며 피를 토하듯일갈하던 이들도 무력해졌다. 94년의 흥행작 <투캅스>의 헤드카피는 “웃다 죽어도 좋다”였다. 하긴 예전 영화들은 지나치게 진솔했다. <월하의공동묘지>의 여인들은 질투와 원한에 사로잡혀 실로 어이없는 행동을 하며 <뽕>의 이대근은 넘치는 남성을 감당못한다. 당대에 공포와 에로티시즘으로관객의 발길을 끌었던 그 영화들을 지금 다시 본다면 웃음을 참지 못하리라. <자유부인>에서 다시는 남편의 집에 발을 들일 수 없는 그녀의눈물조차도 익살스런 제스처로 보인다. 그들은 심각했고 그래서 지금 우습다. 반면 90년대 유행을 주도했던 코미디들을 다시 보라. 그들은웃기려드는데, 진지함을
한국영화의 이상한 경향, 코드4 - 강박적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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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개봉됐을 때 온라인 사이트에 올라온 네티즌들의 평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그 호평들은 이런 제목을 달고있다. “정말 영화 같지 않다”, “이거 영화 맞아?”, “이거, 내 얘긴데…”. <나도 아내가…>를 본 사람이라면 이 말들의 의미를 곧바로이해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사소한 에피소드와 자잘한 유머의 전시장이다. 끝날 때쯤 남녀주인공이 연애를 시작한다는 것말고는 두 시간 내내어떤 극적인 일도 이들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가 꿈이고 신화라면, 그래서 일상에 지친 대중을 비일상적인 볼거리로 달래주는 오락이라면,<나도 아내가…>는 그런 축에 못 낀다. 시간 내고 돈 들여 굳이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관객도 비평가도 이 영화를 좋아했다."일상 포착은 이제 그만" 물론 비판도 있었다. 흥미로운 건 비판의 이유가 호평의 이유와 같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이끌어낼 능력이 모자란 감독이 배우들 뒤로 숨어버린영화”,"나무
한국영화의 이상한 경향, 코드3 - 오인된 일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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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복한 가족들은 서로 닮은 데가 많다. 그러나 모든 불행한 가족은 그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불행하다. - 톨스토이결혼 8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부부가 있다고 하자. 집 팔고 논 팔아서까지 인공수정을 감행하는 이들은 부부애도 남다르다. 남편은아내가 불임이라는 사실을 감추며 스스로에게 결격사유가 있다고 주장하고, 아내는 가임기가 되면 남편의 출장지로 쫓아갈 정도로 자신들의 아이를희구한다. 그런데 단 하루를 살아도 내 새끼인 자신의 피붙이를 간절히 원하는 부부에게 막상 그들의 근원적인 혈맥은 보이지 않는다. 맞벌이부부가 한 20년은 모아야 살 수 있을 것 같은 팬시한 집에서 시댁이라는 명패와 연관된 인간은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얼씬거리지 않는 이상한부부. <하루>라고 이름붙은 멜로영화 속에는 <편지>나 <약속>부터 이어온 대한민국 신파의 어떤 기조, 슬픔이 넘쳐나는 자리에서 아버지와어머니를 밀어내버린, 공중에 붕 떠버린 한국영화의 어떤
한국영화의 이상한 경향, 코드2 - 지워진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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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의 일본영화에 대해 일본의 어떤 평자들은 이른바 ‘사인(死人) 영화’라는 것이 당시 한 가지 중요한 트렌드를 이루었다고 지적한적이 있었다.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영화들, 예컨대 이와이 순지의 <러브 레터>(1995)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1995),그리고 오구리 고헤이의 <잠자는 남자>(1996) 등이 하나같이 ‘부재하는 사자(死者)’와 어떤 식으로든 합일을 이루려 한다는 이야기를담고 있는 영화들이었던 것이다.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가미카제 영화’들 최근 나오는 한국영화들을 조금이라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이와 꼭 같지는 않더라도 죽음에 거의 강박적으로 집착한다는 하나의 특징적인 양상을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최근의 한국영화들은 앞서 이야기한 일본영화들과 어떻게 다른가부터 먼저 지적해보도록 하자. 단적으로말해서, 최근의 몇몇 한국영화들은 죽음에의 이끌림에서, 부(負)의 미학을 전통으로서 지녀왔던 일본
한국영화의 이상한 경향, 코드1 - 죽음에의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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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의 집착, 지워진 가족, 강박적 유머, 가학과 엽기■최근 한국영화에 만연하는 퇴행의 코드들의아스러운 점은 갑자기 한국영화가 빈곤해져 버렸다는 점이다. 1998년에 나온 화제작들의 목록만 적어봐도 상황은 너무 명료해진다. <강원도의 힘><조용한 가족><여고괴담><기막힌 사내들><퇴마록><정사><처녀들의 저녁식사><아름다운 시절><미술관 옆 동물원>.대부분 흥행에도 성공했지만, 문제는 흥행성적이 아니다. <강원도의 힘>만 빼면 놀랍게도 모두 신인의 데뷔작인 이 영화들은 나올 때마다 관객과비평가 모두에게 각각 다른 의미지만 발견의 기쁨을 선사했다. 신인의 비중은 다소 줄었어도 1999년에도 이런 추세는 지속된다. <박하사탕><반칙왕>으로떠들썩했던 2000년 상반기가 지나자 갑자기 어두워졌다. 여름부터 더 크고 더 많은 영화들이 쏟아졌지만 <공동경비구역
한국영화 퇴행징후 5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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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sonaten/ Autumn Sonata
1977년, 출연 잉그리드 버그만, 리브 울만, 레나 니만
베리만의 세계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재능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고통받으면서도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무능력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가을 소나타>의 세 모녀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원하게 지내오던 큰딸 에바와 어머니 샤를로테는 어떤 새로운 국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7년 만에 재회하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증오해왔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고 황망히 헤어질 뿐이다.
베리만의 많은 영화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을 소나타>에서도 비명을 동반하는, 죽어가는 자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묘사된다. 샤를로테와 에바가 서로의 증오심을 고백하는 그 시간에 <외침과 속삭임>의 아그네스처럼, 죽음을 기다리는 또다른 딸 헬레나는 침실 바닥에 뒹굴며 애타게 그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 <가을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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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kningar och rop/ Cries and Whispers
1971년, 출연 하리엣 안데르손, 리브 울만, 잉그리드 툴린, 카리 실반
베리만적인 세계에서 여성들이 배제된다는 것은 알모도바르적인 세계에서 그런 것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그 베리만을 두고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모든 여성들이 나를 감동시킨다”고 언젠가 베리만이 고백한 것처럼, 그의 우주가 많은 부분 여성들의 세계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은 아주 분명한 사실이다. 여성들을 경이로워하는 눈으로 관찰하며 보듬을 때 베리만의 영화들은 특히 미묘하고 불가사의하며 또 매혹적인 것이 되곤 한다. <외침과 속삭임>은 <페르소나>(1966)와 함께 그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로 첫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다.
영화는 네명의 여자들, 즉 죽어가는 아그네스를 거쳐 그녀의 동생인 마리아, 언니 카린, 그리고 하녀 안나까지 차례대로 옮겨가며 그녀들 감정을 섬세하게 어루만진다.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 <외침과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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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som i en spegel/ Through a Glass Darkly
1961년, 출연 군나르 비외른스트란드, 하리엣 안데르손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를 다루지 않는 드라마는 흥미가 없다.” 유진 오닐의 이 말을 자주 인용했고 또 그것에 동의했던 베리만은 60년대에 들어오면서 신과 믿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천착하는 일련의 영화들을 만든다. 흔히 ‘신앙 3부작’이라고 불리곤 하는 그 영화들은, 베리만의 말을 직접 빌리자면, 믿음의 ‘위축’이라는 주제로 한데 묶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어두운 유리를 통해>는 <겨울빛>(1962)과 <침묵>으로 이어지는 바로 그 3부작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작가인 아버지 다비드, 그의 딸 카린과 남편 마르틴, 그리고 카린의 남동생 미누스, 휴가차 외딴 섬을 찾은 이 네명의 가족에게만 전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영화 <어두운 유리를 통해>는 우선 가족 드라마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베리만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 <어두운 유리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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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gfruk llan/ The Virgin Spring
1959년, 출연 막스 폰 시도, 군넬 린드블롬
북구의 중세 전설을 토대로 만든 <처녀의 샘>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제7의 봉인>과 “신은 과연 침묵하고 있다”고 p>말하는 <침묵>(1963) 사이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이건 <처녀의 샘>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진 역사적 시기의 측면뿐 아니라 신학적인 주제에 대해 이 영화가 취하는 태도의 측면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다. <처녀의 샘>은 부조리하게도 순결한 영혼이 오히려 고난을 겪어야만 하고 그런데도 신은 그저 방관하고만 있는 이 사악한 세상을 통탄할 것처럼 진행된다. 순정한 영혼을 지닌 소녀 카린은 교회에 가던 도중 양치기 형제들을 만나 그만 겁탈을 당한 뒤 살해당하고 만다. 이 사실을 안 카린의 아버지 퇴레는 양치기 형제들을 모두 죽인다. 퇴레의 이 ‘잔인한’ 복수는 과연 침묵하고 있는 신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 <처녀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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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ultronst llet/ Wild Strawberries
1957년, 출연 빅토르 시외스트룀, 비비 안데르손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경력에서 1957년은 특별한 한해였으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자신의 대표작이자 세계영화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제7의 봉인>과 <산딸기>가 모두 이 한해에 공개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외형상으로는 확연히 다른 이 두편의 영화는 상당한 친연성을 갖고 있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둘다 ‘탐색’(quest)의 로드 무비라는 점이 그렇다. <제7의 봉인>에서 기사 블록의 귀향기가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여정이었다면, <산딸기>에서 이삭 보리 교수의 여정은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해가는 여정이었다. 다시 말해, 그 두 주인공의 여행이란 공히 물리적 이동이라기보다는 영혼으로의 침잠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의 것인 셈이다.
<산딸기>는 이삭 보리라는 한 노회한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 <산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