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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t sjunde inseglet/ The Seventh Seal
1957년, 출연 막스 폰 시도, 군나르 비외른스트란드
“나는 믿음이 아니라 지식을 갈구합니다…. 나는 신이 당신의 손을 내밀며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고 있습니다…. 두려운 나머지 우리는 어떤 상(像)을 만들어내서는 그걸 신이라고 부릅니다.” 헛되었던 10여년간의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기사 안토니우스 블록이 원한 것은 이 고통스럽고 가혹한 세상에서 신의 존재를 감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요구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신은 여전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과연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제7의 봉인>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귀향하는 기사 블록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종의 로드 무비이다. 그의 여정이란 곧 ‘질문의 여정’이다. 자신 앞에 불쑥 나타난 ‘죽음’에 블록이 체스 게임을 제안한 것은 심연의 공포로서의 죽음을 피하거나 미뤄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 <제7의 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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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arnattens leede/ Smiles of a Summer Night
1955년, 출연 군나르 비외른스트란드, 에바 달벡
지나치게 침울했고 또 지나치게 예민했던 베리만은 어려서부터 유머 감각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건 아득한 절망의 끝까지 다가가는 그의 많은 영화들을 보고 나면, 굳이 그 자신의 술회를 직접 듣지 않더라도 손쉽게 유추해낼 수 있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쾌활함의 기질이라곤 전혀 없었을 듯한 그 베리만이 어울리지 않게도 코미디영화를 만들 때도 있었다. 50년대 초·중반, 자신의 말에 따르면 단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그는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일련의 영화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여름밤의 미소>는 베리만의 그런 가벼운 초기 영화들 가운데에서 단연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이다.
중년의 변호사인 프레드릭은 자기 아들 연배의 젊고 사랑스런 안을 새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그녀와는 아직도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 <한여름밤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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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3월24일부터 하이퍼텍 나다에서 열려
영화를 ‘예술’이라 칭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마지막 머뭇거림을 지워주었던 영화 철학자 잉마르 베리만. 그의 영화 7편이 오는 3월24일부터 4월12일까지 하이퍼텍 나다의 감독 주간 영화제를 통해 필름으로 상영된다. <한여름밤의 미소>(1955)부터 <가을 소나타>(1978)까지, 북구에서 날아온 ‘일곱개의 봉인’을 미리 뜯어본다. 편집자
잉마르 베리만(1918∼)은 자신의 창조력은 유년기와의 대화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창조력의 기반으로서 베리만의 과거로 돌아가보면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루터교 목사인 엄격한 아버지는 죄지은 아들을 따끔하게 벌하고자 그 아들을 벽장 속에 가둬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못된2 아들은 벽장 속 괴물이 혹시 발가락을 뜯어먹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두려워 떨고 있다. 아마도 베리만은 이처럼 지워지지 않는 유년기의 한 장면 속에서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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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이란혁명 전까지 외국에 배급된 이란영화는 몇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영화를 주로 배급한 나라가 프랑스였다. 이란영화가 소개된것은 베니스나 칸, 베를린, 로카르노와 같은 국제영화제에서였고 메흐르지의 <암소>나 샤히드 살레스의 <정물>과 같은 다수의 영화들이 수상했다.프랑스에 본격적으로 이란영화가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부터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바흐람 베이자이, 샤히드 살레스, 아미르 나데리,파르비즈 키미아이와 같은 주요 이란감독의 영화들을 상영하는 사이클이 조직되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비평가들이 이란영화를 발견하게 되고이란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또 시네필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이후 낭트 제3대륙영화제에서 프랑스 배급사(마레 필름)가 나데리의<수색>를 수입해 81년 배급했다. 칸영화제에서도 R. 푸야의 <민중의 옹호를 위해>가 큰 성공을 얻어 영화제 뒤 파리에서 개봉되었다.이후 86년 낭트 제3대륙영화제
이란영화가 알려지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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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향기>에서 <천국의 아이들>까지, 이란영화는 어떻게 세계를 사로잡았나 모흐센 마흐말바프에 따르자면 이란에는 2만명의 시인과 15만명의 갸페(이란의 카펫) 만드는 이가 있는 나라이다. 그리고 15만명의 갸페만드는 이는 단순한 기능인이 아니라, 모두가 예술가라고도 하였다. 각기 자신의 디자인대로 갸페를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이란영화를 이해하는 첫걸음에 불과하다(우리는 이란의 문화 전반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 80년대 이후 이란영화가 세계무대에서 각광받는이유는 이란영화의 저변에 깔린 페르시아 문화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80년대 중반, ‘유럽영화는 죽었다’고 하였을때, 세계영화계가 발견한 새로운 신천지는 중국과 이란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과 이란영화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럽게 나뉘고 있다. 중국영화는몇몇 뛰어난 작가의 출현에 머물렀지만, 이란영화는 영화사를 뒤흔드는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2000년
이란영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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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
오디션을 할 때 지나 데이비스가 참 잘 대해줬던 기억이 난다. 정확히 일주일을 기다렸는데,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별 근거없이 내가 선택될 것 같았는데, 그 예감이 적중했다. 그리고 난 해냈다.
<흐르는 강물처럼>
내가 연기한 캐릭터 폴의 치명적인 결함은, 아닌 척 괜찮은 척 위장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의 평화를 추구한다. 폴은 절대 평화와 자유에 다다르는 길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해 방황하다가 내면의 모순과 갈등 때문에 파멸한 것이다.
<가을의 전설>
영화에서 내가 어떻게 등장하리라는 걸, 그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 거라는 걸,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들판을 가로질러 말을 타고 달려오는 내 모습을 보며 ‘아차’ 싶었다. “저런, 그랬구나.”(“Oops, I see.”)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과연 내가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브래드 피트 [2] - 브래드 피트가 말하는 ‘나의 출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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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에서 <스내치>까지
할리우드의 연인에서 연기자로 변모해가는 배우 브래드 피트
1999년 11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할리우드 파워맨 100인 리스트에서 오랜 단골 브래드 피트를 떨궈냈다. 96년부터 내리 3년간 온갖 장르와 캐릭터를 갈지자로 오가며 부진한 성적을 보인 브래드 피트는 케빈 코스트너와 더불어 졸지에 ‘지는 별’이 돼버렸다. 결정적으로 당시 개봉작 <파이트 클럽>의 흥행 성적이 저조해, 배급사인 폭스를 실망시킨 탓이 컸다. 그러나 당사자인 브래드 피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리우드가 그의 남은 상품가치를 측량하며 배우로서의 생명력을 의심하고 있을 때, 그는 유유히 영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의 감독 가이 리치의 새 작품에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흥정하지 않았다. 배역의 비중도, 성격도, 개런티도 논외였다. 무조건 출연하기만 하면 됐다.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
브래드 피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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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용 아저씨는 춘천 육림극장의 영사기사다. 원래 나이는 쉰일곱, 호적 나이로는 쉰넷. 초로의 나이지만 열여섯에 시작한 영사기사 경력이벌써 40년이 넘었다. 그를 만나러 육림극장을 찾아가는 길.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여 한 시간 반 남짓, 춘천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찾아간 육림극장은 닭갈비 골목이 있는 춘천시내 명동, “개고기 팝니다” 팻말이 즐비한 중앙시장 옆에 있었다. 흰 페인트칠이 돼 있는 오래된극장 외벽에는 아직도 사진 대신 그림 간판이 걸려 ‘상영프로’와 ‘다음프로’를 알리고 있었고, 극장 안 어둑한 매점에는 오징어, 팝콘,바나나우유가 그늘 속에 놓여 있었다. 예쁜 제복의 여자직원 대신 매표구에도 점퍼를 입은 아저씨가 떡 하니. “심상용 영사기사 아저씨를 만나러왔는데요”, 말을 물으니 올라가보라 한다. 영사실은 어디에 있을까. 일요일 낮인데도 관객은 별로 없고, 어둠 속에 몇번인가 발길은 계단턱을더듬는다. 영사실 창에선 예의 빛다발이 쏟아져나오는데 그곳으로 가는 문은 어디
마음은 언제나 꼬마 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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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였을까? 마천동, 5호선 열차가 몇 안 되는 승객을 내뱉고 잠시 쉬어가는 종착역. 남한산성 아래 있다는 그의 집을 찾는 길에, 비가내렸다.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부터 최근작 <내 마음의 풍금>까지, 태동하던 이 땅의 영화가 나고, 옹알이를 하는 모습, 걸음마를 떼는순간, 갈 길 몰라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거쳐 든든한 청년이 되기까지. 긴 세월,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한국영화의 성장을 지켜보았던 배우 박광진(77)은,그러나 더이상 청년이 아니다. 마치 손자에게 키를 나누어 주어 점점 키가 줄어든다 했던 <축제>의 동화 속 할머니처럼….초등학교를 따라 뻗은 길, “이리 오라”며 손짓하는 한복차림의 노인의 볼은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 대한 반가움 때문인지 오랜만에 홍조를띠고 있었다. “배우집이라 부잣집일 줄 알았을 텐데…, 이런 누추한 곳에서 두 노인네만 살아요.” 몇개의 골목을 지나 들어선 곳은 붉은벽돌의 빌라 지하방. 손자가 만든 조잡한 종이 카네이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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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단역배우와 초로의 영사기사에게 들은 영화 옆의 삶, 영화 뒤의 흔적들영화라는 매체가 태어난 이래,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최고의 순간은 여전히, 단독자로서의 관객과 스크린에투사되는 이미지와의 은밀한 만남일 것이다. 이 짧은 만남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을 소비한다. 그중의 몇몇은, 아니 너무 극소수만이,스타로 거장으로 혹은 장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새긴다. 그리고 대다수는 기억되지 못한 채 육신의 생을 마감한다.여기 두 노인이 있다. 아마도 100년 뒤의 한국영화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다.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는, 그들 앞에 섰던많은 사람들처럼, 그들의 생도 온통 영화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스크린 위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단역으로, 다른 한 사람은먼지 입자까지 눈에 박혀오는 좁은 영사실에서 평생을 살았다. 무례가 아니라면, 이들도 시네마 천국의 아이들이다. 말하지 못한 상처와 아픈회한이 왜 없으랴마는, 이들은 영화와의 생활을 행복했다고
시네마천국의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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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8일 한국영화계에 작은 ‘기록’ 하나가 수립됐다. 구스닥이라는 인터넷 업체가 네티즌을 대상으로 실시한 <엽기적인 그녀>의 1억원짜리투자 공모가 6시간40분 만에 마감된 것. <엽기적인…>은 이틀만에 1억원을 모은 <리베라 메>의 ‘기록’을 갱신했지만, 심마니 엔터펀드가실시하는 12일의 <친구> 투자 공모에 9일 현재 공모액 1억원 중 이미 6천만원이 대기 중이어서 그 영광을 오래 누리지는 못할 전망이다.네티즌들의 돈을 모아 영화에 투자하는 네티즌 펀드가 최근 들어 폭발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99년 11월 인츠닷컴이 <반칙왕>에 대해1억원을 공모한 것으로 시작된 네티즌 펀드는 엔터펀드, 엔터스닥(옛 무비스탁), 구스닥, 한스글로벌, 문화거래소 등이 속속 참여하며 점차그 폭을 넓혀가고 있다. 특히 <반칙왕> <공동경비구역 JSA> <자카르타> 등이 높은 수익률을 올려 투자자에게 고액을
충무로에 부는 네티즌 펀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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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펀드의 선발주자로서 최근의 열기를 어떻게 보나.한마디로 과열됐다고 본다.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은 영화들에 대해서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이는 네티즌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에 불과하다.네티즌 펀드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오프라인에서 진행하는 마케팅도 중요하지만 인터넷 환경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온라인 마케팅이 갈수록 중요한 것으로 떠올랐다. 네티즌 펀드투자자들은 한마디로 걸어다니는 홍보맨이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인터넷 공간에서 열성적으로 영화의 장점을 알리려고노력한다. 우리는 네티즌 펀드의 주요한 기능이 투자자에게 수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에 대한 관심을불러일으키고, 투자자들이 영화에 좀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우리는 투자자로부터 어떠한 수수료도 받지 않는다.결국 투자자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투자이익 아닌가.물론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액을 투자해 엄청난 이익을 노리는 투자자를 원치
김정영 인츠닷컴 영상사업부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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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주·조선희·최보은·안판석 - 세 아줌마와 한 아저씨, <아줌마>를 논하다과거지사. 최보은씨는 축시(丑時) 즈음 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민가를 찾아 떠나는 일을 종종 벌였는데, 어느 날 일산 정성주 작가의 집도레이더망에 걸려들었다. 새벽녘 일어나서 글을 쓴다는 작가와 잠을 거르고 달려온 옛 <씨네21> 기자 최씨는 저번에 보고 두 번째네요, 라고믿기지 않는 말을 나누고는, 정담으로 아침해를 맞았다. 야간 의기투합 얼마 뒤, 단지 밤잠없다는 이유로 끌려갔던 구 기자는 정성주 작가의집을 다시 찾는다. 정성주 작가는 <추억>이라는 드라마를 집필하고 있었고, 명목은 작가 인터뷰였다. 인터뷰 기사를 작성해 넘겼는데 어중이떠중이구 기자가 쓸 리 없는 아름다운 글이 되어 나왔다. 거기에는 비밀이 있었으니, 당시 데스크이자 당대의 명문장가 조선희씨가 보기 드물게 감동받은드라마 <추억>에 ‘의욕’을 보인 결과였다. <씨네21> 새로운 영
아줌마들의 저녁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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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렉>의 주요 시퀀스 시사를 마친 2월15일 늦은 오후, 소강의실 크기쯤 되는 PDI 스튜디오 영상실에서는 투어의 마지막 순서로 제프리카첸버그와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교실도 아니고, 형식적일 필요가 없지 않냐”고 입을 연 카첸버그는, 10명 좀 넘는 취재진에게 “난 물지도않고, 오늘 샤워도 했으니 가까이 와도 된다”며 편하게 둘러앉자고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카첸버그는 <인어공주>에서 <라이온킹>까지, 쇠락했던디즈니의 장편애니메이션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애니메이션 왕국 디즈니의 새 중흥기를 이끈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파라마운트영화사의 중역으로재직중이던 84년 월트 디즈니의 사장으로 스카우트된 뒤, <귀여운 여인>(프리티 우먼) 등 실사영화와 89년 <인어공주>를 필두로 한 일련의애니메이션 흥행작들을 제작했다. 94년 마이클 아이스너 회장과의 불화로 디즈니를 떠나기 전까지, <알라딘> <라이온킹> 등으로
“디즈니는 디즈니,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