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 9일 막을 내린 야마가타 국제다큐멘터리필름페스티벌은 올해 한국 여성다큐멘터리감독들에게 충실한 가을걷이 자리였다. 모두 여섯명의 감독이 참가해 4명이 수상하거나 특별언급되는 쾌거를 이루었다.호주로 이민간 멜리사 리(이규정) 감독의 <소신>과 <사랑에 관한 실화>가 ‘아시아천파만파’ 부문에서 대상격인 오가와 신스케상을, 황윤 감독의 <작별>이 장려상을 받았고, 김소영 감독의 <하늘색 고향>이 스페셜멘션을 받았다. 계운경 감독의 <팬지와 담쟁이>에는 넷팩상 스페셜멘션이 돌아갔다. 오가와 신스케상 수상은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이후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다. 멜리사 리 감독은 가족이라는 사적인 주제를 독자적인 접근을 통해 유쾌하게 다룬 <소신>과 미국에서 만난 아시아 남성(한국계와 일본계)과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재구성한 <사랑에 관한 실화>라는 대조적인 두 작품을 통해 뛰어난 작가성을
한국 여성다큐멘터리, 질주하다
-
이순열(43) 대표는 1989년에 세경영화사에서 <걸어서 하늘까지> <그대 안의 블루>를 제작했고, 94년에 순필름을 차려 <개같은 날의 오후> <본투킬> 등을 내놓았다. 가장 최근 작품은 98년에 현진영화사 이름으로 내놓은 <기막힌 사내들>로, 이번 <조폭 마누라>로 3년 만에 재기에 성공했다.추석연휴에 가장 바쁜 제작자였을 것 같다.어제도 새벽까지 집에 안 들어가고 극장 주위를 헤맸다. (웃음) 지금도 실감이 잘 안 난다.예상한 결과인가.3년 동안 헤매다가 만든 영화인데 자신감이 있었겠나. 본전이 목표였고, 처음에는 전국관객 60만∼70만명 정도 들면 되겠다 싶었다. 촬영횟수가 늘면서 제작비가 더 들어 중간에 기대수치를 전국 100만명으로 올려잡은 게 전부다.봄날은 간다>의 우세를 점친 이들이 많은데.봐라. 현진영화사 대 싸이더스, 신은경, 박상면 대 유지태, 이영애, 이순열 대 차승재, 조진규 대 허진호. 게
“돈 번 만큼 욕도 많이 먹을 것 같다”
-
“<봄날은 간다>가 갔어요. 완전히 갔어요. 같은 날 개봉한 <조폭 마누라> 에 참패나 다름없는 스코어로 밀리고 있어요.” “그거 보세요. 평론가들이 아무리 거품을 물고 흥분한들 말짱 헛일이라니까요. 이런 판국에선 극찬이나 혹평이나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도박판에서 구경꾼이 훈수를 두다가 뺨맞는 꼴이에요.” 연휴 마지막날 밤에 동업자와 통화를 마친 뒤 허망함과 막막함에 몸을 떨었다. 때는 바야흐로 영화 글쟁이들의 퇴출시대로 접어들고 있구나.<봄날은 간다>와 <조폭 마누라>의 대결이 처음부터 흥미를 부풀린 까닭은, 두 작품이 워낙 색깔이 다른데다 스크린 수도 엇비슷하게 확보했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팽팽한 접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가도 한참을 빗나갔어. ‘뒈지게 웃기는 칼부림’이라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극장을 나서는 관객은 무죄지. 그렇다고 ‘뒈지게 웃긴’ 이들에게 죄가 있다는 뜻이 아니야.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세태에 죄를 물어야겠어.
무조건 웃기면 그만이라고?
-
예기치 않은 홈런이 터져나올 때가 있다. 홈 플레이트를 밟는 입장에서야 이유 따질 것 없이 기쁜 일이지만, 상대 팀은 갑자기 뺨을 한대 얻어맞은 듯한 얼얼함을 느낄 터. 지난 10여년 동안 제작된 한국영화 830여편 중 흥행 순위 ‘베스트 50’에 랭크된 영화들 역시 모두가 개봉 전부터 기대를 모은 ‘홈런타자’였던 것은 아니다. 이중에는 개봉 전 평단과 언론으로부터 외면당한 영화들이 상당수 끼어 있다. 그래서 “뚜껑을 열어보기 전엔 모른다”는 게 흥행에 관한 제1경구로 남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1997년 정통 멜로영화의 부활을 알린 <편지>는 ‘대박’의 기운을 예감하지 못한 경우다. 같은 해 개봉한 <접속>이 통신을 매개로 한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신선한 설정, 신인감독답지 않은 꼼꼼하고 세련된 연출 등으로 평단으로부터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어낸 데 비해 <편지>는 낡은 신파 멜로영화의 공식을 답습해 한국영화를 후퇴시켰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기 전엔 모른다
-
-
‘컨셉트 무비’의 정착?하지만 이런 견해는 지나치게 비관적인 측면이 있다. <봄날은 간다>를 배급한 시네마서비스 관계자는 <조폭 마누라>의 흥행은 예견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조폭 마누라>가 추석특수를 최대로 누린 예라고 설명한다. “대대로 추석에는 액션코미디가 흥행했다. 추석에는 1년에 영화 1편도 잘 안 보는 관객이 극장에 나온다. 그들이 쉽게 선택하는 영화는 액션영화나 코미디이고 올해는 <조폭 마누라>와 같은 장르에서 경쟁할 영화가 없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나 멜 깁슨의 액션영화 한편만 있었더라도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이런 견해는 올 추석 외화들의 부진을 보면 수긍이 간다.성룡의 <러시아워2>는 1주 앞서 개봉, 추석연휴 6일간 서울 15만1천, 전국 33만2900명을 동원했다. 이는 <조폭 마누라> <봄날은 간다>에 이은 3위의 기록. 성룡의 영화가 한국시장에서 고정관객을 갖고 있지만 늘
엽기적 흥행, 게임의 규칙을 뒤흔들다
-
추석연휴 극장가에서 본 풍경 하나, 깻잎머리 소녀 둘이 극장 앞 광고판을 보며 무슨 영화를 볼까 고르고 있다. <조폭 마누라> 포스터를 본 소녀가 말한다. “야, 이거 정말 아무 생각없이 만든 영화같애.” 옆에 있던 친구 왈 “그래, 그럼 재미있겠다. 이거 보자.” 풍경 둘, 최근 몇년간 매진사례가 별로 없던 스카라극장에서 <조폭 마누라>는 추석연휴 마지막날인 10월3일 3, 4, 5회 매진이 나왔다. 오랜만에 극장에 나온 40대 부부는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순 없다”며 “입석이라도 보겠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관객에게 오뎅을 팔던 아줌마의 말씀, “정말 명절 분위기 나네. 스카라극장 앞에서 이렇게 장사 잘되긴 처음이야.”<조폭 마누라>, 최단기간 전국 100만 동원기록올 추석 화제의 중심은 단연 <조폭 마누라>였다. 이 영화는 개봉 5일 만인 10월2일 전국 100만명을 돌파, <친구>와 <엽기적인 그녀&
엽기적 흥행, 게임의 규칙을 뒤흔들다
-
<고양이를 부탁해>의 숨은 연기자를 꼽으라면 당연히 다섯 아이들의 손을 거쳐 성장해나가는 고양이 ‘티티’다. 새로운 주인에게 옮겨질 때마다 그 조그만 생명이 보여준 아쉬움 가득 찬 눈망울과 떨어져지기 싫어하는 발동작, 장례식장의 우울한 지영의 얼굴을 근심스런 눈길로 올려다보던 표정까지…. 티티는 온전히 일인분의 연기자의 몫을 해냈다. 그러나 하나의 티티를 연기하기 위해 스쳐지나간 고양이만 12마리. 결국 티티로 명명된 4마리의 고양이들이 스크린을 어슬렁거리기까지 ‘줄무늬 고양이를 구하라’는 미션을 받은 스탭들의 심정은 충무로 하늘에 뿌려댄 ‘찌라시’만큼이나 절박한 것이었다. 편집자크랭크인 날짜가 다가오면서 나의 스트레스는 거의 극에 다달았다. 누군가가 웃으면서 “고양이는 캐스팅 했어?”라고 묻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얼굴에 줄이라도 긋고 고양이로 출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11월 초 제작부 지영 언니와 처음 고양이를 찾기 시작했을 땐 우리가 원하는 꼭닮은 줄무늬 아
고양이 좀 찾아줘!
-
상상으로 더듬는 지난 시간들오늘, 우리의 사소한 행동 하나도 늘 과거의 어떤 지점과 닿아 있게 마련이다. “기본적인 이해가 있다면 대사의 뉘앙스나 동작의 디테일은 아이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죠.” 무너져가는 집과 가난의 무게에 눌려 있을지라도 친구에게 꾼 돈으로 콩나물 대신 새 휴대폰을 사고, 균열이 이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떡볶이를 떠올리고, 앓는 할아버지가 누워 있는 집 다락방에서 남몰래 머리색을 고치는 아이들. 그저 나쁜 애, 착한 애, 멍청한 애, 우울한 애로 판단할 수 없는, 한 면만 가진 종이인형이 아닌 다면체의 복합적 인간들이 숨쉬는 공간. ‘이 아이, 이 시나리오에 나타나기 전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시나리오를 기본으로 배우들이 유추해낸 자신들의 전사(前史)는 단순히 지문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묘한 감정의 흐름까지 포착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렇게 태희가 멍하니 만두를 씹어 삼킬 때, 카메라의 움직임도 그 흔한 음악 없이도 울컥
스무살, 길 떠나는 나이, 난 삶이 두렵지 않아!
-
우리도 그들처럼, 배역대로 살아보기이은주, 은실이 관찰한 ‘구슬장사의 하루’출근: 오후 4∼5시 사이영업: 오후 5시∼새벽까지저녁식사시간: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장사를 대신 맡아줄 사람이 없으므로 물건이 보이는 가까운 음식점에서 먹는다. 식사 도중 손님이 오는 게 보이면 달려갔다 다시 들어와 식사함.자리차지: rule(법칙)이 있기 때문에 아무나 장사할 수 없다. but 자릿세는 내지 않음. 먼저 차지하면 임자.가격조사: (모두 수공예품) 빗 → 큰 거 5천원, 작은 거 4천원, 실핀 1천원… 밍크왁구(밍크털 달린 삔) 4천원.총장사비용: 100만원(100만원이면 장사도구 마련해서 장사할 수 있다)잠자는 시간: 아침 내내 → 낮잠을 잔다영업하지 않는 경우: 비가 올 때 →but 심하게 오지 않고 부슬부슬 내릴 경우 파라솔 치고 파는 경우가 많다.영업기간: 1주일 내내 → 하루라도 빠지면 손해이므로 (쉬는 날이 거의 없다)수입: 한달평균 150만원, 하루평균 장사 잘될 때 → 1
스무살, 길 떠나는 나이, 난 삶이 두렵지 않아!
-
스무살의 고개를 넘어가는 다섯 아이들의 세밀한 감정과 소소한 재미들을 스킬처럼 촘촘히 박아넣은 <고양이를 부탁해>는 어느 하나 빠지면 심심해져버리고 마는 한 그릇의 잘 배합된 요리다. 배우로 탤런트로 패션모델로 CF모델로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 분양되어온 서먹하고 낯선 고양이들, 배두나, 이요원, 옥지영, 이은주, 이은실. 이들이 태희로 혜주로 지영이로 비류로 온조로 빚어지기까지, 큰언니 같은 정재은 감독은 아이들의 웃음과 한숨이 뿌려질 인천을 함께 걸으며 각기 다른 그 공간의 느낌을 담아오게 만들었고, 이미 세상의 것이 되어버린 비디오 속 인물들을 슬쩍 훔쳐보게도 해주었으며, 각 인물의 전사(前史)를 상상하게 하고, 신마다 내레이션을 쓰면서 자신의 배역을 이해하고, 친구의 내레이션을 대신 써내려감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세번의 계절이 지나가는 동안 아이들은 하룻밤 빚어낸 뽀얀 인형이 아니라, 20년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은, 그 작은 가슴 안에 희로애락을
스무살, 길 떠나는 나이, 난 삶이 두렵지 않아!
-
신 영화의 캐릭터들은 상당히 독특하다. 이른바 말하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조금씩 어긋나 있다. 아멜리에는 물론이고, 도미니크 피뇽이나 화가 등 거의 모든 인물들이 그렇다.사람은 아주 연약하면서도 동시에 몬스터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도 알고보면 내면의 ‘괴물성’ 같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그것을 영화 속 캐릭터로 추상화하여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내가 할리우드에 가서 <에이리언4>를 찍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 영화 속의 괴물, 그리고 내 영화들 속에서 등장하는 괴물 같은 사람들은 모두 사람들이 가진 이면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내가 그들을 통해 특별히 사회를 비판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왜, 트뤼포가 그러지 않았나? ‘내게 말할 것은 없다. 다만 많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I have nothing to say, I have a lot of story)<아멜리에>에는 다양한 매체의 반복되는 재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비정상이라고? 우리 안에 괴물이 살고 있는 걸”
-
<델리카트슨 사람들>에서 <에이리언4>까지, 판타지의 미궁을 지어내던 장 피에르 주네가 이번에는 좀더 따뜻하고 행복해진 영화를 들고 찾아왔다. 지난 부천영화제에 폐막작으로 선보인 <아멜리에>에선 그동안 주네의 영화들이 보여주던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도시와 기괴한 인물들이 모두 지워져 있었다. 대신 현실을 기적으로 바꿔내는 아름다운 여인 아멜리에와 낭만적이고 동화적으로 가공된 도시 파리가 등장했다. 영화와 함께 부천을 방문했던 장 피에르 주네는 할리우드에서 작업한 <에이리언4> 이후 파리로 돌아가 처음 만든 이 신작에 각별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기억과 사랑을 토로하는 영화이며, 현실 속에 숨어 있는 판타지를 발견하는 영화, 그리고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영화”라며.<아멜리에>는 당신의 전작들에 비해 상당히 밝아졌다. 어떻게 구상했나.<에이리언4>를 찍느라 몇달간 LA에 머물러야 했다. 할리우드의 작업은 흥미롭기는
“비정상이라고? 우리 안에 괴물이 살고 있는 걸”
-
파리, 그러나 현실에 없는전혀 다른 뭔가를 시도해야 하는, 절박하다면 절박한 계기도 있었다. 55년 로안에서 태어난 주네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전화가설공으로 일할 당시 슈퍼8mm 카메라를 장만해 독학으로 영화를 익혔고, 광고와 뮤직비디오와 단편영화를 찍으며 장편 영화로 옮아 왔다. 그에겐 무명시절부터 동고동락해 온 파트너 마르크 카로가 있었고, 카투니스트와 애니메이터로 활약한 전문 디자이너였던 카로는 주네의 영화세계, 특히 시각적인 측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 카로와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이후 결별했고, 조력자인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쥐와도 <에이리언4>이후 함께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주네는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파트너인 카로가 혐오해 마지않던 향수, 복고 등의 센티멘털리즘으로 내달림으로써, 비로소 ‘사적인’ 영화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아멜리에>에서 그의 노스탤지어는 제2의 고향 파리였고, 따라서 시대성과 공간성을 완벽하게 표백
디스토피아의 다리 건너 행복의 나라로
-
장 피에르 주네의 영화세계를 함께 일군 친구들은 더러는 그 곁을 떠나고 더러는 그 곁에 남았다. ‘주네와 카로’표 영화의 한쪽 날개였던 마르크 카로와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이후 헤어졌고, 그들이 만든 이미지를 생생하게 육화해낸 촬영 감독 다리우스 콘쥐는 <에일리언4> 이후 할리우드에 매어있다. 이들의 ‘우호적인 결별’은 그러나,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뜻이 맞는 작품에서 언제고 다시 만나자는 다짐을 해 두었다니까. 주네는 마르크 카로와 74년 앙시 페스티벌에서 처음 만났다. 각기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고 있던 그들은 쉽게 의기투합했고, <탈출> <회전목마> <최후의 참호> 등의 단편을 함께 만들었다. 카투니스트와 애니메이터 경력이 있는 카로는 처음부터 둘의 합작 영화에서 미술을 담당했다. <델리카트슨 사람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에서 번득인 만화적 상상력과 어둡고 기괴한 이미지는 카로의 영향.
함께 꾼 백일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