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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영화는 일본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유럽적인 것처럼 보인다. 유럽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가.외국에 나가면 오히려 차이밍량이나 허우샤오시엔 같은 아시아 감독과 비교되는 편이다. 롱테이크로 찍기 때문인 것 같다. 영향에 대해서라면…. 대학 때 조감독 하던 시기가 지나고 난 뒤에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화들을 집중적으로 본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를 통해서 내 영화의 세계가 훨씬 더 많이 열리긴 했다. 누벨바그 영화들을 보면서 내 영화세계가 형성되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듀오>와 를 보면 정상적인 투숏이 적은 편이다. 보통의 투숏은 숏-리버스숏으로 구성되게 마련인데, 당신의 영화는 한 사람의 표정만 보여주고 다른 사람의 뒤통수를 보여준다든가, 아니면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보여준다든가 하는 식이다.말하는 장면을 특히 좋아하는데, 두 사람이 이야기할 때 리버스숏을 쓰는 것은 아주 습관적인 것이다. 이건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하나의 습관적인 제도에 불과한 것이다. 어쩌
스와 노부히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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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 노부히로의 영화 <듀오>와 <M/Other>의 크레디트를 유심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듀오>의 두 남녀 주연배우들의 이름은 다이얼로그에, 그리고 <M/Other>의 주연배우들의 이름은 스토리에 올라 있는 것처럼, 바로 이 영화들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스토리 구성에 긴밀히 관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스와의 첫 두 영화는 배우들의 영화에의 능동적 참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 영화들은 영화의 전모를 보여줄 수 있는 미리 짜여진 설계도로서 시나리오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대신 스와는 배우들에게 대략적인 상황만을 미리 알려준 뒤 그들로 하여금 자기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능동성과 즉흥성을 발휘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불안정한 하나의 과정이 펼쳐지게 되는데, 거칠게 말하자면 카메라로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기록한 것이 곧 스와의 영화이다. 영화
<듀오>와 로 광주 찾은 일본영화의 새 희망 스와 노부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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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매우 관능적인 환상여행으로서, 데이비드 린치가 <블루 벨벳> 이후, 아니 어쩌면 <이레이저 헤드> 이래 내놓은 가장 강렬한 영화일지 모른다. <로스트 하이웨이>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여러 가지들, 즉 자유롭게 떠다니는 협박의 분위기, 영혼들의 요령부득의 이주, 도발적으로 툭툭 잘려나간 채 꿰매진 플롯 등이 여기서는 멋지게 되살아나 있다.이 영화의 제목을 제공하기도 한 바로 그 거리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일어난 급작스런 한밤중 교통사고로 시작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완벽하게 말이 된다(물론 아주 비이성적인 뜻에서 말이다). 린치의 기이한 누아르풍은 매우 친숙하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론 끊임없이 사람을 놀라게 한다. 서툰 암살 시도가 진공청소기와 화재경보기라는 엉뚱한 두 희생자를 추가로 낳을 때나, 혹은 분홍과 옥색의 급작스런 폭발과 함께 코니 스티븐스의 <내가 너를 사랑하는 열여섯 가지 이유>(
짐 호버먼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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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크 라캉에서 물어보고 싶었으나 감히 데이비드 린치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에서 흔히 부모들은 앉아서 TV를 보거나 음식을 차리는 설정으로 되어 있다. 무기력한 생물학적 부모들이 아이들을 방치하는 사이 아이들은 흑발의 요부에게 이끌리고 정원에서 잘린 귀를 줍는다.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는 오이디푸스 궤적에 대한 완벽한 대리경험을 시켜준다. 흔히 그의 영화에서 무자비한 악당들은 주인공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아름다운 여인을 강제로 소유한 일종의 대리부이기도 하다. 그래서 <블루 벨벳>의 악당 사이코는 끊임없이 ‘이제 어둠이야’라는 말을 되뇌인다. 그곳에서 제프리가 벽장 안에 갇혀 무기력하게 도로시의 정사를 훔쳐보는 대목은 마치 부모의 정사장면을 처음 보는 어떤 원경험의 이미지를 선사한다. <로스트 하이웨이>의 정비공 피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와 금발의 요부 앨리스는 사막 한가운데의 집에서 성적 결합을 시도하는데 남는 것은
데이비드 린치 영화의 정신분석학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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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치의 최근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마지막은 스페인어로 사일런스를 의미하는 ‘실렌지오’로 끝을 맺는다. 침묵. 붉은 커튼 밑에서 ‘밴드도 없다. 오케스트라도 없다’며 립싱크로 크라잉을 애절하게 부르는 여가수. 그리고 영화 <블루 벨벳>에서 여장한 남자가수가 부르는 또다른 립싱크 노래 <인 드림스>의 강렬함. 허공에 맴도는 가짜 립싱크처럼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세상에서 인간의 욕망은 끝없는 공허의 늪을 헤매는 백조의 연가 같은 것이다. 동시에 그 블랙홀의 끝은 인간의 가장 깊은 무의식의 진피에 슬며시 다다른다. 그러므로 린치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10층짜리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하는 것. 극장문을 나서면 그뿐이겠지만, 그 전에는 누구든 일단 현실과 논리라는 망루에서 한번은 아찔한 추락을 감내해야 한다. <이레이저 헤드>나 <로스트 하이웨이>에서처럼 머리가 댕강 잘리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반쯔음은 미쳐 실성하여 세상을 떠돌
<멀홀랜드 드라이브>, 악몽의 린치 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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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먼 남도 유랑길 2001년 11월7일 날씨 맑음.
양수리에서 촬영이 끝나고 다음주에는 선암사에서 유랑을 떠나는 장승업을 찍는다. 나는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아마도 어쩌면 겨울촬영 유랑길에 다시 오게 될 것이다). 이 일기가 너무 길다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 이 촬영장면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내가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의 정말 일부만을 소개한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전문적인 것들은 일부러 지나쳤다. 영화평에서 여러분들이 읽은 대부분의 그럴듯한 말들이 현장에 관한 창작의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아무 도움이 안 된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영화의 지식에 대해서 돌이켜보아야 한다. 사실 영화의 메커니즘은 구체적인 과정을 잘 모르면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 정확하게는 옆에 서 있어도 모른다. 영화 현장에 관한 영화기자들의 기사가 대부분 유사한 것은 그들이 영화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카이에 뒤 시네마> 364호에서 ‘촬영현장 특집’호를 내면서 책임편집을 한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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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도 똑같은 세상의 중심! 2001년 11월1일 날씨 맑음.
다시 양수리 세트장으로 들어왔다. 이날은 낮에 준비를 거쳐서 밤 촬영이 이어졌다.
장면 #123 기생집 일지춘
(김옥균, 개화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장승업과 인사를 한다)
김병문 (나가면서) “아니, 오원 아닌가?” (김옥균을 돌아보며) 오원 장승업이라는 화가입니다. (승업에게) 인사드리게, 수구파들이 이름 석자만 들어도 오금을 못 펴는 고균 김옥균 선생일세.”
김옥균 “정신없이 살다보니 오원 그림 하나 감상할 여가가 없었구먼. 마음 편한 세상이 오면 그림 한점 부탁드리겠소.”
이 장면은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 그리고 안성기 선배의 세션을 보는 것 같았다. 우선 이 일지춘이라는 기생집의 맨 왼편에 있는 정원에 김옥균을 둘러싸고 대화가 벌어지고, 그 옆의 기생집은 방문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에서 방문을 통해 세개의 공간이 이어져 있었다. 방문 프레임은 세개로 쪼개져 있지만, 공간은 이어져 있었기 때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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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성 촬영감독 인터뷰 2001년 10월18일. 날씨 맑음.
<춘향뎐>에서 소리를 찍으셨고, 이번에는 멈춰 있는 그림을 움직이게 하실 참이십니다. 매번 새로운 작업에 도전하면서도 부담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임 감독님이 이 작품을 제안하셨을 때 가졌던 생각이 있으실 텐데요.
정말 굉장히 부담이 갔어요. 움직이지 않는 그림을 때로 움직여야 하고, 살아 있지는 않지만 그 안에 자연이 살아 있고,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사람의 숨소리를 담아야 했으니까요. 한국화에는 영화적 단점이 있어요. 가로가 너무 길든지, 아니면 반대로 세로가 너무 길어서 필요없는 여백이 너무 많이 생긴다는 거예요. 거기에는 감동이 없어요. <취화선> 때문에 화가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림과 동시에 그 과정을 담으면서 그 색채와 앵글이 나와야 한다는 게 엄청난 압박으로 왔어요. 한 4천자 정도를 필름 테스트했어요. 암울한 색채로 담기 위해 브리치 바이 패스(이 효과는 데이비드 핀처의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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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탭들이 영화에 붙길 기다려 2001년 10월16일 오전. 날씨 맑음.
오늘은 새벽 일찍 일어나서 모두 동원되는 날이었다. 엑스트라들이 많이 동원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연출부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이미 분장팀과 합류하고 있었다. 엑스트라들이 많은 날은 연출부들이 분장을 하고 엑스트라들 안으로 섞여 들어간다. 그래서 그들의 동선을 그 안에서 일일이 지시해줘야 한다. 당신이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엑스트라들의 움직임 안에서 그들의 움직임이 그룹지어져 있음과 함께 그들을 이끌고 움직이는 사람을 발견할 것이다. 그 사람이 연출부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다. 이날 촬영은 이미 45회 촬영이었는데, 장면은 장승업이 마흔한살이 되던 1882년 초여름 양반집을 나와 시장거리로 나서면서 떡을 훔치는 거지를 보고 회상에 잠기는 이 영화의 두 번째 장면이었다.
장면 # 2 서울 거리(초여름), 41살
화창한 날씨와 대조를 이루어 황량한 풍경, 포졸들이 각지에서 모여든 처참한 유민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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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 인터뷰2-2001년 10월13일 안개.
새벽 안개가 쏟아지는 날 아침 일찍. <취화선>에는 이 영화의 과정을 일일이 캠코더에 담아서 영화와 함께 완성될 <메이킹 오브 ‘醉畵仙’>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내 생각에 메이킹영화의 최고걸작은 크리스 마르케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난>의 작업과정 일체를 담은 <A.K.>이다). 이 작업은 조선종 PD가 담고 있었다. 그는 매우 섬세한 사람인데 내가 하는 인터뷰도 메이킹 작업에 포함시켜 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하였다. 아마 여기서 진행된 감독님과의 인터뷰의 일부는 다시 메이킹 필름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습니까.
=40% 정도 나간 거 아닐까 싶은데. 느낌은 늘 그런 것처럼 시작할 때는 좀 막막하고 무엇을 하려니 막연한 것이 있어요. 그러나 지금쯤 윤곽이 드러나고, 이제는 모두들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시간인 것 같아요.
-<춘향뎐&g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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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 인터뷰
2001년 10월9일 날씨 아침부터 흐림.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함. 아침에 일어나서 세트장을 처음으로 구석구석 걸어가 보았다. 양수리는 늦가을 아침에는 영락없이 안개가 쏟아져내렸다. 총 2765평(길이 160mx56m)에 한옥기와 26동과 한식초가 35동을 세웠다. 설명에 의하면 이 세트장에 세워진 집들의 자재와 가구들을 일일이 미술팀이 구해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흙담장은 전라남도의 수몰지구에서 가져오고, 건축 목자재는 진부령 육송과 황태 덕장목을 사용하고, 한옥 기와들도 실제 기와를 복제한 우레탄으로 만들었다. 이 세트는 볼수록 신기한 느낌을 주는데 그 힘은 규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길을 이쪽 편에서 보다가 걸어가서 맞은편에서 보면 풍경이 변해서 마치 다른 길처럼 보이게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집에서 방 안까지 세세하게 지어져 있어서, 방 안에서 집 바깥을 찍어도 되고 그 반대로 집 바깥에서 방 안을 찍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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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병도 미술감독 인터뷰
2001년 10월7일 저녁. 날씨 맑음.
이미 <취화선> 팀은 추석이 끝나자마자 이틀 뒤에 양수리 야외세트장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약간의 일이 생겨서 이틀 뒤에나 떠날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상상은 하고 있었지만, 도착하는 순간 펼쳐진 야외세트장은 넋을 잃게 할 정도였다. 이 세트장을 지은 사람은 MBC미술팀의 주병도 미술감독이라고 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세트를 만들었을 때 다른 사람 칭찬을 잘 안 하는 박광수 감독으로부터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세트장"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명불허전. 어쩌면 이건 이제까지 그의 세트 중에서 최고 걸작인 것 같았다.
“이 영화에서 모든 분야가 다 결정되고 난 다음에 미술만 남은 상태였지요. 한국영화는 한 사람과 일하면 그 사람과 계속 일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런데 <춘향뎐>을 작업했던 사람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내가 이제까지 한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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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 고흐와 동시대 화가
2001년 7월16일 날씨 맑음
이 영화의 공식적인 크랭크인은 내가 이 시나리오를 읽은 지 보름 뒤인 7월16일 월요일이었다. 날씨 맑음. 이 자리는 기자들을 부른 첫 번째 현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날 한국화에 관한 세미나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한국화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터넷 서점에서 22권의 한국화 책을 사들고,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영화와 회화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유홍준 선생이 쓴 두권의 <화인열전>에는 장승업이 빠져 있었으며(그런데 안견과 신윤복도 빠져 있었다. 장승업을 고의로 폄하한 것 같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한국화에 관한 책들에서 김홍도와 김정희에 비하면 장승업은 매우 적게 다루어져 있었다(다루어져 있어도 부정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것들이 많았다). 영화에서 화가를 다룬 작품도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고흐를 다룬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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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는 조감독에게 잘 보여야 한다!
2001년 6월19일에서 그로부터 일주일. (온 나라를 황폐하게 만든 가뭄이 이어지던) 날씨 내내 맑음.
이날 집에서 왕가위의 <화양연화>를 보면서 장면을 그려보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씨네21>의 허문영 기자가 무언가 망설이면서 말을 꺼냈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에 가서 일종의 현장일기를 써볼 생각은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냥 하루이틀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함께 먹고 자면서 “임 감독 영화의 현장에서 그 창작자로서의 고뇌와 솜씨를 담아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촬영이 시작되면 현장에 가기 위한 온갖 핑곗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건 고마운 제안이었다.
드디어 명분이 생겼다! 그로부터 닷새 뒤에 허문영 기자와 함께 <취화선>을 제작하는 태흥영화사를 찾아갔다. 그동안 임권택 감독의 새 영화는 화가 장승업을 다룬다고만 알려져 있었으며, 제목이 결정된 것은 얼마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