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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의 어느날, 허진호 감독은 혼자서 전주행 밤차에 올랐다. 일곱살에 서울로 가족이 이사오기 전까지 살았던 그 도시는 , 소년의 머릿속에서 느리게 조금씩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열차 안에서 파는 술을 사서 마셨어요. 옆자리의 대학생들이 어느 학교 몇 학년이냐고 물어봐서 무슨 대학교 2학년이라 거짓말을 했던 것 같아요. 전주는 기억과는 달랐어요‥‥. 친척집에는 들르지 않았고, 그냥 만화가게에서 자고 새벽에 올라왔어요." 왜 그날 갑작스런 여행을 생각했을까 물으려는데 대답이겠다 싶은 토막난 말들이 스쳐간다. "작은아버지가 불던 휘파람 소리, 친구들과 올라가서 놀았던 동산, 뭐 그런‥‥." 사라진 것들의 호출에 이끌려 먼 외출을 감행하고 조용히 귀가했던 엉뚱한 열일곱살 소년은 나이를 먹어 영화감독이 됐다. 열렬하게 집요하게 소원한 건 아니었다. 일년 반쯤 다닌 전자회사를 그만두고 전공한 철학 공부를 더 할까, 다른 일을 해볼까 일년쯤 물끄러미 생각하다가 들어간 영화아카데미에
사랑이 `여기` 있었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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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신문광고가 주가 되던 시절, 카피는 영화의 또다른 얼굴이었다. “사랑하거던… 부뜰지 마라. 가슴은 썩어도 그대 사랑이 깃들 곳은 남으리라.” <용서받기 싫다>(1964)는 한 여대생(엄앵란)을 연모하는 조각가(신성일)가 그녀의 육체를 유린한 깡패 일당에게 복수한 뒤, 자수하여 십년형을 언도받는다는 내용. 카피에 신파 멜로의 기운을 흠씬 불어넣었다. “착한 아씨 이쁜 아씨 우리 아씨 계동 아씨”는 같은 해 아세아극장에서 개봉한 <계동아씨>의 카피. 계동아씨로 나오는 최은희를 부각시키되, 단순반복 4자나열 어구로 입에 올리기 쉽게 만든 경우다. 1967년의 <일본천황과 폭탄의사>의 경우는 멜로적인 설정이 어색했는지, 애초 카피에서 이를 설득하는 듯하다.“필살의 폭탄용사! 그는 처절한 레지스탕스의 정의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도 뜨거운 피를 지닌 매력적인 남성이기에 그를 사모하는 조국 여성과의 사랑의 삼각 갈등은 어떻게 헤어날 것인가.” <월하
뽕도 따고, 금메달도 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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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 시대의 우울을 녹인 ‘속곳 바람’1981년 불황, 불황, 불황. 신군부의 군화정치에 짓밟힌 것이 영화뿐이겠느냐만, 한가위 명절에도 극장들은 상영중인 영화 간판을 계속 걸거나 창고 속 영화들을 다시 꺼내는 수세적 방책으로 일관했다. 김영애, 원미경 주연의 <빙점 ’81>도 꽁꽁 얼어붙은 추석에 재상영을 거듭했고, <닥터 지바고> 등의 외화들도 당시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극장들에겐 요긴했다. 그러나 영화가 어둠 속에서 생명을 얻는 빛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도 있었다. <바람불어 좋은 날>과 함께 리얼리스트가 되어 돌아온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25만5817명)이 추석을 관통, 연장상영됐다. ‘언제나 거기 있던’ 임권택 감독이 <만다라>(12만8932명)로 재발견된 것도 이때였다. 외화로는 <차타레 부인의 사랑>(26만3513명), (28만4285명), <캐논볼>(20만4
보따리 풀어라, 대목에 한몫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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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울고 돈에 웃었다, 극장가 1962 ~ 1997추석은 극장에 손님이 꼬이는 날이다. 그것도 할리우드영화보다는 한국영화가 더욱 그렇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모든 공력을 쏟아붓는 시점이 여름방학 성수기라면, 추석은 짧긴 하지만 한국영화 흥행을 위한 텃밭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영화 배급사는 이 시기가 되면, 촉각을 곤두세운다. 하지만 지난 40년의 흥행사가 말해주듯, 항상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한국영화의 암흑기 시절이던 70년대에는 심지어 재상영작 외화들의 포진에 밀려 극장을 잡지 못한 한국영화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제는 한국영화가 한가위 잔치뿐 아니라 한여름 치열한 전투에 뛰어들 만큼 체력이 좋아진 게 사실이지만, 그러기 위해선 40년이란 세월을 부대껴야 했다.1960년대 - 70원 주고 본 2500만원짜리 블록버스터1962년 관람료 70원 시절이라고 ‘블록버스터’가 없을까. “총제작비 2500만원, 엑스트라 10만명 동원, 말 300필 공수.” <화랑도>는 당시
보따리 풀어라, 대목에 한몫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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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완이 편집한 귀성 음반 14트랙이제 다시, 피할 수 없는 길을 가야 할 때가 왔다. 무사들은 모래바람을 가르며 사막을 건너고 <파리 텍사스>의 해리 딘 스탠튼은 기억상실의 끝없는 벌판을 건너지만, <이지 라이더>의 두 히피는 멕시코에서 미국 북부로 넘어가는 국도를 오토바이로 달리고 <아이다호>의 거지들은 히치하킹을 하여 지평선까지 뻗은 도로를 달린다. 그러나 4천만 남한 민중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수한 길을 가야 한다. 바로 `주차장으로 변한 고속도로`다.. 이 로드무비의목적지에는 무엇이 있나? 고향이 있다. 고향은 문젯덩어리다. 빚은넘치고 노동력은 부족하다. 더구나 거기에는 노령의 귀신들, 부모님이 산다. 노부모는 이 땅 최대의 사회무
길 위의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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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관에서 매표에 실패했을 때<봄날은 간다> 대신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이루어질 듯 말 듯한 사랑의 줄다리기를 찾아 극장으로 가셨던 분들. 도우메 게이의 알싸한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서보라. 기오 시모쿠의 처럼 사랑을 겪는 주인공들의 미묘한 감정을 잘 찾아들어가지만, 그보다는 밝고 젊은 이야기들이 그려진다. 신주쿠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변변치 않은 남학생 우오즈미, 그의 곁에 까마귀를 데리고 다니는 묘한 여자아이가 찾아온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을 눈치채기도 전에 옛날의 여자친구 시나코가 먼 도시에서 돌아오는데….도우메 게이, 학산문화사, 현재 2권 발간<무사> 대신 <바람의 나라>거대한 화면에 펼쳐지는 호쾌한 무사들의 액션을 무엇으로 대치하랴. 다만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인간들의 ‘진정한 이야기’를 느껴보려면, 김진이 만든 <바람의 나라>를 방문해보시라. 특히 이름만 빌려간 온라인 게임의 환상에 질린
만화 클리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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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꼴보기 싫다면<시어머니 죽이기>명절은 무슨 얼어죽을. 고생한 보람도 없이 눈치와 핍박만 받고 퍽퍽한 팔다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 며느리들이여. 이 만화를 집어들어라. 단 시댁 식구들에겐 책 표지라도 눈에 뜨이지 않게 조심할 것. 잘못하면 패륜 범죄자로 낙인찍힌다. 겉으로는 시어머니를 극진히 공양하는 며느리. 그러나 틈만 나면 시어머니를 죽일 시도를 하는데. 역시 만만찮은 존재가 시어머니. 목을 조르는 며느리를 그대로 엎어치며 레슬링 한판을 벌인다. 그렇게 땀을 흘리고 나서는 ‘오랜만에 운동을 하니 좋구나’, ‘어머니 여전히 건강하시네요. 오래 사시겠어요’라는 능청스러운 대사를 주고받는데, 어찌 보면 우리네 마음속 깊숙한 곳에 감춰둔 감정을 꼭 집어내는 것 같기도 하다. 니카이도 마사히로, 서울문화사, 전 1권<우당탕탕 괴짜 가족> 친척들이 잔뜩 모이면, 그 아이들도 우루루 몰려 쌈박질에 장난질에 난리법석을 피운다. 우리 자식 간수도 어려운데, 저렇게 몰
만화 클리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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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전1 도박하다 파산했다면언제부터인가 모르게 명절 하면 떠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고스톱이 되어버렸다. 친지들간의 화목을 도모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갖다댈 수도 있겠지만 명분은 그저 명분일 따름. 돈 잃고 웃음 짓는 이는 없는 법이며 한술 더 떠서 지갑에서 먼지만 폴폴 날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보면 울화가 치미는 것이 인지상정일 게다. 그래도 인심 좋은 친지에게서 개평이라도 조금 얻어냈다면 그 돈으로 뭘 할까?돈벼락 안 떨어지나?도박의 귀신들이 보여주는 화려한 테크닉을 감상하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길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사실 홍콩산 도박영화들- <지존무상> <정전자> <도성>- 이 제격일 게다. 그러나 이쪽 영화에 취향이 각별하지 않은 사람들도 제법 있을 듯싶으니 눈을 다른 쪽으로 돌려보자. 기왕에 돈은 잃은 것이고 바라건대 어디서 일확천금이라도 주어진다면? 잠시나마 이런 몽상에 빠져 보고 싶은 사람들에겐 먼저 <웨이킹 네드>(Waking N
횡재수다(橫財數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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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전1 명절음식에 질렸다 혹은 과식했다면명절음식이래야 매년 먹던, 그게 그거인 것 아니냐고 생각하면서도 어찌어찌하다 결국엔 과식하고 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간만에 만난 친지들과 어울려 식탁에서 얘기꽃을 피우는 건 기본이고, 이어서 거실에 모여 앉아 함께 먹은 과일, 성묘 마치고 무덤 주변 풀밭에서 한 조각 베어문 떡, 거기다 저녁에 만난 고향 친구들과 함께 마신 술에 안주까지 가세하고 보면….게우고 싶도록 많이 먹고서이제 어쩌랴. 아직도 잔뜩 남아 있는 저 맛나(?) 보이는 명절음식들이 점점 그림의 떡만도 못하게 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사실 이 정도라면 당신은 대단한 탐식가가 아닐 수 없다. 당장 비디오 가게에 가서 데이비드 핀처의 <쎄븐>(Seven, vhrtm, 1995)을 골라보실 것.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희생자는 연쇄살인범이 말한 바 바로 ‘탐식’의 죄를 저지른 장본인이다. 그의 비대한 몸집을 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것이다.
오부이토(汚腐以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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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전1 개봉관에서 매표에 실패했다면연휴길의 교통체증에서 벗어났거나 교통체증에 시달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추석은 짧은 휴가. 따라서 연중행사 같은 극장 방문이 일어나는 중요한 타이밍이기도 하다. 그런데 연중행사를 치르는 관객이 쇄도해 빨갛게 떠 있는 매진표시 앞에서 절망하게 된다면? 꼭 보고 싶은 영화를 당장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식의 대리만족이라도 느껴야 조금이나마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면?매진의 빨간 신호등 앞에서‘사랑, 그 이후’를 담담하게 그려낸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아쉽게 놓쳐버렸을 때엔 ‘그들이 서로를 좋아하게 되기까지’를 그린 그의 첫 작품 를 보자. 아주 느릿느릿 천천히 서로에게 스며드는 두 사람의 표정은 <봄날은 간다>에서 서로에게 이력(??인력은 아닌지???)을 느껴버린 연인의 표정과 비교해보면 미묘하게 들떠 있다. 시나리오 자체가 지향하는 바도 있지만 심은하와 한석규의 섬세한 말투 하나, 눈빛 한 조각도
비대오불패(非隊伍不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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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전2 교통체증에 탈진했다면 연휴만 되면 교통방송의 열렬 애청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장거리 여행객(?)들은 연휴가 휴가가 아닌 교통지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차 안에서 장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게다가 믿었던 교통방송마저 뒤통수를 친다면 연휴의 대부분을 도로 안에서 보내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실제로 교통방송이 처음 생긴 90년대 초에 우리 가족은 교통방송만 믿다가 서울에서 경상남도 사천까지 가는 데 무려 22시간이 걸린 적이 있다. 여하튼 비행기로 지구 반대쪽까지 갈 수 있는 시간을 내내 차 안에서 보내야 한다는 건 대단히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차 안에서 얻은 어지럼증이 가시는 즉시 영화 속의 뻥 뚫린 공간으로 침입해보자.자동차는 달리고 싶다 답답한 자동차 대신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드라이빙하는 상상을 한다면 <이지 라이더>부터 시작해보자. 영화는 <Born to Be Wild>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시원하게 달리는
교체불만(交滯不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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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전1 가족이 꼴보기 싫다면 “가족주의는 야만이다”라는 말이 있다. “현실에 대한 감각은 재능을 요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 재능이 없다”(<가을 소나타>의 샤를로트)는 말처럼, 충분히 지혜로워지기 전에 만나서 인연을 맺고 자식을 낳아 서로의 운명을 책임져 보겠다고 복닥거리다 보면, 전생의 웬수가 가족이 아닐까 싶은 순간도 없지 않을 터. 그런데도 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야릇한 기대를 갖고 사돈네 팔촌까지 온 가족을 다 불러 모으거나 부지런히 찾아다닌다. 만나면 또 실제로 기뻐한다. 그러나 반나절만 지나보라. 듣기 좋은 인사치레들이 시들해지고 나면 아들딸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어디론가 나갈 준비를 하고, 아내들은 부엌에서 남자들 흉보기를 시작하며, 노인들은 궁시렁 거린다. 어쩌면 명절은 이미 분리된 가족을 가족으로 재확인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인지도 모른다.현실세계 속에서 가족과의 분리가 처음 일어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친구와 첫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졸업>(
야만가족(野蠻家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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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유난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친척들 몰려와 너 요즘 뭐하냐, 결혼은 언제 하냐, 물어대니 집구석에 있기 끔찍하고, 나가도 친구들은 고향 가고 없고, 상가 썰렁하니 술 먹을 데 마땅찮고, 혼자 어슬렁거리자니 궁상맞고. 하늘은 속절없이 푸르니 마음 더욱 황량하고. 그 심정, 백수 아니라도 아시겠지요.물론, 직장이든 학교든 꽁꽁 묶여 있다가 금싸라기 연휴 앞두고 설레는 분들도 많겠지요. 하지만 장사 한두번 합니까. 어어어 하다 시간 다 보내고, 마지막날 밤에 얼굴 구긴 채 어디 영영 도망갈 데 없나, 궁리하던 게 한두번입니까. 고향 가고 오느라 진기 다 빠지는 분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올해는 추석이 꼭 즐겁지만은 않은 분들을 위해 소찬(제목은 만찬으로 달았지만)을 마련했습니다. 첫상은 추석증후군 극복용 항우울제 및 정신영양보충성 비디오로 차렸습니다. 귀향길 교통체증에 쳇증이 생겼다구요? 극장 앞에 당도하니 매진표시등이 켜졌더라구요? 가족들 모이니 가슴에 생채기들 생기더라구
만월 만병통치(滿月 萬病通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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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집으로 돌아왔을까. 월터 살레스는 <중앙역>으로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비롯, 장기간의 해외 순례를 거쳐 50개의 트로피를 싹쓸이한 장본인이었다. 영어와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에게 할리우드의 구애가 없었을 리 없지만, 그는 브라질에 남기로 했다. 할리우드로 건너와 <소공녀> <위대한 유산>을 찍은 멕시코 감독 알폰소 쿠아론의 결론도 같았다. 그는 할리우드에서의 작업은 늘 순조롭고 행복했지만,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게 됐다고 고백했다. 우연일지 몰라도 이들이 베니스에 들고 온 작품들은 ‘내게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부제를 달아주고 싶을 만큼, 정체성과 성장에 관한 의문으로 가득하다. 아버지를 부정하고, 대물림된 운명에 저항하는 월터 살레스의 페르소나, 그리고 성에 탐닉하며 어른이 되길 갈망하는 알폰소 쿠아론의 어린 분신들은 라틴아메리카의 오늘을 투사하고 있는 반가운 얼굴들이다.<태양 저편에&
먼길을 돌아 내게로 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