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방전1 개봉관에서 매표에 실패했다면연휴길의 교통체증에서 벗어났거나 교통체증에 시달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추석은 짧은 휴가. 따라서 연중행사 같은 극장 방문이 일어나는 중요한 타이밍이기도 하다. 그런데 연중행사를 치르는 관객이 쇄도해 빨갛게 떠 있는 매진표시 앞에서 절망하게 된다면? 꼭 보고 싶은 영화를 당장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식의 대리만족이라도 느껴야 조금이나마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면?매진의 빨간 신호등 앞에서‘사랑, 그 이후’를 담담하게 그려낸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아쉽게 놓쳐버렸을 때엔 ‘그들이 서로를 좋아하게 되기까지’를 그린 그의 첫 작품 를 보자. 아주 느릿느릿 천천히 서로에게 스며드는 두 사람의 표정은 <봄날은 간다>에서 서로에게 이력(??인력은 아닌지???)을 느껴버린 연인의 표정과 비교해보면 미묘하게 들떠 있다. 시나리오 자체가 지향하는 바도 있지만 심은하와 한석규의 섬세한 말투 하나, 눈빛 한 조각도
비대오불패(非隊伍不敗)
-
처방전2 교통체증에 탈진했다면 연휴만 되면 교통방송의 열렬 애청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장거리 여행객(?)들은 연휴가 휴가가 아닌 교통지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차 안에서 장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게다가 믿었던 교통방송마저 뒤통수를 친다면 연휴의 대부분을 도로 안에서 보내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실제로 교통방송이 처음 생긴 90년대 초에 우리 가족은 교통방송만 믿다가 서울에서 경상남도 사천까지 가는 데 무려 22시간이 걸린 적이 있다. 여하튼 비행기로 지구 반대쪽까지 갈 수 있는 시간을 내내 차 안에서 보내야 한다는 건 대단히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차 안에서 얻은 어지럼증이 가시는 즉시 영화 속의 뻥 뚫린 공간으로 침입해보자.자동차는 달리고 싶다 답답한 자동차 대신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드라이빙하는 상상을 한다면 <이지 라이더>부터 시작해보자. 영화는 <Born to Be Wild>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시원하게 달리는
교체불만(交滯不滿)
-
처방전1 가족이 꼴보기 싫다면 “가족주의는 야만이다”라는 말이 있다. “현실에 대한 감각은 재능을 요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 재능이 없다”(<가을 소나타>의 샤를로트)는 말처럼, 충분히 지혜로워지기 전에 만나서 인연을 맺고 자식을 낳아 서로의 운명을 책임져 보겠다고 복닥거리다 보면, 전생의 웬수가 가족이 아닐까 싶은 순간도 없지 않을 터. 그런데도 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야릇한 기대를 갖고 사돈네 팔촌까지 온 가족을 다 불러 모으거나 부지런히 찾아다닌다. 만나면 또 실제로 기뻐한다. 그러나 반나절만 지나보라. 듣기 좋은 인사치레들이 시들해지고 나면 아들딸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어디론가 나갈 준비를 하고, 아내들은 부엌에서 남자들 흉보기를 시작하며, 노인들은 궁시렁 거린다. 어쩌면 명절은 이미 분리된 가족을 가족으로 재확인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인지도 모른다.현실세계 속에서 가족과의 분리가 처음 일어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친구와 첫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졸업>(
야만가족(野蠻家族)
-
추석을 유난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친척들 몰려와 너 요즘 뭐하냐, 결혼은 언제 하냐, 물어대니 집구석에 있기 끔찍하고, 나가도 친구들은 고향 가고 없고, 상가 썰렁하니 술 먹을 데 마땅찮고, 혼자 어슬렁거리자니 궁상맞고. 하늘은 속절없이 푸르니 마음 더욱 황량하고. 그 심정, 백수 아니라도 아시겠지요.물론, 직장이든 학교든 꽁꽁 묶여 있다가 금싸라기 연휴 앞두고 설레는 분들도 많겠지요. 하지만 장사 한두번 합니까. 어어어 하다 시간 다 보내고, 마지막날 밤에 얼굴 구긴 채 어디 영영 도망갈 데 없나, 궁리하던 게 한두번입니까. 고향 가고 오느라 진기 다 빠지는 분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올해는 추석이 꼭 즐겁지만은 않은 분들을 위해 소찬(제목은 만찬으로 달았지만)을 마련했습니다. 첫상은 추석증후군 극복용 항우울제 및 정신영양보충성 비디오로 차렸습니다. 귀향길 교통체증에 쳇증이 생겼다구요? 극장 앞에 당도하니 매진표시등이 켜졌더라구요? 가족들 모이니 가슴에 생채기들 생기더라구
만월 만병통치(滿月 萬病通治)
-
-
그들은 왜 집으로 돌아왔을까. 월터 살레스는 <중앙역>으로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비롯, 장기간의 해외 순례를 거쳐 50개의 트로피를 싹쓸이한 장본인이었다. 영어와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에게 할리우드의 구애가 없었을 리 없지만, 그는 브라질에 남기로 했다. 할리우드로 건너와 <소공녀> <위대한 유산>을 찍은 멕시코 감독 알폰소 쿠아론의 결론도 같았다. 그는 할리우드에서의 작업은 늘 순조롭고 행복했지만,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게 됐다고 고백했다. 우연일지 몰라도 이들이 베니스에 들고 온 작품들은 ‘내게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부제를 달아주고 싶을 만큼, 정체성과 성장에 관한 의문으로 가득하다. 아버지를 부정하고, 대물림된 운명에 저항하는 월터 살레스의 페르소나, 그리고 성에 탐닉하며 어른이 되길 갈망하는 알폰소 쿠아론의 어린 분신들은 라틴아메리카의 오늘을 투사하고 있는 반가운 얼굴들이다.<태양 저편에&
먼길을 돌아 내게로 오다
-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 <부서진 4월>을 영화화하게 된 이유는.<중앙역>이 전세계에 소개되던 시점에 많은 나라를 다녔는데, 그때 <부서진 4월>을 접했다. 스토리와 스타일은 물론이고, 잘 다듬어진 캐릭터가 맘에 들었다. 영화를 만드는 건 힘들지만, 난 늘 호기롭게 열정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따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원작자 카다레도 영화제작을 반겼고, 프로듀서 아서 콘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클래식 웨스턴의 영향을 받았나. 세르지오 레오네나 존 포드의 흔적이 보이는데.그들의 팬이긴 하지만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해석은 관객의 자유다. 나 자신이 영화광이라서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 힘들지만 웨스턴은 아니다. 이 영화를 기획하면서 <파드레 파드로네>를 여러 번 봤고, 브라질의 초기 시네마누보 영화나 무성영화도 많이 봤다.<중앙역>의 성공 때문에 차기작을 만드는 데 부담이 따르진 않았나.솔직히 이런 질
“호기롭게, 열정적으로, 욕망을 따라”
-
노골적인 성애장면이 해외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하나.그래도 살인장면은 없다. (웃음) 이 영화의 톤은 멕시칸적이지만, 스토리는 유니버설하다고 생각한다. 두 소년이 성에 눈뜨고 탐닉하면서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니까. 다른 나라에서도 심의 때문에 골치 썩는 일 없이 온전히 상영되길 바라지만, 무엇보다 이건 섹스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 섹스는 이 영화의 일부에 불과하다.사회 계급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도 드는데.그렇다. 사회 계급의 문제는 스토리의 근저에 깔려 있다. 그 위에 위선과 거짓으로 점철된 두 주인공의 관계가 깨어지는 과정을 얹었다. 삶의 어두운 단면을 직시할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듯 가면을 쓴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가는 것이다.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내레이션이 많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나.(작가) 서로 얽혀 있는 캐릭터에 대한 코멘트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를 중심에 둔 우주를
“사라져가는 정체성을 찾고 싶었다”
-
현지 언론들은 이번 베니스영화제 출품작 가운데 영국 켄 로치의 <네비게이터>와 프랑스 로랑 캉테의 <시간의 고용자들> 두편을 ‘사회파 영화’라는 타이틀로 한데 묶어 보도하는 일이 잦았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민영화된 철도회사 노동자들의 수난을 다룬 <네비게이터>나, 고액 연봉을 받다가 해고된 전직 컨설턴트의 내면세계를 좇아간 <시간의 고용자들>은 모두 신자유주의 질서가 개인 일상에 어떻게 파급되는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카메라를 들고 노동현장으로 뛰어든 두사람꼭 이 두 영화만이 아니라 켄 로치와 로랑 캉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해볼 만하다. 노조가 무기력해지고, 노동자의 계급적 자존심이 흔적없이 사라진 90년대 중반 이후로 장편 극영화에서 노동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이는 이 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65살의 켄 로치는 영화를 시작한 60년대부터 노동자의 편에서 노동자를 다룬 영화를 찍어왔고, 최근까지도 변함없
신자유주의는 일상에 어떤 무늬를 남겼나
-
실화를 다뤘다는데.9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결말을 바꿔서 각색했다. 한 중년이 해고당한 사실을 숨겨오다가 가족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신문에서 읽었을 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도망가고 비상하고 싶어하다가 스스로를 괴물 같은 존재로 만들어간 캐릭터에 관심이 갔고 아무 준비없이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인공을 중상류층으로 만들고 계급적 시점을 이동시켰다.전작 <인력자원부>의 대학생과 이 영화의 빈센트를 비교한다면.둘 다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빈센트는 사회적 공간에서 물질화돼버린 브루주아지다. 새로운 세계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거짓 세계를 만들어 그곳에서 욕구를 해소한다. 실제로 우리가 지금까지 속해온 세계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지 그걸 다뤄보고 싶었다. 실제사건과 달리 다시 가족에게 돌아가는 걸 해피엔딩으로 볼 수도 있지만, 결국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야기는 비극적인 것 아닌가.<인력자원부>는 음악
“해피엔딩?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걸”
-
현재 영국 철도 노동자들의 영화를 ‘네비게이터’(항해자)로 이름 지은 이유는.본래 네비게이터란 19세기 노동자들, 특히 영국의 수로와 철로 공사에 동원됐던 아일랜드 노동자들을 가리키던 말이다. 내 영화의 배경은 남부 요크셔이고, 영국 철도가 민영화되던 90년대 중반이긴 하지만, 유래는 그렇다.영국 철도 노동자의 상황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는가.많은 얘기를 할 수 없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전혀 로맨틱하지 않다는 것이다.왜 하필 90년대 중반의 철도 노동자들을 이야기하게 됐나.철도가 민영화되면서 노동자들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들에 대해 사람들은 모르고 있거나, 알면서도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처가 나빴다. (웃음) 노조가 전부 흩어지게 만들었으니까. 지금? 글쎄, 지금의 노조는 토니 블레어의 호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작가 로브 다우버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던데.로브는 17년 동안 철도 노동자로 일해온 자신의 경험에 관한 편
“노동자들의 연대가 절실한 때”
-
아시아가 세계영화의 변방에 머물던 것도 이제 태곳적 얘기다. 기타노 다케시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제답게 베니스는 올해도 아시아 작가 발굴에 힘을 쏟았다. 최근 몇년 동안 금사자상의 주인이 아시아감독이었기 때문인지, 영화제를 찾은 서구 언론들도 아시아영화의 상영장마다 떼지어 몰려드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김기덕 감독과 프루트 챈은 ‘2년 연속 경쟁부문에 진출한 아시아감독’이라는 묶음으로 종종 비교가 됐고, 인도 영화사상 초유의 제작비가 투입됐다는 서사극 <아소카>는 수입·배급 관계자들 사이에 ‘베니스에서 꼭 봐야 할 영화’라는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서구관객의 눈에 거칠고 생경한 이미지로 다가간 <할리우드 홍콩>이나 <아소카>처럼 베니스를 떠들썩하게 한 영화들이 있었던 반면, 이란의 <비밀투표>와 중국의 <해산물>처럼 특정한 사회적 현실을 다루면서도, 다국적 평단과 관객에게 조용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영화도 있었다. &
리얼리즘을 넘어 인류학적 진실을 향해
-
최근 이란영화의 일반적인 경향인 리얼리즘영화에서 한발 더 나아가고 있는데.그렇다. 그렇게 봐주길 바란다. 리얼리즘영화를 만든 게 아니니까.소녀와 병사의 여행은 하나의 우화인 동시에 매우 리얼한 인류학적 보고서 같은 느낌이다.민주주의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해석을 갖고 있는지, 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특히 민주주의가 어떤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그런 사회에서 말이다. 선거관리원인 소녀는 교과서적 이상을 갖고 외딴 마을을 찾지만,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이 배운 것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놀라워한다. 사회 또한 그녀의 이상과 노력을 통해 뭔가를 배울 수 있었고, 이런 상호작용을 담아내려 했다.편집과 조명 등으로 강조된 자연 풍광의 느낌이 운명론적이랄까 체념적인데.이건 좀 다른 얘긴데, 이 영화에는 인공조명을 쓰지 않았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룻동안 일어나는 일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시퀀스에 시간 관념이 있다. 그런데도 자연 조명만을 고집하다보니, 기
“한번에 모든 게 이뤄지진 않는다”
-
인물들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까. 그들은 과연 정상인가.물론, 아주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질문자가 더 자세한 대답을 요구하자) 지난 몇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 유심히 관찰했고 또 기록해 왔다. 그러면서 ‘사람’에 관해 많은 걸 배웠는데, 그렇게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이 영화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발전시켜 나갔다. 여섯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공통점은 있다. 폭염, 주말, 그리고 오스트리아라는 배경이다. 이 영화에는 의외로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해 왔는데, 이번 영화도 이전의 다큐 작업과 관련이 있나.이 영화는 픽션이다. 대사도 각본도 있다. 캐릭터에 맞는 사람들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대부분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했다. 상황에 따라, 즉흥적인 영감에 따라 스토리를 바꿔가는 등 다큐적인 스타일로 촬영하기도 했다.등장인물들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부정한다. 폭력 사용도 빈번하다. 파시즘이나 국수주의적인 혐의가 보이기도 하는데,그
“지방색을 드러내는 데 언어만한게 어딨나”
-
<몬순 웨딩>은 당신의 전작들에 비해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현대 인도를 배경으로 한 가족영화라는 점에서, 이제까지 내가 만들었던 영화들과 다르다. 이 작품은 내 고향인 펀자브에 바치는 연가이기도 하다. 펀자브 공동체 사람들은 열심히 즐기고, 일하고, 삶에 대한 열정이 강하는 점에서, 이탈리아 나폴리 공동체 사람들과 비슷하다. 우리의 전통 문화와 고유한 정서를 재발견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공존하게 된 현재 인도의 모습을 조명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만들게 됐다. 복잡한 현대 인도에서 펀자브가 유지해온 독특한 집단성을 지금쯤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영화를 만드는 방식에서도 어떤 변화나 차이가 있었는지.영화는 보는 이를 자극하고 또 실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우선 아주 개인적으로 내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 내 가족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건 누구나의 가족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인도인들의 자부심을 보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