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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DVD를 출시할 때 삭제되었던 장면을 집어넣는다든가 다시 편집하는 게 유행처럼 되었지만(계약서에 DVD를 만들 때에는 감독의 요구대로 재편집한다는 규정을 넣는 경우도 있다), 과거에는 ‘디렉터스 컷’을 만들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제작사가 마음대로 편집을 하거나, 소수 관객의 반응이 너무나 뜨거워서 뭔가 새로운 팬서비스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때 잘린 장면 등을 추가하여 ‘디렉터스 컷’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한 이유는 제작사의 간섭이다. 상영시간이 너무 길거나, 관객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을 내리면 따로 편집기사를 불러다가 독자적으로 편집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이에 격분한 감독이 제작사와 너무 심하게 싸우다가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빼라고 할 경우에는 ‘감독 앨런 스미디’라는 타이틀로 나가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찍기는 했지만 ‘이건 내 작품이 아니오’라는 뜻이다. 이 정도까지 악화일로를 걸었을 때에 감독이 다시 ‘디렉터
영화사에 등재된 디렉터스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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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의 씨앗은 남가주대(USC) 동창인 조지 루카스와 존 밀리어스가 뿌렸다. 베트남전쟁을 무대로 한 강박적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하던 그들에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조셉 콘래드의 1902년작 소설 <암흑의 심장>을 각색하라고 권했다. <암흑의 심장>은 오슨 웰스도 영화화를 기획했던 소설. 웰스는 연출은 물론 커츠와 말로우(<지옥의…>의 윌라드에 해당하는 인물)를 1인2역으로 연기하고 영화 전체를 말로우의 1인칭 시점 숏으로 찍는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이루지 못했다. 밀리어스는 시나리오를 완성했지만 코폴라의 조감독이었던 루카스는 코폴라가 자기를 ‘어린애 취급’하고 있다고 느끼고 <스타워즈>를 연출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옥의 묵시록>은 결국 코폴라의 손에 안착했다.<지옥의 묵시록>의 필리핀 촬영은 ‘피크닉 가듯 해치우자’고 생각한 코폴라의 예상과 달리, 제작진 전체를 파월된 미군
오리지널 <지옥의 묵시록>의 제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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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오리지널에서 49분 추가, 코폴라의 예술적 야심을 보다 완벽하게 담아낸 걸작 어느 영화 감독의 고백에 따르자면, 영화를 완성하는 감독은 없다. 감독들은 다만 어떤 단계에 이르러 영화를 ‘포기’할 뿐이다. 그리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아마 역사상 누구보다 어렵게 영화를 ‘포기’한 감독일 것이다.1979년 봄 코폴라는 16개월에 걸친 전쟁과도 같은 촬영과 2년여의 편집을 마치고 오리지널 <지옥의 묵시록>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 묵시록은 종말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결말 처리에 대한 고민을 “손톱으로 유리벽을 기어오르는 것 같다”고 표현할 만큼 코폴라는 고통받았다. 한편의 영화가 그토록 엄청난 시간을 삼키고 많은 스캔들을 토하는 괴물이 된 광경을 본 경험이 없었던 1970년대 말의 언론이 호들갑을 떨어대는 와중에, 코폴라는 경솔하게도 결말에 대한 불안을 외부로 흘렸고 아니었으면 아무 생각 없었을 평론가들은 눈에
<지옥의 묵시록> Now and T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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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낙 강행군이라 스탭들의 불만도 많았을 텐데.= 불만이 많이 쌓였을 텐데 밖으로 표출한 적은 없다. 촬영분량 중에 진립이 별장 가남에게 “그토록 고향에 가고 싶은데도 막상 고향 생각이 잘 나지 않아요. 그저 이 끝도 없는 행군이 어서 끝났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걸 보고 있던 스탭들이 눈시울을 적셨을 정도로 힘들긴 했다. 사막의 경우 기온이 50도 정도 되는데 더위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하니 탈진한 스탭도 많았다. 많이 지쳤을 것이다.+ 그럴 땐 잘 다독이고 그랬나.= 절대 그렇지 않다. 다독여서 어떻게 영화를 찍겠나. 내가 그들을 위로하고 다독인다며 시간을 낭비한다면 일 끝나고 오히려 그들이 잘못했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이 힘들 때, 독려한다고 뭘 하는 게 아니라 조 이사와 내가 먼저 뛰었다. 사실 아닌게아니라 꼭 그래야만 했나 하는 반성도 든다. 좀 심하긴 심했는지 나이 50쯤 된 중국 제작부장이 우리 스탭을 끌어안고 울었다고 하더라. “너
<무사> 김성수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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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3월 <비트>의 편집실에서 출발한 <무사>는 김성수 감독이 그 오래 전부터 꿈꿔오던 프로젝트였다. 그가 당시 프로듀서였던 조민환 싸이더스 이사에게 펼쳐보인 이 영화의 내용은 “여러 명의 남자들이 극한 상황에서 조그마한 대의명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이야기”였다. 그로부터 3년하고 몇달이 지난 뒤 김성수 감독은 극중 주인공들처럼 중국 대륙에서 500명이 넘는 남자, 그리고 여자들과 함께 <무사>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가며 험난한 5개월의 여정을 버텨냈다. 이후 6개월이 넘는 후반작업까지 포함하면 <무사>는 4년 가까운 기간 동안 눈물과 환희의 반복 속에서 그와 동고동락했던 셈이다. 개봉을 앞둔 그의 표정에서 긴장이나 기대 외에 허전함 같은 것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완성된 작품을 보니 어떤가. 애초의 생각과 비교한다면.= 처음 시작할 때는 항상 걸작을 꿈꾸는데 나올 땐 늘 졸작이 된
<무사> 김성수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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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감독 정두홍한국영화의 액션이라면 모두 그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산전수전 다 겪은 정두홍 감독이지만, <무사>는 그에게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의 액션스쿨 멤버 17명 전원이 참여해 수많은 부상에 시달려야 했던 <무사>의 촬영은 두배로 힘든 작업이었다. 워낙 빡빡한 스케줄에다 거의 모든 장면이 액션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당연한 일. “아무리 액션영화라 해도 보통 15번에서 20번 정도 촬영하면 되는데 이번엔 112회 촬영 중 거의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하지만 이보다 그를 괴롭혔던 문제는 액션의 스타일이었다. 그와 김성수 감독이 애초 설정했던 액션 스타일은 와이어를 쓰지 않고, 임팩트가 있으면서 힘이 넘치는 것이었다. “일본의 , 미국의 <벤허> 같은 한국의 대표적인 액션 스타일을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액션이 그대로 담겨 있는 <글래디에이터>를 본 뒤 모든 계획을 틀어야만
<무사> 스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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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의 제작과정을 살펴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규모다. 무사가 남기고 간 숫자만 살펴봐도 비용과 제작진이 흘린 땀이 얼마쯤인지 짐작이 간다.5=기상시간.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나야 했던 스탭들에겐 지옥 같은 숫자.20=다음날 아침까지 촬영이 이어진 날짜 수. 이렇게 24시간 작업한 다음에도 휴식은 반나절도 채 주어지지 않았다.149=2000년 8월6일 크랭크인, 12월22일 크랭크업할 때까지 촬영기간의 일수. 사막의 모래바람과 엄청난 더위, 그리고 혹한이 동반했다.300=최대 스탭 수. <무사>의 스탭은 적을 땐 120명, 많을 때는 300명에 이르렀다. 웬 중국 여인이 촬영장을 한동안 따라다녔는데 모두 그녀가 스탭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얼굴들을 익히지 못한 현장상황이 빚어낸 촌극.4,000=촬영해온 총 컷 수. 1초라고만 잡아도 66분40초에 달한다.14,900=아침식사 대용 컵라면 개수. 200명의 스탭 중 절반만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
숫자로 본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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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영하회족자치구 중웨이(中衛) : 2000년 7월5∼7일. 테스트 촬영.② 베이징시 베이푸퉈(北京市 北普陀) : 8월6∼7일. 크랭크인. 난징가도 세트. 명으로 향하던 고려 무사들 간첩 누명쓰고 저지당하다.③ 베이징 근교 샹산퇀청(香山團城) : 8월9일. 사신단 및 무사, 무장해제당하다.④ 영하회족자치구 중웨이 : 8월14∼21일. 명에 의해 귀양 떠나던 사신과 무사 행렬, 원군에게 습격당하다.⑤ 영하회족자치구 인촨시 수이둥거우(水洞構) : 8월23∼29일. 무사 일행, 고려를 향해 사막을 횡단하기로 하다.⑥ 인촨시 타오러(陶樂) : 8월30일∼9월8일. 무사 일행, 사막에서 객잔을 발견하다. 부용 공주를 납치해가는 원군도 만나다.⑦ 인촨시 빙거우차오(兵構橋) 계곡 : 9월10∼18일. 부용 공주를 구출하다. 무사 일행, 난징으로 향하다.⑧ 내몽고자치구 싼관(三關) : 9월19∼27일. 원군, 부용 공주를 되찾기 위해 뒤쫓다. 원군과 무사 일행의 대추격전 펼쳐지다.⑨ 타오러 : 9
<무사>가 달려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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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 / 여솔(사신단 부사인 이지헌의 노비)김성수 감독의 영화 속 자아 격인 그는 <무사>에서 폭발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는 스탭들의 흉내를 내는 등 쾌활한 청년이었지만 막상 촬영이 시작되며 보는 이를 오싹하게 할 정도로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강한 연기를 펼쳤다. 중국 프로듀서 장샤도 그를 두고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진지한 연기태도를 보여준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주진모 / 최정(왕실 경호대 용호군의 장군)독선적인 성격으로 무사 일행을 고난에 빠뜨리지만, 부용공주를 향한 뜨거운 애정이 밉지 않은 최정 역의 주진모는 다른 배우들보다 늦게 캐스팅돼 촬영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는 현장에서 장군옷을 입고 에어로빅춤을 추거나 고글을 쓰고 마징가 흉내를 내는 등 분위기메이커를 자임했다.안성기 / 진립(평민으로 구성된 주진군의 하급무사)무사 일행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는 진립 역의 안성기는 촬영장에서도 큰형 같은 존재였다. 가장 일찍 나와 가장
<무사>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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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1월6일<무사>의 마지막 촬영지인 씽청으로 간다. 베이징에서 차로 6시간. 후팅샤오가 지은 토성은 수백년 시간의 손길이 쓸고 지나간 듯 거기 서있다. 고려의 아홉 무사들이 고향에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해안토성에 도착했듯 우리 스탭도 마침내 이곳에 이르렀다.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덜덜 떨리는 이 추위에 우리는 비까지 뿌려가며 촬영을 해야 한다. 다들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럴 것이다. 우리에겐 물러설 곳이 없다.2000년 11월10일눈이 와서 이틀간 촬영을 못했다. 눈이 오는 걸 보며 스탭들이 술렁인다. ‘올해 집에 돌아가기 힘들겠구나’ 하는 표정이다. 스케줄이 말썽이다. 장쯔이와 우영광(몽고군 장군 람불화 역)을 내년까지 붙잡을 수 없다. 둘 다 12월에 다음 영화 스케줄이 시작된다. 날씨도 문제다. <무사>에는 눈오는 장면이 없는데 12월 들어가면 눈 때문에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내년에 다시 와서 찍는다? 있을
<무사> 제작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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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5일밤장면을 찍을 때 보통 촬영 종료시간은 새벽 5∼6시. 그런데 오늘은 3시30분에 끝나버렸다. 일찍 끝났다는 사실에 좋아하며 정리하려고 하는데, 감독의 목소리가 들린다. “촬영감독님, 한번만 더 가죠.” 분명 OK사인을 내렸는데 다시 찍자는 감독의 말에 김형구 촬영감독이 왜 그러는지를 묻자 감독이 악동 같은 얼굴로 대답한다. “너무 일찍 끝났어…. 이러면 안 되는데. 우리 찍기로 한 시간까지는 찍어야 되잖아.” 어이없어하는 촬영감독, 조명감독 그외 모든 스탭, 배우들. 감독은 여전히 애처럼 떼를 쓴다. “촬영감독님, 한번만 더 가자니깐…. 가야 돼∼.”2000년 9월6일새벽에 촬영이 조금 일찍 끝났다고 오전에 다시 기상해서 오후 촬영에 들어갔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스케줄이 밀리고, 제작비는 초과하고, 그러다보니 강행군을 멈출 수 없고….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다. 내일은 또 5시 기상이다. 한달이 지났는데 30%도 못 찍었다.2000년 9월12일추석이다.
<무사> 제작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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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영화 <무사>의 시작은 1997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비트> 후반작업을 할 때 김성수 감독이 “한 무리의 무사들이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이야기를 하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처음 했다. <용문객잔> <유성호접검> 같은 무협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좋다”고 말했지만 그런 영화를 언제 찍게 될지는 몰랐다. <태양은 없다>를 개봉하고 감독이 다시 그 얘기를 꺼냈다. “지난번에 내가 했던 얘기 기억하냐? 그 영화, 성을 짓고 찍었으면 좋겠어”라고. “응,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뭐.” 건성으로 듣고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두려움이 밀려왔다. 성을 짓는다고? 이 양반이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 감독이 입버릇처럼 칭찬하는 영화 를 봤다.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엔 장풍도 없었고 칼바람도 없었다. 내가 생각한 무협영화와는 전혀 다른 액션이 아닌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에 끼어들고 있
<무사> 제작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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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2001, 중국 대륙의 모래바람 뚫고 김성수 감독의 <무사>가 태어나기까지, 그 험난한 여정의 기록600여년 전 한 무리의 고려인들이 원말 명초 혼란기의 중국 대륙에서 자취를 감췄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그들에게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사>는 공식적인 역사서에서 물음표로 남겨둔 여백에서 출발한 영화다. 김성수 감독은 여기서 난생처음 사막의 모래폭풍에 휩싸인 사람들을 떠올렸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인간 한계를 넘는 한발한발을 내딛는 사람들, 그들은 오래 전 구로사와 아키라의 와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 같은 영화들에서 자신을 매혹시켰던 존재의 극단에 있는 인간이었다. 어느날 아침 수백명이 바삐 움직이는 <무사> 촬영장에서 그는 자신의 꿈이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는 걸 봤다. 역사가 눈길을 돌린, 실패한 자들의 전쟁을 복원시키는 작업이 중국의 낯선 풍광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었다. &l
<무사> 제작, 그 천일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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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비슷하게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동료들은 다 유명 감독이 돼 있다.” 후루카와 다쿠 감독이 웃음을 띠며 건넨 이 한마디는 의미심장하다. 이 ‘유명 감독’들에는, 41년생 동갑내기로 일본애니메이션의 시대가 열리던 60년대 중반 함께 출발선에 섰던 미야자키 하야오와 린 타로가 포함된다. 하지만 40여년이 흐른 지금, 이들은 제각각 다른 고지에 이르러 있다.그 중 후루카와 다쿠는 “늘 혼자 투계장 같은 스튜디오에서” 독립애니메이션을 고수해왔다. 후루카와 다쿠는 일본 독립애니메이션의 2세대 감독. 60년대 일본 독립애니메이션을 개척한 구리 요지와 마찬가지로 만화가 겸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꾸준히 실험적인 작업을 해왔다. 이번 SICAF에서도 상영된 그의 작품들은, 자유로운 실험과정을 짐작게 한다. 74년작인 <페나키스티스코프>는 19세기의 동화(動畵) 장치를 응용해 18개로 분할된 그림을 동시에 보여주며, 78년작 <모션 루미네>에서는 사람의 관절 위치대로 종이
단편 <상경 이야기>의 후루카와 다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