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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 웨딩>은 당신의 전작들에 비해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현대 인도를 배경으로 한 가족영화라는 점에서, 이제까지 내가 만들었던 영화들과 다르다. 이 작품은 내 고향인 펀자브에 바치는 연가이기도 하다. 펀자브 공동체 사람들은 열심히 즐기고, 일하고, 삶에 대한 열정이 강하는 점에서, 이탈리아 나폴리 공동체 사람들과 비슷하다. 우리의 전통 문화와 고유한 정서를 재발견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공존하게 된 현재 인도의 모습을 조명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만들게 됐다. 복잡한 현대 인도에서 펀자브가 유지해온 독특한 집단성을 지금쯤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영화를 만드는 방식에서도 어떤 변화나 차이가 있었는지.영화는 보는 이를 자극하고 또 실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우선 아주 개인적으로 내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 내 가족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건 누구나의 가족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인도인들의 자부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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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는 그동안 내게 4개의 트로피를 줬다. 너무 잘 대해줬다. 이번 초청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 것은 그런 오랜 부채의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영화제 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언론과 대중 앞에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은둔 작가 에릭 로메르가 올 베니스영화제 평생공로상 시상식에 나타나기로 한 것은 이래저래 화제가 됐다. 불과 몇 개월 전에 초청장을 내민 칸영화제에도 퇴짜를 놓았으니, 베니스쪽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노심초사 마음을 졸인 것은 당연했다. 로메르는 확답을 하기 전에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고 한다. 시상식은 폐막 전야인 9월7일에 해야 하고, 신작 <영국여인과 귀족>의 상영도 같은 날 해야 한다는 것. 그의 요구대로 시상식은 9월7일 영화제 메인 상영관인 살라 그란데에서 거행됐다.평생공로상은 말 그대로 영화에 평생 헌신해온 영화인에게 주는 상으로, 수혜자는 대개 노배우들인 경우가 많았다. 베니스영화제가 올해의 평생공로상
“내 영화는 연극이고자 하지 않은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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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을 발표하는 순간, 다양한 국적, 다양한 색깔의 영화를 불러모으마던 베니스의 약속은 완성됐다. 금사자상을 수상한 인도의 <몬순 웨딩>과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의 <한여름>은 그 배경과 성격이 판이한 작품. 어느 한편에 열광할 취향이라면, 다른 한편을 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 작품은 어떤 면에서는 서로 참 많이 닮아 있다. 인도의 ‘몬순’과 오스트리아의 ‘한여름’. 공교롭게도 지역 특유의 날씨를 제목으로 갖다붙인 두 영화는 ‘지금 여기’에 관한 개성있고 신랄한 보고서다.흥겨운 축제의 장을 연 <몬순 웨딩>미라 네어가 <몬순 웨딩>을 들고 베니스에 날아온 것은 아주 영리한 선택이었다. 어떤 기대도 의도도 없었다면, 운이 아주 좋았던 게다. 일찌감치 베니스영화제 출품을 결정했던 미라 네어는 <몬순 웨딩>을 소개하는 글에서 “영화의 배경인 인도의 펀자브는 이탈리아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삶에 대한 열정으로 충
`지금 여기`에 관한 신랄한 두편의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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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가 열린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베니스에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쨍하게 눈부신 햇살과 끈적거리는 바람에 웬만큼 저항력이 생겼다 싶을 때, 예고도 없이 시린 바람이 불어닥쳤고 가끔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낙비도 내렸다. 차라리 그런 ‘반전’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이렇다 할 화제작도 없고 이슈도 없이 지루하고 나른하게 이어지던 영화제는 결국 한순간의 흥분과 긴장도 제공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혹시 베니스영화제는 막판 ‘깜짝쇼’라도 보여줄 요량으로 <몬순 웨딩>에 황금사자상을 안긴 건 아닐까.황금사자상부터 남녀주연상까지, 이견분분9월8일 저녁, 영화제 폐막식이 열린 살라 그란데에서는 환호와 침묵과 야유가 엇갈렸다. <몬순 웨딩>은 여러 버전으로 나돌던 ‘수상 유력작’ 리스트에 단 한번도 오르지 않았던 작품. 기자단은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전통과 축제에 관한 관능적이고 이국적인 코미디를 지지하던 베니스 현지 관객 사이에선 환호가 터져나왔다. 미라 네어 역시
다양했다, 그러나 `발견`은 미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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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에 얽힌 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며 식민지 시절의 유명한 협객이었고 뒤에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고 김두한씨의 단성사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아주 오래 전 조감독 시절, 우연한 기회에 나는 고 김두한씨의 실물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하필이면 내가 있던 건너편 건물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그의 정면 모습이었는데 나는 그가 바로 그 유명한 김두한씨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숨을 죽이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렇게 소변을 끝내기까지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과연 그는 거물다운 기품을 보이고 사라졌다. 그가 국회 본회의에서 부총리였던 장기영씨에게 똥물을 퍼부은 것은 아주 유명한 사건이다.나는 전부터 그의 전기를 영화로 만들면 좋을 것이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그의 일화를 소개하곤 했는데 그중에 단성사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화장실과 관계가 있다. 그는 소년 시절, 단성사 옆 설렁탕 집에서 키워졌는데 당연히 단성사 출입이 잦았다. 물론 동네 꼬마들을
“바보같은 녀석들, <바보선언> 보겠다고 장사진을 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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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3가는 오늘도 사람들 발길이 부산했다. 지하철 입구를 오르내리는 젊은이들에 섞여 밖으로 나오니 눈부신 가을햇살을 받고 단성사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94년 동안이나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극장문화의 본산이었던 단성사는 그렇게 초라하게 늙어 있었다. 벌써 간판이 모두 철거되어 굴레 벗은 말처럼 벌쭉한 모습으로 조만간 철거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얼마 전 극장이 헐리고 그 자리에 새 영화관 12개가 들어선다고 자랑하던 J 사장의 말을 들었을 때 반가우면서도 한편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헐리기 전에 건물이라도 한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곳을 찾아간 것이다.단성사는 우리 세대 감독들에게 영화를 발표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상영관이었다. 극장 수보다 영화제작편수가 넘치던 시절, 그곳에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큰 긍지였고 행운이었다. 물론 당시 단성사의 웅장한 음향과 스크린의 선명한 영상 덕에 관객은 즐거워했지만,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 무렵의 한국영화는 녹음, 현
“거기에 영화 걸면 행운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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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림(66) 상무는 단성사 터주대감이라 불릴 만하다. 태흥영화 이태원 사장이 “그 사람은 살아 있는 역사책이야”라고 말할 정도다. 단성사 왼편 건물 3층에 마련된 간이 사무실, 여전히 그는 건재했다. 지난 9월1일로 극장 업무는 끝났지만, 여전히 그가 바쁜 이유는 뭘까. “그래도 제일 큰 극장이었잖아. 곧 100년을 채울 텐데, 내가 직접 쓰지 않더라도 누군가 책 한권 정도는 내야지.” 그가 지금까지 모은 극장 자료만 해도, 큰 박스로 2개나 된다. 어디 고이 모셔 있던 자료를 거저먹은 게 아니라 당시 문화공보부 등을 들락거리는 등 발로 직접 뛰어서 구한 것들이다.몇년 전부터는 1920∼30년대 영화들의 원제를 찾느라 직접 인터넷을 뒤지고 있다. “그런데 자료 찾느라 <매일신보> 같은 걸 뒤지다보면 배꼽잡을 일이 많아. 예를 들면 당시 배우들 이름 뒤엔 군 또는 양을 붙였거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외국사람 이름만으로 성별을 아나. 그러니 로버트 아무개양이라고 써놓고선 며
“살아 있는 역사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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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역사처럼 단성사의 주인도 여러 번 바뀌었다. 기록이나 구술에 의한 것만 하더라도 열번이 넘는다. 첫 번째 단성사를 세운 이는 지명근, 박태일, 주수영 세 사람. 1907년 동대문시장 상인 출신이던 이들은 근처 영도사 대원암에 사람들을 모아넣고 ‘조선 연예계 발전 방안’이라는 연설회를 가진 뒤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 다음은 이익우. 1909년부터 경영을 맡았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지가 않다.단성사는 같은 해 호남의 갑부 한흥석에게 넘어가고, 이듬해 일본인 후지와라 구다마로에게 넘어갈 정도로 운영이 어려웠다. 그러다 1917년 황금관(이후 국도극장)의 소유주인 다무라가 단성사를 인수한다. 당시 토지는 일본인들에게 불하한 것이라, 해방 이전까지 단성사의 땅 주인은 다무라였다. 단성사가 흥행 극장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18년 당시 광무대의 소유주이자 창에 빠져 있던 박승필이 단성사를 인수한 뒤, 영화상설관을 표방하면서부터다. 그는 본관을 신축하고, 주임변사 서상호 외 6
거기에 이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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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겨울여자, 단성사를 찾다.1972.10.17 박정희, 국회 해산 및 정치활동 금지를 골자로 하는 유신조치 발표 1978.6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 여고생 농락 사건 발생1979, 정부, 영화사 등록제를 허가제로 변경. 이로 인해 제작사 수 대폭 감소“할리우드 제국의 신성일, 로버트 테일러 얼굴에/ 지지직 굵은 비가 내렸네 나는 어느새/ 70년대의 찌린내와 함께 종로 화신극장에 앉아 있었네/ 격투기 쑈도 보고 연극도 보았던 그 옛날 원형극장의 관객들처럼/ …/ 그래, 누구도 살아서 이 극장의 어둠을 벗어나진 못할 것이네”(‘로마 콜로세움 속의 화신극장’, 유하 <천일馬화> 중에서)1970년대 한국영화는 암흑기의 수렁을 피할 수 없었다. 유신조치와 함께 영화를 한편 만드는 것조차 쉽지 않아졌다. 영화사 설립여건이 강화돼 수많은 영화사들이 무너졌고, 제작사전신고부터 시작되는 겹겹의 검열에 한국영화는 숨이 막혔다. 제작 의무편수를 정해놓고 그걸 채워야 외화 수입권을 주는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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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 100년이 허물어진다. 자그마치 5천만명 이상이 드나들었던 놀이터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의 새카만 족적만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여흥과 위락의 장소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 한 세기를 버텨오는 동안, 단성사 돌벽은 시대의 어둠을 피해 군중이 찾아들어간 안온한 카다콤이었고, 그들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소망의 앙코르와트였다. 좁디좁은 의자에 잠시나마 등허리를 기대고 그들이 피워올린 꿈의 환영은 언제나 푸른색이었기에, 진동하는 화장실의 지린내와 도사린 구석의 퀴퀴함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단성사는 없다. 그리고 시대의 꿈은 영원히 지하에 매장된다. 꿈의 체취를 맡고자 하는 열망이 남았다면 무너지기 전, 단성사의 기억을 거슬러볼 일이다.제1장 셋이 모여(團) 뜻을 이루다(成)1907.5.22 이토 히로부미의 압력에 의해 박제순 내각 사퇴하고, 이완용 내각 성립, 서울 전역에 콜레라 창궐.“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지명근, 박태일, 주수영 제씨가 발기하여 우리나라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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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와 바퀴벌레의 콜라주 - 이미지의 실험실 부문NFB의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독특한 기법과 실험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모았다. <신데렐라 펭귄 이야기>는 동화 <신데렐라>를 펭귄들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으로 바꾼 작품. 내용은 알려진 대로지만, 신데렐라와 요정, 왕자까지 모두 귀여운 펭귄인데다 유리 구두가 유리 물갈퀴로 바뀌는 설정 등 코믹한 각색과 다양한 카메라워크가 돋보인다. <E>는 커다란 ‘E’ 모양의 상을 소재로 독재와 폭력을 비꼰 우화. 독재자와 군대까지 등장해 ‘E’에 대한 의견이 다른 사람은 머리를 열어 생각을 고쳐놓고 마는 풍자가 날카롭다. <바로크 앤 롤>은 소수 민족의 이야기를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다룬 인형애니메이션. 터번을 쓰고 색다른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따돌림받던 아이는, 얼음이 깨진 강에 빠진 아이를 구하고 친구를 얻는다.서울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이 세편. 부산에서는 모래에서 태어난 모래 인간이 생명체를
모래의 연금술, 디지털의 황홀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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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관한 긴 이야기 - 장편 2편<말괄량이 삐삐>는 잉거 닐슨의 연기로 기억되는 TV시리즈 및 영화로 이미 만들어진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명소설의 애니메이션 버전. 부모세대에 의존하지 않고 꿋꿋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면서도 늘 유쾌한 주근깨 소녀 삐삐의 모험담으로, 널바나의 공동창업자이자 캐나다 상업애니메이션의 대표적인 감독 클라이브 스미스가 공동연출했다. 판화와 스크래칭, 컷아웃 등 다양한 기법과 이미지를 시도해온 NFB 출신의 작가 피에르 에베르의 <인간 식물>은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장편. 도서관 사서직을 은퇴한 뒤 개를 돌보고, 죽은 아내의 무덤을 찾는 것을 낙으로 살아가는 미셸의 외로운 일상 틈틈이 걸프전 등 갖가지 사회풍경을 겹쳐놓는다. 동화에서 추상화까지 - NFB 단편걸작선 부문‘Beyond NFB’를 제외한 섹션들은 사실상 다 NFB 단편걸작선이지만, 그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11편을 따로 묶었다. 한 소녀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
모래의 연금술, 디지털의 황홀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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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같은 황무지에 수십년간 나무를 심는 사람의 이야기를, 혹 봤거나 읽었을지 모르겠다. 물과 생명이 말라붙고 마을의 폐허만 남은 땅에 매일 100개의 도토리를 심어 마침내 숲으로 가꿔낸 양치기 노인 엘제아르 부피에의 삶 말이다.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의 동명소설을 렘브란트의 회화마냥 섬세한 빛과 색채의 일렁임, 결이 풍부한 크레용화로 살려낸 프레데릭 벡의 87년작 <나무를 심는 사람>은 국내에는 다소 낯설고도 신기한 화풍의 캐나다 애니메이션이다. 히로시마, 자그레브 등 유명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물론, 클레르몽 페랑과 오스카의 애니메이션 트로피까지 각종 영화제를 휩쓴 이 작품은 국내 공중파 방송과 위성채널, 비디오로도 소개된 바 있지만, 미국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국내 토양에서 캐나다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낯선 그림이다. 영화제가 아니면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캐나다 애니메이션 축제가 오는 9월 말과 10월 중순 각각 서울과 부산에서 열린다.오는 9월25일부터 28일
이미지의 숲으로 소풍가자, 낯설고 고혹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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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세계로<프로젝트 A> <쾌찬차> <용형호제> 등 할리우드의 아이디어를 자기 것으로 소화한 대작을 만들던 성룡의 최종목표는 세계 진출, 할리우드 진출이었다. <프로젝트 A> 이후 성룡의 영화는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홍콩관객을 위한 영화와 세계를 대상으로 한 영화가 나뉘는 것이다. <미라클> <쌍룡회> 같은 영화는 영락없는 중국인의 구정용 영화다. 반면 <폴리스 스토리>는 세계 무대를 향한 시발점이다. 인종과 국가를 막론하고 경찰의 활약을 그린 영화는 가장 보편적이다.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점차 무대를 세계로 넓히고, 액션의 강도를 높이는 점도 그렇다.성룡은 지금도 동일한 전략을 고수한다. 할리우드에서 일급 스타 대우를 받으면서도, 홍콩에서 <성룡의 빅 타임> 같은 명절영화를 만든다. 아시아 관객만을 위한 액션영화 <나이스 가이> <엑시덴탈 스파이> 등을 만드는 것도 같
난 당신이 좋다, 그 `순수한 육체`의 향연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