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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충무로에 ‘이명세교’라는 종파가 있었다.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을 보고 매료된 젊은 영화인들이 그를 받들며 뿌리내린 이명세교는 궁핍한 살림살이를 면치 못했지만 새로운 영화에 대한 열정과 신념이 넘치던 사람들에게 영혼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샘물과도 같았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세계를 사랑하고 영화에 대한 이명세 감독의 태도를 존경하던 그들 가운데 김태균 감독과 싸이더스 대표 차승재씨는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90년대 초반 영화아카데미를 나온 젊은 감독지망생들과 영화공장이라는 영화사를 차렸던 김태균 감독은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첫사랑> <남자는 괴로워> 등 이명세 감독의 영화 3편의 프로듀서였고 당시 차승재씨는 단순히 옷장사를 하는 김태균 감독의 친구로서 이명세교에 가입했다. 지금은 감독과 제작자로 엇갈린 행보를 걷고 있지만 이명세 감독과 그들의 인연은 어릴 적 친구에 대한 추억처럼 애틋한 것이다.
<인정사정 볼 것
<화산고>의 김태균, 선배 이명세에게 `개기며` 영화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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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적
진짜 나쁜 놈은 따로 있다. <투캅스>에 나오는, 업소 돌면서 관리비 뜯는 경찰관에 대한 강우석 감독의 애정은 그런 것이었다. 적당히 때묻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태도로 임하는 <투캅스>의 안성기를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양심에 어긋하는 일에 몸서리치던 패기만만한 젊은 형사 박중훈도 결국은 안성기의 전철을 밟고 말았다. 강우석 감독이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이후 3년 만에 연출하는 작품 <공공의 적>에 등장하는 형사 철중도 그런 인물이다. 사소한 불법은 거리낌없이 눈감을 줄 아는 이 남자가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이유를 법의 잣대로 가늠할 수는 없다. 그는 진짜 나쁜 놈을 만난다. 이름하여 ‘공공의 적’. 먼지 한올 떨어지지 않은 말끔한 양복에 흐트러짐 없이 빗어넘긴 머리를 한 펀드매니저에게 철중은 무턱대고 덤벼든다. 그가 자기 부모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철중에겐 증거도 증인도 없지만 분노와 투지는 넘쳐난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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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스카치테이프로 붙인 안경에 왜소한 체구, 계단 밑 벽장에서 지내온 외토리 소년 해리. 11살 생일이 다가오지만, 부모를 잃고 페투아니아 이모 부부와 심술맞은 사촌 더들리에게 구박당하며 살아온 해리에게는 별다른 기대가 없다. 하지만 자정이 지나 생일이 되는 순간, 선물처럼 상상치 못한 세계로의 초대장이 날아든다. 거인 해그리드가, 마법사라는 해리의 정체와 함께 전설적인 마법학교 호그와트에 초대된 사실을 알려온 것이다. 벽장의 음지에서 빠져나와 호그와트 특급에 올라탄 소년을 기다리는 것은 상상이 현실로 펼쳐지는 마법의 세계. 빗자루를 타고 나는 것은 기본. 변신술, 약초와 마술지팡이 이용법 등 갖가지 마법과 신비의 동물들이 실존하는 판타지 세상이다. 이곳에는 전설적인 ‘마법사의 돌’을 노리는 마왕의 음모 또한 도사리고 있다. 마법 수업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인 해리는, 친구들과 함께 마법사의 세계를 지키기 위한 모험에 나선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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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무하마드 알리는 링의 모든 코너에서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20세기의 전사다. 열정적으로 산 사람의 일대기가 그렇듯 알리의 생애에는 시대의 갈등이 그대로 들어 있다. 눈부신 권투 재능과 날카로운 위트, 굽힐 줄 모르는 분노와 강인한 인간만이 갖는 내적인 품위로 현대 미국사에 진한 자취를 남긴 이 거인의 장도(長途)를 어떻게 하면 한 편의 극영화 안에 요약할 수 있을까. 이 육중한 과제를 받아 안은 것은 <히트> <인사이더> 등 전작을 통해 유려하고도 역동적인 스토리텔링 능력을 공인받은 마이클 만 감독과 슈퍼 헤비급 챔피언이 되기 위해 육체를 ‘리모델링’하다시피한 윌 스미스. “한 인간의 삶에는 나머지 전체를 함축하는 모멘트가 있다. 일단 그것을 발견하면 이야기는 강력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마이클 만 감독은, 알리 개인사의 뇌관을 이슬람 개종, 징병 거부, 결혼, 챔피언 벨트를 따고 잃고 다시 되찾는 사건이 있었던 1964년부터 1974년까지의 1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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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스카이
오픈 유어 아이즈!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길을 잃고서 추락을 택했던 세자르가 뉴욕에 떨어졌다. <바닐라 스카이>는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오픈 유어 아이즈>(1997)를 리메이크한 작품. 매끈한 외모에 재력을 지닌데다 천하의 바람둥이인 데이비드 에임스(톰 크루즈)는 원작에서 세자르가 당했던 고통 역시 그대로 물려받는다. 자신의 단짝친구의 애인인 소피아(페넬로페 크루즈)에게 한눈에 반하지만, 이튿날 하룻밤 상대였던 줄리(카메론 디아즈)의 복수극에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이나, 어렵사리 소피아로부터 사랑 고백을 끌어내지만 이후 자신도 알 수 없는 극한적인 분열증세에 시달리는 것까지 닮았다. 직접 판권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진 톰 크루즈는 <클럽 싱글즈><제리 맥과이어>의 카메론 크로에게 메가폰을 맡겼다. 아직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관객을 악몽의 크레바스 속으로 내몰았던 아메나바르보다는 강도가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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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
<버스, 정류장>의 사랑이 고개를 드는 장소는 별이 쏟아지는 강변이나 휘황한 스카이라운지, 외딴 섬같은 ‘위대한’ 로맨스의 공간이 아닌 변두리의 버스 정류장이다. 많은 사람이 심상한 얼굴로 오가는 그곳에서, 사는 이유를 묻는 일조차 경멸하기 시작한 32살의 학원강사 재섭과 일탈과 자해를 통해 세상을 냉소하는 17살의 여고생 소희가 서로를 알아본다. 재섭은 학원에서 시선을 끌던 소희가 중년남자와 승강이를 벌이는 모습을 목격한 뒤 소녀의 복잡한 속내를 짐작하고, 집이 같은 동네인 두 사람은 어느날부터 ‘친구처럼’ 대화하기 시작한다. <반칙왕> <조용한 가족>의 프로듀서였던 이미연 감독의 데뷔작인 <버스, 정류장>의 시나리오는, 사랑을 절대적인 보물로 정해놓고 그것을 둘러싼 밀고 당김을 보여주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사랑과 엇비슷한 형태로 느리게 덩어리져가는 감정의 행로를 따라가는 멜로드라마를 예고한다. <접속> <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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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온기를 구한다면 적당한 영화들이 있다. <줄리엣을 위하여>는 임신중에 암 선고를 받은 여주인공과 가족의 이야기. 익숙한 소재지만 다큐멘터리 출신 감독 솔베이 안스파흐의 침착한 시선이 예기치 못한 담담한 감동과 성찰을 끌어낸다. <작별>은 자매애 이상의 자매애를 통해 일상의 일부로만 여겨지는 가족관계의 운명성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 교통사고로 부모를 여의고 서로를 의지하던 자매가 동생이 사랑에 빠지면서 새로운 비극에 빠진다. <뷰티풀 데이즈>(가제)는 <인생은 아름다워>에 미소지은 관객의 감성을 노크하는 휴먼코미디. 나치가 주둔한 체코 시골마을의 순박한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웃음과 사랑을 그린다. <댄싱 앳 더 블루 이구아나>는 옷을 벗어도 드러나지 않는 스트리퍼 다섯명의 진실을 일주일간의 생활기록을 통해 들춰보는 드라마. 위로는 때로 사람 이외의 존재에서 온다. 일본영화 <하치 이야기>는 17개월을 함께한 주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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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지금쯤 원작소설의 광팬들은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의 개봉을 앞두고, 기대 반 우려 반의 심경으로 가슴을 졸이고 있을 것이다. 반세기 동안 ‘스테디’하게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킨 판타지소설 <반지의 제왕>의 영화판은 그러나, 원작의 명성에 누가 되진 않을 듯하다. 그것은 <천상의 피조물들> <데드 얼라이브> <프라이트너>로 알려진, 판타지 호러 장르의 재간꾼 피터 잭슨의 이름에서 배어나는 미더움 때문. 피터 잭슨은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뉴질랜드의 숲 속에 시공을 탈색시킨 중간세계(Middle Earth)를 짓고, 2년 넘도록 두문불출하며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만들어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절대반지’의 내력을 소개하고, 원정대가 구성돼 험난한 여정을 떠나는 과정을 따라잡는다. 엘프족과 난장이족, 그리고 인간이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던 먼 옛날, 악의 힘에 동화된 신 사우론이 만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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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야, 찬 바람을 부탁해!
혼곤히 잠든 거인의 꿈처럼 길고 황량한 계절 겨울. 그 거대한 꿈 안에서 다시 꿈꾸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극장이라는 동굴이 있고 영화가 있다.
12월7일부터 2002년 2월 말까지 극장으로 나설 채비를 차리고 있는 영화는 한국영화 16편을 포함해 줄잡아 70편을 웃돈다. 외화 가운데 크리스마스와 새해의 축제 분위기를 북돋우며 흥행을 주도할 ‘빅3’는 판타지 블록버스터 세편. 20세기 판타지문학의 양대 베스트셀러를 최신 특수효과 기술에 힘입어 스크린에 옮겨놓은 <반지의 제왕>와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3주 간격으로 주술의 효험을 겨루고, 픽사의 신작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가 행복해지고픈 크리스마스 주간 관객을 유혹한다. 자기 영역을 굳힌 중견감독의 현재를 알려줄 신작도 즐비하다. 마이클 만의 <알리>, 스티븐 소더버그의 <오션스 일레븐>, 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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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고 애니메이션만 기억하면 어쩌지"‘다르르르르르….’ 프라모델 비행기 한대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어수선한 오후의 소음 속을 부유하던 비행기가 우리를 인도하는 골목은 낯익은 듯 새로운 세계다. 수채화 붓을 통해 불러낸 유년의 공간. 트램펄린을 반동삼아 구름을 잡을 듯 뛰는 아이들, 담배를 문 입에 미소를 머금은 채 구경하는 중년아저씨, 번개가면을 서로 뺏으려 자전거 위에서 장난치는 동네 녀석들. 그 한가로운 골목풍경 속으로 쭈뼛쭈뼛 걸어들어오던 노란모자 소년. 악동들의 눈을 피해 다른 골목으로 돌아가던 소년은 결국 그들의 눈에 띄어 모자를 뺏긴다. 하늘로 휙, 날아가는 노란 모자. 모자는 대문 넘어 뻗어나온 어느 집 나무 위에 걸리고, 키가 닿지 않는 소년은 한아름 짱돌을 던져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때 소년 곁을 배회하던 강아지의 코 위로,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이들의 발걸음은 잠시 나무 아래 계단에 머문다.날렵하게 달려가는 셀 애니메이션의 매끄러운 질감도, 머리카락의
<와니와 준하> 애니메이션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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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원안을 냈다는데, 벽장 속의 괴물은 어떻게 구상한 이야기인가.피트 닥터(이하 피트) 래세터와 <토이 스토리>를 만들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도 내 장난감들이 살아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었지’ 하고 공감하는 게 좋았다. 그처럼 모두가 공유할 만한 것을 찾고 싶었다. 난 어릴 때 벽장 속에 괴물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아이들은 그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세계 어느 곳, 어느 문화에서나 보편적이다. 그래서 벽장 문을 지나면 아이들을 겁주는 몬스터들의 회사가 있고, 거기도 경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다.거의 5년이 걸렸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한 작품에 매달리게 하는 힘이 뭔가.존 래세터(이하 래세터) 우리는 미쳤으니까.(웃음) 애니메이션은 아마 가장 노동집약적인 예술 형식일 것이다. 또 내가 좋아하는 점이지만, 아주 협동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 중 하나는 스토리 개발 때문이다. 우리는 스토리와 캐릭터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참 어려
“벽장 속 괴물, 모든 유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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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미국 땅에서 제 나름의 분위기를 지닌 도시가 어디 한둘이랴마는, 샌프란시스코는 유난히 독특한 정취를 품고 있다. 멋스런 유럽풍 집들의 이국적인 느낌이 그렇고, 가파른 고개를 꾸준히 기어오르는 전차가 그렇다. 아니 굽이굽이 언덕을 따라 자리잡은 도시 자체가 그렇다. 차가 없으면 꼼짝없이 발이 묶이는 LA는 물론, 비교적 전철과 택시가 발달한 뉴욕 등 여느 도시보다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한다는 것도 미국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한때 히피들의 터전이었다는 헤이트 애시베리에는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이나 그레이트풀 데드 같은 히피문화의 상징이 새겨진 티셔츠가 심심찮게 보이고, 게이들의 거리라는 카스트로의 카페에는 다정하게 마주앉은 동성연인들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시내 중심가에서 벌어진 아프가니스탄 반전시위나 살 집을 요구하는 홈리스들의 시위에 100여명이 몰리는가 하면, 킹 크림슨 같은 60년대산 노장들의 공연에 아직도 수백명이 줄지어 선다. 사랑과 자유의 이상
<몬스터 주식회사>와 픽사 스튜디오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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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감독 이용민 출연 이예춘, 도금봉, 이빈화 제작연도 1965년<살인마>(1965, 이용민) 이전에 <흡혈화 악의 꽃>(1961, 이용민)이 있었다. ‘한국판 드라큐라’(두 영화 모두 사용한 메인 카피)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그보다 앞서에는 <괴인 드라큐라>(Horror of Dracula, 해머 스튜디오, 테렌스 피셔 감독, 1959년 수입·개봉), <흡혈귀의 선혈>(Blood of Dracula, 허버트 스트록 감독, 1960년 수입·개봉), <흡혈귀 드라큐라의 신부>(Bride of Dracula, 해머 스튜디오, 테렌스 피셔 감독, 1961년 수입·개봉)가 있었다. 이들 수입 공포영화는 ‘처첩’ 또는 ‘계모-전처자식간의 갈등’을 다루는 조선말 이후의 가정소설들과 함께 <살인마>의 중요한 문화적 원천이다.1967년 <월하의 공동묘지>가 신파를 끌어들여 한국 괴기영화의
하녀가 마의 계단을 내려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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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한국영화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한국영화 전성시대’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영화제가 지난 8월 ‘7인의 감독전’에 이어 11월25일부터 ‘과거로의 환상여행’을 시작한다. <살인마>(이용민), <하녀>(김기영), <우주괴인 왕마귀>(권혁진), <꿈>(신상옥), <마의 계단>(이만희), <월하의 공동묘지>(권철휘) 등 60년대 영화 6편에 배창호 감독의 <꿈>을 덧붙여 상영하는 이번 영화제는 한국영화 전성기에 만들어진 판타스틱한 장르영화들을 엿볼 드문 기회이다. 당시 이런 유의 영화들이 생산되고 소비된 방식은 최근 영화학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지점이다. 영상원의 김소영 교수는 <근대성의 유령들>에서 이런 영화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국가 근대성이 대낮을 밝히는 와중에, 근대화 정책이 ‘현실’에서 혹독하게 말살해버린 여귀, 야수, 괴물, 영매, 무당으로 가득 찬 어두운 공포영화들이 극장을 밝혔다
하녀가 마의 계단을 내려올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