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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미국 땅에서 제 나름의 분위기를 지닌 도시가 어디 한둘이랴마는, 샌프란시스코는 유난히 독특한 정취를 품고 있다. 멋스런 유럽풍 집들의 이국적인 느낌이 그렇고, 가파른 고개를 꾸준히 기어오르는 전차가 그렇다. 아니 굽이굽이 언덕을 따라 자리잡은 도시 자체가 그렇다. 차가 없으면 꼼짝없이 발이 묶이는 LA는 물론, 비교적 전철과 택시가 발달한 뉴욕 등 여느 도시보다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한다는 것도 미국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한때 히피들의 터전이었다는 헤이트 애시베리에는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이나 그레이트풀 데드 같은 히피문화의 상징이 새겨진 티셔츠가 심심찮게 보이고, 게이들의 거리라는 카스트로의 카페에는 다정하게 마주앉은 동성연인들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시내 중심가에서 벌어진 아프가니스탄 반전시위나 살 집을 요구하는 홈리스들의 시위에 100여명이 몰리는가 하면, 킹 크림슨 같은 60년대산 노장들의 공연에 아직도 수백명이 줄지어 선다. 사랑과 자유의 이상
<몬스터 주식회사>와 픽사 스튜디오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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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감독 이용민 출연 이예춘, 도금봉, 이빈화 제작연도 1965년<살인마>(1965, 이용민) 이전에 <흡혈화 악의 꽃>(1961, 이용민)이 있었다. ‘한국판 드라큐라’(두 영화 모두 사용한 메인 카피)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그보다 앞서에는 <괴인 드라큐라>(Horror of Dracula, 해머 스튜디오, 테렌스 피셔 감독, 1959년 수입·개봉), <흡혈귀의 선혈>(Blood of Dracula, 허버트 스트록 감독, 1960년 수입·개봉), <흡혈귀 드라큐라의 신부>(Bride of Dracula, 해머 스튜디오, 테렌스 피셔 감독, 1961년 수입·개봉)가 있었다. 이들 수입 공포영화는 ‘처첩’ 또는 ‘계모-전처자식간의 갈등’을 다루는 조선말 이후의 가정소설들과 함께 <살인마>의 중요한 문화적 원천이다.1967년 <월하의 공동묘지>가 신파를 끌어들여 한국 괴기영화의
하녀가 마의 계단을 내려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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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한국영화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한국영화 전성시대’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영화제가 지난 8월 ‘7인의 감독전’에 이어 11월25일부터 ‘과거로의 환상여행’을 시작한다. <살인마>(이용민), <하녀>(김기영), <우주괴인 왕마귀>(권혁진), <꿈>(신상옥), <마의 계단>(이만희), <월하의 공동묘지>(권철휘) 등 60년대 영화 6편에 배창호 감독의 <꿈>을 덧붙여 상영하는 이번 영화제는 한국영화 전성기에 만들어진 판타스틱한 장르영화들을 엿볼 드문 기회이다. 당시 이런 유의 영화들이 생산되고 소비된 방식은 최근 영화학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지점이다. 영상원의 김소영 교수는 <근대성의 유령들>에서 이런 영화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국가 근대성이 대낮을 밝히는 와중에, 근대화 정책이 ‘현실’에서 혹독하게 말살해버린 여귀, 야수, 괴물, 영매, 무당으로 가득 찬 어두운 공포영화들이 극장을 밝혔다
하녀가 마의 계단을 내려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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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모로는 1928년 1월23일 영국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줄곧 자랐지만 영국과 프랑스를 오간 국제 결혼 덕분에 그녀는 4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바깥 나들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던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던 모로였지만 2차대전의 와중에서 그녀가 마음을 빼앗긴 것은 연극이었다.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연기수업을 받던 그녀는 1948년 <마지막 사랑>으로 영화에 데뷔하고 1953년 장 가뱅과 공연한 <현금에 손대지 마라>로 프랑스에서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후 <여왕 마고>와 <여학생 기숙사> <가스 오일> 등을 거쳐 1958년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 출연하면서 명실공히 월드 스타로 발돋움했다.<사형대의 엘리베이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전, 잔 모로는 이미 10여년의 연기 경력을 가진 중견 여배우였다. 당시 촬영기사는 첫 일주일치 촬영 분량을 보고 “애송이 감독 루
나른한 매혹, 그 아름다운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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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살았다”라는 찬사로 입을 열자,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여성으로 살았을 뿐이다. 그리고 배우로, 감독으로”라고 분명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쥴 앤 짐> 등을 통해 누벨바그의 아이콘이 된 배우 잔 모로는 올해 부산영화제가 모셔온 귀한 손님이다. 11월15일 오전 11시30분, 파라다이스 호텔 18층. 해운대 바다가 창문 가득 펼쳐진 카페에 청바지에 하늘색 블라우스, 파란 니트 카디건 차림으로 나타난 잔 모로는 파리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머니처럼 소탈했지만, 말을 걸면서 똑바로 상대를 쳐다보는 눈동자는 여전히 빨려들고 싶게 아름다웠다. <쥴 앤 짐> 시절의 고혹적인 목소리는 많이 거칠어졌지만, 거침없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위’ 또는 ‘농’ 하고 말할 때 카트린의 그림자가 겹쳐지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스크린
“내 안의 진리가 나를 밀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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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대만영화는 이란영화와 함께 미학적 신세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중심에 허우샤오시엔이 있었다. 민족의 상처를 성장의 통증에 실어보냈던 초창기를 지나 엄격한 형식미로 시간과 존재의 문제를 탐구해온 그의 필모그래피는 20세기 영화미학의 빼놓을 수 없는 중대한 성취다.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한국을 첫 방문한 이 쉰살의 거장은 신작 <밀레니엄 맘보>에서 이제 동시대 대만 젊은이들의 생활에 카메라를 갖다대고 있다. “이건 10년 동안 만들어질 3부작의 미완성 서장”이라고 그는 말했다. 임/편집자 나의 인생, 나의 영화부산에서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허우샤오시엔은 “부산을 처음 방문했다. 자갈치 시장이 마음에 들어 자주 나가봤는데 화투를 치고 있는 남자들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자갈치 시장의 풍경이나 화투 치는 남자들이 그에게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켰을지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그는 대만의 남루한 변두리에 태어나 싸움질과 도박으로
“영화 창조는 관객을 거절하면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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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의 세밀화가 그려내는 무늬
<모텔 선인장>(1997)이 모텔 방이라는 하나의 공간을 중심에 놓고 그 위에 여러 남녀의 에피소드들을 분산시켜놓았다면, <낙타(들)>에서 구심점은 두 남녀이고 모텔 방은 그들이 거쳐가는 여러 장소 가운데 하나(아마도 그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장소, 즉 목표점일지도 모르지만)일 뿐이다. 데뷔작인 <모텔 선인장> 이후 무려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기용 감독은 그렇게 전작의 구도를 변주하면서 또 그것과는 다른, 아주 인상적인 작품 하나를 들고 나왔다.
나이 마흔이 된 한 남자와 그와 같은 나이를 곧 맞게 될 한 여자가,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그들이 어느날 ‘모험’을 감행한다. 사실 모험이라고 해봤자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일을 저질러 봤던 남녀들이 지나갔던 길을 그저 반복할 뿐이다. 그들은 서해안의 어느 작은 포구에 도착해서는 우선 약간의 대화를 나누고 기분을 돋워줄
부산에서 만난 아시아감독 [6] - 박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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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멸과 파괴의 이중주
여기 더할 나위 없이 악독한 인간이 있다. 먹이를 찾는 매처럼 표독스런 눈을 부라리는 야수, 그의 시야에 한 여자가 들어온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얌전히 앉아 있는 그녀 곁에 남자는 기척없이 다가서고 여자는 벌레보듯 놀라며 사내를 피한다. 기다리던 남자친구를 만나자 야수 같은 남자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그녀, 순간 사내는 그녀의 입술을 강제로 빼앗는다. 한낮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진 사건은 처음엔 그저 미친 사내의 행패에 불과했다. 여자에게 입을 맞춘 사내는 목격자들 앞에 무릎꿇고 여자는 남자에게 침을 뱉는다. 아무도 짐작 못했지만 여자의 일생은 그때부터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김기덕 감독의 7번째 영화 <나쁜 남자>는 ‘<악어>의 용패가 <파란 대문>의 진아를 만났을 때’라고 불릴 만한 영화다. 세상에 대한 저주와 분노로 똘똘 뭉친 남자가 행복에 겨워하는 여대생에게 멸시당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
부산에서 만난 아시아감독 [5] - 김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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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삶, 그러나 위로는 있다
지난 98년 <벌이 날다>로 데뷔한 민병훈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괜찮아, 울지마>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일반에 첫 공개됐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고원지방에 자리한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삼은 작고 따뜻한 이야기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소박한 삶의 진실을 찾으려 한 첫 번째 작품의 주제의식은 이번 작품에도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벌이 날다>가 작은 권력을 휘두르는 무례한 이웃을 굴복시킨 보통 사람의 집념을 그린 작품이라면, 이번 작품은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어떻게 지친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모스크바에서 도박으로 소일하는 청년 무하마드(무하마드 라히모)는 돈을 다 탕진한 뒤 바이올린 케이스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겐 “유럽 공연이 취소돼 휴가를 얻어 악상을 구상하러 잠시 들렀다”고 둘러대지만, 그게 그의 허장성세임을 알 사람은
부산에서 만난 아시아감독 [4] - 민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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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내 사랑, 어둠만이 가득한”
1997년 7월1일. 유니언 잭이 하강하고 오성홍기가 게양되던 날, 홍콩의 운명은 바뀌었다. 누구는 할리우드로 건너가고, 누구는 중국 본토를 껴안았지만, 프루트 챈은 ‘그날’을 가슴에 묻은 채 ‘홍콩 지킴이’로 남았다. 반환 직전의 불길한 공기를 호흡하는 거리 아이들을 포착한 출세작 <메이드 인 홍콩>이 파문을 일으킨 이유는, 그것이 8만달러짜리 영화라거나 리얼한 상황과 기묘하게 어우러진 MTV적 영상이 돋보여서만은 아니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더욱 두드러지는 ‘홍콩의 그늘’을 주시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짜 홍콩의 모습’이라고 외칠 수 있었던 용기와 재기 때문이다. 프루트 챈은 <그해 불꽃놀이는 유난히 화려했다> <리틀 청>으로 이어지는 반환 3부작을 마친 뒤에는 “중국사회에서 일종의 금기사항”인 섹스를 전면에 내세운 창녀 시리즈로 돌입해 <두리안 두리안> <할리우드 홍콩>을 완성해냈
부산에서 만난 아시아감독 [3] - 프루트 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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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바뀌어야 하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신선하고 색다른 어떤 것들을 원하고 있지만 전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영화감독들이 있기 때문에 굳이 나도 그런 흐름에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차이밍량 감독은 올 부산영화제에서도 그의 세계에 매혹돼본 이라면 익숙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또다시 보여주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여전히 소통에 목말라했고 감독은 그들을 침묵과 여백의 세계 속에 가둬두었으며 결국 보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인내심이 있어야 그들을 지켜볼 수 있다. 전작 <구멍>에서 다소나마 변화의 기미가 엿보였기에 혹 그 다음 작품은 그만의 세계에서 많이 벗어난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차이밍량은 여전히 자기 세계를 굳건히 고수한 것처럼 보였다. 영화세계에 변화를 줄 의향은 없는가, 하는 질문을 들은 그는 웃고 나서 딱 한마디로 질문자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왜 바꿔야 하는가?”
차이밍량의 신작 <거기
부산에서 만난 아시아감독 [2] - 차이밍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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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유작이었으면 좋겠다”
“영화의 진짜 제목은 <소년들의 모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신작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하 <릴리>)을 들고 부산영화제를 방문한 이와이 순지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 이와이 순지 감독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야키와 절친한 관계가 된 탓일까.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이와이 순지과 안노 히데야키가 함께 공존하는, 기묘한 작업이다. 감각적으로 인물 동작을 ‘배분’하는 편집, 그리고 나이어린 소년의 이야기라는 점은 이와이 감독의 전작과 같다. 여기에 원조교제와 이지메, 그리고 아이의 살인극이라는 극단의 소재를 끌어들이면서 <릴리…>는 마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신지’의 이야기를 연상케한다.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라는 뇌까림의 기억 말이다.
이와이 감독만큼 동시대 일본영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인물은 드물다. 그는 개인적으로
부산에서 만난 아시아감독 [1] - 이와이 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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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부산영화제엔 특별한 장소가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함지골. 정확한 명칭은 함지골청소년수련원이다. 영도다리를 건너 봉래산 기슭에 자리한 이 수련원을 영화제에서 빌려, 하루 숙박료 5천원에 일반관객에게 잠자리로 제공했다. 가난한 영화광들이 한푼이라도 아껴 영화표 살 돈을 보탤 수 있게 해주는, 덤으로 영화마니아 친구들과의 파자마 파티까지 제공하는 이 공동숙소의 하룻밤을 전한다.뒤로는 봉래산, 앞으로는 영도 해변산책로가 바다를 따라 이어져 있는 풍광이 특급호텔 수준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30인, 20인, 혹은 45인 1실 구조. 다닥다닥 이층침대들이 붙어 있는 일종의 ‘도미토리’ 시스템으로 세면장과 샤워실은 공동사용한다. 규율도 엄격해서 11시 ‘귀가’ 통금을 지켜야 하는 곳. 그뿐 아니다. 음주 금지, 흡연 금지, 음식물 반입 금지.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화마니아들과 단체방문객이 경비절감을 목적으로, 혹은 독특한 추억을 기대하며 이곳을 찾았다. 외국인 숙박객들이 뒤섞
5천원 내고 자고, 배우고, 사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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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식단이 풍성해질수록 영화와 감독, 영화와 관객이 벌이는 ‘마우스 투 마우스’ 공방전은 치열해진다.영화도 많고 ‘말거리’도 많았던 축제 기간 내내 기자회견장이든 인터뷰장이든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둘러싼 낙관론과 비관론은 한치 양보도 없이 엇갈렸고, 극장을 나서는 사람들은 행복한 미소를 피워올리며 “영상이 좋았다”, “음악이 좋았다”, “많이 울었다”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영화란 무엇이냐”라는 난해한 질문이 어김없이 등장하기도 했다. 가버린 축제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넘실대던 말들도 이제 추억으로만 남겠지만, 풍성했던 영화의 식탁이 치워진 자리에 열정과 웃음이 공존하던 순간의 말들을 그러모아 소박한 말의 식탁을 차려본다.“사랑에 빠져도 됩니까?”배우 구보즈카 요스케 <GO> 관객과의 대화 중, 한 관객이 “한국인과 사랑할 수 있나요?”라고 묻자.“새벽 6시쯤 부산역에 도착했는데, 우동 한 그릇을 먹고 왔더니 이미 20
잔치 잔치 열렸네, 말잔치가 열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