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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에서 '공공의 영웅'으로
<박하사탕>의 후속작 <단적비연수>는 설경구 스스로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고 할 만큼 상반되는 평가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영화는 낯설었지만 설경구는 낯익다. 여기서 그가 맡은 ‘적’은 왕위계승자라는 지위와 부족 안에 전해 내려오는 오랜 주술마저 위반하면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헌신한다. 운명과 세계에 근본적으로 불화하고 완전한 파멸을 향해 내달리는 복합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가 설경구에게 기대한 역할은 <박하사탕>의 그것과 숨결을 공유한다. 이것은 특정 스타가 확보하고 있는 인격적 이미지(star personality)를 이어가려는 캐스팅 전략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0, 감독 박흥식)의 김봉수는 설경구가 연기한 캐릭터 중에 이색적인 인물이다. 말이 느릿느릿해졌고 눈은 순하게 내리깔았으며 말할 때 입술을 앙다물기보다는 조금 앞으로 내민 듯한 것이
설경구를 보는 세개의 시선 [3] - 김소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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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를 축복하고 저주했다 <박하사탕>
솔직히, 나는 설경구를 썩 잘 알진 못한다. 지난 6년간 영화 담당 기자였건만 어찌어찌 하다보니 그와는 단 한 차례도 정식 인터뷰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인터뷰를 하고도 별 인상조차 남기지 못하는 배우들도 숱한 반면, 설경구는 알아갈수록 호감이 더해가는 사람이다. <씨네21> 기자가 <박하사탕>과 관련해 두 번째 인터뷰를 했을 때 기사 첫줄이 “아직도 궁금한 것 있으세요”란 그의 말이었지만, 내겐 열 차례쯤 인터뷰를 하고도 남을 만큼 그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많다.
어차피 설경구와 김영호(<박하사탕> 주인공)가 오래도록 서로에게 양화(陽畵)와 음화(陰畵)가 되리란 걸 부정할 순 없다. 설경구에 대한 개인적 인상기에서 <박하사탕> 얘기가 빠질 수도 없다. 그는 <박하사탕> 촬영 초반에 결말부터 찍어야 하는 상황 때문에 이해도 못한 채 연기를 시작했다가 점차 과거로
설경구를 보는 세개의 시선 [4] - 이동진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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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4월- “이창동 감독하고는 무조건 할거예요”
<파이란>으로 깊은 감동을 받아 최민식과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직후 ‘우발적으로’ 술잔을 나누던 자리에 송강호와 설경구가 합류했다. 내게 설경구와 최민식이 함께한 그 자리는 절묘했다. <박하사탕>과 <파이란>은 각각 지난해와 지지난해에 내가 본 가장 훌륭한 영화였고, 두 영화에서의 설경구와 최민식은 각각 그해 최고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설경구는 취한 상태로 휴대폰을 꺼내 이창동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통화는 마치 연인들의 것인 양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흘러 넘쳤다. 이창동 감독도 대종상을 받을 때 거의 아내에게 할 법한 애정표현을 배우들에게 퍼붓는 수상 소감으로 화제가 되지 않았는가. 하긴, <박하사탕>을 통해 서로의 작업에 대해 (‘知音’이란 말을 낳은) 백아와 종자기의 사이가 되어버린 두 사람이니, 그럴 법도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유심히 쳐다보는 내게 그
설경구를 보는 세개의 시선 [5] - 이동진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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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사진을 찍었다, 야호!
자랄 때 나는 스타에 열광하지 않았다. 성장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다. 떡볶이와 맛탕이 영혼의 양식이던 중학교 시절, 다른 친구들이 어니언스나 윤형주, 송창식에 뿅 가 있을 때, 나는 별것도 아닌 내 영유년의 상처에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피학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거른 끼니는 죽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때우는 법이다.
삼십대 중반에 영화잡지사 기자라는 명함으로 영화와 때늦은 인연을 맺고, 사십대 초반에 영화잡지사 편집장이라는, 자질에 비해 엄청 때깔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뒤늦게 ‘열광’이 가져다주는 치유효과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 열광은, 처음에는 아마 산전수전에 찌들어온 아줌마답게 얄궂고 얄팍한 호기심의 형태였던 것 같다. 그들은 실존에 덧씌워진 아우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존재와 아우라의 충돌이 빚어내는 분열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그들은 나보다 얼마나 더 행복할까.
그래서 후배들의 일거리를
설경구를 보는 세개의 시선 [6] - 최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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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작비 80억원, 기획기간 2년, 촬영 8개월, 촬영횟수 120회, 사용된 필름 18만자…. 역대 개봉작 중 가장 많은 물량이 투입된 영화라지만, 이런 수치들이 라는 영화를 속속들이 설명하진 못한다. 영화의 모양을 빚고 색깔을 입히고 숨을 불어넣는 역할은 역시 ‘사람들’ 몫이니까. 그중에서 이렇게 영화의 ‘크기’가 강조될수록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파트 중 하나가 연기일 것이다. 일찌감치 이 작품에 출연을 결정했던 장동건은 이 영화와 함께 많은 일을 겪었다. 전국 로케에, 일본과 중국 나들이까지 했다. 원없이 총도 쏴봤고, 와중에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프리프로덕션이 길어지면서 뒤늦게 만난 <친구>로 배우로서의 자신감을 얻었는가 하면, 블록버스터에서 배우는 얼마나 드러나고 숨어야 하는지를 가늠하느라 시름에 잠기기도 했다. 외롭던 순간들, 더불어 정겹던 시간들.
2001년 1월30일부터 9월2일까지, 카메라가 돌아가던 8개월 동안의 일들을, 장동건의 시점에서 되돌아본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 [1] - 장동건의 제작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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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NG를 내다니
[일본어 대사]
누가 그런 얘길 했다. 장동건은 손에서 시나리오를 놓지 않기로 유명하다고. 칭찬인가, 아닌가. 사실 난 시나리오를 손에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신인 시절에는 대본에다가 시선 방향까지 적어놨다. 그게 습관이 된 게 아닌지. <…로스트 메모리즈>는 컷 수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컷을 기억하기 위해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고 일본어 대사 때문에도 들고 있었다. 우리 영화는 1/3이 일본어 대사로 진행된다. 난 사실 드라마이건 영화이건 NG를 많이 내는 편이 아니다.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르게 표현해본다든가 한 적은 많이 있었지만. 그런데 <…로스트 메모리즈>에서는 엄청난 NG를 냈다. 일본어 대사 때문에. 외우는 것도 문제였지만, 연기할 때도 느낌이 잘 안 살았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 가장 걱정이 되었던 장면들도 아버지에 대해 더럽고 비열한 변절자라고 하는 것, JBI에서 국장한테 대드는 것, 그리고 전무이사실 장면 등
<2009 로스트 메모리즈> [2] - 장동건의 제작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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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중요하지 않은 장면도 있구나
[자동차 폭파신]
국도에서의 촬영은 배우들보다는 스탭들이 훨씬 더 많이 힘들었던 시퀀스였다. 나는 놀면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영화에서 중요하고 액션도 많은 장면이지만, 흐름상 감정이 필요한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배우 입장에서는 좀 쉬면서 연기하는 경우이다. 장소도 마음에 들었다. 영화적으로도 적당한 장면이었지만, 넓은 데서 사람들한테 구애받지 않고 우리끼리 촬영하는 게 좋았고, 또 놀잇거리도 있었다(길 끝과 끝이 너무 머니까 제작부에서 쓰려고 준비한 장난감 자동차가 있었다. 나는 틈틈이 그 자동차를 몰고 다녔다). 액션도 그렇게 난이도가 높거나 체력적으로 힘든 장면이 없었고, 그래서 마음 편하게 찍었다. 국도 촬영의 하이라이트는 자동차 폭파신이었다. 나는 다치는 것보다도 기회가 한번밖에 없다는 것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다. 혹시 잘못되거나 화면에 잘못 찍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 컨디션이 괜찮았기 때문에 위험할 것이라는 생각은
<2009 로스트 메모리즈> [3] - 장동건의 제작기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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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고> 배우들, 존경스럽다
[피아노줄 액션]
피아노줄 묶고 하는 연기. 그전에도 몇번 해봤지만, 할 때마다 정말 힘들다고 느낀다. 와이어액션 분량이 많았다고 알려진 영화 <화산고>의 배우들은 참 힘들었겠구나, 고생이 많았겠구나, 새삼 생각했다. 피아노줄로 묶이고 나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오래 견디기가 참 힘들다. 갈비뼈도 아프고, 숨도 안 쉬어진다. 그나마 우리 영화에서는 많지는 않았으니 다행이지만, <화산고>팀은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언론 보도를 보니까, 그쪽 배우들은 12시간씩 피아노줄에 매달려 있었다는데, 다시 그렇게 찍을 영화가 있다면 너무 힘들 것 같다. <툼레이더>에서 안젤리나 졸리의 공중 발레장면은 참 멋있었는데. 할리우드에서는 피아노줄을 쓰는 시스템이 배우에게 훨씬 편안하고 좋을까, 아님 그쪽 사정도 우리랑 마찬가지일까.
영화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연기하는 건 참 어렵다. 완달산에서 시간
<2009 로스트 메모리즈> [4] - 장동건의 제작기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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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윤발과 이수현. ‘개폼’도 예술이 된다는 걸 일러준 전설의 쌍웅. 한때나마 홍콩영화에 매혹됐던 사람이라면, <첩혈쌍웅>의 두 남자를 잊기 힘들 것이다. 아니 거의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두 사람을 만나기 전까진.
의 장동건 그리고 나카무라 도오루. 거대한 예산이 투입된, CG와 특수촬영이 중시되는 대작 액션영화에서 21세기판 쌍웅을 만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한·일의 근현대사가 뒤바뀐다 해도, 살기 위해 아니 조국을 위해 서로를 겨누면서도, 서로를 가슴으로 배신하지 않는 사카모토와 사이고. 장동건과 나카무라 도오루의 분신은 이렇게 몸과 마음을 다해 저 사반세기전의 쌍웅들에게 경배를 바친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이들 두 배우는 연기에 대해, 영화에 대해, 인생에 대해 과연 얼마나 많은 생각을 공유했을까. 7개월의 긴 촬영 기간 동고동락한 두 주연배우에게 촬영장 안팎의 이야기를 청했다.
의 첫 번째 시사회가 있던 1월23일, 하루종일 인터뷰와 촬영 고문에 시
<2009 로스트 메모리즈> [5] - 장동건 vs 나카무라 도오루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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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처럼 아우처럼
장동건 | 촬영하면서 제가 좀 친근하게 느껴진 게 언제부턴가요?
나카무라 | 중국 로케 갔을 때 일어 통역이 없었잖아요. 400명 넘는 중국 엑스트라와 40명 넘는 한국 스탭들 사이에서 혼자 일본인으로 있을 때 현장 상황상 일본으로 전화도 못하고 있었죠. 동건씨가 나 대신 전화 연결을 해줬을 때, 이 사람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했죠.
장동건 | 그때서야 비로소? (일동 폭소)
나카무라 | (웃으며) 그 전부터 조금씩 느끼긴 했지만.
장동건 | 저는 그것보다 훨씬 전이었어요. 강화도에서 훈련을 받을 땐데, <친구> 촬영이 끝난 직후라 몸이 안 좋아서, 정말 쉬고 싶었어요. 그런데 일본 배우들도 와 있고, 단역 조연배우들도 다 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투덜대며 갔었거든요. 거기서 도오루상를 봤는데, 너무 열심히 진지하게 연습하고 있는 거예요. 미안할 정도로. 사실 첫 대면 때는 내가 생각하던 일본인의 이미지, 상냥하고 나긋나긋한 이미지를 상상하고
<2009 로스트 메모리즈> [6] - 장동건 vs 나카무라 도오루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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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객에게 나카무라 도오루라는 아직 낯선 이름이지만, 그는 무려 16년 경력의 베테랑 배우다.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스무살이 되던 1985년. 영화 <비밥 하이스쿨>의 제작과정에서 실시한 주연배우 오디션에서 6천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배우로 데뷔했다. 당시 상대역은 훗날 <러브 레터>로 유명해진 나카야마 미호. 이 작품에서 나카무라 도오루는 학업에 뜻이 없는 날나리 학생을 연기해, 각종 연기대상에서 신인상을 휩쓸었고, 88년까지 6편의 <비밥 하이스쿨> 시리즈에 출연했다. 87년부터 98년까지 TV로, 영화로, 속편에 속편이 만들어진 <위험한 형사> 시리즈 역시 그의 대표작.
그는 러브스토리, 사무라이영화, 전쟁영화, 형사영화 등 다양한 작품을 종횡무진했는데, 특히 영웅적이지 않은 주인공이나 매력적인 악당의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다. 또 하나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해외에서 자주 작업했다는 사실. 93년에는 미·
<2009 로스트 메모리즈> [7] - 나카무라 도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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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지금 비상이다. “프랑스의 문화의 예외성은 이제 죽었다”는 비방디-유니버설사 대표 장 마리 테시에의 발언이 몰고온 결과다. 지난해 12월17일 미국의 케이블 업체 USA네트워크를 인수한 장 마리 테시에는 다음날 “프랑스 영화인들이 우리 기업의 미국화가 전체 영화산업을 장악할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발상이자 순전한 억지”라며 “할리우드에서 제작을 하게 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프랑스) 국내시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이같은 테시에의 언급에 <르몽드>를 비롯한 언론들은 연일 비판의 소리를 높이고 있다. 2004년까지 프랑스영화에 연간 3억500만유로를 투자하게끔 되어 있는 유료방송사 카날플러스의 실질적 소유주의 이같은 입장이 프랑스 영화인들로선 의무협약을 저버릴 수도 있다는 무책임하고 신중하지 못한 처사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이건 비단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돌발사태만은 아니다. 그 여파는 한국에도 몰아쳐온다. 할리우드의 무차
문화다양성의 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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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문화주권을 지켜나가고 패권주의에 대항할 수 있으려면, NGO들이 그 나라의 정부와 어떻게 협력해나가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해당 단체들이 영향력을 갖기 위해선 정부를 하나의 적대적인 대상으로 위치시켜 배제해서는 안 된다. 민간 차원의 교류는 행사들을 주도할 수는 있지만, 각국의 법적인 구속력까지 확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INCD 총회의 경우 공통적인 관심사를 갖고 있는 NGO들을 묶어내는 것을 넘어, 이들의 결정사항이 각국 문화부 장관들에게 전달되고 실질적인 정책으로 반영될 수 있는 일종의 외교문서 역할까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따를 만한 선례도 있다. 생물종다양성을위한협약이나 대인지뢰협약의 경우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다.양: 그런데 아직 한국의 경우, 문화부 장관이 이 모임에 참석하고 있지 않다는 게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의회쪽에 이 문제를 건의해서 적극적인 검토를 유도하려고 했으나 감사 자체가 파행으로 치닫아 결국 전달하지 못한
문화다양성의 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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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이러한 기구가 실질적인 연대의 틀로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호혜’라는 원칙하에 아시아 지역 등 좁은 블록에서의 연대틀 또한 마련되어야 한다.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것뿐만 아니라 합작 등의 시스템 결합 등의 방식도 좀더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씨네21: 지난해 한국영화의 호조 상황을 놓고서도 쿼터제의 혜택은 특정 소재의 일부 흥행작들과 메이저 영화사에 돌아가고, 반면 관객은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는 권리를 잃었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유: 처음 시작할 당시 내부에서는 우리가 내세우는 논리의 배경이 너무 국수주의적이지 않냐라는 심각한 고민이 오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매일 집회 일정이 잡혀 있는 상황에서 그걸 대외적으로 밝힐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다 지난해 한국영화의 시장점유가 급상승하면서 쿼터제를 둘러싸고 국내 메이저랑 할리우드의 메이저랑 차별성이 무엇이냐, 결국 한국영화니까 편드는 것 아니냐라는 의문들이 제기됐던 것 같다. 하지만 문화다양성에 대한 논의는 갑작스런 말
문화다양성의 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