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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타이, 홍콩, 세 나라에서 제작한 옴니버스영화 <쓰리>가 8월23일 개봉을 앞두고 8월7일 기자시사회와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국의 김지운, 타이의 논지 니미부트르, 홍콩의 진가신 세 감독이 만든 30분 남짓한 단편 세 작품을 묶은 <쓰리>는 1999년 진가신과 논지 니미부트르, 두 감독의 만남에서 시작해 3년 만에 결실을 맺은 작품이다. ‘공포’라는 키워드로 만든 이들 세편의 괴담은 3주 전 타이에서 개봉해 같은 시기 간판을 건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누르며 흥행에 성공했다. 최근 3년간 홍콩영화 가운데 가장 성공한 작품인 <소림축구>가 타이에서 40개관에서 개봉, 2100만바트(약 6억원)를 벌어들인 반면 <쓰리>는 150개 극장에서 오픈, 3일 만에 흥행수입 3200만바트(약 9억원)를 기록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처음 구상해 3개국 합작의 피날레까지 지휘한 진가신 감독의 의도는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아시아 3국 합작 옴니버스 영화 <쓰리> 감독에게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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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로는 단 한번도 지난해처럼 행복한 생일을 지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먼로는 살아서 맞은 마지막 생일을 중간에 해고된 영화 <Something’s God to Give> 촬영현장에서 보냈고, 그 두달 뒤 몸 속에 수면제를 가득 담은 채 죽었다.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느라 딸을 책임질 수 없었던 어머니도, 허물없이 마음을 기대게 될 정도로 오랜 시간 함께 살아주지 않았던 남편들도, 그녀에게 사랑만 담긴 생일상을 차려주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러나 살아 있었으면 일흔다섯 번째 생일이었을 2001년, 미국인들은 그들의 50년대를 위로했던 먼로에게 서른여섯해 동안의 얼룩을 말끔히 지울 만한 선물을 준비했다. 먼로의 첫 전속영화사였던 이십세기 폭스는 그녀가 남긴 영화와 노래를 컬렉션으로 만들면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첫 번째 책 속 브로마이드 모델로 그녀를 택했던 <플레이보이>는 ‘플레이걸’들을 모아 영화 속 먼로의 모습을 재현하면서 21세기 금발 미인들이 보내는 변함없
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 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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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되고 청결한 거실. 그러나 방 안에 괸 공기는 소리없이 흐느낀다. 모로 누워 잠든 남자의 목을 조르듯 느리게 기어가는 트래킹 숏으로 삐거덕 문을 여는 김지운 감독의 <메모리즈>는 어느 아내와 남편이 경험하는 몹시 피곤한 하루의 기록. 신도시의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꾸민 성민은 불길한 예감을 안고 갑자기 사라진 아내를 찾아다니나, 그녀가 실종되기 전후의 기억이 희미하다. 한편 인적 드문 신도시 길목에서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성민의 아내는 지갑 속 세탁전표 하나를 단서로 온 길을 되짚어간다.“상업적 지향이 없는 프로젝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다른 두 감독이 찍은 걸 보니 나 혼자 잘못 안 거 아닌가 싶더라구요.” 짐짓 난감한 척하는 김지운 감독에게, <쓰리>는 장편영화의 흥행 부담을 살며시 벗어두고, 호러 장르의 공법을 진지하게 시험한 실험실이자 놀이터였다. 첫 번째 장편 호러를 구상하고 있던 2000년 <쓰리>의 트리오에 가담할 것을 제안받은 김지
첫 번째 이야기 <메모리즈> 감독 김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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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라>로 널리 알려진 타이감독 논지 니미부트르의 <휠>(Wheel)은 타이판 <전설의 고향>이다.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는 과거의 타이, 인형극의 장인 타오는 온몸이 마비되는 병을 앓으며 인형의 저주를 떠올린다. 인형을 버리러 나간 아내와 아들은 물에 빠져죽고 타오는 불에 타죽는다. 타오의 인형은 동생의 손에 넘어가지만 인형의 저주는 그치지 않는다. 김지운, 진가신의 영화와 색조부터 확연히 다른 <휠>은 공포로 순식간에 오감을 사로잡는 영화가 아니다. 감독의 관심은 고답적인 느낌이 들 만큼 교훈적이다. 욕망이 불러온 화(禍)는 제목이 의미하는 대로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 <잔다라>를 본 관객이라면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의 빗나간 욕정을 혐오하던 잔다라가 아버지가 앉았던 오욕의 의자에 앉아 치욕에 온몸을 떨었던 것처럼 <휠>의 인물들은 재앙을 불러올 물욕에 번번이 눈이 먼다. <잔다라>가 매
두 번째 이야기 <휠> 감독 논지 니미부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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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듯 스쳐 지나며 세월의 먼길을 돌아 마주하는 남녀의 인연을 섬세하게 그려냈던 손길로 빚은 공포는 어떤 빛깔일까. <금지옥엽> 1, 2편과 <첨밀밀> <러브레터> 등 멜로드라마의 고운 감수성으로 알려진 진가신 감독이 공포를 키워드로 불러낸 <고잉 홈>은 결코 노골적인 공포영화가 아니다. 다들 떠나갈 뿐 더이상 입주해 오지 않는 황량한 아파트, 어두운 복도에 텅 빈 집집의 문짝들만 이따금 삐걱대는 폐허 같은 공간에서 신경이 곤두서는 불안을 감지할 순 있겠지만. 그 아파트에 이사온 며칠 뒤 사라져버린 아들의 행방을 쫓던 경찰 천은, 거의 유일한 이웃으로 세상과 담쌓은 채 병든 아내만 돌보며 산다는 한의사 위를 의심한다. 하지만 위의 집에 잠입한 천이 발견하는 것은 아들의 흔적이 아니라, 죽은 아내가 되살아나리란 믿음으로 3년간 정성껏 시체를 보살펴온 남자의 기이한 집착이다. 언뜻 공포스러울 법도 한 설정이지만, 매일같이 시체를 한약재로 씻기
세 번째 이야기 <고잉 홈>의 진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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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만에 막내린 결혼생활, 무너진 먼로먼로가 남긴 짧은 말들은 대부분 슬픔에 차 있다. 먼로는 “만일 내가 만인의 스타라면 그건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다. 나는 어느 곳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외로움에 시달렸다.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는 그런 먼로를 찾아온 기적 같은 연인이었다.디마지오는 54년 1월 흰 면사포 아래 동그랗게 뜬 눈동자로 웃고 있던 먼로와 결혼했지만 같은해 10월 공식적으로 이혼을 청구했다. 두 사람이 왜 그토록 빨리 헤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디마지오가 원피스 자락이 올라가며 먼로의 허벅지가 드러나는 때문에 분노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많은 언론이 디마지오가 먼로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요구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끈질기게 나돌던 먼로의 불감증 소문도 불거져나왔다.결혼 아홉달 만에 디마지오와 헤어진 먼로는 빠른 속도로 무너져갔다. <돌아오지 않는 강>을 본 <뉴욕타임스>
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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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29일 밤, 미국 뉴욕 소호의 유명한 드랙퀸 클럽 ‘스퀴즈박스’는 일순 조용해졌다. 스스로를 야시시한 여성 모습으로 치장한 남성, 즉 드랙퀸들이 록음악을 고래고래 불러댔던 이 클럽 무대에 자신을 미군 병사와 결혼한 독일인 여성인 헤드윅이라고 소개하는 한 드랙퀸이 등장했던 것.
그저 목청이 터져라 꽥꽥거리며 좌중의 흥을 돋웠던 다른 드랙퀸들과 달리,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자신에 관한 이런저런 농담을 던졌고,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이야기를 노래로 불렀다. 그리곤 다시 격렬한 노래를 열창하며, 가발을 벗어던지고 옷을 북북 찢었으며, 브래지어도 벗어 찢어버렸다.
하지만 이 새로운 형식의 드랙퀸 쇼에 관객이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던 그날 밤이 록뮤지컬, 그리고 >록뮤지컬영화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헤드윅>(Hedwig and the Angry Inch)이라는 제목의 록뮤지컬
소란스런 B급 드랙퀸 쇼가 `영화 <헤드윅>`으로 태어나기까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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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텍사스에서 태어난 존 카메론 미첼은 군 장성인 아버지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 아래서 유년기를 보냈다. 군인 집안의 아들답게 그는 오클라호마, 캔자스, 콜로라도, 펜실베이니아, 스코틀랜드 등지를 20차례도 넘게 옮겨 다니며 어린 나날을 보냈다. 당연하게도 그는 언제나 친구 하나 없는 아웃사이더였다. 10살 무렵 스코틀랜드의 가톨릭계 기숙학교 생활을 하면서 접한 글램록만이 그의 삶에 빛을 던져줬다. 스위트, 데이비드 보위, 록시 뮤직, 이기 팝, 루 리드 등은 그의 우상이었다. <헤드윅>에 보위, 팝, 리드, 이 글램의 세 ‘성자’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찍은 흑백사진이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첼이 훗날 헤드윅의 모델이 된 여성을 만난 것은, 영화에서 토미가 헤드윅을 만났을 때와 똑같이 캔자스주의 정션 시티에서였다. 미첼이 ‘음탕하고 작은 마을’(Wicked Little Town)이라고 부른 이곳에는 포트 라일리라는 커다란 미군 기지가
소란스런 B급 드랙퀸 쇼가 `영화 <헤드윅>`으로 태어나기까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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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댄스를 미치게 하다
각종 신문과 잡지의 리뷰난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이 뮤지컬을 영화계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뉴라인시네마, 저지필름스, 그리고 온갖 영화사의 직원들은 객석 또는 백스테이지에서 공연을 지켜봤다. 뉴라인시네마의 회장 로버트 셰인도 오리지널 캐스팅 공연을 관람했다. 그는 <오리진 오브 러브>가 흘러나오는 도중 옆자리에 앉은 관계자를 팔꿈치로 찌르며 “놀랍다”고 찬탄했고, 공연이 끝난 다음에는 “최고의 시나리오다. <록키 호러 픽처쇼>가 갔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뮤지컬의 영화화 판권이 뉴라인으로 간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영화제작은 전설적인 뉴욕의 인디영화 프로듀서 크리스틴 바숑의 킬러필름스가 맡았다. 제작사는 이 작품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알고 있는 미첼이 주연과 감독을 모두 맡길 원했지만, 영화연출엔 까막눈이었던 미첼은 부담 때문에 공동연출자 정도에 머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99년 6월 선댄스재단에
소란스런 B급 드랙퀸 쇼가 `영화 <헤드윅>`으로 태어나기까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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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으로 질문을 보내고 답을 기다리기 며칠. 아뿔싸, 존 카메론 미첼이 ‘떠나버렸다’는 전갈이 왔다. 인터뷰에 답을 쓰고서? 아니다.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부하고(좀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얼마나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그냥 그거 보고 쓰라고 그래!”라는 엄청난 말을 남기고) 얼마 동안이 될지 모를 여행을 떠났다는 거다.존 카메론 미첼은 2001년 <헤드윅>이 발표되었을 당시 실로 엄청난 양의 인터뷰에 응했다. 영화잡지, 일간지, 게이잡지, 온갖 온라인 매체, 음악잡지 등 <헤드윅>이 걸쳐져 있는 모든 영역- 영화, 음악, 성정체성, 팬덤, 일반 뉴스- 의 언론매체들에서 그에게 이야기를 걸어댔다. 그런 모든 시끌벅적한 일들을 끝내고 당분간 연기마저 쉬며 조용히 아동영화의 대본을 쓰고 있던 그는, 갑자기 어느 날 ‘광희’의 나라 한국에서 인터뷰가 날아들자 떠나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그의 바람대로, 2001년 영화 발표 당시 존 카메론 미첼이 응했던 수많은
원작자 · 각색자 · 감독 · 주연배우 존 카메론 미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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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처음 섹스한 게 언제죠?A:고등학교 졸업한 뒤 여자친구하고 했는데요. 사실 마스터베이션을 알게 된 것도 얼마 안 된 상태였어요. 주위 친구들에 비해 굉장히 발육이 늦었죠. 뒤늦게 눈떠서 그런지 욕심이 과하게 생기더라구요. 군대가기 전까지 정말 많이 했어요. 나이트클럽에서 통성명하고 나면 곧장 자러 가곤 했으니까. 그렇게 1년 정도 보냈더니, ‘만나서 하는’ 과정이 너무 지겹던데요. 그뒤로는 시들해졌죠Q:성이란 게 어차피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하죠. 어떨 때 섹스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요?A:비오는 날 있잖아요. 부슬비말고. 우박만한 굵기의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 그런 날은 창 밖을 보고 있으면 증상이 정말 심해요. 반대로 너무 밝은 날은 죽어도 하기 싫어요.봉만대(32) 감독은 엉뚱한 데가 있다. 오디션 보기 위해 찾아온 남자배우에게 ‘별걸’ 다 물어본다. 동석한 매니저가 여자인데도 거리낌없다. 심지어 중간에 자신의 경험까지도 친절하게 들려준다. 영문 모르는 이로선 “웬, 성상담 클리
에로영화계의 스타감독에서 데뷔작 준비하는 봉만대 감독 스토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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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규, 내겐 형님 같은 스승제대한 뒤 <휘파람 부는 여자> <용호의 권> 등의 영화에 조감독으로 복귀했고, 이듬해인 95년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언더그라운드>는 제작사의 원안을 각색했고, <킬링게임> <킬러> 등의 시나리오를 썼다. 스스로 재주가 남달랐기보다는 현장이 자신에게 그걸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감독이 “다음 대사 뭐야?”라고 물었을 정도로 촬영현장에서 급하게 시나리오를 써낸 영화도 있다. “지금이야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만, 그땐 예를 들어 살수차 오기만을 기다려선 안 됐다. 시간이 지연되면 중간에 호스를 뚫어서라도 물을 뿌려봐야 했다. 시나리오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에서 습작한 셈이다.”그는 영화촬영이 없는 날이면 광고, 방송쪽 일을 맡아 촬영스탭으로도 활동했다. 혹시 경제적인 이유? 아니다. 조감독 때 곧잘 배우로 카메라 앞에 서곤 했는데, 매번 감독말 듣고 가서 서 있으면 촬영감독이 그
에로영화계의 스타감독에서 데뷔작 준비하는 봉만대 감독 스토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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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가 부른다면 돌아가리라이런 시도에는 AV를 둘러싼 열악한 환경에 대한 그의 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디지털 비디오>에서 잠깐 설파했듯이, 유통이 판치는 상황에서 여전히 벗기기 경쟁만을 일삼는 제작관행은 유입되는 인력을 막아세우는 방벽이자 AV시장이 자멸하기 딱 좋은 지름길이다. 그는 무엇보다 일단 사회적인 시선이 좀더 관용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음성화가 고질적인 병폐를 키우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전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자신의 작품 <아파바>를 틀었던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반지하나 옥탑방이나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어차피 그렇다면 햇빛이라도 보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공개적인 상영기회가 좀더 늘어나야 한다고 본다.” 그는 충무로 진출 이후 미아가 될지 모른다. 여전히 1천만원 이하의 작품들이 양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제작비는 무조건 2500만원 이상이어야 한다고 못박는 삐딱한 그를 기용할지는 미지수다. 물론 그는 불러준다면
에로영화계의 스타감독에서 데뷔작 준비하는 봉만대 감독 스토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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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웃기는 일본영화 한편이 한국을 찾는다. 8월15일 개봉하는 <워터 보이즈>. 감독은 장진을연상케 하는 야구치 시노부. 만화스토리 작가, CF 감독 같은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인 야구치는 지금 일본에서 가장 촉망받는 코미디 감독이다.한국을 방문한 야구치 시노부를 만나 분방하고 경쾌하고 명민한 그의 영화세상을 들여다보았다.편집자교복차림의 남학생이 화면에 보인다.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는 바닥에 누워 있다. 옆에선 자전거 바퀴가 한없이 맴돌고 있다.카메라는 위에서 교복의 학생, 자전거 바퀴, 그리고 자동차의 불빛을 포착한다. 이상한 상황이다. 아이는 주섬주섬 주변에 떨어져 있던 책을 줍기시작한다. 가방에 쑤셔넣는다. 표지만 봐도 어떤 책인지 짐작이 간다. 포르노 잡지다. 자동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웅성거린다. “야, 이 학생은정말 머리좋기로 소문난 수재야”, “빨리 병원에 가야지”, “경찰을 부르자”, “정말 미안하게 됐네 그려” 웅성웅성. 그런데 교복
일본 대중영화의 UFO,야구치 시노부와 <워터 보이즈>(1)